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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복왕 윌리엄 1세

구름위 2012. 10. 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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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1세  [William I, 1027~1087.9.9]

 

 

정복왕(the Conqueror)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윌리엄 1세는 본 릴레이의 주제에

 

가장 잘 맞는 '정복 군주' 라고 할 수 있겠다.

 

 

노르망디 공작(1035~, 기욤 2세)이며 잉글랜드의 왕(1066~).

중세의 가장 위대한 군인·통치자 중 한 사람이었다. 프랑스에서 강력한 봉건영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잉글랜드를 정복해 그 역사의 경로를 바꾸어 놓았다.

초기생애

노르망디의 로베르 1세와 팔레즈 성읍 출신 평민의 딸인 첩 에를르바(아를레트) 사이에서 난 두 아이 중 첫째였다. 로베르는 예루살렘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 유일한 아들인 윌리엄(기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1035년 로베르가 예루살렘 순례에서 돌아오던 길에 죽자 그는 노르만 유력자들과 그의 군주였던 프랑스 왕 앙리 1세로부터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윌리엄과 그 친구들은 엄청난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했다. 적출이 아니라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한 데다(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서자왕'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짐) 어린나이로 공작위에 오른 데 따르는 법질서의 문란을 이겨내야 했다. 윌리엄의 후견인 가운데 3명은 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잔혹한 죽음을 당했으며 가정교사는 피살되었다. 아버지의 친척들도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 윌리엄이 죽으면 자신들이 이득을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애를 써서 가장 위험한 시기에 가까스로 윌리엄을 보호했다. 아마도 이러한 초기의 난관을 겪으면서 그는 의지력이 강해지고 무법행위와 실정을 혐오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 같다.

노르망디의 통치자

15세가 된 1042년에 윌리엄이 기사작위를 받고 자기 공국의 일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최악의 고비는 물러갔다. 그러나 그가 잃은 권리를 되찾고 불복종하는 신하와 하인들을 복종시키고자 했을 때 불가피하게 분쟁이 일어났다.

1046~55년에 그는 대부분 친척들이 주도한 귀족들의 반란을 연이어 겪었다. 때로는 크게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프랑스 왕 앙리에게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1047년에 앙리와 윌리엄은 캉 남동부에 있는 발레뒨에서 반란세력들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 시기에 윌리엄은 싸우는 법과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윌리엄은 이내 젊은 혈기의 무분별을 자제할 줄 알았다. 그는 전쟁에서 항상 치밀한 계산을 근거로 위험을 무릅썼으며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점은 언제든 전투를 벌일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용맹하거나 열정적인 지휘관은 아니었다. 그의 계획은 단순했고 방식은 직접적이었으며 일단 유리한 위치에 서면 어떤 상황이든 가리지 않고 냉정하게 끝까지 그것을 살려나갔다.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즉각 물러났다.

통치하는 데서도 똑같은 자질을 발휘했다. 빼앗긴 공작의 권리와 세금을 되찾고자 하는 목표를 한시도 놓친 적이 없었으며, 통치이론을 발전시키거나 행정기술에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지만 항상 임기응변과 실험적인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대의 기준에서 볼 때 그는 도덕적인 생활을 했던 것 같고 노르만 교회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의 이복동생이며 16세 가량 된 오도를 1049년 바이외의 주교로 임명했는데 오도는 당대의 사람들을 크게 경악시키는 일 없이 귀족 및 고위성직자로서의 역할을 가까스로 결합해나갔다. 윌리엄은 또한 외국의 수도승과 학자들을 노르망디로 불러들였다. 유명한 인문학의 대가인 파비아의 랜프랭크는 1042년경 베크 수도원에 들어와 1063년에 캉의 대수도원장이 되었다.

한 익명의 저자가 아인하르트의 샤를마뉴 전기에서 많은 내용을 빌려와 윌리엄의 인물 됨됨이에 관해 간략하게 기술한 데 따르면 그는 평균보다 약간 큰 키에 강건하고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항상 음식과 술을 절제했지만 말년에 이르러 뚱뚱해졌으며, 목소리는 거칠고 저음이었으며 어느 때나 유창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후대의 저술가들은 그가 남다르게 힘세고 활기찼다는 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윌리엄은 야외활동을 즐겼고, 수렵가이자 군인이었으며, 열정적이고 전제적인 성격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교육을 받지 못해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총명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이내 경쟁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새로운 동맹

1047년 이후 윌리엄은 그의 공작령 외부의 일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군주인 앙리 1세의 지원을 받아 남부 변경을 강화하고 멘 지역으로 영토를 확대하려는 야심으로 그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마르텔을 상대로 몇 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1052년 앙리와 조프루아가 평화협정을 맺자 동부 노르망디에서 심각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1054년까지 윌리엄은 또다시 중대한 위험에 빠졌다.

