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스크랩] 백년 전쟁 이야기--검, 그리고 예언

구름위 2012. 10. 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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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창조론, 진화론 논쟁 때문에 게시판 분위기가 많이 않좋아져 버렸네요.

그래서 예전에 써뒀다가 나중에 수능 끝나고 다시 고쳐 올리려던 글을 그냥 올려버립니다 ㅇㅅㅇ;;

요즘들어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먹는걸 느끼고 있달까요=_=

조금씩 스태미너의 한계가...(그러길래 메이킹 마스터리를 올려두랬더니;;)

         ......네. 변명 그만두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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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 그리고 예언

 

 

1377년, 위대했던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이자 흑태자 에드워드의 아들인 리처드 2세는 드디어 왕위를 계승했다. 개인적으로는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2세-에드워드 3세-흑태자 에드워드로 이어지던 플랜태저넷 왕가에 5대만에 색다른 이름이 나왔다는 바에 일단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는 바이다-명료한 이해를 바라는 독자제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이번 이야기에서는 엄청난 수의 헨리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리처드 2세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다. 10살짜리 초딩이, 비록 아무리 죽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빽이 엄연히 살아 있더라도 안정적으로 왕좌를 유지하기란 Mr.ya 앞에서 비누줍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빛나는 위업은 오히려 소년의 왕위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아버지(상)와 아들(하)은 닮은 법이라지만 꼭 그렇지도 않나보다. *아래=모X레드




애초에 백년 전쟁은 발루아 가문과 플랜태저넷 가문이 프랑스의 왕위를 두고 다툰 일종의 내전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40년이 지날즈음 되자 전쟁은 단순히 왕위 쟁탈전이 아니라, 이제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 따끈한 적대감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관계를 조성해버렸다. 리처드 2세의 왕권을 강화시킬 가장 좋은 방법은 일단 전쟁을 멈추고 내부 권력 강화에 치중하는 것이었지만, 두 에드워드씨가 일궈놓은 후덜덜한 위업 때문에 리처드 2세는 그렇게 쉽게 평화 조약에 싸인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예전에는 기사들이 한 번 프랑스로 출장갔다 오면 약탈품을 바리바리 싣고 돌아오기라도 했건만, 드 게클렝의 검은 손이 잉글랜드 군을 어루만지게 되자 오히려 잉글랜드군이 역관광 당하고 쫓겨오기 일쑤였다.

상황이란 언제나 변하기 마련이었다.

(상황이야 언제나 변하기 마련 **주** 프로토타입 세이버!?)

 

 

변경의 영주들(Marcher Loads)

 

 

한편,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서로 공과 수를 번갈아 가며 동인녀들이 좋아하는 짓거리를 벌이는 동안, 북방의 국경은 그래도 좀 평화로웠다. 1346년, 크레시 전투가 벌어졌던 그 해에, 잉글랜드 궁수들은 네빌스 크로스(Neville's Cross)에서 스코트 스킬트론을 캐관광 시키고, 스코틀랜드 국왕의 숙소를 왕궁에서 런던탑으로 바꾸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이후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에 대한 대규모 군사원정을 자제했다. 14세기 말에 이르면, 점차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군대가 패배 당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 잉글랜드 군대가 프랑스 군대에 집적거리는 횟수가 줄어들었다-실제 대규모 기마대 약탈질은 80년대 초로 일단 중지된다-. 그런만큼, 스코틀랜드 군대도 잉글랜드에 대항해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기 어려웠다.

 


그렇긴 해도 잉글랜드 국왕은 북쪽 변경에 직접적으로 군대를 파견할만큼 시간과 물자가 남아돌지는 않았으므로, 변경의 영주들에게 인상적인 한 마디를 해주는 센스를 보였다.

 

 

"님들이 알아서 하셈."

 

 

아, 물론 잉글랜드 국왕들이 그렇게 무책임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국왕은 이 변경의 영주들에게 여러가지 특권을 수여했고, 이들은 그 지역에서 모집한 병력을 이끌고 스코틀랜드의 공격자들과 맞서 싸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변경 영주들의 권력은 꽤나 큰 것이었고, 이들 외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뒤통수 후리기를 막을 특별한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이 변경 영주들의 권력은 점차 커져갔다.
이럴 때 국왕이 쓸만한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역시 여러 작은 영주들을 자기 세력권에 두고 통제하는 것이었겠지만, 스코틀랜드가 작은 영주들로 막을 정도로 만만했다면 브레이브 하트도 안 나왔을것이다. 결국 이들을 막을 만한 자들은 변경 영주들 중에서 꽤나 힘좀 쓴다는 작자들에게서 선발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리처드 2세도 이 문제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지만, 결국 퍼시(Percy)가문과 네빌(Neville)가문을 제외하곤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리처드 2세)

이 제도는 상당히 후대로 이어져서, 튜더 왕가 때까지도 존속했다. 리처드 2세의 치세인 1397년, 네빌 가문의 랄프 네빌은 웨스트모얼랜드(Westmorland)의 백작 칭호를 얻었다.

 


 퍼시 가문으로 보자면, 15세기의 역사가인 존 하딩에 따르면 그들은 "그들은 북방 사람들과 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퍼시 가문은 크레시 전투에서도 활약했지만, 5대 동안 적어도 8명 이상의 "퍼시"들이 전쟁터에서 누군가의 칼에 찔려 밥숟갈을 놨다. 그래도 이들이 흘린 피는 효과가 있어서, 1377년 퍼시 가문은 노섬벌랜드의 백작이 되었고, 요크셔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들의 성은 Spofforth에 있었는데, 그 성인 오늘 이야기의 비중있는 조연이 되실 헨리 핫스퍼(Henry Hotspur)의 탄생지로 유명하다.

