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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구름위 2012. 10. 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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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나라 대한제국 13년의 꿈

 

고종은 무능한 왕이 아니라 유능하고 개혁적인 군주

 

오는 8월 29일은 1897년 고종황제가 세운 대한제국이 망하고 1910년 일본에 강제 병합된 지 102주년 되는 치욕의 날이다. 그날 경복궁 근정전에는 일장기가 나부끼고 육천년 이상을 이어온 유구한 역사의 맥이 끊겨져 버렸다. 외적인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러한 민족 최대 치욕의 날을 잊고 살고 있으며, 최고 통치자인 고종이 무능했기 때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당연하다고 모두들 알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역사적 사실이며, 해방된 나라에서 그동안 얼마나 역사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으면 이렇게 기막힌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6부작 KBS 역사스페셜 동영상과 고종황제에 대한 설명을 통해 '고종은 무능한 왕이 아니라 유능한 군주'였다는 사실을 밝혀보고자 한다.
 

▲ 1910년 8월 29일 일장기가 나부낀 경복궁 근정전     © 편집부

 
고종(高宗,1852~1919)은 조선의 제26대 임금(재위 1863년~1897년)이자 대한제국의 광무제(光武帝,재위 1897년~1907년)이다. 휘는 희(熙) 또는 형(𤌇), 초명은 재황(載晃), 아명은 명복(命福), 초자(初字)는 명부(明夫), 자는 성림(聖臨), 호는 주연(珠淵), 정식 시호는 ‘고종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문헌무장인익정효태황제’이다. 연호는 건양, 광무이다.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둘째 아들로, 생부 흥선대원군과 헌종의 모후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초기 10년은 대원군의 섭정 단계였고, 친정 이후에 민씨 일족의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열강의 개항 요구와 개항하는 즉시 청-일-러 3국의 3파전이 치열한 가운데 국권을 보존해왔으며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양위하였고, 1910년에는 이태왕이 되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하자 그가 독살 당했다는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되기도 했는데, 윤치호에 의해 그의 독살설이 기록으로 전한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가 사용했다고 알려진 국새가 발굴되었다.

출생과 즉위

아버지 흥선대원군고종은 헌의대원왕과 순목대원왕비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 이름은 개똥이었다가, 소년기에 명복(命福)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조선의 26대 왕으로 즉위한 뒤에는 이름을 다시 재황(載晃)으로 개명했다. 철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흥선 대원군과 대왕대비 조씨(신정왕후)의 후원으로 1863년 음력 12월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성군의 군호를 받고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형인 이재면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나이가 어려 청정을 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즉위 이전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도 아들의 왕위를 위한 꾸준한 계획을 세웠다. 철종이 언제 사망할까 불확실하므로 흥선군은 궁중의 환관과 궁녀를 포섭해서 정보를 알아냈고 안동 김씨 가문에도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도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김병학은 자기 딸을 고종의 비로 삼기로 흥선군과 밀약을 맺었다고도 한다.

철종이 후사 없이 시름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도 했다. 흥선군이 어리석은 인물이라는 계산에서였으나, 그의 파락호 행실과 그의 나이 등 여러 조건에 걸려 반대에 부딪혀 묵살 당했다. 김병기(金炳冀)는 그에게 야심이 있는가를 시험하려 하였으나, 그는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그에게 장남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고의로 파락호 생활을 하며 천하장안으로 알려진 천희연, 하정일, 안필주, 장순규 등을 측근으로 삼아 가까이 했으며, 이상지, 이경하 등도 포섭하여 측근으로 삼았다.

▲ 고종의 어진     © 편집부

흥선군만이 왕실 족보상 왕위 계승에 가장 근접한 인물은 아니었기에, 왕위를 계승하려면 능력을 보여야 했고, 정치적 작업도 해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재황을 안동 김씨 가문의 딸과 혼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하나는 김병학의 딸이었고, 다른 한명은 김병문의 딸이었다. 이런 밀계로 흥선군은 안동 김씨 일부를 포섭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흥선군은 조대비를 찾아가 물밑 교섭했다. 조대비의 아들은 헌종이었으나 헌종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사도세자의 증손이자 전계군의 아들인 강화도령 덕완군 원범이었다. 철종이 헌종보다 윗 항렬이므로 헌종의 양자가 될 수 없었고, 익종에게도 동생뻘이기 때문에 익종의 양자가 될 수도 없었다.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는 이 점을 보고 철종을 간택하여 순조의 양자로 삼았던 것이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앉히게 도와준다면 조대비의 양자로 보내겠다는 밀계를 맺었다.

1863년 12월 철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조대비와 조성하, 조영하, 정원용 등은 비밀리에 옥새를 접수한 뒤, 흥선군의 적실 둘째 아들 명복을 익종대왕으로 입승대통한다는 교서를 재빨리 발표한다. 이로서 그는 조선의 제26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즉위 초기는 대원군의 섭정, 이후 개혁 개방에 큰 관심을 보였던 고종

 

즉위 초기

고종의 즉위 후 10년은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권은 흥선대원군이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구 안동 김씨와 김씨 내각의 주요 인사들은 축출되었고, 흥선대원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풍양 조씨 세력 역시 궁정에서 축출한다. 이들 외척들은 고종이 군주인지 흥선대원군이 군주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유포시켜 대원군 섭정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기도 한다.