이 시기에 그는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와 중요한 협상을 벌였다.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에 대한 노르만족의 관심은 1002년에 잉글랜드 왕 애설레드 2세가 윌리엄의 조부인 리샤르 2세 백작의 누이 에마와 결혼했을 때 맺은 동맹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의 두 아들 하디커누트(1040~42 재위)와 참회왕 에드워드(1042~66 재위)는 차례로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윌리엄은 에드워드가 대륙에 망명중일 때 그를 만나 1041년 그가 잉글랜드로 돌아갈 때 모종의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그해 에드워드는 36세였으며 윌리엄은 14세였다. 윌리엄은 에드워드에게서 어떤 보상을 기대했던 것이 분명하며 에드워드가 결혼하고서도 자녀가 없자 친척인 자기가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아마도 이따금 윌리엄의 그같은 희망을 부추겼던 것 같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것이 하나의 외교적 자산이었다.

1049년 윌리엄은 플랑드르의 보두앵 5세와 그의 딸 마틸다와의 결혼문제를 놓고 협상을 벌였다. 황제의 봉신으로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보두앵은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3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동맹군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 결혼계획은 1049년 10월 랭스 공의회에서 황제의 친구인 교황 레오 9세로부터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을 받았다(윌리엄과 마틸다는 명백하게 모종의 친척관계였음).

그러나 양측은 동맹을 갈망했기 때문에 1053년말이 되기 전, 아마도 1052년 결혼을 했다. 1059년에 윌리엄은 교황청과 화해를 했으며 불순종의 죄를 지은 그들 부부는 참회의 표시로 캉에 2채의 수도원을 건립했다. 윌리엄과 마틸다 사이에서 4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장차 노르망디 공작이 된 로베르(로버트)와 요절한 리처드, 정복왕의 잉글랜드 후계자였던 루퍼스, 루퍼스의 뒤를 이은 헨리가 그들이다. 딸들 가운데는 잉글랜드 왕 스티븐의 어머니였던 애덜라가 있었다.

참회왕 에드워드는 황제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윌리엄은 플랑드르와의 새로운 동맹을 계기로 에드워드에게 압력을 가해 자신을 잉글랜드 왕의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강요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에드워드는 1051년에 윌리엄에게 모종의 약속을 했던 것 같고 그와 동시에 잉글랜드 최고귀족인 고드윈 백작의 아들 토스티그가 보두앵의 이복누이와 결혼했다. 이러한 3자동맹의 직접적인 목적은 각 당사자들의 안정적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것이었다. 윌리엄이 에드워드의 후계자라는 언질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또한 먼 장래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1054~60년 윌리엄은 프랑스 왕 앙리 1세와 앙주의 조프루아 마르텔 사이의 동맹에 대항해 자신의 독자적인 동맹을 유지했다. 그 두 사람이 1060년에 죽고 나서 더 유약한 군주들이 뒤를 이었다. 그결과 1063년에 윌리엄은 멘 지방을 정복할 수 있었다. 1064(또는 1065)년에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자기 처남 웨식스 백작 해럴드를 노르망디에 사절로 보냈다.

이때 윌리엄은 위험에 빠져 있던 해럴드를 도와주었으며 이와 관련해 해럴드는 윌리엄에게 서약을 했는데 노르만 저술가들에 따르면 그 서약은 에드워드가 윌리엄에게 왕위를 물려주리라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하고 자신이 그것을 지지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1066년 1월 5일 에드워드가 자식이 없이 죽자 해럴드는 잉글랜드의 유력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윌리엄은 이에 대항해 전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다른 인물들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5월에 망명중이던 해럴드의 형제 토스티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으며 9월에 노섬브리아 해안 근해에서 노르웨이 왕 하랄 3세의 침략군과 합세했다. 윌리엄은 함대를 모으고 군사를 징집해 8월에 자기 병력을 디브 강 하구에 집결시켰다.