 


 자아, 어쨌든 앞으로는 프랑스와 싸우면서 언제 뒤에서 덮쳐 허리를 펴줄지 모를 스코틀랜드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고양이 손이든 네코미미 미소녀의 손이라도 빌려야 했던 잉글랜드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막강한 변경 영주들은 마치 국왕과 계약한 용병대장처럼 제멋대로 굴었다. 물론 이들의 만행은 이탈리아의 그 후덜덜했던 용병대장씨들과 비교하면 롱소드와 듀랜달급의 차이는 났지만, 변경에 강한 군사력과 독자성을 가진 군사 세력이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에드워드 3세는 매년 이들에게 돈을 보내 필요할 때 스코트인들에게 대항해 군대를 모으게 했지만, 퍼시 가문과 네빌 가문을 견제시켜 어느 한 쪽이 강해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물론, 이 시스템은 1489년까지 유지되었다. 네빌 가문은 59년 동안이나 서쪽 변경의 지휘관이 되었고, 퍼시 가문은 총 81년동안 동부의 변경을 맡아 지켰다.

 

 

어찌되었든 퍼시 가문은 국왕의 명령을 받아 스코트인을 범해야 하는 숭고한 사명을 띄고 있었으므로, 스코트인, 특히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를 범하는데 숭고한 사명감을 느끼고 있던 더글라스 가문과 퍼시 가문은 서로 강력한 라이벌이 되었다. 그 결과 나타난 의미심장한 전투는 바로 1388년의 오터번(Otterburn)에서 벌어진 기묘한 교전이었다.

 


사실 이 전투도 30인 전투와 비슷하게 기묘하고, 어찌보면 기사도적인 사명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때 스코트인을 이끌던 사령관은, 할리던 힐에서 용맹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아키발드 더글러스의 손자인 두 번째 제임스 더글러스 백작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잉글랜드 약탈☆을 시행하기 위해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좀 더 큰 부대는 칼라일(Carlisle)로 보내고, 더글러스 백작 자신이 이끄는 좀더 작은 부대는 리즈데일(Redesdale)을 치고, 타인(Tyne)강을 건너, 더럼(Durham)까지 육박했다. 그러나 뒤로 바리바리 실려 산더미처럼 쌓인 약탈품들이 스코틀랜드인의 간에 간부종을 일으켰던 모양인지, 이들은 더 남쪽까지 내려와 뉴캐슬까지 진군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들은 더글러스 경의 라이벌이자 스코틀랜드 인을 잡아 족칠 기회만 노리고 있던 헨리 핫스퍼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과 만났다. 어찌나 성질이 급했던지 핫스퍼(Hotspur)란 별명까지 얻은 그와 더글러스 백작 사이에서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퍼시와 더글러스는 예전부터 앙숙이었으므로, 이 격전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때 벌어진 교전에서, 더글러스 경은 헨리 핫스퍼와 대결을 벌여 그의 창에 달린 깃발(pennon)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월터 스콧경에 따르면, 이 때 헨리 핫스퍼는


"?O들이 국경을 넘기 전에 그 깃발 뺏을거삼-_-^"


이라고 했고, 물론 이에 대한 더글러스 경의 반응은 간단했다

.
"열등 이기리시, 언제나 말 뿐인지(소) 낄낄 √(′∀`√) "

 

이렇게 깃발 하나 두고 불붙은 싸움에서, 더글러스 경은 미꾸라지처럼 잉글랜드 군을 따돌리며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어차피 스코틀랜드 군대는 많은 약탈품을 버려두고 떠났으므로 잉글랜드 군으로서는 굳이 추격할 필요가 없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창기(槍旗 pennon)가 걸린 헨리 핫스퍼 경은 도무지 추격을 그만 둘 수 없었다. 한편, 온몸에서 아드레날린을 뿜어올리며 핫스퍼 경이 돌진해 오고 있을 때, 더글러스 경은 오터번 성을 공격하는데 실패했다. 그의 가신들은 약탈품을 싣고 국경을 넘을 것을 제안했지만, 더글러스 경은 헨리 핫스퍼에게도 깃발을 뺏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국경 근처에서 뭉그적 거렸다.
그 결과, 드디어 전투는 시작되었다.

 

(오터번 전투)


마침내 1388년 8월 19일, 2,000명의 중기병과 5,000명의 호빌라-승마 보병-로 구성된 잉글랜드 군은 스코틀랜드 군대를 따라잡았다. 그날 밤, 스코틀랜드 군이 포식을 하고 잠자리에 빠져들었을 무렵, 핫스퍼가 이끄는 잉글랜드 군은 무방비 상태의 스코틀랜드 군대를 덮쳤다! 일단 핫스퍼 경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한 군대를 스코틀랜드 군대 정면으로 보내고, 다른 한 부대는 토머스 엄프레빌(Tomas Umfraville) 경에게 맡겨 우회 기동을 통해 스코틀랜드 군을 측면을 습격하게 했다. 최초의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맨주먹으로 잉글랜드군의 안면에 펀치를 날렸지만, 안타깝게도 스코트인들이 아무리 용맹스러워도 뎀프시롤을 써서 잉글랜드군을 때려눕힐 수는 없었다. 초기 공격으로 스코틀랜드인은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더글러스 경은 이런 삽질의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민첩하게 반응했다. 그에게는 아주 작은 시간밖에 없었지만, 스코틀랜드 군은 효과적으로 후방에 결집한 후, 재빨리 반격에 들어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잉글랜드 군은 당황했다. 더군다나 밤의 어둠이 내려덮은 전장에서 그들의 비장의 무기인 롱보우를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전투는 치열한 육박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날 아침 태양이 빌빌거리며 안면을 내밀 무렵, 전열을 유지하고 있는 쪽은 스코틀랜드 군이었다.
헨리 핫스퍼와 그의 동생인 랄프 퍼시는 사로잡혀 있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만세를 불렀다. 아니 부르려 했다. 기쁨에 사로잡힌 그들이 찾은 사령관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리저리 짓밟혀 도무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상태였다. 그날 난전 와중에 누군가 더글러스 경을 찔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더글러스 가문의 인물이 죽으면 스코틀랜드가 승리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그대로 공격하시오!"라고 외쳤다고 한다. 결국 스코틀랜드 군대는 승리했지만, 그들은 사령관을 잃고 비통한 상태에 빠져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번 상황의 원인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젠장, 이게 다 깃발 때문입니다.

