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561년, 로마를 밀어내고 갈리아를 통일한 프랑크의 왕이 사망했다.
왕국은 셋으로 나뉘어 첫째 아들 시쥐베르는 서부를, 둘째 히르페리크는 동부를,
셋째 아들은 남부를 다스리는 왕이 되었다.나중에 이 세 왕국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된다.
동부왕국을 다스리는 둘째인 히프페는 사냥과 전쟁, 여자를 좋아하는 호색한이었다.
그는 왕비를 따라온 시녀 플레데곤드(이하 악녀)에게 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던 시녀는 어떻게든 그를 유혹하여 왕비가 되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녀는 교묘한 방법으로 왕의 침실에 들어갔고
거기서 왕을 육체적 포로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그녀는 왕의 애첩이 되었고
왕비 오드베르를 깔보게 되었다. 마음이 착한 왕비는 그래도 왕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4년 후, 왕이 전쟁에 나간 사이 왕비는 딸을 낳았다.
왕비는 귀하게 얻은 딸의 유모를 알아봤지만 아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 걱정이었다.
이때 이를 이용하기로 한 악녀가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이 나라에서 왕비 이상으로 신분이 고귀한 여성은 없으니
왕비 자신이 유모가 되어 딸을 돌본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왕비는 그 말에 아무 의심 없이 스스로 유모가 되기로 했다.
하지만 악녀의 이 말에는 교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프랑크족의 법에는, 아이의 유모는 곧 아이의 언니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함정에 빠진 왕비는 이제 더 이상 왕의 침실에 들 수 없게 되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왕비는 자신을 한탄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게 되었고
악녀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자 너무 기뻐서 날뛰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왕도 이 사실을 알고 애첩과 함께 기뻐했으며
이제는 애첩이 왕비 행세를 해도 아무도 그녀를 비난하지 못했다.
한편, 잠재적인 경쟁자가 눈에 거슬린 악녀는 침실에서 왕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신분이 하락한 왕비와 딸을 수도원으로 ?아버리세요”
그러자 왕도 이를 흔쾌히 허락하여 두 모녀는 불쌍하게 ?겨났다.
다음해 봄, 기고만장한 악녀에게 새로운 라이벌이 등장했다.
히르페의 형인 서부의 왕이 어여쁜 블뤼느오를 왕비로 맞이한 것이다.
그녀는 고트왕국의 공주로 너무나 매력적이었기에 히르페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고트왕국에 그녀의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악녀 몰래 사절을 보내, 언니 갈스윈트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내 승낙을 받은 그는 아리따운 갈스윈트를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 후부터 왕이 자신의 침실을 찾지 않자, 악녀는 새로운 왕비에게 원한을 품고
어떻게든 ?아낼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녀를 매수해 왕비의 음식에 이상한 약을 투입했다.
왕비는 어느날 부터 머리에 윤기가 빠지면서 점점 야위기 시작했다.
마침내 왕은 너무나 볼품없이 변한 그녀를 멀리하고 다시 악녀를 찾기 시작했다.
악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각제로 왕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쾌락의 늪으로 이끌었다.
배신당한 왕비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애원했지만, 고트족 왕이 이 사실을 알면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고 걱정한 왕은 그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 날 불쌍한 왕비는 플레데가 보낸 자객에 의해 목이 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왕은 이 사실을 오히려 기뻐하고, 고트왕국에는 왕비가 급사했다고 알렸다.
그리고 플레데는 드디어 고대했던 왕비로 등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비가 살해됐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게 돌았다.
한편, 서부의 왕비인 블뤼느오 왕비는 언니의 죽음에 분노를 터트렸다.
그녀는 당장 왕을 찾아가 “당신의 동생은 내 언니를 죽인 천한 계집애와
지금 쾌락에 빠져 있어요.나를 사랑한다면 내 언니의 복수를 해 주세요!“
왕비를 사랑했던 시쥐베르 왕은 결국 언니의 복수를 결의했다.
이것이 역사상 그 유명했던 ‘블뤼느오의 피의복수’가 시작된 계기였다.
