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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당 최후의 전쟁, 기벌포 해전의 영웅 `시득` 장군

구름위 2012. 10. 9.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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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문제는 당나라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나라가 수양제와 당태종 때부터 고구려 정복이라는 야욕을 가져왔던 터라, 쉽사리 물러날 리가 없었다.

당나라는 끝내 신라를 집어삼키려고, 거대한 병선을 이끌고 금강 하구로 침입해왔다.

 

신라와 당나라 간의  최후의 결전은 금강하구, 기벌포에서 벌어졌다.

기벌포 해전에서 신라장군 "시득"은 귀신과 같은 전략으로 당나라의 대군을 물귀신으로 만들며(혹시 이 때부터 오합지졸

을 '당나라 군대'라고 지칭하는 속언이 생길 게 아닐까? ㅋㅋ), 당군이 신라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만들었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당군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당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렇다고 당나라를 계속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당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났지만, 거대제국 당군이 언제 다시 몰려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신라에서는 기벌포 해전의 찬란한 사적을 당당하게 기록할 수가 없었다. 기벌포 해전의 영웅, 시득은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죄인같은 불편한 입장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시득이, 신라 8관등 사찬 벼슬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러한 저변의 사정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나는 삼국유사에서 이 기벌포 해전에 관한 대목을 읽고 매우 의아하게 여긴 적이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시득 장군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신라 군대의 활약으로 당군에게 이긴 것이 아니라, 용이 나타나고

(?), 태풍 같은 바람이 불어서 당의 병선이 저절로 다 침몰해서 신라가 승리한 것으로 나와있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당군을 물리치고도, 당나라에 승리한 것이 매우 송구스러워서, 그걸 정상적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시득 장군의 자료를 찾고 복원하고, 사당을 세우는 등 기리는 것이 후손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 도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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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당 최후의 해전과 잊혀진 海軍영웅 '시득'

 
한반도 지배의 주도권을 둘러싼 나당(羅唐)전쟁은 7년 동안 벌어졌다. 그런데 이 전쟁 최후의 전투는 육상전이 아니었다. 676년(문무
왕 16년) 11월 금강 하구에서 벌어졌던 기벌포(伎伐浦) 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사(戰史)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분명 그 실체가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데도 중국 학계에선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그들에게 치욕스러운 전투가 아니었다면 이런 주장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는 중국을 통일한 대제국이었고 '정관의 치'로 알려진 전성기 직후였다. 방패막
이와도 같았던 고구려마저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작은 신라가 맨몸으로 맞서겠다고?

이 전쟁에서 신라는 세 가지 면에서 유리했다. 첫째 고구려 유민들이 673년 임진강 전선으로 밀려날 때까지 신라군과 함께 분투했다.
675년의 매소성 전투가 있기 전부터 당군은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둘째 때마침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吐蕃)이 당나라의 발목을 번번이 잡아 줬다. 7세기 초 손첸감포에 의해 통일왕국이 수립된 토번은
662년부터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당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였다.

당나라는 한반도·만주와 티베트·실크로드라는 동·서 양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겉으로 보기엔 현대 미국의 '윈·윈
(win·win)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당나라의 '루즈-루즈(lose·lose)'였다.

설인귀의 대함대, 금강 하구로 진입

설인귀(薛仁貴)·유인궤(劉仁軌)·이근행(李謹行) 같은 당의 장수들이 동서를 오갔지만 패했다. 670년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대비천(大非川)에서 토번에게 대패할 무렵 신라는 옛 백제 영토를 차지했다.

675년 매소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근행이 재침공하지 못한 것은 676년 초 토번 전선으로 차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토번 쪽
상황이 안정되자 당나라는 676년 11월 최후의 신라 침공을 감행한다.

설인귀가 이끄는 대함대가 기벌포로 진입했던 것이다. 중국측은 여기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한다.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
(674~676) 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는 중국측 기록 때문이다.

그런데 '구당서' 위원충전(魏元忠傳)을 보면 설인귀가 676년 이후에도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상원 연간에 유
배를 간 것'이 아니라 '상원 연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나중에 유배를 간 것'이 되는데(경북대 박사과정 이상훈), 그 사건이란 바로
기벌포 해전이었다.

안시성 전투부터 숱한 전장을 누볐던 설인귀는 대형 상륙전을 통해 신라의 숨통을 끊어놓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나
선 신라 장군은 17관등 중 8관등인 사찬 벼슬의 시득(施得)이었고, 병선은 고작 100척 정도였다.

이제 세 번째 요인이 나온다. 당 대군에 맞선 건곤일척의 싸움에서 신라는 끈질긴 전의(戰意)와 유연한 전술로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
했다. 첫 싸움에서 신라군은 패했으나 시득은 물러나지 않고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바꿨다.

23전 22승으로 서해 제해권 장악

시득은 무려 22번에 걸친 기동전을 벌여 당나라 해군을 공격했고 모두 승리를 거뒀다. 마침내 당군 4000명의 목을 베고 설인귀를 패
퇴시켰다. 해전에선 전사자 시신이 쉽게 수습되지 않기 때문에 당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이후 서해상에선 당군의 군사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신라 해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시득은 을지문덕
이나 강감찬의 반열에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거대 영웅'으로 추앙된 김유신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득의 이름이 희미해지는 동안 오히려 '적장' 설인귀가 한
반도에서 추앙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일어났다.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경기도 파주쯤에서 태어난 인물로 둔갑시킨 설화가 유포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아쉬운 점 중 하
나는 이순신 장군을 제외한 숱한 해군의 명장들이 부당하게도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군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라를 구했다. 바다를 모르는 권력자들에 의해 홀대받고 망각되기를 반복하
면서도 푸른 포말 속에 이름을 묻은 채 언제나 묵묵히 조국을 수호해 왔던 것이다.
 

입력 : 2010.04.24 03:01 / 수정 : 2010.04.24 16:10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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