칼리프 오마르의 시대와 이슬람교가 거둔 최초의 거대한 정복 이후 이슬람은 늘 전통적으로 피정복민들에게 합당한 대우를 하도록 규정해 왔다. 자발적으로 항복해 오는 도시나 지역은 경우에 따라 배상금은 지불할 지언정 약탈은 면했다. 건물에 대한 약간의 법규만 지키면 그리스도교도와 유다교의 예배 장소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 규정은, 설사 그 항복이 방어군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정복자가 더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고 저항한 적의 처벌을 요구하는 가혹한 요구를 할 수 있는 상황이라 해도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무력으로 점령된 도시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없었다. 승리자에게는 3일 간의 무제한적인 약탈이 허용되었다. 교회 역시 다른 모든 건물들과 더불어 정복자의 개인 소유물이 되었다. 다시 말해 모든 것들이 다 정복자 마음대로였다.
술탄 메메드 2세는 병사들에게 3일 간의 약탈 기간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그렇게 할 권리가 있었다. 그들은 도시 안으로 와르르 몰려 들어 갔다. 술탄은 투르크군의 첫 부대가 성벽을 돌파한 후 일정한 규율을 지켜 줄 것을 그들에게 강조했다. 그에 따라 군악이 연주되고 군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한 부대씩 질서정연하게 도시로 들어 갔다. 그러나 도시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그들은 모두들 광란의 약탈 대열에 끼어 들었다. 처음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믿지 못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보는 사람마다 모두 죽여 버렸다. 페트라 고지의 가파른 거리에서 골든 혼(금각만)까지 피가 내를 이룰 정도였다. 하지만 광란의 살인극은 곧 수그러 들었다. 포로들과 값진 물건들이 더 큰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투르크군 중에서도 방책을 넘거나 케르코포르타를 통해 들어 간 병사들은 대부분 다른 데로 눈을 돌려 블라케르나에 황궁을 약탈했다. 그들은 황궁의 근위대를 격파하고 그 곳의 온갖 보물들을 약탈했으며, 책들과 이콘들은 표지와 테두리에서 금은보석을 잡아 떼어 내기가 무섭게 불태웠고, 황궁의 벽을 장식하고 있던 모자이크와 대리석은 두들겨 박살내 버렸다.
또 다른 병사들은 블라케르나에 성벽 옆의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들인 카리시오스 문 옆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페트라의 성 요한 성당, 코라의 메시아 성당(수도원)으로 쳐들어 가서 금은제 성찬용품, 제의, 그 밖에도 갖고 갈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빼앗아 버렸다. 코라에선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그대로 놔 두었으나, 비잔티움 세계를 통틀어 가장 성스러운 이콘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모 이콘, 즉 호데게트리아(Hodegetria)는 파괴했다. 그 이콘은 성 루가가 직접 그렸다고 알려진 이콘이었다. 본래 그것은 황궁 옆 성당에 있었으나 포위전에서 성모의 그림을 좀 더 가까이 두고 보면 방위군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성벽 근처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그 이콘을 원래 배경에서 떼어내 4조각들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병사들 중 일부는 근처 집들로 쳐들어 가고, 일부는 시장과 도시 동쪽 꼭대기의 커다란 건물들이 있는 쪽으로 내달았다.
골든 혼에 정박해 있던 배의 병사들도 이미 플라테이아 문으로 진입해 들어 가, 성벽 주위의 창고들을 싹쓸이 하고 있었다. 그들 중의 일부는 곧 성 테오도시아 성당으로 향하고 있던 여인들의 애처로운 행렬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성녀 테오도시아의 중재를 청하기 위해 성당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병사들은 그 행렬을 한 군데로 몰아 넣고 머릿수대로 여자들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는 덩굴 장미가 늘어진 성당을 약탈한 뒤 예배를 보고 있던 신도들을 사로 잡았다.
다른 병사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육지 성벽에서 올라 온 병사들과 합류해 삼중(남쪽, 중앙, 북쪽)의 판토크라토르 성당과 부속 수도원, 그리고 인근의 판테폽테스 성당을 약탈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판토크라토르 성당은 약탈 뒤 투르크족 숙소로 쓰였다고 한다. 그 곳 수사였던 겐나디오스를 자기 방에 있다가 사로 잡혔다. 그는 처음 카르시아니 수도원에 은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병사들은 호레아 문으로 들어가 시장을 잠시 약탈한 뒤 히포드롬과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 갔다.