574년, 서부의 왕은 동부의 히르페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서부군은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동부로 진격해 들어갔고
복수심에 불타는 블뤼느오도 직접 말을 타고 전장을 누볐다.
서부군의 위세에 몰린 동부군은 패배를 거듭하였고
거기서 동부군의 첫째 왕자가 ?기다가 전사까지 하였다.
마침내 히르페 왕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안고 서부군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플레데는 전사한 왕자가 전처의 아들이라 신경쓰지는 않았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을 벗어나야 했으므로 한 가지 계책을 꾸몄다.
그녀는 뛰어난 자객 두 명을 불러 환각제가 들어있는 술을 먹이고는
“지금 즉시 서부의 왕을 해치워라. 그러면 큰 상을 내리겠다!”고 명령했다.
환각상태인 그들은 몰래 포위망을 뚫고 서부군의 진영으로 침투한 뒤,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시쥐베르 왕의 가슴에 단검을 꽂았다.
왕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서부군의 진영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전열을 재정비한 동부군에게 밀려 퇴각을 거듭했다.
드디어 블뤼느오 왕비는 파리에서 동부군에게 포위되는 신세까지 되었다.
이때 블뤼느오의 큰 아들이 매츠에서 왕으로 즉위한 뒤, 반격을 준비했고
히르페 왕은 블뤼느오를 사랑하여 파리를 쉽사리 공격하지 못했다.
이를 알아차린 악녀가 빨리 공격하여 블뤼느오를 처형하라고 요구했다.
두 여자의 증오심은 매우 강렬하여 어느 한쪽이 죽어야만 끝날 것 같았다.
악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자 은밀히 자객을 불러 파리로 침투시키려고 했다.
이때 히르페의 둘째 아들인 멜로베가 은밀히 아버지를 찾았다.
그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고는 자신이 블뤼느오를 몰래 피신시키겠다며
그녀를 데리고 루앙의 수도원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멜로베가 그곳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던 히르페에게 악녀가 계책을 일러준 것이다.
어느 날 '왕이 위독하니 속히 왕위를 받으라'는 편지가 멜로베에게 도착했다.
블뤼느오는 함정일지 모른다며 그를 말렸지만, 멜로베는 듣지 않았다.
결국 멜로베는 왕위를 받으로 갔다가 그대로 처형되고 말았다.
악녀는 당장 블뤼느오를 찾아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급파되자, 블뤼느오는 멜로베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루앙을 탈출하여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있는 매츠로 돌아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들과 재회한 뒤 다시 복수를 다짐했다.
악녀는 아직 잃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두 왕자가 죽었지만 전처의 소생이라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블뤼느오는 벌써 사랑하는 언니와 남편 둘을 잃었으며
아직 빼앗긴 영토의 절반을 되찾아야만 했다.
한편, 더욱 강성해진 동부의 왕비 악녀는 더욱 잔혹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첫째 왕비를 내?고 둘째 왕비를 살해하고
서부의 왕을 암살했으며, 멜로베를 처형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을 방해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었으며 삶의 낙이었다.
그녀의 왕궁에서는 의문의 죽음들이 잇따르기 시작했다.
우선 전처의 셋째 아들이 암살당했고, 그 부인이 산채로 불태워졌다.
그리고 ?겨난 왕비인 오드베르도 딸과 함께 자객에게 목숨을 잃었다.
악녀는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치 않았으며
그 대상을 죽이거나 고문하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살았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관리를 체포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수레바퀴에 묶고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때린 뒤
살덩이가 다 떨어져 나갈 때까지 이리저리 끌고 다니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이런 고문을 보고 싶었던 그녀는 잠시 후 현장으로 가 보았다.
그때 고문 집행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 정도면 됐다. 그만해라!”
피투성이가 된 관리가 안쓰러운 나머지 고문을 중지시킨 것이다.
희생자의 고통을 즐기고 싶었던 그녀는 이 모습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즉시 병사들에게 집행인의 손발을 잘라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관리에게는 손가락과 손톱 사이에
날카로운 꼬챙이를 박아 넣으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고문장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는 악녀에게 묘한 쾌감을 전해주었다.
