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파티아 (Hypatia) 355~415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촉망받는 여성 철학자가 살해되었다.
그것도 옷이 발가벗겨진 채 깨진 조개껍질로 온 몸에 회가 뜨이며 불에 타 죽었다.
이것은 기독교 광신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최초의 마녀 사냥이었다.
모든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그녀는 왜 이토록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을까?
그녀는 모든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으며 또 모든 이념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이 죽음은 천문학의 발전을 1200년이나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히파티아는 인류역사상 최초의 여성 수학자, 철학자, 천문학자였다.
그리스계 여성이었던 그녀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신플라톤주의자였다.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천재적인 머리로 수학, 천문학, 철학들을 가르쳐 많은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박물관의 수장이었던 테온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수학을 배웠으며, 이탈리아와 아테네로 유학을 갔다오기도 했다.
그녀의 수학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특히 남을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그래서 많은 유력자의 자제들이 그녀의 명쾌한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매력적인 언변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 많은 수학자들이 매달려 끙끙거리던 문제를 단번에 풀어냈다고 하니
단순히 외모 때문에 인기가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진리와 결혼하였다'고 선언하며 독신을 고집하였고
세속적인 욕망이나 물질적인 면을 매우 낮게 여기며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이것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하여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모든 문명국으로부터 학자들이 모여드는 세계 학문의 중심지였다.
히파티아는 유년기를 뮤지엄(Museum)이라는 연구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했다.
또 그녀의 곁에는 늘 존경하는 아버지가 있었고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아버지는 "무릇 모든 형식적이고 독단적인 종교는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이어서
자존심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쳤다.
또 "네가 생각하는 권리를 비축하여라. 왜냐하면 틀리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라며 그녀의 정신을 단련시켰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녀의 정신은 놀랍도록 신속하며 또 강철처럼 단련되었다.
테온은 이러한 정신에 어울리는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도록 그녀의 식이요법도 개발하였다.
그는 히파티아가 규칙적으로 연습할 수 있도록 일종의 부드러운 미용체조도 고안해냈다.
그녀는 노 젓는 법, 수영, 승마, 체조, 등산 등을 하루 일과중에 일정하게 할애하였다.
영화 아고라의 한 장면. 히파티아와 그녀의 아버지 테온
로마인에게 우변술, 수사법 같은 예술은 사회적 품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한 개인의 성향을 드러냄으로써 타인을 감명시킬 수 있는 이 능력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부여받은 위대한 재능으로 생각되었다.
테온은 딸 히파티아가 자신이 이미 규정해 놓은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한 하나의 준비 단계로 히파티아는 연설에 필요한 정규교육을 받았다.
미사여구를 시도하는 방법, 언어의 힘과 최면을 유도하는 힘, 음성을 적당하게 조절하는 법,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 정도의 부드러운 음성을 내는 방법에 관련된 수업이었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환경의 변화에 좌우되지 않기 위해 매 순간마다 그녀의 생활을 감독하였다.
그는 쉽게 영향받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은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미사여구를 사용하는 것은 단지 화장을 하는 효과가 있을 뿐이며,
타인에게 영향을 미쳐 타인을 조종하는 것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테온의 철학은 감수성이 강하고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는 그녀에게 계승되었다.
그녀는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외국을 여했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왕족처럼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한동안 그녀는 젊은 플루타르크와 그의 딸이 운영하는 아테네의 한 학교에서도 공부하였다.
바로 여기서 수학자로서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장관이 그녀를 초빙하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녀는 매우 인기있는 선생이었고 그 시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그녀를 자주 방문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도서관과 뮤지엄 그리고 그녀의 집을 지성의 중심으로 여겼다.
그녀는 마치 제사장처럼 여겨졌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 온 열정적인 학생들이 히파티아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녀는 수학을 가리켜 '자신의 마음을 자극한 순수'라며 사랑하였다.
그녀는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늘 우주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왜 계절에 따라 낮과 밤의 길이가 달라지고 해의 크기가 변하는가?"
이 의문은 그녀가 죽기 직전에 발견한 원추곡선의 이론을 탄생시킨다.
그녀의 제자들 중에 가장 두각을 보인 두 젊은이가 있었다.
오레스테스는 가장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고 시네시오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어느 날 두 사람이 기독교 문제로 다투게 되었는데 히파티아가 이런 말을 했다.
"유클리드 공리 1번이 무엇인가?
어느 둘이 다른 하나와 일치하면 모두 서로 같다는 이론이다.
즉, 여러분들은 나를 따른다는 일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형제이다"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러디쉽은 제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또 그녀의 철학적인 신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오레스테스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며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녀는 고민에 빠졌는데, 다음날 수업중에 오레스테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손수건처럼 곱게 접혀진 것이었다.