즉위 초기는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노골화되어 프랑스(1866년 병인양요), 미국(1871년 신미양요) 등과 강화도에서 군사 분쟁을 겪었으나, 흥선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국내적으로는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탄받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오직 47개소만 남기고 조선 후기의 상설 기관이던 비변사를 완전 폐지하였다.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비로 맞으니 곧 명성황후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 증기선 복제계획을 흥선대원군이 수립하여 김기두 등이 실행하였으나, 1867년 완성된 목탄 증기선은 매우 느리게 움직여 사실상 실패하였다. 이에 팔도에서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대원군은 소년 시절 김정희와 홍대용 학파 인물들로부터 전해들은 열기구를 본딴 열기구를 만든 뒤 학과 두루미 10만 마리를 잡아들여 그 깃털을 뽑아 아교를 녹여서 붙였으나 열기구는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다.

고종의 친정

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圖書)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圖章)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對)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소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흥선대원군의 집권이 최익현의 탄핵을 받아 끝났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의 척신 정치의 경향을 보였다.

1875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명령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음력 9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결국 1876년 음력 2월 3일(양력 2월 27일)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후 조선은 개항을 하게 된다.

강화도 조약이 성립하고 난 뒤부터 조선 정부는 세계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던바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내정개혁에서 고종이 관심을 가장 기울인 것은 군제였다. 즉 고종은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兩營)으로 개편하고 새로이 일본의 신식 군사훈련을 도입하여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搢紳子弟)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케 했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 등 12사(司)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1881년 초 서양의 군함을 구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때 이동인이 일본과 협상하였으나 실패하고 잠적한다. 그해에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된 경기도 향시를 치르려고 모인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던 사건이 발생한다.

청의 간섭과 갑신정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1883년에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은 복권하였으며, 그 뒤로부터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 된다.

1882년 청나라의 중재로 조선·미국 수호 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을 시초로 구미 각국과 수교하고, 1883년에는 민영익 등 보빙사(報聘使)를 미국 등 서방에 파견하여 임오군란(1882년)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해 서재필 등 16명을 일본 도야마 사관학교에 보내어 신식군사기술을 배우고 돌아오게 하였다. 이때 조선에는 사진기가 최초로 들어온다.

▲ 1884년 촬영한 고종의 최초 사진. 고종은 개혁 개방적인 군주였다.   

1884년 여름, 사진기의 소문을 들은 고종은 친히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하였다. 사진기로 촬영하면 그림을 그린 것보다도 정밀하게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체의 종이가 나온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실까지 들어갔고, 왕은 직접 사진을 촬영해보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촬영하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속설도 만만치 않게 제기되었다. 고종은 퍼시벌 로웰을 시켜 사진을 처음 촬영한다. 이때 촬영한 사진이 그의 최초의 사진이라는 것은 후일 윤치호 등의 증언을 통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철종의 사위) 등 개화파가 고종을 보필하였으나 고종의 입장은 중립적이었으며, 마침내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급진 개화파의 혁명은 수포로 돌아갔다. 고종은 이 일로 말미암아 급진 개화파와 그들을 후원한 일본을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이후 청나라의 압력은 더욱 거세지고 러시아의 위협 증대와 이에 대항하여 영국 군함이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점령하는 사건(1885~1887년)이 잇달았다. 1886년 사노비 세습제의 혁파를 천명하였다.

1890년 다시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하였으나 일본 측 반응이 신통치 않았으며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하였다. 그 뒤 1893년 독일과 일본을 통해 증기선 3척을 도입하였으며, 이것은 주로 세미(稅米) 운반선으로 쓰였다.

 

격동의 세월,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동학 농민혁명과 갑오개혁

▲ 동학 농민혁명 전개도     © 편집부

이후 소강상태를 거쳐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 양국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고 마침내 1894년 양력 7월 25일 새벽부터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 무렵 한양을 점령한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였는데, 1894년 7월 23일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고,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흥선대원군이 1894년 7월부터 8월까지 달포에 걸쳐 섭정을 하였으나,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를 강요받는다. 개국 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과의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 기존 조선의 6조 체계를 8아문으로 개편하고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두었다. 1895년 양력 1월 7일 홍범 14조를 반포함으로써 개혁이 본격화된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도승지에까지 오른, 큰아들 이재면의 아들로서 장손인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려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준용은 1895년 4월 19일(음력) 종신 유형(流刑)에서 10년 유형에 감형하여 강화 교동도로 유배되고, 대원군은 마포 공덕리 별장(아소정)에 유폐된다. 그 뒤 이준용은 6월 12일(음력) 특전으로 풀려나 할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아소정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한편 1895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것이 삼국간섭이며, 그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친서방 정책을 강화했다. 특히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도록 했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로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 또는 수원책(綏遠策)으로 불렸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아들 황태자 척과 함께 일본 지식인들과 조선인 협력자들에 의해 창덕궁 또는 덕수궁에 감금당해 있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을 독점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된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를 어떻게 해서든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명성황후와 갈등을 빚고 있는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황후 시해에 이용하게 된다. 일본은 1895년 재한일본인을 보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그 뒤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했는데, 이것이 국민감정을 자극함으로 말미암아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은 일본정부    


