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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군을 전멸시킨 여왕 보디카

구름위 2012. 10. 8.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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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카(Boudicca)는 켈트어로 승리(Victory). 즉 빅토리아(Victoria)와 같은 의미다.

보디카는 많은 역사가들로부터 부디카 혹은 보아디키아(Boadicea)로도 기록되고 있다.

 

이 이름은 거의 1500년 동안이나 잊혀졌다가 르네상스 시대인 1534년에 한 역사가에 의해 재발굴되었다.

이것이 1610년 셰익스피어때 활동했던 극작가들에 의해 연극<Bouduca>로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되었고, 

빅토리아 여왕에 이르러 영국의 수호자라는 찬사와 함께 신화적인 인물로 재조명 되었다.

 

이 이야기는 로마의 전성기인 서기 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브리타니아)에는 원주민인 켈트족들이 수십개의 왕국을 이루면서 살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최초의 로마 침공은 약 100년 전,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가

갈리아족을 지원한 켈트족들을 응징하기 위해 쳐들어 간 것이었는데,

이때 완강한 저항을 받아, 점령 대신 로마에 우호적인 켈트왕국 하나를 내세운 것에 그친다. 

 

그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거치면서 엄청난 내전에 시달렸고

서기 9년에는 게르만 전선에서 바루스의 3개 군단이 전멸을 당하는 등

당시 상황이 너무나 복잡하여 영국에 눈을 돌릴 여유조차 없었다.

 

거의 100년이 흐른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영국의 남동부를 점령하게 된다.

아마도 이들은 게르마니아를 점령하지 못한 한(恨)을 그 쪽으로 풀었는지도 모른다.

꿩대신 닭이라는 말도 있잖은가. 아무튼 그렇게 브리타니아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첫 스타트가 순조롭게 풀리자, 로마는 본격적인 등기부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먼저 켈트족을 브리튼인(Britons), 점령지를 브리타니아(Britannia),

프랑스 북서부 해안지역을 브리타니(Brittany)라 명명한 뒤, 침략의 야욕을 세웠다.

 

보디카 왕비의 굴욕

 

이즈음 영국 중동부의 노폭(Norfolk) 지방에는 보디카라는 아름다운 왕비가 살고 있었다.

왕족 출신이었던 그녀는 큰 키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붉은 머리를 가졌으며 매우 지혜로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 프라스타쿠스(Prasultagus)는 당시 이곳 아이케니아(Icenia) 왕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프라스타쿠스 왕은 43년, 로마의 정벌 때 다른 10명의 켈트족 왕들과 함께 자발적으로 항복하게 되는데,

로마는 이들을 종속국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은 사후 로마로의 편입을 의미하였지만,

당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들은 이것이 자국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왕들이 죽자 켈트 왕국 두개가 로마로 편입되었다.

그래도 아직까진 본색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프라스타쿠스 왕도 로마를 의심하지 않았다.

 

서기 59년이 되자, 프라스타쿠스 왕도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깨닫고

가족들의 안전과 노후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재산 중 절반을 로마에 바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왕은 이 계획을 유언으로 남기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한편, 이 시기에 브리타니아 총독이었던 수에토니우스가 일을 저지른다.

그는 라이벌인 꼬르블로가 아르메니아에서 큰 전공을 세우자 자기도 따로 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던 중 아주 좋은 곳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있는 모나섬이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 동명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와는 다른 인물)

 

 

모나섬은 현재의 앵글시(Anglesey)섬을 가리키며 수려한 해안으로 유명한 곳이다.

드루이드교 사원이 있는 이곳은 머리를 헝크러트린 여사제들이 신을 모시는 곳으로

전체 브리튼인들의 저항의 상징이자 근거지가 되어왔다.

 

때문에 수에토니우스는 이 섬을 공략하여 브리튼인들의 저항의 의지를 꺽고

과거 실루레스족의 기습으로부터 자국군이 당했던 패배까지 되갚아 줄 심산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는 로마의 역사에 크게 이름을 알릴 것이다.

 

수에토니우스는 먼저 얕은 바다에 유리하도록 바닥이 낮을 배를 건조하도록 지시한 뒤,

두 개 군단을 공격에 참가시키고 제9군단을 남쪽으로 배치시켰다.

이제 밥은 다 되었고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바로 프라스타쿠스 왕의 죽음이었다.

왕이 죽으면 그 왕국은 자연스럽게 로마에 편입이 된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한 지방행정관의 횡포에 의해 그르치게 된다.

 

이 행정관(징세관)의 이름은 카투스 데키아누스.

데키아누스는 왕이 죽자마자 미망인을 찾아가 전재산을 로마에 귀속시키라고 명했다.

명목은 왕국의 남쪽에 위치한 콜체스터 사원의 건립이었다.

 

왕비는 선왕의 유언대로 재산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지만,

데키아누스 상속자가 모두 여자인 것을 알고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자 그의 무례한 요구에 화가 난 왕비가 이를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를 괘씸히 여긴 데키아누스가 그녀를 체포하여 채찍으로 후려쳤으며,

아리따운 두 공주마저 병사들에게 넘겨 집단으로 강간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아이케니아족들은 이 날을 치욕의 날로 기억하게 된다.

