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꽁꽁 언 한강에 쇄빙선 동원 군량미 100만 석 수송

구름위 2017. 1. 14.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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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언 한강에 쇄빙선 동원 군량미 100만 석 수송

임진왜란 군량미 수송 작전


수송선에 두꺼운 널판 덧붙여 한양의 용산까지 운반

거북선 이어 조선이 만든 또 하나의 조선기술 발휘

 

기사사진과 설명
왜군이 머물던 순천 왜성을 공격하는 임진정왜기공도. 이 전투를 끝으로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이 끝났다. 필자 제공

왜군이 머물던 순천 왜성을 공격하는 임진정왜기공도. 이 전투를 끝으로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이 끝났다. 필자 제공



 

기사사진과 설명
군량미 100만 석 수송 작전을 지휘한 유근(柳根)의 초상화. 필자 제공

군량미 100만 석 수송 작전을 지휘한 유근(柳根)의 초상화. 필자 제공



 

   1598년 11월 19일 임진왜란이 끝났다. 물론 음력이니 지금 달력과는 차이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전쟁이 끝난 날의 모습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달 19일, 예교(曳橋)의 적들이 모두 철수하여 바다를 건너갔습니다. 성 안에 들어가 보니 우리나라 사람 3명과 소와 말 4필만이 남아있습니다.”

 종전을 알리는 내용으로 왜군이 철수한 지 5일 후인 11월 23일 자,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예교는 지금의 순천 왜성으로 당시 왜군 최대 거점이었으며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가 치러진 곳이다.

 이튿날인 24일 자 선조실록에도 왜군이 완전히 철수했음을 확인하는 기록이 보인다. “세 방향의 왜적이 일시에 달아났다.” 드디어 왜군을 물리친 것이다.

 왜와의 7년 전쟁 중 조선이 거둔 유명한 승리로는 한산대첩·행주대첩·진주대첩이 있다. 반면 크게 빛은 나지 않았지만 전쟁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준 작전도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용산 군량미 수송 작전이다. 100만 석의 쌀을 평안도에서 한강의 용산으로 수송하는 작전이다.

 왜군이 쳐들어온 1592년, 조선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였기에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사실 원군이 도착해도 병마를 먹일 식량이 부족했다. 한양은 물론 평양까지 빼앗긴 마당이어서 군량미 조달이 막막했는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1592년 10월 26일 자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명나라 군사의 숫자는 모두 합쳐 4만8585명, 말은 모두 2만6700필인데 이들이 먹는 양을 계산하면 군량으로 하루에 쌀이 대략 720석 들어가니 두 달이면 쌀 4만3700석이 필요하고, 말의 먹이는 하루에 대략 콩 800석이 들어가므로 두 달이면 콩 4만8060석이 필요합니다. 의주에서 평양까지 열여섯 고을의 곡식을 조사해보니 쌀과 좁쌀이 모두 5만1488석이고 콩은 3만3127석이 있습니다. 이리저리 꿰맞추면 대략 50일은 지탱할 수 있는 군량을 확보할 수 있겠지만, 말을 먹일 콩은 한참 부족할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1차로 조선에 건너온 명나라 군사는 약 4만8000명이었다. 이어 1597년 정유재란으로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을 때는 2차로 약 10만 명의 군사가 조선에 왔다. 명나라 군사들이 먹는 군량미는 주로 조선에서 마련했는데 구원병이 처음 도착했을 때는 명나라에서 직접 자신들이 먹을 양식을 가져왔다.

 임금이 의주로 피란 가고 전라도를 제외한 한강 이남 지역 대부분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니 명나라 군사가 먹을 양식을 지원하는 것은 고사하고 조선군과 백성이 먹을 식량도 모자랐다. 그 때문에 개전 초기에는 명나라에 구원병과 함께 군량미도 요청했다. 심지어 지금의 톈진(天津)에서 바닷길로 군량을 운송하면 된다며 수송 방안까지 논의했을 정도다.

 조선의 상황을 알았는지 명나라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군량미도 함께 보냈는데 그 양이 100만 석이었다. 정사(正史)가 아닌 대동기문(大東奇聞)이라는 조선 전쟁사를 기록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명나라는 산둥성에 있는 곡식 100만 석을 보내면서 왜군에게 빼앗길 것을 염려했는지 혹은 바다에 빠질 것을 두려워했는지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과 철산에다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평안북도에서 도성인 한양의 용산까지 운반하는 것은 전적으로 조선에서 책임지라고 했다.

 이미 늦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아져 조금만 지체하면 바닷길이 막힐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100만 석이나 되는 쌀을 육로로 운송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때 군량미 운송 작전의 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이 형조참판을 지냈던 유근(柳根)이다. 선조가 직접 운향검찰사(運餉檢察使)라는 벼슬을 내려 책임자로 임명했으니 군량미 100만 석 수송 작전이 얼마나 막중한 임무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유근이 엉뚱한 일을 벌였다. 하루빨리 군량미를 운송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수송선에 두꺼운 널판을 덧붙여 배를 둔하고 무겁게 만들면서 시간을 낭비했다.

 사람들이 유근을 비웃었다. 그렇게 둔한 배로는 운항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바다는 몰라도 한강이 얼어붙으면 바닥이 너무 두꺼워 얼음에 갇혀 움직이지도 못할 것이라는 우려였다.

조정에서도 군량미가 제때 도착하지 못할까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겨울이 시작되자 유근이 드디어 배를 띄웠다. 50척의 선박에 100만 석의 군량미를 나누어 싣고 서해를 따라 얼어붙은 한강에 도착했다.

이때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두꺼운 널판을 덧붙였기 때문에 선박이 얼음에 부딪혀도 배가 깨지지 않았고 오히려 얼음을 부수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차례차례 목적지인 용산에 도착한 것이다.

 유근이 개조한 배는 얼음을 깨고 운항하는 조선 시대의 쇄빙선이었으니 거북선에 이어 조선 수군이 만든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결국 군량미 100만 석 수송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1598년 11월 19일, 왜군이 허겁지겁 철수하면서 임진왜란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