오레스테스는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히파티아가 많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내 생리혈이 묻은 수건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사랑하는 나의 참모습이다!"
오레스테스는 이에 실망했지만 그녀의 뜻을 헤아리고 더 이상의 구애를 하지 않았다.
이 소문은 알렉산드리아 전체에 퍼져 '진리와 결혼하였다'라는 그녀의 신념을 확인시켰다.
그래도 오레스테스는 학교를 떠나지 않고 늘 그녀를 사랑하였다.
한편, 이 시기엔 기독교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었다.
이것은 다신교를 믿는 히파티아와 아버지에게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들었다.
그래도 박물관과 도서관은 옛 전통들이 남아있어 이교도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거리는 온통 기독교도들의 포교 활동으로 늘 소란스러웠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은 기독교, 유대교, 다신교로 삼분되어 있었는데,
당시 이 도시의 기독교도들은 이미 과반수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다른 이교도들과 별다른 충돌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1900년 히파티아를 연기한 매리 앤더슨
그런데 강경파의 리더였던 암모니오스의 출현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광장에서 교리를 설파하면서 이교도들을 멸시하고 조롱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이교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신상에까지 모욕을 주었다.
소수였던 다신교 신자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다신교의 교주가 모든 이교도들을 박물관 앞에 모이게 했다.
"이제 더 이상 저들의 오만함에 인내를 갖는다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
그의 선동적인 연설에 수 많은 이교도들이 함성으로 앙갚음을 다짐했다.
이때 히파티아가 폭력을 반대했으나 그녀의 아버지는 주교의 입장과 같았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자신을 따르는 학생들을 이 무리에서 떼어냈다.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교도들은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다.
광장에 모여있던 기독교 신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살해되었다.
얼마 후, 이교도들이 허겁지겁 박물관으로 되돌아왔다.
"기독교도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어서 성문을 닫아라!!"
시커멓게 몰려든 기독교도들은 삽시간에 박물관을 포위하였다.
박물관은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와 같았다.
이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히파티아의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뒀다.
알렉산드리아 장관은 고민에 빠졌다.
겨우 몇 천의 군대로 수 십만의 기독교도들을 해산시킬수는 없었다.
자칫하다간 폭동으로 이어질게 뻔했다. 장관은 로마 황제에게 해결을 부탁했다.
며칠째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황제로부터 포고문이 내려왔다.
"이교도들에게 사면을 내린다. 대신 지금 이순간부터 박물관을 비워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박물관의 출입은 기독교도와 유대인들에게만 허용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명령이었다.
다신교 전통의 모든 신상과 수 만권의 서적들이 짓밟히게 생겼다.
장관은 후문에 병사들을 도열시켜 이교도들이 안전하게 빠져나갈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교도들이 황급히 빠져 나가는 상황에서도 히파티아는 도서관에 남았다.
제자들이 위험하다며 피하라고 해도 그녀는 서적을 챙기기에 바빴다.
"이 귀중한 자료들이 저들에게 불태워질게 뻔해!!"
드디어 기독교도들에 의해 성문이 부숴졌다.
히파티아는 노예들에 의해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박물관의 신상과 서적들은 모조리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흉가처럼 변한 박물관은 나중에 시민들의 가축 우리로 쓰여졌다.
이로써 기독교도에 의해 다신교는 해체되었다.
이후 몇 년간 신변의 안전을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히파티아의 제자들도 거의 개종하였고 이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고위직으로 올랐다.
특히, 오레스테스는 장관에 임명되었고 시네시오스는 키레네 주교가 되었다.
이때 알렉산드리아에는 키릴로스라는 새로운 인물이 주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권력을 쥐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의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유대교를 표적으로 삼았다.
어느 날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유대인들이 돌 팔매질을 당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오레스테스 장관에게 고발하고 관련자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관이 힘을 쓰기엔 이미 기독교도들의 힘이 너무 강해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로 했다.
영화 아고라. 키릴로스 주교
어느 날 밤, 기독교들이 모여 있는 박물관에 한 여성이 뛰어 들었다.
"불이 났어요. 어서 도와주세요. 빨리요!!"
놀란 기독교도들이 양동이를 들고 그 여성을 쫓아갔다.
"대체 어디에 불이 났단 말이야?"
큰 건물 안으로 뛰어든 기독교도들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때 현관문이 스르르 닫히며 쇠사슬이 걸렸다.
어둠속의 적막, 이것은 가장 큰 공포였다.
이윽고 지붕위에 자리를 잡고 있던 유대인들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안에 갇혀있던 수 백명의 기독교도들은 그렇게 비명과 함께 쓰러져갔다.
다음날 아침, 기독교 광장은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수 많은 군중 사이로 키릴로스 주교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제 우리의 눈물은 형제들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해 흘려줍시다!"