한편 마르마라 해에 있던 병사들은 옛 황궁으로 쳐들어 가 황궁의 홀들을 다 뒤집어 엎고 절반은 폐허로 만들었다. 그 곳엔 아직 네아 대성당과 같은 눈부신 성당들이 있었다. 네아 대성당이라면 근 5세기 전에 바실레이오스 1세 황제가 세운 바로 그 성당이었다. 그 교회들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런 다음 양 측(골든 혼과 마르마라 해) 함대의 병사들과 육지 성벽에서 넘어 온 병사들은 비잔티움 제국 최고의 교회인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몰려 갔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성찬 예배가 끝나고 조과가 진행 중이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 문이 닫혔다. 대성당 안에서는 신도들이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기도도 아무 소용 없었다. 오래지 않아 투르크 병사들이 문을 때려 부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 꼼짝 없이 갇혀 버렸다. 힘 없는 노인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끈이나 쇠사슬로 결박당했다. 여인들이 쓰고 있던 베일과 머릿수건은 찢겨져 노 끈으로 사용되었다. 그 중 남보다 조금 반반하게 생긴 처녀나 청년, 값비싼 옷을 입은 귀족은 병사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잡아끄는 통에 온 몸이 찢겨져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곧이어 남녀노소가 몰골 사납게 뒤섞여 끈으로 동여매어진 긴 행렬이 병사들의 야영지로 끌려 와, 거기서 다시 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다. 대성당의 사제들은 잡혀 갈 때까지 쉬지 않고 제단에서 성가를 불렀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몇몇 사제들은 성찬용품들을 움켜 쥐고, 남쪽 성벽의 지성소로 옮겨 갔다. 지성소의 문은 사제들 앞에서 열리고 그들 뒤에서 닫혔다. 그 곳에서 그들은 대성당이 다시 교회가 되는 날까지 남아 있게 될 터였다.
약탈은 하루 종일 계속 되었다. 투르크군 병사들은 수도원에까지 난입해 그 곳 거주자들을 사로 잡았다. 젊은 수녀들은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교를 택해 우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수사들과 늙은 수녀들은 순종적인 정교회의 전통에 따라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민가들도 조직적으로 다 털렸다. 거주자들도 재물과 함께 끌려 나왔다. 몸이 약해 쓰러지는 이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 아무 값어치도 없다고 여겨진 갓난아기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는 전반적으로 목숨은 살려 주는 분위기였다.
도시에는 아직 도서관들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엔 세속인 소유의 도서관도 있긴 했으나 수도원에 부속된 것이 더 많았다. 책들은 거의 다 불살라졌다. 그러나 일부 병사들은 거기서도 약삭 빠른 장삿속으로 많은 책들을 챙겨 놓았다가 나중에 사람들에게 푼돈을 받고 팔아 넘겼다.
교회에서는 야비한 장면도 연출되었다. 병사들은 보석이 박힌 십자가 위를 타고 넘으며 터번으로 잽싸게 그것을 챙겨 나왔고, 많은 십자가들이 그런 식으로 도난당했다. 건물들도 대부분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손되었다.
저녁 때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약탈할 물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약탈을 그만 두라는 술탄의 명령에도 항의하는 자가 없었다. 그 후 이틀 간은 약탈품들의 분배와 포로들의 숫자를 세는 데만도 바쁜 형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포로 수는 약 5만 명 가량 됐고, 그 중 병사는 5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해로로 탈출한 극소수의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그리스도교군은 모두 전사했다. 민간인 희생자까지 포함하면 사망자 수는 4,000명에 이른다고 전해 진다.
술탄은 오후 늦게야 도시에 입성했다. 그는 예니체리의 호위를 받으며 신하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말을 타고 천천히 거리를 지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대성당 앞에 멈춰 서서 말에서 내린 뒤 바닥에서 흙을 한 움큼 집어 자신의 터번 위로 쏟아 부었다. 신에게 겸손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는 대성당으로 들어 가 아무 말 없이 한 동안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후 제단 앞으로 걸어 가는데, 투르크 병사 한 명이 대리석 바닥을 마구 내려치며 조각 하나를 떼어내려 하는 게 보였다. 술탄은 분노한 표정으로 그에게 건물 파괴는 약탈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건물들은 술탄 자신을 위해 남겨 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대성당에는 아직 투르크군에게 끌려 가지 않은 소수의 헬라스인들이 남아 있었다. 술탄은 겁에 질려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을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리고 대성당을 즉시 모스크로 바꿀 것을 명했다. 그러자 울라마 한 명이 설교단으로 올라가 하느님(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선포했다. 그 다음에는 술탄 자신이 제단의 석판 위에 올라가 승리를 안겨다 준 신에게 경의를 표했다.