 


랭커스터의 승리

 

 

오터번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기는 했지만, 1390년대에 퍼시 가문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1391년부터 96년까지, 퍼시 가문의 수장인 헨리 퍼시는 노섬벌랜드 공작이자, 동쪽 변경의 지도자였다. 그의 아들인 헨리 핫스퍼는 서쪽 변경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아주 멋대로 놀아나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상 그들은 독립된 새력이었다. 누가 감히 그들에게 태클을 걸겠는가...싶었겠냐마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태클을 거는 자는 존재했다. 바로 그는 국왕 리처드 2세였다. 그는 변경 지방의 퍼시 함유량이 지나치게 높다는 판단을 내렸고, 이를 중화시키기 위해 랄프 네빌을 긴급 투여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오히려 퍼시 가문을 활성화 시켰을 뿐이다. 이제 산 위에 올라 더 오를 곳이 없어진 그들은, 이제 하늘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들의 랜스가 겨눈 목표는 바로 "정통 군주"였다. 그리고 그들이 손을 내민자는 바로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볼링브로크였다.

 

(물건너 나라와 그 물건너 나라가 손을 잡은 모습)


한편, 리처드 2세는 귀찮은 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섬에 가 있었다. 중세의 아일랜드에는 위대한 마법을 사용하는 투아하 데 다난이나 게이볼그를 들고 설쳐대는 쿠훌린은 없었지만, 난폭하기로 소문난 용사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리처드가 아일랜드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사이, 마침 전에 언급한 리투아니아 언정에서 돌아온 헨리 볼링브로크가 헨리 4세로서 비어있는 옥좌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쳤다. 리처드 2세에게는 후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의 혈통과 가까운 귀족은 있었다-바로 라이오넬의 클라렌스 공작(Duke of Clarence)였다. 그러나 클라렌스의 계승권은 한 딸에게 이어져 있었고, 그녀는 모티머 가문으로 시집을 간 상태였다--그 가문은 퍼시 가문과 매우 닮은 존재였는데, 퍼시가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던것 같이 모티머 가문은 웨일스 국경을 지배하던 변경 영주였다.
모티머 가문의 계승자인 에드문드는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가지고 있었으니, 그 계승권이 바로 여성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여성 계승권으로 프랑스의 왕좌를 주장한 에드워드 3세와 비교해보면 정말 아이러닉하지만, 결국 왕위 계승에 대한 그의 목소리는 꽤나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반면, 그 다음 서열의 계승자는 모두 남자였다. 그 가문의 계승자는 바로 헨리 볼링브로크. 바로 위대한 흑태자의 동생인 겐트의 존이 그의 아버지였다-즉, 그 역시 에드워드 3세의 손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와 사촌이자 왕인 리처드 2세의 사이는 썩 편안하지는 않았던 듯 하다. 리처드 2세는 그의 봉지를 몰수하고, 그를 외국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리처드 2세의 국내 기반 역시 조금만 발을 옮기면 흔들흔들거리는 것이었다. 결국 그가 아일랜드에 가 있는 사이, 헨리 볼링브로크는 잉글랜드로 되돌아와 몰수당한 그의 권리를 주장했다. 위태위태하던 리처드 2세의 지지기반은 순식간에 우당탕탕 무너졌고, 그는 곧 체포되었다. 그리고 헨리 볼링브로크는 헨리 4세로 즉위해 장미의 옥좌에 앉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는 원래부터 왕이 되겠다는 야심이 존재 했었을 것이다. 그렇긴 해도, 퍼시 가문의 지지를 손에 넣으면서 그가 좀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 역시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헨리 4세)

 

