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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

구름위 2012. 10. 15.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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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

 

 

시대적 상황

러일전쟁을 빌미로 2개 사단의 한국주차군으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면서

1906년 7월 2일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를 알현하면서 폭도 반발의 화근은 궁중에 잠재한 바이니 궁중의 숙정 필요로 경위원 대신(臺臣)에 경무고문부 감관으로 궁정 호위를 맡도록 할 것을 상주하여 경위원을 폐지하고 궁금령을 발표하여 1906년 3월 17일 부터 황실경위권을 박탈당해 일본경찰에 의해 황궁이 장악당한 상황이였습니다

 

고종에 영단(英斷)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는 큰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한국 조차군은 1개 연대 수준이였으며

대한제국군은 황제 직속 혼성시위 여단 1개 및 2개 연대 4900명 이였습니다.

대한제국군은 휴대탄환 15만발과 전시(爭) 비축 탄환 600여만발의 탄약을 비축한 상태였고 개틀링 기관총과 맥심 기관총 그리고 크루프 75mm 속사포와 암스트롱 포 등의 막강한 포병 세력 또한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종황제께서 내리신 결단은 바로. 일본과의 실질적인 전쟁이였습니다

시위대가 황궁에 진입하여 황제를 직접 보위하여 일본군의 위협을 완화시키며 친일 각료들을 억압 최악의 경우 이들을 모두 병력으로 제거하려는 이 계획은 일본에 의해 망해가는 대한제국에 대한 황제의 마지막 결단이였습니다.

이에 시위 2연대 3대대는 1907년 7월 19일 양위 조칙이 발표되는 새벽 황궁으로 진입할 계획을 세웠으며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종황제의 결단을 방해하고 한명에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친일파 매국노 군부대신 이병무 였습니다. 군부를 통제하던 군부대신이였으니 이러한 계획을 눈치챈 이병무는 곧장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일본군 51연대 3대대를 파견하여 경운궁의 각 문을 급히 봉쇄했으며

1대대는 이 계획에서 고종에 호위를 맡은 대한 제국군 시위 2연대 3대대 본영을 기습 포위합니다.

 시위군 3대대 소속의 몇몇 병사들이 일본군에 포위를 뚫고 경계근무 중이던 시위 1연대 3대대 병사 100여명을 선동하여 대대적인 무장 탈영을 벌여서 종로 파출소를 급습하여 일본인 경관 3명을 사살하고 경운궁과 본영을 포위한 일본군과 산발적인 총격전 후 복귀합니다.

 

1907년 7월 20일

 

대한제국군의 조직적인 반격을 두려워한 일본은 포병 19연대 1개 포대를 남산 왜성대 일대에 산포를 전개해 서울 시가지를 제압할 작전을 세우면서 51연대 병력을 동원 대한제국 군부청사를 점거하고 용산 육군병기창을 점령 후 탄약을 은닉하였으며 평양수비대 1개 대대를 긴급 차출하여 서울의 병력을 증강시켰습니다.

 

이로서 고종황제의 마지막 결단은 한명의 조국을 배신한 이병무라는 친일 매국노에 의해 실패되고 말았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지만 고종황제의 결단이 성공했을 경우 역사가 어떻게 바뀌였을까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고종황제를 호위하는 대한제국군 친위대와 기병대

 

대한제국군 친위대

 

영왕과 대한제국군 장교들
정중앙 어린분이 영왕
노백린, 어담, 김응선, 조성근, 민병석, 민영소님 등이 계십니다.

 

대한제국군 시위대

 

대한제국군의 군모의 문양은 오얏꽃 문양입니다
황실의 성인 李가 [오얏나무 이]인 이유로 오얏꽃은 대한제국 황실 문양입니다.
 
 
대한국제국군 수원 진위대 강화분견소 장교 이준영이 썼던 모자이다. 이준영은 1900년 7월 육군무관학교 장교 양성과정을 수료한 후, 참위로 시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1907년 8월 한국 군대가 해산되자 박승환 등이 자결하자, 시위대 장병들과 함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모자윗부분의 문양은 대한제국의 국화인 이화(배꽃)무늬이다. 이화무늬는
       대한제국 황실 문양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몰락하는 모습에 자결한. 웃고 있는 순국열사 민영환

 

고종황제는 일본의 침략의 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강력한 근대식 군대를 원했으며

 

약8년이란 단기간 동안 준비한 대한제국의 군대는

1907년 일제의 군대해산 요구로 무산되었습니다.

 

 

(서울 전투에서 대한제국군 진압하고 입성하는 일본군대) 일제가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여 의병부대와 대한제국군연합 13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 편성되었고 倭민족으로부터 서울탈환을 위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병력부족과 화력열세로 끝내 실패하게된다.

이사건은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전투로 기록이된다.

 

 

 

 

 

1907년 8월1일, 서울 동대문 훈련원 연병장. 군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식을 갖기 위해서다. 예정시각 오전10시를 넘겨 오후2시까지 집결한 병력은 1,812명. 대상인원 중 절반이 불참했지만 통감부는 서둘러 해산식을 가졌다.

 

군대해산식에는 저항이 따랐다.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격분 속에 자결하자 병사들이 총을 들었으나 일본군이 미리 탄약고를 점거한 상황. 탄약이 고갈된 밤11시쯤 전투는 끝났다. 서울시가지 총격전을 지켜본 미국인 의사 애비슨(세브란스병원 공동설립자)이 ‘탄약만 충분했다면 한국군이 승리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아쉬운 전투였다.

지방 상황도 마찬가지. 7개 진위대대 중 원주와 강화도ㆍ수원에서 일부가 항거했으나 8월10일께 3분의2가 해산을 마쳤다. 흩어진 병사들은 의병에 합류, 항일의병의 전력이 강해졌다지만 군대의 붕괴는 망국으로 이어졌다.

누구보다 충격이 컸던 사람은 헤이그 밀사 사건에 빌미 잡혀 강제 퇴위당했던 고종황제. 극심한 인플레이션에서도 국가 총지출의 25~40%를 투입하며 군대를 키웠기 때문이다. 재정규모 자체가 미미했지만 병력 수가 적었기에 대한제국군의 장비는 열강들에 버금갔다.

문제는 잡다한 구성. 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독일ㆍ러시아ㆍ일본제 소총이 혼재해 보급과 운용의 통일이 어려웠다.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군을 무너뜨렸던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는 물론 영국제 암스트롱 대포와 최고급 독일제 크룹 대포도 군대해산이라는 위기에는 쓰이지 못했다. 러일전쟁 이후 득세한 친일파 장교들이 중화기를 일본군 진영으로 빼돌린 탓이다. 방만한 재정과 국방 예산과 장비의 효율적 관리 부재, 국가 반역세력이 맞물려 군사력 상실과 교활한 왜구에 의해 국가멸망을 낳은 셈이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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