보디카 역시 사랑하는 두 딸과 자신이 유린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훗날을 기약하며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반란의 중심 보디카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61년, 드디어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수에토니우스의 군대가 모나섬을 공격하여 드루이드교의 신자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보티카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드루이드교 : 떡갈나무를 숭배하는 켈트족의 고대신앙)

 

전통적으로 켈트족들은 전투에 임할 때 몸에 파란색을 칠했는데 여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섞여 전쟁에 나갔으며 결코 물러서거나 두려움을 표하지도 않았다.

또 도끼나 칼, 창 등을 들고 남자만큼 우렁찬 고함을 치며 적들을 위축시켰다.

보디카 역시 똑같은 전사의 차림을 하였고 두 딸도 그녀 옆에서 칼을 들었다.

 

 

봉기의 중심에 섰던 보디카는 맨 먼저 콜체스터를 향해 진군했다.

당시 콜체스터는 주력부대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로마의 2개 군단은 모나섬 쪽에 몰려 있었고 9군단은 남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절묘한 시점에 분노한 켈트족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무방비 상태였던 콜체스터는 그들에 의해 무차별 공격을 받았다.

또 이곳은 공공건물과 사원만 있을 뿐 방어용 성벽이나 도랑조차도 없다.

그러자 약 2만명 정도가 살고 있었던 이 도시는 삽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주민들이 서둘러 런더니엄(런던)에 있는 데키아누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깜짝 놀란 데키아누스는 부랴부랴 병력을 끌어 모았다.

병력이라고 해봐야 겨우 200명 뿐이었고, 무장 또한 형편없었다.

더군다나 병력마저 대부분이 나이든 고참이나 제대병이었다.

 

결과는 로마군의 참담한 패배였고 도시는 반란군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자 여기서 살아남은 주민들이 서둘러 사원안으로 도망쳤다.

그러자 뒤쫓아온 반란군들이 이 사원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렸다.

 

이로써 반란군의 여왕 보티카는 브리타니아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수 많은 켈트족에 의해 병력은 수 만명으로 불어났다.

자신감을 얻은 보티카는 드디어 런더니엄으로의 진군을 명령했다.

그곳은 템즈강 주변을 요새화한 보급 도시로 로마군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다.

 

 

9군단의 전멸

 

이 소식을 들은 9군단의 수장 페들리우스 케리알리우스가 부대를 출동시켰다.

여기서 등장하는 불운의 9군단. 이름은 '히스파나'로 불린다.

이 이름은 한때 스페인에서 신병을 모집한데서 유래되었다.

 

당시 9군단(5천명)은 여기저기에 분산되어 있었다.

수 만명의 적을 상대하려면 부대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군단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뭘~"

 

결국 9군단은 소부대로 나뉜 상태에서 군사작전을 폈다.

보디카는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매복과 습격으로 모두 괴멸시켜 버린다.

이로써 9군단은 게르만에서 증발한 3개 군단에 이어 네 번째로 전멸한 부대가 되었다.

참패한 케리알리스는 기병 몇기만 데리고 간신히 캠프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런던에 있어야 할 데키아누스는 어느새 갈리아로 도망쳐버렸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수에토니우스는 모나섬 전투를 중단하고 급히 방향을 틀었다.

2개 군단을 이끌고 서둘러 달려왔지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무려 12만 명으로 불어난 보디카의 군대가 온 들판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맨 앞에는 여왕이 채리엇(고대2륜전차)을 타고 긴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금 목걸이에 두꺼운 외투, 브롯치로 졸라맨 갖가지 색의 튜닉이 반짝거렸고

훤칠한 키에 거친 목소리. 눈빛은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켈트족의 규모와 여왕의 포스에 질려버렸다.

결국 그는 런더니움 방어가 역부족임을 깨닫고 로마인들을 데리고 철수해버린다.

도시에 입성한 보디카는 부하들에게 철저한 파괴와 복수를 명했다.

 

반란군이 런던을 덮치자 대부분의 시민들은 로마군과 함께 도주를 했지만,

나머지 절반의 시민은 과거의 전철대로 무지막지한 보복으로 살해되었다.

그녀는 이어서 세번째 도시를 점령하고 똑같이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점령된 3개 도시에서 로마인과 그 협력자들까지 포함하여 약 7만 여명이 처형되었다.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들은 귀족의 여인들을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고 가슴을 도려냈으며,

여자의 몸 길이에 따라 땅에 꽃혀진 꼬챙이에 옆으로 뉘어 죽였다"

 

보디카의 최후

 

 

그 이후로 보티카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승리한 반란군이 3개 도시에서 복수의 만찬을 벌이고 있을 때,

수에토니우스는 중부에서 군대를 재편성하여 2개 군단(약 1만명)을 이끌고 왔다.

 

양측이 대치한 곳은 런던에서 가까운 월틀링(Waltling)

로마군은 무려 12배가 넘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반란군에 비해 장비와 훈련이 잘 되어있고 전투경험이 풍부하다.