실제 정변은 피 한방울 흘리지도 않고 이루어졌지만, 따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려운 법이 긴긴 역사를 통해 이어진 세상 진리 아니던가. 헨리 4세의 뇌속을 휘져어 놓은 문제는 역시 정통성이었다. 일단 그보다 정통성에서 앞서는 모티머 가문의 계승자는 어렸기 때문에, 다루기 어렵지 않았다. 그 소년은 안전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확고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던 리처드 2세를 멋대로 풀어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폰테프락트(Pontefract)성에 감금되어, 랭커스터의 충실한 부하인 토머스 워터톤(Thomas Waterton)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다. 아마도 그는 증조할아버지-에드워드 2세-가 맞은 비참한 최후를 생각하며 밤마다 몸을 떨어야했지만, 그에게는 다행인지 상황은 좀 더 나았다. 에드워드 2세가 추방되었을 당시, 그에게는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를 국왕으로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에드워드 2세를 사로잡은 사람들은 아무 부담없이 그의 몸에 달군 쇳덩이를 삽입시켜줄 수 있었지만, 이 경우에 리처드 2세에게는 후손이 없었다. 헨리 4세는 아무래도 정통성에서 떨어졌으므로, 전 군주가 불행한 방식으로 밥숟갈을 놓을 경우에 역풍을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음침하고 축축한, 마토가 지하실같은 곳에서 하루 빨리 리처드 2세가 밥숟갈 놓아주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리처드 2세가 그 음울한 성에서 자란 낙타풀과 하아하아거리며 쌔-그에 대해 토론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헨리 4세의 상황이라고 그다지 썩 나을건 없어보였다. 이 새로운 국왕은 퍼시가문을 비롯해서 동맹자들과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방에서 반란과 폭동이 일어나거나, 적어도 그 기미가 흉흉한 가운데, 그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맹자는 그의 아드님이셨던 웨일스 대공 헨리 정도였다. 그는 젊은 시절을 "술에 잔뜩 취해, 양아치들을 끌고 밤거리를 싸돌아다녔다"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브럿 연대기(Brut Chronicle)에 실려 있는데, 이를 보면 그의 젊은 시절이 신칸센 대탈선정도로 비정상-적어도 후에 그의 업적과 비교해보면-이었던 이야기는 꽤나 오래된 듯 하다. 하지만 당시에 그의 군사적 재능을 넘어서는 인물은, 적어도 그의 적 중에서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도와 도처에서 일어나는 적들과 박터지게 싸워야 했는데, 가장 먼저 시작된 위협은 바로 웨일스에서 였다.

 

 

오웨인 글린드워(Owain Glyndwr)의 반란

 

 

1359년, 웨일즈에서는 한 명의 소년이 태어났다. 후에 오웨인 글린드워, 혹은 영국식으로 오웬 글렌도워(Owen Glendower)라고 불리게될 소년의 탄생이었다. 이 자음으로만 이루어진 아슷흐랄한 성을 가진 소년은 후에 웨일즈의 대표적인 영웅이 될 터였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의 명성은 아직도 웨일즈에 살이 있는 모양이다.

 

<웨일즈를 빛낸 100명의 위인들>

1. Aneurin Bevan (2426 votes)

2. Owain Glyndwr (2309 votes)

3. Tom Jones (2072 votes)

(이하 생략)

 


 
그는 원래 사법고시생이었지만, 14세기 후반에 들어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언제나 반란의 기미가 다분하던 웨일즈는-그 이유중 하나로, 잉글랜드인은 웨일즈에게 특별세금을 매겼다- 경제 침체까지 겹쳐서 상황은 계속 진창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영향력 낮은 비정통 군주가 즉위한 이상, 언젠가 한 번 웨일즈에서 반란이 터질 것은 뻔했다. 1400년, 민중들을 모은 그는 루틴의 레이널드 그레이 경(Lord Reginald Grey of Ruthin)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당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를 공격하기 위해 웨일즈에서도 군대를 모았다. 이 때, 레이널드 경은 일부러 오웨인을 늦게 소환했다고 한다. 결국, 그가 나타났을 때 그는 변명하기도 어려울만큼 늦어 있었다. 결국, 그는 루틴을 공격하고 언덕 위로 달아나 숨었다. 물론 시작단계는 언제나 그렇듯 가벼웠다. 그는 단지 웨일즈 국경에서 몇 번 집적거렸을 뿐이지만, 이는 순식간에 웨일즈 전역의 반란으로 퍼져나갔다. 과연 웨일즈 영웅 No.2에 해당하는 그는 순식간에 웨일즈를 휩쓸었고, 그해 9월 웨일즈인은 그를 "웨일즈의 대공"으로 선포했다. 그 달, 그는 던비, 루틴, 러들란, 플린트, 하워든, 홀드, 오스웨스트리, 웰시풀을 정력적으로 공략했다. 그의 군대는 일시적으로 세븐 강에서 저지당했지만, 어차피 웨일즈의 대세는 정해져 있었다.

 


미디블 토탈워에서야, 이럴 경우 신이나서 왕자에게 소수 정예 병력을 주어 불쌍한 농민병들을 캐관광시키고, 차기 왕위 계승자의 별을 올릴 좋은 기회일지 몰랐다--비잔틴처럼 왕자가 별을 주렁주렁 달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이게 정석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진짜 웨일즈의 대공인 헨리에게도 매우 위태로운 것이었고, 그는 강력한 동맹자인 퍼시의 헨리 핫스퍼를 불러들여 웨일즈를 뭉개버리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그들의 작전은 머언 옛날, 언젠가 필자가 연재한 적 있던 웨일즈 반란 때 에드 1세가 쌓았던 북부 웨일즈의 성들-일명 철의 반지(iron ring)-을 제압해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파견되었던 부대는 1401년, 컨위에서 글린드워가 이끄는 웨일즈 반란군의 공격을 받았다. 잉글랜드군은 웨일즈군보다 훨씬 더 잘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Hyddgen 전투에서, 글린드워는 놀랍게도 잉글랜드군을 격파했다. 이 승리로 웨일즈 전역이 들고 일어났다. 국왕군은 다시 웨일즈군을 공격했지만, 글린드워는 결코 이들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들을 잡으려고 들어간 잉글랜드군은 어느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기 일쑤였다. 물론, 그들이 뒤를 돌아봤을 때 웨일즈군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데이비스 교수는 이 전투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대규모 전투는 없었다. 오직 게릴라와 공성, 그리고 그 반대쪽으로의 공성이 있을 뿐이었다.