대성당을 나온 술탄은 광장을 가로질러 옛 황궁으로 갔다. 그리고 반이 폐허로 변한 홀과 회랑을 둘러 보면서 페르시아의 한 시인이 읊었다는 시구를 중얼거렸다고 한다.
"황제들의 궁전에는 거미 줄만 무성하고, 아프라시아브의 탑에는 부엉이가 보초를 서고 있구나."
술탄이 도시를 순행하자 질서가 곧 회복되었다. 술탄의 헌병대는 물리도록 약탈품을 차지한 군대를 야영지로 돌려 보냈다. 술탄도 적막한 거리를 지나 자신의 막사로 되돌아 왔다.
이튿날, 그는 모든 노획물들을 자기 앞에 대령시켜 군 최고 통수권자인 자신에게 해당되는 몫을 골랐다. 그리고는 직무상 약탈에 참여하지 못한 병사들에게도 적절한 몫이 돌아가도록 했다. 비잔티움의 명문 가문 출신과 학살에서 살아 남은 고위 지휘관 포로들은 모두 그의 차지가 되었다. 술탄은 귀부인들 대부분은 즉시 풀어 주었지만, 미소년들과 어여쁜 처녀들은 하렘을 위해 남겨 두었다. 그 밖의 젊은이들에게는 그들의 종교를 포기한다면 자유를 주는 건 물론 투르크군의 장교로 임관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도에게 충절을 지킴으로 처벌을 달게 받았다.
헬라스인 포로들 중에 루카스 노타라스 대공과 9명 가량의 신하들이 섞여 있는 것을 술탄이 보게 됐다. 술탄은 그들을 몸소 포로의 신분에서 구해 주고 정중히 맞아들인 뒤 대공과 다른 두세 명의 신하들을 방면했다. 하지만 프란체스를 비롯한 다른 관리들은 대부분 신분 확인이 안 된 채 포로 신세로 남겨 졌다.
이탈리아인 포로들에겐 그런 자비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베네치아 거류민 대표인 미노토는 아들과 9명의 동료 지휘관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카탈루냐 행정관 페레 훌리아 역시 네다섯 명의 카탈루냐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대주교 레오나르드도 생포됐으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제노바인 동포들을 구하려고 투르크군 막사로 급히 달려 온 페라 상인들이 지불한 몸 값 덕분에 풀려 났다. 이시도로스 추기경은 그보다도 더 운이 좋았다. 그는 입고 있던 수단을 거지에게 벗어 주고 자신은 거지의 누더기를 걸쳤다. 그 때문에 거지는 잡혀 죽었으며, 잘려진 머리는 추기경의 머리로 전시되었다. 이시도로스는 거의 헐값으로 페라의 한 상인에게 넘겨 졌다. 그가 누구인지 상인이 알아 봤던 것이다. 투르크족의 오르한 왕자도 변장을 하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는 유창한 헬라스어 실력 때문에 의심받지 않을 것이라 믿고, 정교회 수도복을 입었다. 하지만 그는 붙잡혔고 동료 죄수의 밀고로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골든 혼을 용케 빠져 나간 배들 중에는 부상당한 주스티니아니를 태우고 간 문제의 제노바 갤리선도 끼여 있었다. 그는 키오스 섬에 닿은 지 이틀 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는 여전히 영웅이었다. 하지만 헬라스인과 베네치아인에게는 결국은 도망자에 불과한 인물이었다. 많은 이들, 심지어 제노바인들까지 그의 행동에 수치심을 느꼈다. 대주교 레오나르드도 적절치 못한 시기에 공포심을 느낀 그를 통렬히 비난했다.