이 말 한마디로 알렉산드리아는 온통 살육의 바다로 변했다.
기독교도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유대인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결과는 기독교도들의 승리였고 유대인들은 모두 추방되었다.
이제 도시는 완전한 기독교의 세상이 되었다.
한편, 히파티아는 장관을 찾아가 이 문제를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세례를 받은 관료들이 기독교를 편 들며 히파티아의 주장을 일축했다.
화가 난 히파티아는 "당신들의 종교는 우리가 믿는 것 보다 나을 것이 없군요"라며 쏘아부쳤다.
이 소식을 들은 키릴로스 주교는 매우 분노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걸림돌은 히파티아와 오레스테스 장관 뿐이었다.
"그래, 이 기회에 그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
주교는 장관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을 신전으로 불렀다.
"교리를 따르지 않는 히파티아는 마녀다!!"
이 선언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주교를 거역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오레스테스만은 이 선언을 거부하며 퇴장하였다.
성난 군중들이 오레스테스에게 강하게 반발했다.
경호대와 군중들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장관의 머리에 돌이 날아왔다.
강경파의 리더였던 암모니오스의 짓이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시신을 인도받은 키릴로스는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히파티아를 사랑한 오레스테스 장관
"이 모든 것이 그 마녀 때문이다!"
기독교도들이 흥분하여 그녀를 곧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도 히파티아는 의연했다. 그녀는 변함없이 연구에 몰두하였다.
다음 날, 히파티아에게 시네시오스가 말했다.
"선생님, 제발 세례를 받으십시요!"
"나에게 신념을 강요하지 말라!"
그러자 오레스테스가 간곡한 표정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제발, 부탁입니다. 저는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히파티아는 아무 말 없이 두 제자를 물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경호원들이 히파티아 옆에 서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저를 경호할 필요는 없어요!"
그 날은 아침부터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히파티아는 예전처럼 마차를 타고 대학으로 향했다.
평소 그녀를 존경했던 군중들의 시선은 이미 차갑게 변해 있었다.
그녀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 귀밑으로 한 줄기 땀 방울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이때 검은옷을 입은 무리들이 마차를 가로막았다.
"저 마녀를 끌어 내려라!" 괴한들이 그녀를 끌어 내리고는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성소로 끌고 갔다.
1885년 찰스 윌리엄 미셸이 묘사한 히파티아의 죽음
"머리카락을 모두 뽑아라!!"
광신도들에 의해 히파티아는 머리카락이 뽑혀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온 몸을 비틀었다.
이윽고 지쳐 쓰러진 그녀에게 고문이 시작되었다.
광신도들의 손엔 칼날처럼 예리하게 깍은 굴 껍데기들이 쥐어져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지옥같은 고통을 느끼며 온몸이 면도날처럼 썰려나갔다.
그것은 마치 산 채로 회접시에 올려진 육신이나 다름 없었다.
히파티아는 피범벅이 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광신도들은 그녀를 바닥으로 질질 끌고 나와 불 속에 집어던졌다.
그녀의 마지막 몸부림이 검은 연기로 피어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오레스테스 장관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한 그는 곧바로 모든 공직을 버리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로써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지위와 권한은 키릴로스의 차지가 되었다.
그녀가 죽자, 충격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국외로 망명하였다.
히파티아의 죽음은 사실상 수 백년을 이어온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의 종언을 의미하였다.
이제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에 반대되는 어떠한 사상과 철학도 용납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후 키릴로스 주교는 죽어서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히파티아가 죽기전에 발견한 원추곡선의 이론도 묻혀버렸다.
이후 1200년이 흐른 17세기, 요하네스 커플러에 의해 그녀의 이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형'임이 그때서야 인정된 것이다.
현재 그녀가 서술했던 서적은 거의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
위 그림은 라파엘로가 묘사한 아테네 학당이다.
좌측에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히파티아가 이곳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아래는 그녀가 세상에 남긴 어록이다.
"여러분이 가진 생각하는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세요"
"생각하는 것은 값진 능력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능력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을 모두 없애 버리면,
여러분 속에는 어둠이 들어찰 것이고 그 어둠을 다른 사람들이 메우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무엇을 믿어야 할지 말해주면서
절대 거기에 의문을 갖지 말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어둠 속에서 살게 되면 머지않아 여러분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젊은이여, 이것이 그대가 사랑하는 나의 참모습이라네.
그러나 자네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지"
위 내용은 아래의 출처와 영화 아고라의 내용을 취합한 것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sinkilchurch / 다음백과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Hypatia_of_Alexandria
[출처] http://user.chollian.net/~badang25/bmk/bmk21.htmhttp://cafe.daum.net/terralux13/4ue6/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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