577년, 프랑크 전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악녀의 자식들이 모두 죽었다.
그러자 이 슬픔을 잊기 위해 다시 아이를 갖고자 노력했지만 임신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히르페 몰래 다른 남자들을 침실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아무 아이면 어때. 빨리 낫기만 하면 되지”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남자관계가 복잡해지고 꼬리가 길어지자 왕이 의심을 시작했다.
그녀는 왕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게 되자, 그를 주저 없이 독살해 버렸다.
그 후 왕국을 독차지하게 된 그녀의 생활은 난잡하기 그지 없었다.
수십명의 남자들이 그녀의 침실에 드나들었고, 이를 거부한 남자들에게는
성기를 잘라버리는 잔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왕궁에서 그녀의 존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596년, 서부는 이미 잃은 영토를 모두 되찾고 정상으로 돌아왔다.
블뤼느오는 갑자기 아들이 죽자, 손자를 왕위에 올리고 섭정을 시작했다.
그러자 왕 교체기를 틈 탄 악녀가 동부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부터 두 여왕의 피비린내 나는 2차 복수전이 10년 동안 재개되었다.
서부의 수도 파리가 동부군의 맹공을 받고 함락되자, 블뤼느오가 달려 나갔다.
그녀의 비장한 모습에 용기를 얻은 서부군이 반격을 개시하자
동부군이 뒤로 밀리면서 국경지대까지 철수하게 됐다.
이윽고 양측은 최후의 일전을 벌여야 할 때가 왔다.
두 여왕은 늙어 쇠약해진 몸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전투를 지휘했다
악녀의 뒤에는 아들 크로탈이, 블뤼느오의 뒤에는 손자가 있었다.
양측의 군대는 서슬퍼런 두 여왕의 명령으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해가 질 때까지 벌어진 이 전투로 전쟁터는 피비린내로 가득했다.
드디어 동부군이 대승을 거두고 서부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플레데는 언덕위에서 백발을 흩날리며 외쳤다.
“즉시 ?아가서 붙잡아라! 반드시 생포해야 된다!”
그녀는 블뤼느오를 잡아다 고문시킬 생각으로 눈에 불을 켰다.
하지만 이미 중병에 걸려있던 그녀는 갑자기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이미 아들 크로탈의 계략으로 독약에 중독된 그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그로부터 1년 동안 죽은 자들의 망령에 시달리다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블뤼느오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악녀가 죽은 뒤에도 양국의 복수극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의 아들인 크로탈이 블뤼느오의 새로운 적이 되어
전쟁은 그 후 613년까지 무려 17년 동안 3차 복수전이 벌어졌다.
블뤼느오의 잔혹함도 악녀 못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손자와 증손자까지 모조리 처형했다.
마침내 그녀의 폭정에 화가 난 귀족들이 모반을 일으켰고
체포된 늙은 여왕은 80이 다된 나이로 동부의 크로탈 왕에게 넘겨졌다.
이로써 양국은 드디어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크로탈 왕도 어머니의 잔혹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왕국을 수십년 동안 괴롭힌 블뤼느오를 증오했다.
블뤼느오는 사흘 밤 낮으로 고문을 당한 뒤, 말에 매달린 채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질 때까지 끌려 다니며 처참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뒀다.
이로써 40여년에 걸친 두 여인의 피의 복수극은 막을 내렸다.
어찌 보면 비열함과 잔혹한면에서 치를 떨게 만드는 악녀의 죽음이
블뤼느오의 참혹한 죽음과 뒤바뀌었어야 공평했겠지만 운명은 그 반대였다.
인간의 역사는 늘 그렇듯 음모와 배신속에서 잔혹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인명과 지명은 약칭으로 처리했습니다]
[악녀-플레데곤드. 히르페-히르페리크]
[동부-라인강 중북부의 네우스트리아. 서부-프랑스 북부의 아우스트라시아]
[출처 : 키류 미사오 - 프랑스의 잔혹한 이야기들 중에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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