포로로 잡힌 헬라스인들의 운명은 천차만별이었다. 사흘 간의 약탈 기간이 지나자 술탄은 포고령을 내렸다. 생포되지 않았거나 몸 값 지불이 끝난 헬라스인들은 더 이상 생명과 재산에 대한 침해 없이 귀가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집들 또한 대부분 파괴되어 앞으로 살 길이 막막했다. 일설에 따르면 술탄은 당시의 대표적 무슬림 군주들인 이집트 술탄, 튀니지 국왕, 그라나나 국왕에게 400명의 헬라스 아이들을 선물로 보내 주었다고 한다. 많은 헬라스인들은 가족을 영영 되찾지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생존한 신하들에게 보여 준 메메드 2세의 관대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처음에 그는 정복한 도시의 총독에 루카스 노타라스를 앉히려고 했다. 설사 그것이 진심이었다 해도 그는 곧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의 관대함은 늘 의심으로 움츠러 들었다. 술탄의 조언자들은 그에게 대공을 믿지 말라고 경고했다. 술탄은 대공을 시험해 봤다.
도시가 함락되고 난 뒤 5일 후 그는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가면서 거나하게 술 기운이 돌 즈음 누군가가 술탄에게 노타라스의 14세 된 아들이 보기 드문 미소년이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술탄은 즉시 대공의 집에 환관을 보내 아들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명했다. 물론 쾌락의 대상으로서였다. 이미 장남과 차남을 전쟁터에서 잃은 대공은 삼남마저 그런 운명의 희생물로 만들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술탄은 헌병대를 보내 노타라스와 그의 아들, 그리고 군 사령관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제노스의 아들인 그의 사위를 자신에게 대령시키도록 했다. 그래도 노타라스가 명령을 거부하자 두 소년들과 함께 즉시 그의 목을 베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노타라스는 자신의 죽음으로 아이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애들을 먼저 죽여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소년들이 죽자 자기 목을 내놓았다. 이튿날, 9명의 또 다른 귀족들이 체포되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죽은 귀족들의 여자 식솔들은 다시 포로 신세가 되어 투르크국 조신들을 따라 기다란 죄수 행렬을 이루며 아드리나오플까지 끌려 갔다. 노타라스의 미망인은 가던 도중 메시니 마을에서 죽었다. 그녀는 황족으로 태후가 사망한 이후엔 제국 최고의 귀부인으로 대접받았고, 그 고고함과 자애로움은 남편의 적대자들까지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노타라스 부인은 아마도 요한 7세 황제의 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딸 안나는 이미 재산들을 일부 챙겨 가지고 이탈리아로 도주한 뒤였다.
프란체스도 노타라스와 비슷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프란체스는 술탄의 조마사 집에서 18개월 간 노예 생활을 하다가 아내와 함께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두 자녀들은 하렘으로 끌려 갔다. 두 아이들 다 황제의 대자녀(God-Children)들이였다. 딸 타마르는 아직 어린이일 때 죽었고, 아들은 술탄의 욕망에 저항하다가 살해됐다.
1453년 6월 21일, 술탄과 그의 중신들은 정복한 도시를 떠나 아드리아노플로 향했다. 도시는 이제 텅 비고 인적도 끊겼다. 마치 불이라도 난 듯 어두컴컴하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것이 폐허를 방불케 했다. 병사들이 다녀 간 곳은 예외 없이 적막감이 감돌았다. 교회들은 신성이 더렵혀지고 약탈당했으며, 집들도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태반이었고, 점포들은 박살난 채 텅 비어 있었다. 술탄조차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며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그는 도시 전체를 다 폐허로 만들지는 말라고 지시한 바 있다. 그러나 중앙 산마루의 인구 밀집 지역, 골든 혼 연안 동부의 반을 차지하는 상업 지구, 근처 블라케르나에 황궁과 귀족들의 저택들, 히포드롬과 아크로폴리스 인근의 옛 황궁과 교회, 이 모든 것들이 파손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슬픔에 찬 당대의 그리스도교 작가들이 들려 준 소름끼치는 약탈 이야기와는 달리, 파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은 교회들도 있었다. 신도들 역시 그 교회들을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점령된 도시이니 만큼 성물함이 남아 있을 리는 없었다. 그 모순(교회가 온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거대한 공간이 마을과 구역의 분리대 구실을 하고 있던 도시의 특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투르크군의 성벽 돌파 소식이 알려지자 몇몇 지역들의 관리들은 용의주도하게 공격군에게 즉시 백기를 들고 성문 진입을 허용했다. 또한 그들은 아마 공격군의 호위 속에 술탄의 진영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러자 술탄도 그들의 항복을 받아 들여 헌병대를 시켜 그들의 교회와 집들을 약탈로부터 면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
페트리온과 인근 파나르 지구의 교회들이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도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르마라 해 연안의 프사마티아와 스투디온 전 지역의 교회들 역시 그 곳 방위군이 함자 베이 함대에게 즉시 항복을 선언했기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그 지역 시민들이 돈을 걷어 곤경에 처한 다른 지역 시민들의 몸 값을 지불해 구해 준 것 역시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약탈당했다면 몸 값 지불에 필요한 모금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2번째로 크고 거룩한 성 사도 대성당이 약탈을 면했다는 사실이다. 그 안의 보물들도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카리시오스 문에서 시작되는 주도로변에 위치해 있어서 수많은 투르크 병사들이 그 앞을 지나쳐 갔을 텐데도 술탄은 아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접수하면서 정교도 백성들을 위해 그것만은 남겨 두기로 작정하고, 그 즉시 호위대를 보내 보호 조치를 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교도에 대한 술탄의 너그러움도 나중엔 많이 약화되어 교회도 하나둘씩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술탄은 일단 도시가 정복되자 헬라스인도 투르크인과 똑같이 자신의 백성으로 간주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스도교 제국은 끝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교 제국의 황제들의 후계자로 생각했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했다.
