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정묘호란 치욕의 역사

구름위 2012. 11. 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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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호란 치욕의 역사 

임진왜란의 전란이 끝난 지 40년도 안 돼,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전란이 다시 발생한다. 전란은 1627113(인조 5)일에 발생한 정묘호란이다. 정묘호란은 고려시대 여몽전쟁과 임진왜란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일어난 조선내분이 부른 또 하나의 전란이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전란은 자체 정치세력들 간의 내부 분열이 외세를 끌어들여 발생한 전란이다. 그리고 그 현장은 바로 인천이다. 고려시대 여몽전쟁과 임진왜란 모두 자체 정치세력들 간의 분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정묘호란 또한 마찬가지다.

 

 

 

 

정묘호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중심으로 정치권력을 잡고자하는 서인들이 일으킨 쿠데타모반사건이 가장 큰 원인이다. 바로 정묘호란의 원인은 고려시대 여몽전쟁시 들어 온 주자학의 유교로 무장한 서인일파가 인조를 내세워 광해군을 추출하면서 쿠데타정권 장악을 시도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조선 광해군 15(1623)에 이귀, 김유 등 서인일파가 대북파인 북인들을 옹호하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인 인조를 쿠데타정변으로 왕위에 올린,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부른다.

 

인조반정에 대한 명분은 중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와 광해군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다는 효()에 대한 유교사관을 그 명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북인들을 옹호하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치권력을 잡고자 하는 서인들이 명나라를 등에 업고 일으킨 사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권력의 싸움들이 정묘호란의 근거가 된 것이다. 인조반란으로 정치권력을 잡은 서인들은 자리배분 문제를 놓고 또다시 내분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 정치적 논공행상의 자리싸움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16241월에 난을 일으킨다. 즉 이괄의 난인 것이다. 한 나라의 관리가 정치적 자리를 놓고 국가적 난을 일으킨 것이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마자 인조는 충남 공주로 도망친다. 국가적 난이 일어나면 왕들이 도망치는 역사가 다시 반복된 것이다. 이괄의 난이 1개월 만에 다행히 평정되자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주한다. 후금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일본, 조선, 중국 명나라간의 국제적인 전란기를 틈타 몽골족과 여진족 그리고 한족들을 규합하여 1616년 누루아치가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이 후금을 세운 누루아치가 1626년 사망하자 그의 여덟 번 째 아들 홍타이지가 왕이 된다. 이때 후금으로 도주한 이괄의 잔당들은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홍타이지에게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중국 명나라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지졸 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한다.

 

 

당시 명나라의 명장(明將) 모문룡은 철산(鐵山)의 가도(假島)에 주둔하고 요동의 회복을 획책하면서 후금을 매우 불안케 하고 있었다. 이에 후금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우선 모문룡을 원조해 주며,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고 있는 조선을 쳐서 모문룡을 고립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후금은 당시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인하여 심한 물자 부족의 경제난을 겪고 있었으며, 특히 전쟁으로 인한 군 포로이탈과 지배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 노선을 견지했던 조선왕 광해군이 인조에 의해서 추출되고 인조반정세력들이 후금을 멀리하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펴자, 앞으로 조선이 명과의 전쟁에 있어서 크나 큰 배후 위협 세력으로 등장할 것을 우려한다. 즉 후금은 명과의 전쟁에 있어서 사전에 위협 세력인 조선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후금은 랴오등 지역(백두산, 길림, 흑룡강, 연해주)에서 생산되는 인삼 교역권 확보에서 조선이 항상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을 크나 큰 문제점으로 보고 있었다. 인삼교역권은 당시 명과 후금을 나누는 경제적, 지리적, 영토적 지표로서 큰 작용이 되고 있었다.