 

수에토니우스는 전투지역을 세밀히 살펴 좁은 협곡에 숲을 등진 곳에 로마군을 배치한다. 

넓은 개활지를 내다보는 곳이다.  협곡은 수가 적은 로마군의 양측면을 보호할테고

뒤의 숲은 후위를 보호할테니 포위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는 베테랑 레지온을 전면에, 경무장 보조군과 기병대를 양 측면에 배치했다.

 

전투를 앞 둔 보디카는 채리엇을 타고 각 부대를 배치시킨 뒤 큰 목소리로 외쳤다.

"로마의 오만과 자신감 앞에 아무것도 안전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의 성역과 처녀들을 유린할 것이다.  

여기서 승리하던지 몰락하던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바로 나 보디카, 여인의 몸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카이사르나 키케로를 연상케하는 멋진 말이다.

그녀의 외침에서 자유와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묻어 나왔고

그녀를 바라보는 파란 얼굴의 켈트족들도 이 외침에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여기서 보디카는 마지막 운명을 걸고 배수진을 쳤다.

그들의 뒤쪽에 마차들을 배치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그들의 승리를 지켜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더 용감히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드디어 보디카의 진군 명령이 떨어졌다.

12만 명의 켈트족들이 로마군이 있는 좁은 협곡으로 진격하였다.

인해전술. 부대가 전진할수록 좁은 입구 때문에 병력들이 밀집되고 있었다.

 

이를 기다렸던 수에토니우스가 공격의 신호를 올렸다.

로마군의 화살이 밀집된 켈트족들의 머리위로 무차별 쏟아졌다.

그래도 켈트족들이 물러서지 않자, 두 번째 화살 공격이 이루어졌다.

마침내 켈트족들의 대열이 하나 둘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가 전진을 명령했다.  

백병전. 로마군 특유의 쐐기형 공격진은 두텁기로 유명하다. 

갑옷, 무기, 훈련 모든 면에서 뛰어난 로마군을 켈트족들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싸움은 점점 로마군에게 유리해져갔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보디카는 부대 지휘에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이미 켈트족의 대열은 무너졌고 패배는 불을 보듯 뻔했다.

 

결국 켈트족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후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뒤에 배치한 마차와 가족들 때문에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다.

얼마 후 켈트족들은 로마군에게 살해되거나 서로에게 짓밟혀 압사당하고 있었다.

가족들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미칠듯이 울부짖었다.

 

이때 수에토니우스의 두 번째 명령이 떨어졌다.

로마 기병대의 측면 공격, 그들의 칼끝은 적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에게도 향해졌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함께 전장은 붉은 피로 물들여졌다.

이 전투에서 약 8만 여명의 켈트족들이 학살되었다.

반면 로마군의 전사자는 단 400명 뿐. 그들의 완벽한 승리였다.

 

여기서 보디카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녀 옆에서 용감히 싸워주었던 두 딸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여왕으로써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며 스스로 독약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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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바로 네로가 통치하던 시대이다.

네로는 처음엔 반란 소식에 당황하여 모든 부대를 철수시키려고 했지만,

생각지 않은 승리에 기뻐하며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승장 수에토니우스의 잔인한 보복정책이 문제였다.

그는 반란을 주도했던 부족들 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몰살시키고 있었다.

살가죽을 벗기고, 토막내고, 불 태우는 만행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자 네로는 또 다른 반란을 우려하여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지시키고

반란군 모두에게 사면조치를 내림과 동시에 화해의 새원칙을 발표했다. 

그리고 문제의 총독을 좀 더 평화적인 인물(Petronius)로 교체하고

반란 지도자들이 아일랜드로 망명할 수 있도록 묵인까지 해 주었다.

 

물론, 이것이 켈트족들의 로마에 대한 저항의 끝은 아니었지만

이 승리로 인해 로마의 지배는 이후 약 350년 동안 계속된다.

 

여왕 보디카의 저항은 로마인에게는 잊고 싶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보디카의 역사는 중세 때까지 거의 잊혀진채로 흘러왔다.

그러다 1500년 만에 발견된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우상화를 위해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1818년에는 남편 알버트공이 여왕의 생일선물로 보디카의 동상을 바쳤고,

이 동상은 보디카와 두 딸이 전차를 타고 전진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현재 이 동상은 런던 국회의사당앞 광장에 놓여 있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많은 영국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으며,

책과 소설, 영화, 드라마의 주제로도 널리 소개되고 있다.

 

 

 

 

이 글은 아래의 출처들을 짜깁기 하였습니다.

 

출처 : 다음지식   원문보기  [작성자] 아프리카

출처 : http://myekim.egloos.com/3714724 / Celtic Britain: Its Art and Influence

출처 : http://bbs2.agora.media.daum.net/gaia/do/kin/read?bbsId=K162&articleId=10206

출처 : 영국여행정보 가볼만한 곳,100가지 영국여행 아이디어 |작성자 브리튼

출처 : BOB&밀리터리 매니아
글쓴이 : 임용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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