그가 첫 번째로 행한 의무는 동방 정교회의 안녕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정교회가 겪고 있던 어려움에 대해서라면 그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속 사정까지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동서 교회 통합 지지자였던 총대주교 그레고리오스 3세(Gregorios III)가 도시를 빠져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는, 헬라스인들의 민심에 따라 그의 총대주교직을 박탈했다. 이제 후임 총대주교를 뽑아야 했다. 적임자는 오직 한 사람, 동서 교회 통합 반대론자이자 학자인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Georgios Scholarios) 밖에 없었다.
도시가 함락될 때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는 판토크라토르 수도원의 자기 방에 있었다. 침략자들은 삼중으로 지어진 거대한 수도원을 보자마자 군침을 흘렸다. 한 무리는 건물을 약탈하고 또 한 무리는 수사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아 넘겼다. 술탄이 게오르기오스를 데려 오도록 사람을 보냈을 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아드리아노플의 한 부유한 투르크인에게 팔려 간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투르크인은 너무도 존귀하고 학식이 깊은 노예를 사 들였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고 또 한편으로는 벅찬 감동을 느껴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 그가 붙잡혀 팔려 갔다는 사실은 곧 술탄에게도 보고되었다. 며칠 뒤 사절단이 그 집에 도착해 게오르기오스를 콘스탄티노플로 호위해 갔다. 술탄은 이미 헬라스인에 대해 대략적인 정책의 밑그림을 그려 놓고 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들 종교의 수장인 총대주교 아래 일종의 자치 단체인 밀레트(milet)를 두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총대주교는 그리스도교도의 위법 행동에 대해 술탄 앞에 책임을 져야 했다.
얼마 간의 논의 끝에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는 결국 총대주교직을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주교 회의가 결성됐다. 주교들은 술탄의 요청에 따라 게오르기오스를 총대주교로 선출했다. 이름은 겐나디오스로 정했다. 1454년 1월 6일에 총대주교 취임식이 열렸다. 의식은 비잔티움식으로 치뤄 졌다. 술탄은 황제의 역할에 따라 신임 총대주교를 만나 임명장과 제의, 직원과 십자가 목걸이를 그에게 주었다. 술탄이 읽은 격려사의 내용은 이랬다.
"늘 행운이 함께 하는 총대주교가 되시오. 또한 우리들의 우정에 확신을 갖고 귀하 이전의 총대주교들이 누린 모든 특권들을 누리시오."
그 말이 끝나자 총대주교는 술탄이 하사한 말을 타고 성 사도 대성당으로 향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모스크가 되었으므로 성 사도 대성당이 이제부터 총대주교좌 성당이 될 곳이었다. 그 곳에서 그는 관습에 따라 헤라클레아의 수도대주교에 의해 총대주교로 추대됐다. 그런 다음 행렬을 지어 도시를 순회한 뒤 대성당 구내의 자신의 사저로 돌아 왔다.