 


1402년, 헨리 4세는 할 수 없이 그의 맹견을 풀어놓았다. 그 해, 국왕의 명령을 받은 변경 영주인 에드먼드 모티머(그의 조카인 후계자 No.1이었던 소년과는 동명이인이다)는 웨일즈로 진격했다. 약 4,000~8,000명의 군대를 거느렸던 것으로 추산되는 모티머는 브린 글라스(Bryn Glas=Green Hill)에 진을 친 글린드워의 군대를 공격했다.

(브린 글라스)

 

이 때 글린드워 부대의 숫자는 모티머보다 훨씬 더 적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인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들의 무서운 병기인 장궁(Longbow)의 원산지는 웨일즈였다. 폴커크에서 윌리엄 월리스의 군대를 골로보낸 이 무서운 궁수들은 가파른 언덕 위에서 화살을 매기고 모티머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티머의 군대가 접근하자 그들은 일제히 화살을 퍼부었다. 하늘을 뒤덮으며 날아온 화살에 모티머군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불굴의 모티머는 간신히 화살비를 헤치고 가파른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갔다. 웨일즈 군보다 훨씬 더 잘 무장한 그들은 백병전이 벌어지면 분명 승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믿고 접근한 순간- 글린드워가 숲 속에 숨겨놓았던 부대가 달려나와 모티머군의 옆구리를 찔렀다! 측면이 후벼진 모티머군은 공황에 빠졌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의 군대에 있던 웨일즈 궁수들이 동족을 도와 화살을 퍼붓고 단검을 꺼내 전 동료들의 목줄을 따기 시작하자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이 틈을 타 글린드워의 군대가 언덕 아래로 달려들었다. 그들의 무기가 잉글랜드 기사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웨일즈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1,000여명에 달하는 모티머군의 시신이 언덕에 널브러졌고, 지휘관인 에드먼드 모티머도 사로잡혔다.

 


이 전투는 웨일즈에서 잉글랜드군이 경험한 최악의 패배로 남아있다. 이 때 웨일즈 여성들은 전해에 벌어졌던 잉글랜드의 보복에 대해 좀 선행으로 보답하기로 했다. 그들은 무거운 잉글랜드군의 신체 일부를 절단해서 그들의 체중을 줄여주는 것으로, 복수를 선행으로 갚았다.

 

 

이 푸른 언덕에서 벌어진 전투는, 같은 이름(Greenhill)을 가진 자유행성동맹 모 대장님의 운명과는 반대로 반란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제 잉글랜드군은 스코틀랜드보다 웨일즈 국경이 더 위태로웠다. 9월, 헨리 4세는 직접 글린드워를 찾기 위해 슈루즈베리(Shrewsbury)로 진격했지만, 글린드워의 웨일즈군은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부아 군대에서 이재민이 속출했다. 뿐만 아니라 잠자든 도중, 비바람에 국왕의 텐트마저 홀라당 뒤집혀 그는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밤새 떨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님은 하마터면 텐트에 깔려 버둥거리다 질식사하실뻔 했다. 더군다나 글린드워는 순식간에 잉글랜드군을 유린하고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전장에서 모습을 갖추는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혹자들은 그가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게 틀림없다고 쑥덕거렸고, 그가 마술사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글린드워의 명성과는 정반대로 헨리 4세의 명성은 말 그대로 락바텀을 당했다. 여러 곳에서 머리통이 터져나갈 것 같은 소식 중에서 오로지 그의 신경을 좀 안정시켜주는 소식은, 노섬벌랜드의 호미던 힐(Homidon Hill)에서 퍼시 가문이 스코틀랜드의 침공을 완파했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헨리 핫스퍼는 새로운 더글러스 백작을 사로잡으면서 오터번 전투의 복수를 했다. 이 전투의 전황은 확실하지 않은데, 예전과 비슷하게 스코틀랜드 기사들이 부주의하게 언덕 위로 차징을 감행했다가 화살비에 두들겨맞고 개관광 당한 것으로 보인다.

(호밀던 힐에서 스코틀랜드 기사들의 랜스 차지)

 


한편, 헨리 핫스퍼는 복수를 위해 더글러스 경에게서 몸값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헨리 4세는 스코틀랜드와의 협상을 위해 더글러스를 좀 더 잡아두기를 바랬다. 또한 헨리는 빨리 에드먼드 모티머를 석방시키기 위해 돈을 모았다. 그 때, 부하가 더 이상 몸값은 필요하지 않을거라는 보고를 받았다. 헨리 4세는 뭔 소린가 했다. 설마 글린드워가 맘씨 좋게도 그를 놓아줬단 말인가? 하지만, 다음에 들려온 소식은 엄청난 것이었다. 에드먼드 모티머는 더 이상 몸값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글린드워의 "사위"였기 때문이었다!

 

 

글린드워는 "에드먼드 모티머(조카)"가 국왕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에드먼드 모티머(삼촌)을 설득했다. 이를 받아들인 모티머는 기꺼이 글린드워의 딸인 카트린과 결혼했다. 만약 에드먼드 모티머(조카)가 왕위에 오르면, 글린드워와 웨일즈는 독립을 보장받을 것이다. 이 소식만 해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얼마 후 그를 완전히 뒤집어지게 할 소식이 들려왔다. 헨리 핫스퍼가 모티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이 결혼 동맹을 바탕으로 헨리 4세는 북부와 서부 사이에서 포위되었다.
이 "배신"의 이유를 잘 설명해 주는 것으로는 에드먼드 모티머(삼촌)이 그의 부하들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남아있다.

