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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차에 걸친 테스트로 애인을 선발했던 여왕

구름위 2012. 10. 8.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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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은 종합건강검진. 황실 전속 의사가 꼼꼼하게 건강과 체력 상태를 체크합니다. 모든 의사가 O.K 사인을 한 경우에만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2차는 지적 능력 테스트. 머리가 좋은지, 책은 얼마나 읽었고 교양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했습니다. 현재의 지적 수준보다는 앞으로 똑똑해질 싹이 보이는지를 평가했습니다.

3차는 실전 침실 테스트. 황제의 신임을 받는 측근들이 직접 후보자들과 합방하여 성적 능력을 시험했습니다. 가끔 후보자에게 홀딱 반한 시험관이 3차 테스트를 3~4차례 되풀이해 실시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여기까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하고 나면, 4차로 최종면접이 행해졌습니다. 황제와 대면하여 인성과 매력을 평가받았지요. 

황제의 마음에 든 후보자는 합격 축하 상금으로 십만루블(당시 러시아 고급 관리의 1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하사받고 바로 그날 밤부터 황제의 침실에 들었다고 합니다.

Ekaterina II (1729.5.2~1796.11.17)

이렇게 까다롭게 동침할 애인을 고른 군주는 바로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였습니다.

18세기 러시아 근대화를 이끈 계몽군주이자 러시아를 유럽, 아시아, 미국 알래스카에 이르는 대국으로 넓힌 장본인이었지요. 표트르1세와 함께 러시아 역사상 유일하게 '대제'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가 정치에 죽을 쑬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몰아내고 정부를 황후 자리에 앉히려 하자, 왕실 경호대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남편을 쫓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음을 선언한 여걸이었지요.

표트르 3세가 어이없을 정도로 무능했던 덕에 당시 러시아 사회도 예카테리나의 편에 섰답니다. 권력을 장악한 그녀는 농지 개혁, 공장 건설, 학교 설립 의무화 등 34년간 다양한 업적을 남기며 여제의 자리를 누렸습니다.


소녀시절의 예카테리나 2세. 프로이센 작은 공국의 공주였던 그녀는 14세 때 러시아 황실에 들어왔다. 명석하고 영리한 그녀에 비해 남편인 표트르3세는 장난감 병정 놀이에만 열을 올리는 저능아였다.

예카테리나 2세의 대담함과 영리함은 남성편력에서도 빛을 발했는데요. 일단, 4차의 테스트를 걸쳐 애인으로 선발된 남성들을 단순히 성적 파트너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엄격하게 정치,사회적 교육을 받도록 하고 나랏일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지요. 

2~5년 정도가 흘러 이 남성이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추고 똑똑해졌다고 판단되면, 애인 관계를 청산하고 대신 벼슬 자리를 주어 일을 하게 했습니다. 더 오래 함께하면 권력욕이 싹틀 것을 우려한 부분도 있고, 직접 '키워낸' 믿을 수 있는 인재를 사회 고위층에 앉혀 자신을 돕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헤어지는 애인에게는 돈과 작위, 땅과 농노까지 두둑히 챙겨주었습니다. 여제에게 첫 딸을 낳게 한 포니아토프스키(Poniatowski) 백작은 애인 자리에서 물러난 뒤 폴란드의 왕위를 선물로 받았으며, 18개월 정도 여제의 정부였던 표트르 자바도프스키(Peter Zavadovsky)는 헤어질 때 <현찰 5만루블+노예 4000여명+연금 5000루블>을 패키지로 받았으며 이후 국무장관까지 출세를 했습니다.

이쯤되니 당시 러시아의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예카테리나 2세의 정부가 되기를 소망했다는 이야기가 과장은 아닌 듯 하지요.

Grigori Alexandrovich Potemkin(1739~1791)

가장 유명한 정부였던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emkin)은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여제보다 열살 연하였지요.

남성적 매력으로 예카테리나2세의 총애를 받은 포템킨은 드물게 12년간이나 여제와 동거하였으며 둘의 관계가 시들해지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여 여제의 애인들을 직접 고르는 역할을 맡습니다. 4차에 걸친 애인 선발 시스템도 그가 만든 것이라는군요.

또한 그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 등 남부 러시아 전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자리까지 승진합니다. 애인, 뚜쟁이, 정치가, 군인으로서 모두 능력을 발휘했으니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던 셈이지요.

또 한 사람 자주 언급되는 예카테리나의 남자는 마지막 정부였던 주보프(platon Zubov). 근위대 중위였던 그가 여제의 눈에 들었을 때는, 예카테리나 61세-주보프 23세였습니다.

40년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애인에게 푹 빠진 예카테리나 2세는 공과 사를 적절히 구분했던 한창 때의 현명함을 잃고 주보프가 막강한 권력을 누리도록 내버려두었다는군요. 주보프는 여제가 67세에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마음껏 러시아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platon Zubov(1767~1822)

예카테리나는 죽기 전까지 약 20명의 정부를 두었으며, 애인을 갈아치운 뒤에도 옛 정부들의 처우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애인인 상태에서 정부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하면, 관대하게 재물을 내려 떠나가게 했다는군요.

헨리 8세나 루이 15세 같은 유럽 왕들이 정부에게 싫증이 나면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목을 자르거나 수도원에 보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사생아들도 모두 똑같이 신분을 보장해주고 재물을 내린 덕분에 갈등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후에 예카테리나 2세의 업적은 인정하지 않고, 남성 편력만 부풀려 '색을 밝힌 악녀'라고 악의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성 군주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여제의 사생활은 몹시 당당하고 떳떳하게 느껴지는군요.

여러모로 보아,그녀가 보기 드문 '여걸'이었던 것은 분명한 듯 합니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대영제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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