그는 원래 곧장 북쪽으로 항해해서 아일오브와이트와 사우샘프턴 호를 경유해 잉글랜드를 침공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 계획대로라면 그는 연해의 기지와 내륙의 전선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풍이 불어 그의 함대는 1개월 동안 항구에 발이 묶여 있었으며 9월에는 강한 서풍이 불어 그의 배들을 영국해협 위쪽으로 몰고갔다.

헤이스팅스 전투

 


                               Battle of Hastings。

  <노르만의 잉글랜드 침입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전투이다.>


윌리엄은 솜 강변의 생발레리에 자기 병력을 다시 모았다. 원정이 지체되면서 그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고 해군력의 손실을 입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떨어졌다. 9월 27일 춥고 비오는 날씨가 지나간 뒤 바람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윌리엄은 원정군을 출발시켜 잉글랜드 남동부 해안을 향해 항해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육지에 상륙해서 아무런 저항 없이 페븐시와 헤이스팅스 성읍들을 점령하고 4,000~7,000명의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고 교두보 건설을 시작했다.

윌리엄의 병력은 앤드레드 대삼림으로 둘러싸인 좁고 길다란 해안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 회랑지대는 방어하기에 용이했지만 잉글랜드 정복을 위한 기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전쟁도 거의 끝나갔고 윌리엄이 들은 적군의 소식은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해럴드는 9월 25일 요크 부근 스탬퍼드브리지에서 승전을 거두어 토스티그와 하랄을 살해하고 나서 새로운 침략군을 상대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중이었다.

10월 13일에 해럴드가 삼림지대를 빠져나왔을 때 윌리엄은 불의의 습격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늦어 해럴드는 헤이스팅스까지 진격하지 못하고 방어태세를 취했다. 다음날 일찍이 윌리엄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전투를 벌였다. 그는 궁수와 기병대로 잉글랜드군의 방진(防陣)을 공격했으나 그의 군대는 퇴각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패주병들을 다시 모아 전투에 되돌려보냈으며 결국에는 적군을 녹초가 되게 만들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 중 헤이스팅스 전투。

               <정복자 윌리엄의 승리에 넘치는 출정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다.>

 

 

해럴드의 형제들은 전투 초기에 전사했다. 어둠이 닥칠 무렵에 국왕 해럴드까지 쓰러지자 잉글랜드군은 항복을 했다. 이때의 운명적인 전투에서 윌리엄은 침착하고 끈질긴 자세를 견지해 승리를 얻어냈고 이후 재빠르게 움직여 저항거점을 분쇄함으로써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는 것을 막았다. 1066년 크리스마스에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잉글랜드 왕관을 썼다. 이로써 공식적으로 노르만 정복이 이루어졌다.

잉글랜드 왕

 

                                 런던탑. 바이워드 타워。

<정복왕 윌리엄이 1066년 왕이 된 후 런던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지키기 위해 지은 성채.한때는 왕궁이었으나 1282년 이후로는 감옥으로 사용되고 14세기부터는 처형장이 되기도 했다.>

윌리엄은 이미 통치경험을 쌓은 군주였다. 노르망디에서 그는 불충실한 귀족과 공작령 관리를 자기 친구로 교체하고 사적인 전투를 규제했으며 찬탈당한 공작의 권리를 되찾고 봉신들의 봉건적 의무를 명확히 했다. 노르만 교회는 그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렸다.

그는 부패하지 않고 군주에게 복종하는 교회를 원했다. 그는 주교와 대수도원장의 반대나 교황청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는 종교회의를 주재했으며 자신이 정한 규율로 교회의 규율을 강화했다. 베크 수도원의 원장 랜프랭크가 성체성사에 관한 교리를 놓고 투르의 베렝가르와 논쟁을 벌였을 때 그는 랜프랭크를 지지했다.

그는 성직매매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반대했다. 동시에 정치적 필요에 따라 완강하고 때로는 난폭하기까지 한 지배자로 행동했으며 자기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는 데 인색했다. 개혁가였던 랜프랭크가 자문 역할을 했지만 어쩌면 바이외의 오도 주교 또는 쿠탕스의 조프루아 주교같이 세속적이고 군인적인 인물들이 훨씬 더 그의 구미에 맞았을지 모른다.