 

후금은 이와 같은 모든 사항을 근거로 하여 더욱 조선 침략의 결의를 다지게 된다. 즉 잘못된 인조반정의 외교정책과 이괄의 잔당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전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후금의 태종인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구실로 내세우고, 이괄의 난에 참여했던 잔당 한윤 등을 길잡이로 하여 1627(인조 5) 정월 14일 장군 패륵(貝勒 : 왕자) 암니(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략케 한다. 후금이 침략해오자 조선은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이 강화도로 피신하고, 세자인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한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 공주로 피신했던 인조는 이번에는 후금이 침략해오자 싸워보지도 않고, 다시 강화도로 피신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몽전쟁시 고려 고종의 강화도 피신, 임진왜란시 선조의 의주 피신 등 불미스러운 역사가 이어서 재현된 것이다.

 

인조는 먼저 강화도를 선점해야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고려시대 여몽전쟁처럼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었다. 이때 조선의 중신 신흠(申欽)은 강화도로 피신하기 전에 인조에게 민심 수습을 위해 백성들에게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한다. 일종의 사과 성명을 발표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건의를 받아들여 장유(張維)에게 교서를 짓도록 한다. 인조는 교서에서 반정 직후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채 백성들을 기만한 것, 옥사(獄事)가 빈발하여 억울하게 처벌받은 사람들 때문에 화기(和氣)가 손상된 것, 모문룡을 접대하기 위해 세금을 혹독하게 거둔 것, 호패법(號牌法)을 가혹하게 시행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 등에 대한 실정에 사과한다.

 

이어 자신을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고 자책한 뒤 부디 열성(列聖)의 은혜를 생각하여 기댈 곳 없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백성들에게 호소했다. 이렇게 정묘호란의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사과하는 굴욕까지 감수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조는 10년 뒤에도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1637년 병자호란이 항복으로 끝난 뒤에도 백성들에게 다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과 후 조정이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여타 지역에 대한 방어는 거의 방기된다. 인조는 신료들과 가졌던 대책 회의에서 장만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한다. 방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장만은 황해도의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적과 조우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영군 (御營軍) 가운데 사격술이 뛰어난 포수 100명을 데려가게 해달라고 인조에게 요청한다.

 

인조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를 거부한다. 또한 신료 김류는 이시백(李時白) 휘하의 수원부 군사들을 임진강 방어에 투입하자고 한다. 하지만 인조는 수원의 군병도 강화도로 들여보내라고 한다. 이렇게 거짓사과를 하며 자신을 지킬 군사력만을 강화하고 강화도로 피신하지만, 당시 후금의 군사력과 작전은 여몽전쟁과는 달랐다. 조선은 조선의 모든 군사전략을 알고 압박해오는 후금을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화도에 피신한 인조와 서인세력들은 강화도에서 후금의 침략에 대해 화·(和戰) 양론이 분분하던 중, 후금에서도 강화(講和)의 의사를 표시한다. 바로 후금은 조선보다는 명나라를 칠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후금에게 있어서는 군사력을 강화도에서 소모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다. 이에 강화도에서도 주화론이 채택되어, 적과의 교섭을 진행시키니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퇴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후금과 강화하여도 명나라에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화약이 성립되어 후금의 군대는 곧 철퇴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정묘조약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패전국으로서는 최소의 부담이었으나, 후금은 전승국(戰勝國)으로서의 우월한 입장에서 강북철병(江北撤兵)의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서 금병(金兵) 1,000, 몽골병 2,000, 진강(鎭江)에 금병 300, 몽골병 1,000명을 주둔시켜 모문룡을 막게 하고, 중강개시의 교섭을 하여 이곳을 개시(開市), 많은 물자를 얻을 수 있게 되니, 그들의 소기(所期)의 목적은 거의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후금과 조선은 강화도 연미정에서 후금은 형, 조선은 아우가 되는 정묘약조를 162733일에 체결한다. 이처럼 정묘호란은 서인의 인조반정으로 인한 외교정책의 실패와 주자학을 근간으로 만들어진 명에 대한 그릇된 충성심, 그리고 후금의 광해군에 대한 보복을 들어 일어난 전란이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으로 이어지는 전란 속에서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고 전란을 준비하지 못하고 정묘호란을 당하고 만다. 이는 한 마디로 조선 관료들의 부패에서 비롯된 전란이라고 볼 수 있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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