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스크랩] 태자밀건법

구름위 2012. 10. 8. 15:46
728x90

고금을 막론 하고 권력을 쟁취하려는 자. 또 권력을 가진자에게 붙어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 하려는 사람들은 셀수 없이 많았다. 그중 가장 심하 였던 것이 왕위를 이를 태자 자리를 두고 형제간의 골육상쟁을 하거나 권력을 이을 자들의 신하가 되어 자신들의 세력을 위해 서로가 싸우는 경우가 있었다.

  태자자리 차지를 위해 서로간의 암투와 모함 이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 한국 또한 마찬 가지 였다. 춘추오패로 유명한 진문공의 형이 였던 신생도 태자 였으나 황후의 모함을 받아 자결을 하였고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의 아들인 조비와 조식 또한 조조의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놓고 대립 하였다. 그 결과 조비는 후계자 자리를 물려 받았지만 이 후 형제들을 멀리해  이후 사마염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된다. 물론 조조가 장자인 조비 보다 삼남 조식을 더 편애 하였기에 생긴 형제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있다. 이후 당태종 이세민은 태자였던 자신의 형 건성과 동생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 태자로 책봉 되어 이후 당의 2대 황제가 되었다. 물론 당의 전성기를 이룩 하였지만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오명은 씻을수 없는 것이다. 유목국가였던 몽골 또한 칸의 자리를 놓고 대립이 심하였고 우리나라도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고 세조 또한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렇하듯 권력을 위해 시기 모함 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은 허다 하였다.

 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강희제 말기에 이르러 황족과 조정의 신하 사이에 붕당의 싸움이 심하였으므로, 즉위 후 동생인 윤사(允祀) ·윤당(允禟) 등을 물리쳐 서민으로 삼고, 권신인 연갱요(年羹堯) ·융과다(隆科多) 등을 숙청하여 독재권력을 확립하였다. 원래 청은 태조 누르하치때 부터 3대 순치제 까지는 실력 있는 자가 왕위에 오르는 추천제 였지만 4대 강희제 부터 중국 전통을 따라 황태자를 봉하게 된다. 강희제는  순치제의 셋째 아들로 순치제의 유명으로 8세 때 즉위하고,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강희제는 아들 35명, 딸 20명을 두었다. 이렇듯 아들이 35명이나 되었고 재위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권력 싸움이 있었다. 실제로 강희제는 태자를 몇번이나 폐위시켰다가 다시 태자 자리에 복위 시켰다. 강희제가 죽고 우여곡절 끝에 옹정제는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옹정제는 즉위하자 바로 자신이 즉위하기까지의 황위 싸움을 뒤돌아보고 일찍부터 황태자를 정해놓으면 황태자를 둘러싼 당파싸움이 일어나고, 또 황태자가 교만해진다고 하여 황태자를 공표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황태자의 이름을 써서 건청궁(乾淸宮)의 정대광명액(正大光明額) 뒤에 숨겨두고 내무부(內務府)에 밀지(密旨)를 간직하였다가 황제가 죽은 후에 개봉하여 밀지와 실물을 맞추는 방법을 정해 놓았다. 이것이 바로 태자밀건법이다. 이로써 관료가 황태자 주변에 결집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사후에 뭇 대신이 임석한 자리에서 황제의 의지를 문제의 소지없이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나아가 이 방법에 따른다면 황제의 눈에 든 황자가 지명되는 것이기 때문에 황자들은 부친인 황제의 마음에 들도록 하기 위해 평소 수양을 쌓고 면학에 노력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청조황제들 가운데에는 이전시대와 같은 암군이 없었다고 한다.

 태자밀건법은 완전한 제도는 아니였지만 이전에 있었던 여러 후계자들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싸우는 것을 방지 하였다고 볼수 있다.






출처 : 이종격투기
글쓴이 : 마이클쉥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