한편 술탄과 총대주교는 헬라스인 밀레트 설치를 시작했다. 프란체스에 따르면, 술탄은 총대주교에게 신변 보장 문서를 줬다고 한다. 거기엔 면세 혜택, 파면으로부터의 보장, 행동의 자유, 이 특권들을 후계자들에게도 전수할 수 있는 권리 등이 포함됐다. 주교 회의 소속의 고참 수도대주교와 교회 관리들도 이와 비슷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파면으로부터의 보장이 곧 주교 회의의 권리를 거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사실 어느 정도는 이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 시절엔 빈번히 일어난 일이듯, 주교 회의의 권리란 교회법에 저촉된 선출이었다고 하면서 총대주교직을 박탈하는 권리를 말한다.
다음 세기의 총대주교 연대기 작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술탄은 또 다른 문서를 통해 아래의 사항들도 총대주교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첫째, 혼례 및 매장과 관련된 교회의 풍습을 인정한다. 둘째, 부활절을 정교회 축일로 기릴 수 있게 한다. 셋째, 부활절 축일 동안에는 행동의 자유를 보장한다. 넷째, 교회를 모스크로 바꾸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투르크족 관리들이 이후에 발행한 임명장(berats)을 보면 교회가 그리스도교인 사회의 제반 법규를 관리할 권리 역시 당연시 되었던 것 같다. 그 임명장엔 주교 선출에 대한 추인과 그들이 지켜야 할 의무가 적혀 있었다. 교회 재판소는 혼인과 이혼, 유언 및 미성년자의 후견인 역할과 관련된 것들을 포함해 종교적 중요성이 내포된 정교도들 사이의 제반 사건을 심리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정교회 소송인 간에 벌어지는 그 밖의 민사 사건은 총대주교가 설피한 세속 법정에서 다루어졌다. 투르크인 법정에선 형사 사건과 무슬림과 연루된 사건만 심리했다. 헬라스인 사회에 부과된 국세는 교회가 직접 거둬 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지방 관리가 할 일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정교도가 세금을 안 내거나 국가의 명을 어길 경우, 투르크족은 교회에게 파문이나 그 밖의 다른 종교적 처벌을 가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었다. 성직자들은 면세 혜택을 받았다. 정교도들 중에 수염을 기를 수 있는 계층은 성직자 뿐이었다. 그리고 정교도임을 나타내는 옷을 입어야 했고, 무기도 일체 휴대할 수 없었다. 남자 아이를 데려 가 예니체리로 만드는 제도 또한 변함 없이 계속 되었다.
정교도 사회가 전통적으로 무슬림 정복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은 대강 그 정도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헬라스인들은 특별한 양도를 하나 더 받아 냈다. 술탄이 정복된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자신들의 열쇠들을 바쳐 입성을 서둘러 도운 한심한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 공식적으로 정복자인 술탄은 단지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만 모스크로 바꿀 것을 명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페트리온과 파나르, 스투디온과 프사마티아의 보호 구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다 파괴되었다. 그 지역의 거의 모든 교회들이 철저히 약탈당하고 신성이 더럽혀졌으며, 교회들이 있던 지역들도 황폐화 되었다. 하지만 파괴된 것들을 다시 복원하고 신성화 하는 일은, 설사 허가가 떨어졌다 해도 무의미했을 것이다. 그렇게 파괴되고도 아직 남은 교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아니, 그것은 낙관주의자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후일 투르크족 법률가들까지 무력으로 점령된 나라의 백성들이 무슨 권리로 자신들의 성소(교회)를 가질 수 있는 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 거릴 정도였다.
정복자 술탄에겐 이 합의 사항이 적절했다. 그는 이들 지역을 콘스탄티노플 내 헬라스인 거주 지역으로 정해 놓았고, 그러려면 어차피 예배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이들 합의 사항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교회들은 하나둘씩 모스크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이르자 정교도 손에 남은 성소는 이제 단 3개에 불과했다. 몽골인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 성 데메트리오스 카나보우 성당, 키프로스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이 그것이다. 그 밖의 다른 지역의 정교도들은 무슬림들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수수하게 지은 새 성당에서 예배를 보았다.