유길준과 개화파, 한국 군벌 등이 일본인들의 길안내를 담당했고, 궁녀로 변장한 명성황후를 찾아내는데 협력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친대원군계 세력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 흥선대원군과 유길준 외에도 조선국 국군 1대대장 우범선, 2대대장 이두황,·3대대장 이진호 등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 국왕 친위대 부위 윤석우, 일본공사관 통역관 박선, 문신 구연수 등이 협력했고, 궁궐수비대의 구식군대 출신 조선인 병사들도 자발적으로 협력했다.

송병준의 사위이기도 했던 구연수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의 시체를 소각하는 걸 도와줬다. 사건 이후 명성황후가 복권되면서 조선인 가담자인 박선, 이주회는 처형당하고, 우범선, 이두황, 이진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우범선은 뒤에 일본으로 찾아간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되기도 했다. 구연수는 한일 합방 이후에 복권됐다.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것을 알게 된 고종은 나중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 빈소에 찾아가지도 않았다.

 

아관파천과 도시정비, 광무황제가 되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아관 파천과 도시 정비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끈질긴 종용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의지로 왕세자(순종)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관으로 주필(駐蹕)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덕수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그때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예컨대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독립신문은 1896년 11월 7일자 논설에서 이를 “조선이 이제 문명 진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한 경운궁 중심의 도시 정비는 190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통감부에서는 남산 밑에 소재한 통감부의 북쪽 정면 방향으로 도로를 놓는 계획과 1919년 6월 25일에 공개된 총독부안에 따라 파괴되며, 경운궁 앞 광장도 도로와 로터리가 설치되었다.

▲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한 당시 러시아 공사관     © 편집부



대한제국 선포 때 황제의 격에 맞춰 황룡포를 입은 고종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원구단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光武)로 새로 정하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 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주: 사천리 강토면 만주(간도)까지 조선의 영토이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
- 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

▲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원구단. 현재 부속건물인 황궁우만 남아있다     © 편집부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창단하여 대한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모두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상태가 되었다.

1898년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노면전차를 운행한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러시아, 일본과의 갈등 그리고 일본의 침략

 

러시아, 일본과의 갈등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五衛)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군대가 해산된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대한제국의 황성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 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 영국에 전달된,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고종의 친서     © 편집부



일본의 침략과 강제 퇴위

이처럼 일본은 1904년에서 1905년까지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물론 한반도에서의 열강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전쟁 기간 중에 대한제국의 수도 한성을 침탈하는 등 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 등 각종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극대화했다. 고종이 이를 척결하기 위하여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밀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고종 양위 사건).

한편 1905년 4월 29일 근대적 형법전인 《형법대전》을 편찬하여 반포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것을 1906년 2월 2일 법률 1호로 제1차 개정하고, 1908년 7월 23일 법률 19호로 제2차 개정하였다. 이 제2차 개정에서 총 880개조였던 법률 가운데 100개조를 개정, 252개조를 삭제하여 원래 모습을 없애 버렸다. 결국 1910년 《한국법전》에 형법으로 개명 삽입하였다. 일본 제국은 《형법대전》이 민권 신장의 성과였으므로 도리어 삭제해 버렸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이후 일본의 영향력 증대가 가속되었으며 마침내 일본의 강압으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고종은 일본 제국으로부터 이태왕(李太王)의 작위를 받고 덕수궁에서 생활했다. 고종 이하 흥친왕, 의친왕, 영친왕, 영선군 등이 일본제국의 왕족 자격으로 황적에 편입되었다. 일부 일본 극우 귀족이 망국의 왕족을 왕족으로 대우해야 되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자 일본왕 메이지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을 일본 왕족가의 딸과 결혼시킬 계획을 세운다.

1912년 5월 딸인 덕혜옹주가 태어나자, 그해 6월 그는 덕혜옹주를 자신의 딸로서 일본 황적에 올리고 싶어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장관 모두 덕혜는 사생아이므로 황적에 올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성대한 백일 잔치(혹은 돌잔치)를 차려놓고 조선총독부의 고관들과 이왕직 장관실의 관료들, 일본의 일부 지한파 귀족들까지 두루 초청, 단상에서 "이 애가 내 고명딸"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에서 온 귀족들까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므로 조선총독부나 이왕직의 관료들 모두 덕혜를 일본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덕혜로 하여금 일본으로 인질로 끌려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만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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