 

 

"나와 만난 글린드워는 재미있는 주장을 시작했네. 만약, 리처드 왕이 살아 있다면, 그분은 반드시 왕관을 수복해야 하네.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나의 존귀한 조카님이 진정한 잉글랜드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했네. 그렇게 되면 오웨인은 웨일즈에서 그의 권리를 지킬 수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의 주장이 아주 합리적이고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그의 편을 들기로 했네"

리처드 2세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루머는 반란군에게 일종의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그가 살았든 죽었든 관계 없었다. 이 "정당한 국왕"을 위한 군대는 하나로 결집했고, 이들은 세 방향에서 잉글랜드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었다-에드먼드 모티머, 오웨인 글린드워, 그리고 퍼시 가문. 이 상황은 헨리 4세가 맞이한 최악의 위기였다.

 

 

슈루즈베리의 격전

(슈루즈베리 전투)

 

헨리 4세는 이 세 방향에서 나뉘어 쳐들어오는 적을, 오히려 지금이 그들이 가장 약할 때라고 판단했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아스테이트 전투를 아시는가? 은하제국의 장군 라인하르트는 세 방향에서 분리되어 진격해오며 포위 섬멸전을 진행하려던 동맹군 함대를 차례로 요격, 격파했다. 물론 동맹군 장군의 저주스러울 무능은 차지하고서라도-- 적이 분리되어 있을 때 공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퍼시가문의 당주인 헨리 퍼시는 저 멀리 스코틀랜드 국경에 있고, 그의 아들인 헨리 핫스퍼는 체스터에 있다. 그리고 오웨인 글린드워와 에드먼드 모티머는 서부 웨일즈에 주둔해있다. 이들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지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국왕군도 마찬가지였다. 황태자인 헨리 5세가 이끄는 군대는, 세븐 강 상류를 건널 수 있는 요충지인 슈루즈베리에서 소수의 군대만 이끌고 주둔해 있었다. 그로서는 적의 연결을 끊고 황태자를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차지해야만 했다.

 


물론, 헨리 핫스퍼도 같은 결론을 내리고 슈루즈베리의 헨리 5세를 향해 진군했다. 이 경주의 승리자는 헨리 4세였다. 헨리 핫스퍼가 도착하기 겨우 몇 시간 전, 국왕군은 먼저 도착해 황태자와 합류했다. 이로서, 이제 헨리 핫스퍼는 웨일즈 북부에서 따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나마 가까운 오웨인 글린드워의 부대는 저 멀리 웨일즈 서부에 있었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체스터로 후퇴해서 글린드워와 합류하는 일이었지만, 국왕군은 기를 쓰고 이를 추격할 것은 분명했다.

 


길을 따라 펼쳐진 슈루즈베리의 북쪽에는 고지대가 있고, 여기에 헨리 핫스퍼는 군대를 주둔시켰다. 셰익스피어는 헨리 핫스퍼와 헨리 황태자가 같은 나이라고 생각했고, 온 몸에서 아드레날린을 뿜어올리는 이 청년이 기사도적 덕목을 위해 도박을 감수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때 헨리 핫스퍼의 나이는 39세였다. 노장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오터번 전투에서 15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무모한 행동을 했다는 것은 오히려 그를 깎아 내리는 처사이리라. 그는 이번 전투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았고,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후퇴하는 것보다는 여기서 교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인간이란 변하기 마련이다....그래도 이건 설마 상상도 못했다. OTL)


연대기 작가들에 의해 "잉글랜드인과 잉글랜드인 사이에서 벌어진 슬픈 교전"이라는 평가를 받은 슈루즈베리 전투는 1403년 7월 21일 시작되었다. 국왕군의 숫자는 15,000에서 무려 60,000에 이르렀다고 하고, 반란군의 수는 5,000~20,000사이였다고 하는데 물론 믿기 어려운 수치임에는 분명하다.

 


그날 오후, 항복 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전투는 시작되었다. 두 군대의 장궁병은 각각 화살에 살을 매기고 서로를 향해 쏘아붙였다. 수많은 화살들이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으며 양쪽 모두에게 날아갔다. 이 때까지 잉글랜드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발사무기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니, 이 상황은 그들로서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곧, 그들은 이 경험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수한 병사들이 쓰러졌다. 땅은 쓰러진 병사들에게서 흘러내린 피로 뻘겋게 뒤덮이고, 공중에서는 화살비가 새까맣게 하늘을 가렸다. 먼저 승기를 잡은 쪽은 헨리 핫스퍼였다. 그의 체셔주의 궁수들은 적들보다 훨씬 우수한 궁수들임을 증명해보였다. 그러나 전투는 활로만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국왕군이 접근해 반란군과 교전이 벌어지자, 과연 "머릿수는 그 자체로 질적 우수함이다"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초기 접전에서 승리를 거둔 헨리 핫스퍼와 그의 군대가 국왕군의 중앙을 파고들었을 때, 화살비의 피해를 받지 않고 있던 좌익의 황태자군이 반란군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어느 순간, 헨리 핫스퍼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반란군은 그대로 무너졌다.

(장궁병)

 

이날의 승리로 헨리 4세는 가장 큰 위기를 넘겼다. 헨리 4세는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이 곳에 교회를 지었다. 이날의 승리로 반란군의 큰 세력 하나가 사라졌으며,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변경의 두 반란군은 이로서 서로 분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각개격파였다-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제 3자가 여기에 개입하기 시작했다---그 3자는 바로, 프랑스였다.