애초부터 일을 그렇게 만든 것은 총대주교 겐나디오스 2세(Gennadios II)였다. 그가 처음 술탄에게 성 사도 대성당을 양도받았을 때 그 건물은 파손이 심해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따라서 웅대하게 재건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해도 그것이 제 모습을 갖추려면 상당한 희생이 뒤따랐을 것이다. 성 사도 대성당이 있는 지역엔 투르크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성당의 존재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던 1454년의 어느 여름, 투르크인 시체 한 구가 대성당 앞마당에 발견됐다. 그 시체는 누군가가 일부러 그 곳에 갖다 놓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시체의 존재는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투르크인의 시위를 정당화 시켜 주었다. 그러자 총대주교는 재빨리 총대주교좌 성당의 이전 허가를 요청했다. 그리고는 성 사도 대성당에 보관돼 있던 성 유물들을 몽땅 싸 짊어지고 파나르 구역의 파마카리스토스 수녀원으로 옮겨 갔다. 총대주교가 수녀원을 차지하자 수녀들은 인근 트룰로의 성 요한 성당 부속 건물로 옮겨 갔다. 이후 파마카리스토스 성당은 1세기 이상이나 총대주교좌 성당으로 남아 있게 된다. 술탄도 그 곳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고는 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는 겐나디오스 2세를 깊이 존경하게 됐다. 술탄은 광신도들이 나중에 그 건물을 빼앗을 구실로 이용할까 봐 성당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부속 소성당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곳에선 찬란한 모자이크가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정치, 종교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술탄의 요청으로 총대주교는 두 종교의 화해에 관란 짧은 글도 써 주었다. 그리스도교 교리는 이슬람교 교리와는 다르다는 점을 설명하고 그것을 정당화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두 종교의 화해를 시도한 술탄의 이 작전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1586년, 그의 후계자 무라드 3세가 이 성당을 빼앗아 모스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그는 도시의 황폐함이 정말 싫었다. 건축가들은 여전히 마리차 강의 한 섬에 짓기로 한 술탄궁 건립에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술탄이 아드리아노플 시절, 장차 자신의 거처로 생각하고 계획한 궁전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바꿨다. 자신은 이제 황제들의 후계자인 것이다. 따라서 황궁에 거주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시의 중앙 산마루에 작은 궁전을 하나 짓고, 큰 궁전은 고대 아크로폴리스 자리에 지을 계획을 세웠다.
술탄은 자신의 지배권 내에 있는 모든 투르크인들에게 그 도시에 들어 와 살 것을 권유했다. 집과 상점을 짓는 일은 정부가 나서서 도와 주었다. 그 곳에 계속 살고 있었거나 자유를 되찾은 포로들은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들도 아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지방으로 도주한 많은 제국의 귀족들도 종용받았다. 물론 그들의 지위에 걸맞는 특권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암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지위가 보장해 준 특권이란 투옥이었고 그보다 더 심할 때는 사형을 당했다. 과거의 명성으로 인해 자칫 반란의 주동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헬라스인의 마지막 자치구가 소멸하면서 그 곳의 주민들 역시 콘스탄티노플로 강제 이주당했다. 트레비존드와 그 인근 도시에서 쫓겨난 가구 수만도 5,000 가구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는 귀족 뿐 아니라 상인과 장인도 섞여 있었다. 특히 석공은 가옥, 시장, 궁전, 요새의 신축 공사에 동원되었다.
그 후 다시 평화로워지고 평화와 함께 번영이 찾아들자, 화려하게 부활한 도시로 더 많은 헬라스인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모여 들기 시작했다. 특히 술탄의 장려로 헬라스인에 이어 아르메니아인까지 도시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상업과 경제의 주도권을 놓고 헬라스인과 경쟁을 벌였고 유다인과도 같은 목적으로 경쟁을 벌였다. 투르크인도 끊임 없이 쏟아져 들어 와,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의 쾌적함을 즐겼다.
그 결과, 술탄은 하루가 다르게 신축 건물이 솟아 오르고 일터와 시장에서도 활기가 넘쳐 나는 새로운 콘스탄티노플을 가슴 뿌듯이 바라 볼 수 있었다. 인구 수만 해도 정복 당시의 4배로 불어나 1세기도 채 못 돼 인구 수가 50만 명 이상을 헤아리게 되었다. 1550년 경에 기록을 남긴 에스파냐 여행가 크리스토발 데 빌라론은 콘스탄티노플 시의 명부를 봤다고 주장하면서 투르크족 가구 6만, 헬라스인과 아르메니아인 가구 4만, 유다인 가구 1만, 페라 지구의 헬라스인 또는 서양인 가구 4,000, 교외의 헬라스인 가구 1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술탄은 무너져 가는 옛 제국의 수도를 파괴하고 그 자리에 찬란한 새 수도를 건립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그 안에서 종교와 인종 등을 초월해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질서 있게 공존하기를 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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