윌리엄은 1067년초에 잉글랜드를 떠났으나 잉글랜드의 소요 때문에 12월에 되돌아와야 했다. 1067년에 시작된 잉글랜드의 반란은 1069년 절정에 달했으며 1071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진정되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최고 귀족계급이 완전히 몰락했고 윌리엄은 새로 정복한 왕국에 염증을 느꼈다. 대륙에서 자신의 입지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문제를 가능한 한 수월하게 해결하고자 했다.

잉글랜드의 변경을 안정시키기 위해 1072년 스코틀랜드를, 1081년에는 웨일스를 침공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경계선을 따라 방어적인 역할을 하는 특별한 '변경주'들을 창설했다. 생애의 마지막 15년간 그는 잉글랜드보다 노르망디에서 더 많이 지냈으며 그중 약 5년이나 또는 7년간은 잉글랜드를 전혀 방문조차 하지 않았다.

앵글로노르만계의 최고귀족들 대부분을 노르망디에 자신과 함께 있게 했고 잉글랜드 통치는 주교들에게 위임했으며 특히 자신의 오랜 친구인 랜프랭크를 신임해 그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토착민들이 불필요하게 동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는 그들이 독자적으로 법률과 법정을 운영하도록 허용했다.

윌리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즉 1075년에는 헤러퍼드 백작 로저와 노폴드 백작 랠프가 일으킨 반란의 후유증을 수습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 반란은 덴마크 함대의 개입으로 더욱 위험한 상황까지 갔다. 그리고 1082년에는 바이외 주교 및 켄트 백작인 이복동생 오도가 교황이 될 목적으로 이탈리아에 군대를 파병할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1082년 봄 윌리엄은 아들 헨리에게 기사작위를 주었으며 8월에는 솔즈베리에서 누구의 봉신이든 가리지 않고 잉글랜드의 모든 주요지주들로부터 충성서약을 받았다. 1085년 그는 덴마크 왕 크누드 2세(신성왕 크누드)의 침공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086년 크누드의 죽음으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윌리엄은 왕국의 경제와 토지소유에 대한 조사를 명했으며 조사결과는 ' 둠즈데이 북'이라는 2권짜리 토지대장으로 압축되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 변경지방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위험성이 있는 지역은 프랑스 왕실영지와 접해 있는 멘 지방 일부와 센 강변의 벡생 지방이었다. 1066년 이후 대륙에 있는 윌리엄의 인접국들은 더욱 세력이 커졌으며 갈수록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1068년 풀크가 앙주를 계승했으며 프리슬란트 사람 로베르가 플랑드르를 물려받았다.

프랑스의 필리프 1세가 로베르와 동맹을 맺고 로베르는 덴마크 왕 크누드 2세와 동맹을 맺었다. 또한 윌리엄의 법적 상속인인 장남 로베르도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영지도 받지 못하고 돈에 쪼들리자 1077년 노르망디를 떠나 외국으로 가서 아버지의 적들과 음모를 꾸몄다. 1081년에 윌리엄은 풀크와 블랑슐랑 조약을 맺어 타협했다.

로베르는 멘 백작작위를 받되 앙주 백작의 봉신이 되기로 했다. 벡생 동부지방의 망트 현은 1077년 윌리엄이 멘 지방 문제로 바쁘게 신경쓰고 있을 때 완전히 필리프 왕의 수중에 떨어졌다. 1087년에 윌리엄은 필리프에게 쇼몽·망트·퐁투아즈 등의 성읍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7월에 그는 기습적으로 망트를 침입했으나 성읍이 불타는 와중에 부상을 입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미해결된 영유권 주장을 강행하려던 순간에 그는 꺾이고 말았다.

죽음

윌리엄은 루앙 교외로 옮겨져 5주 동안 빈사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는 몇몇 주교와 의사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복동생인 모르탱 백작 로베르 및 아들들인 윌리엄 루퍼스와 헨리가 시중을 들었다. 로베르는 프랑스 왕과 함께 있었다. 그는 관례대로 로베르가 모든 유산을 상속받게 할 예정이었겠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충실한 루퍼스를 유일한 후계자로 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타협적인 결정을 내려 노르망디와 멘은 로베르에게, 잉글랜드는 루퍼스에게 주었다. 헨리는 영지를 사들일 수 있는 많은 보물을 물려받았다. 윌리엄은 60세 되던 해 9월 9일 새벽에 죽었으며 다소 어울리지 않게 자신이 캉에 세운 생테티엔 교회에 묻혔다.

 

 

 정복왕 윌리엄 1세。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대영제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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