 

(웨일즈를 갈구려는 잉글랜드를 방해하는 프랑스. 뭐, 실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만큼 그 효과도 별것 아니었다)

 


잊혀진 침공

 

 

보통 잉글랜드는 1066년 정복왕 윌리엄씨가 설레발레 난리를 친 이후로, 한 번도 외국의 침략을 받은적 없다는, 어쩐히 옆나라와 비슷해보이는 아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때 프랑스군이 대륙에서 건너와 브리튼 섬에 발을 떡 디디고 오웨인 글린드워를 도와 싸운 이야기는 영국 역사에서는 흑역사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이 공격은 1403년과 1404년에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습격하며 이루어졌다.

 


그들의 목표는 플리머스, 다트머스, 그리고 와이트 섬이었다. 그런데 사실, 잉글랜드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맞기는 맞는 것이, 이 때의 프랑스군의 성과는 손오공에 푸알의 전투력을 더해준 효과밖에 없었다. 얼마나 안습이었냐면, 이 군대를 이끈 브르타뉴인 지휘관 중 한 명인 Sieur de Castellis는 다트머스 침공 도중, 잉글랜드 정규군도 아니고 그 지역 사람들에게 잡혀 뼈와살이 분리되었다는, 정말 안구에 쓰나미가 몰려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오웨인 글린드워는 이 예상보다 형편없는 공격에 머리를 감싸쥐었겠지만, 그래도 없는것보다는 나았다. 곧, 그는 프랑스 군대와 연합해서 에드워드 1세가 세운 강력한 카나번 성(Caernafon castle)을 공격했다. 이 때의 상황은 체스터의 사령관이 헨리 4세에게 보낸 편지에 남아 있다.

 

 

-카나번 성의  사령관인 로버트 패리스경은, 여자를 통해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 안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적진을 뚫고 이 편지 가져올만큼 간부종에 걸린 인간이 거의 없다는군요. 지금 오웨인 글린드워는 자기 세력과 프랑스놈들과 힘을 합쳐 성을 카나번 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그리고 성 안에 병력이 있기는 있는데 무기들고 싸울 남자가 28명밖에 없어서 방어에 좀 애로사항이 있답니다. 그리고 벌써 지난 번 공성전에 있었던 11명은 벌써 죽어나갔다는군요.

 

 

웨일즈에 있는 잉글랜드 성의 방어 상황을 보면, 이 인간들이 비폭력 통치의 추종자로, 어쩌면 마하트마 간디의 선구자였을지도 모를 생각이 든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카나번성은 물론 콘위 성에는 15명의 중기병과 60명의 궁수들이 있었다고 한다. 1404년초에는 할레크(Harlech)성과 애버리스트위스(Aberystwyth)성이 별 저항도 못해보고 떨어졌다. 강력한 에드워드 1세의 쇠고리들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오웨인 글린도워도 슬슬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프랑스인에게 도움을 청하고 잉글랜드를 몰아 붙였는데, 이 공격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슈롭셔의 백작은 그와 3달 동안 휴전조약을 맺었다. 이로서 잉글랜드인들은 웨일즈가 사실상 독립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권리를 되찾은 웨일즈)


1405년, 퍼시-모티머-글린드워 연합군은 기묘한 인간을 만나 추가로 "정통성"이란 옵션을 얻게 되었다. 그 정통성이란 바로 웨일즈 음유시인들의 예엣적 노래들, 그리고 예언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오웨인 글린도워가 홉킨 앱 토머스(Hopkin ap Thomas)라는 이와 만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글린드워는 그를 "브럿의 마스터"라고 불렀는데, 이는 멀린의 예언에 통달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홉킨씨의 주장에 따르면 지금 이 상황은 머언 옛날의 예언과 관계가 있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헨리 4세야말로 "신에게 저주받은 mouldewarp--이게 뭐야-_-;; 구글에 돌려봐도 안나오잖아--"이며, 그를 물리칠 글린드워는 용이고, 퍼시는 사자이며, 모티머는 늑대였다. 무슨 애들 변신 로보트만화에 나올 것 같은--아니...투니버스에서 용하고 사자하고 늑대가 나오는걸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_-;;--이 세 야수들은 mouldewarp의 왕국을 셋으로 갈라먹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사실 그 정도 음모론이야 따지고 보면 삼국지에도 적용할 수 있는 때려맞추기 식이었다. 그러나 글린도워는 그가 용이든, 호랑이든, 혹은 투명드래곤의 환신이든간에 잉글랜드를 쪼개먹을 수 있다는 운명을 타고났다, 라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을 것이다.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모티머의 조카는 리처드 2세를 이어 정통 군주로서 잉글랜드를 다스릴 것은 맞지만, 잉글랜드를 어떻게 쪼개먹을 것인지는 당시 상황 및 기득권과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홉킨 씨는 알아서들 하라고 무책임하게 내버려둔 모양이다. 이 점에 대해서 난 결론에 의하면, 오웨인 글린드워는 "대 웨일즈(Greater Wales)"를, 퍼시 가문은 북부 잉글랜드를, 모티머는 남은 잉글랜드 본토를 가지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어디까지 나눠먹을 것인가까지 상세하게 결론을 지었다. '북부'는 트렌트강 이북의 잉글랜드에, 레스터셔(Leicestershire), 노스햄프턴셔(Northhamptonshire), 워릭셔(Warwickshire), 그리고 노포크(Norfolk)를 먹게 되어 있었다. "대 웨일즈"는 세븐 강을 따라, 북쪽의 관문인 우스터(Worcester), 그곳에서부터 "브리즈노스(Bridgnorth)에서 킨버(Kinver)로 가는 길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까지, 트렌트 강의 수원과 머지강의 수원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선"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 웨일즈의 국경이 좀 더 위로 올라가야 정확한 것 같습니다.)

 

사실, 헨리 핫스퍼가 슈루즈베리에서 전사하면서 이 구상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사실상 물건너 갔다고봐도 봐도 무리가 없었다. 헨리 4세가 보기엔, 반란군은 스테이크 줄 생각은 없는데 야채스프부터 마시고 있는 꼴이었다. 과연, 국왕군이 반격에 나서자 반란군이 지도에 그어놓은 선은 그냥 낙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오웨인 글린도워는 웨일즈의 강력한 성채들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런만큼 예전처럼 게릴라전을 펼치기가 어려워졌다. 몇 차례 회전이 벌어졌지만, 그가 아무리 뛰어난 전술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역시 회전에서 그의 군대는 강력한 잉글랜드군을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웨일즈에서 오는 승전보와 함께, 북쪽에서는 요크의 대주교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헨리 4세를 흐뭇하게 했다. 헨리 퍼시는 잔뜩 열이 받은 채 요크의 주교를 체포해 머리와 몸을 분리시켜줬지만, 대주교의 무덤에선 그날 이후로 각종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고 하지만 뭐, 헨리 4세로서는 어떻게든 지어내는 쪽이 편했으리라.

 


그렇긴 해도 아직 상황이 결정난 것은 아니었다. 글린드워의 요청에 드디어 프랑스군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기 시작했다. 1405년 7월 22일에 밀포드 헤븐(Milford Haven)에서 출항한 프랑스군 2,600명은 8월 초, 웨일즈에 발을 디뎠다. 800명의 기사와 600명의 석궁병이 포함된 이 군대는 작년과 제작년의 약골 프랑스군보다 훨씬 강력했다. 2,000명의 웨일즈 군대와 합류한 뒤, 하버포드웨스트(Haverfordwest)와 카마던(Carmarthen)을 점령하고 헤리퍼드셔(Herefordshire)를 넘어 나아갔다. 그러나 그들은 우드버리 언덕에서 잉글랜드국의 저항에 부딪쳤다. 이 곳을 뚫고 나간다면, 프랑스군은 1066년 이후 잉글랜드 영토 가장 깊숙히 찔러들어간 군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의외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헨리 44세는 8월 22일 우스터에 입성했다. 잠시동안 프랑스-웨일즈 연합군과 잉글랜드 군 사이에서 소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잉글랜드군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오웨인 글린드워는 그가 평상시에 하던대로 군대를 뒤로 물려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나 남은 프랑스군이 아무리 머리를 둘러싸매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지만, 고귀하신 기사분들은 저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가가 영 이해 되지 않았다. 결국 이런식으로 불협주곡이 계속된 끝에 넌더리가 난 프랑스군은 1406년 배를 타고 잉글랜드를 떠나버렸다. 이제 잉글랜드군은 거칠것 없이 웨일즈를 밀어붙였다. 1407년, 애버리스트위스 성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때 잉글랜드군의 한 기사가 탁월한 활약을 벌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존 탈보트(John Talbot)란 기사로, 앞으로 프랑스인은 그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었다.

 

 

북방의 상황도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헨리 퍼시는 스코틀랜드인들을 끌어들여 남쪽으로 진군해왔다. 그러나 요크셔의 장관인 토머스 로케비(Thomas Rokeby)경은 Knaresborough의 다리에서 그들의 진군을 가로막았고, 헨리 퍼시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그를 압박해 들어갔다. 마침내 리즈와 태드캐스터 사이의 브라함 무어에서, 그는 퍼시의 군대를 따라잡았다. 곧 브램험 무어(Bramham moor)에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사납고, 격렬하고, 피비린내나는" 전투 끝에, 늙은 헨리 퍼시는 사로잡혔다. 잉글랜드인은 그를 요크의 성 위에 모셔 탁월한 시야를 제공해 주었지만, 머리만 남은 그가 별달리 감동했을 것 같지는 않다. 1409년에는 할레크와 애버리스트위스성이 함락되었고,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에드먼드 모티머(삼촌)는 살해되었다.

(모티머의 야망은 DEAD END를 맞았다.)


다음해에, 오웨인 글린드워는 다시 한 번 잉글랜드를 급습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그 다음에, 그는 역사에서 퇴장해 전설의 영역으로 사라져갔다. 그가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전투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딸의 집에서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 이상, 랭커스터의 왕좌도 잠시동안은 안전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별 등장도하지 않던 에드먼드 모티머(조카)는 결국 감옥에 갇혀 죽었다. 이로서 모티머의 가문은 단절된 것 같았지만, 세상 만사가 언제나 그렇듯 꼬투리는 남겨두기 마련이다.
왕위 계승권 No.1이었던 에드먼드 모티머의 유일한 혈육 앤은 케임브리지 백작과 결혼했고, 1411년 애를 하나 나았다. 그리고 이 아이는, 기이하게 모티머 가문과 또 연결되어 왕위 계승에 분쟁을 낳게 될 것이다. 이 아이의 이름은 리처드 플랜태저넷으로, 후에 요크의 공작이 될 것이다.
--이제, 흰 장미가 피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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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혹시라도 프로토타입 세이버를 보시고 나으 세이버는 저렇지 않아!

그럼 마력 보충은 어떻게 하라고!!...라고 하실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원래 이 때 나스 씨는 순수했다던가요(먼산)

그래도, 정말 어쩔 수 없을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을 듯 합니다.

(페이트 초기 주인공 아야카 사죠우......원래 페이트는 역할렘이었던게냐-_-)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게이볼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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