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라트의 이름 자체는 잘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명나라때 정통제를 사로잡는 위업을 달성하기도 했고, 그 후 오이라트가 준가르로 통합되어 강희제를 비롯한 청나라와 맞선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단편적인 이야기 말고 ─ 즉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여 사건을 일으킬때 말고, 오이라트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널리 이야기가 퍼진 편이 아닙니다. 심지어 북원과 헷갈리는 경우도 많이 있는 편이죠.
오이라트의 족속은 따지자면 몽골인들로, 몽골족입니다만, 그 후 뒤를 보면 말이 몽골족이지 소위 말하는 우리가 아는 그 몽골과는 계속 싸워왔기에 좀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몽골 "계통" 이라고 해도 되겠죠.
대체로 이런식의 위치라 오이라트를 "서몽골"이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몽골 족 자체도 칭기스칸 이전에는 그리 빨리 역사에 두각을 나타낸 편이 아닌데, 오이라트는 그 보다 뒤에 나타납니다. 징기스칸이 몽골을 통합한 뒤에야 간단하게 몽골에 항복했지만, 그 위치가 나중에 가면 분열된 몽골 제국 여기저기에 발을 끼게 된 셈이 되었죠.
잘 아시다시피 쿠빌라이가 원의 지배자가 된 다음에, 몽골 제국은 분열해서 서로 계속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오이라트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교역도 되고 하니까 쭉쭉 성장을 했죠.
다이원 예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소위 대원제국이 버티고 있을때야 감히 오이라트가 까불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한 30년쯤 되는 짤막한 전성기를 마치고 원나라가 망조를 보이며 무너지자 슬슬 세력을 높입니다.
중국의 남경을 장악한 주원장은 세력을 키우고, 마침내 때가 무르익자 주원장은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의 대군을 맡겨 북벌을 감행, 원나라는 차례차례 무너지고 결국 종말을 고하고 맙니다. 명나라의 시대가 오고,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과거 영광스럽게 내려왔던 고향으로 쫒기듯이 도망쳐야 했는데, 이렇게 해서 북원이 되었습니다.
즉 오이라트는 전부터 있었고, 북원은 이때 성립했으니 서로 헷갈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1390년 쯤의 북원의 칸인 엘베크 칸 무렵부터 북원과 오이라트는 계속 전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엘베크 칸은 오이라트에 의해서 죽었구요. 그런데 북원은 내부 사정도 막장이라 자기들끼리 죽이기도 하고 잘 되는게 없습니다.
초상화만 봐도 오줌 지릴 듯한 포스가 느껴지는 영락제
아이 좋아라 싶은건 명나라였죠. 홍무제나 영락제나 북방으로 원정군을 보내 싸우기도 싸웠지만, 그보다도 회유와 이간책으로 분열시키는 공작등이 성공적이었습니다.
직접 원정군을 보낸 경우엔 어떠했나면, 영락제는 북원의 울지트무르칸(Ulzitumur Khan)에게 "야 좋은거 줄게 말 잘들어라." 라고 회유책을 시도하여 사신을 보냈는데
북원에서는 그냥 죽입니다.
이 ㅅㄲ가?
이걸 참으면 영락제가 아니죠. 10만의 군대를 보내 1차적으로 공격을 시도했는데, 뜻밖에 패배했다는 소식만 들려왔습니다.
결국 영락제의 어그로는 끝까지 올라버렸습니다. 1410년, 영락제는 무려 50만의 병력을 동원, 북쪽으로 진군하는데
북원은 도망감.
.....뭐 어떻게 합니까. 그냥 돌아와야죠.
그런데 이런 혼란 속에 오이라트의 마흐무드라는 사람이 울지트무르칸을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울지트무르칸의 밑에 있던 무리가 명에 귀부했는데, 이것은 오이라트의 반발을 샀죠. 그런데 그까짓것 신경 쓸 영락제가 아닙니다. 건방진 촌놈들을 혼내주기 위해 또 이번에도 스케일 크게 50만의 군대를 동원했는데
오이라트는 도망감
......어쩔수가 없습니다. 영락제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머지 원정도 비스무리하게 돈만 왕창 나가는데, 그래도 영락제 성님의 쩌는 포스에 한동안 북원이나 오이라트나 서로 자기들 끼리 아웅다웅이나 하고 있었는데, 오이라트의 네 부족은 연합하여 오이라트 4부족 연합이 되고, 토곤 타이시가 이를 이끕니다.
보통은 토곤 칸이라고 할텐데...칭기스칸 사후에 그의 일족인 황금씨족만 이 표현을 쓸수 있었기에 칸을 보좌하던 직책인 타이시를 칭한 것입니다.
토곤 타이시는 마침내 북원을 개박살내고 몽골을 통합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그 유명한 에센 타이시죠.
포로가 되는 정통제
1406년부터 영락제는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무역을 허락하였는데, 마시(馬市)라는 형태로 교역을 하여 관례화 되었습니다. 이들로부터 말과 가축 등 그 부산물을 수입하고, 비단 등의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래는 영락제 성님의 아량 보이기 였던 말장사가, 정통제 시대쯤 되자 규모가 커지면서 오이라트, 명나라, 위구르족 이놈 저놈 끼어들며 판이 커지고 밀무역이 횡횡하고 어떻게든 한몫 챙겨보자는 놈들에 오이라트는 말 팔면서 사기까지 치고 아무튼 개판이 되어버려서 골칫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정통제의 총애를 얻고 있던 환관 사례감 왕진의 주도 아래 명나라는 오이라트 부족에 대한 무역을 제한하였고 실제 인원에 대한 조공무역만 허용했으며, 말 값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하였습니다.
오이라트는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정통제는 영락제 성님처럼 자신도 50만 대군을 동원해서 출정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정통제는 영락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이 50만 이라는 병력도....정예군도 있지만 대다수가 숫자만 모은데다, 총사령관인 황제부터가 무슨 피크닉 가는 수준으로 알고, 문신들도 데려가고...여하간 난리도 아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정통제와 더불어 지휘관이 왕진이었습니다. 환관 왕진이요.
당연히 에센이 한번 공격하니까 우르르 무너지며 50만 숫자는 왕창 헛일이 되었는데, 도망치면서 토목보라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문제는 이 요새가 물이 없습니다....
결국 완전히 망하고 통일 제국의 황제가 야전에서 포로로 잡히는 희대의 대사건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토목보의 변이었습니다.
고대의 국가라는것은 곧 왕조, 왕을 포함한 지도부가 잡혔다는것은 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수준이었기에 명나라에서는 대혼란이 벌어졌습니다. 심지어 남경으로 도망가자는 소식까지 나왔는데, 이것을 막은것이 병부시랑 우겸이었습니다.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의 예를 못보았느냐"
"북경은 천리이므로 사수하여야 한다!"
만약 저때 명나라가 진짜 남경으로 이동하고, 에센이 북경을 장악하면 이건 진짜 남송 버전 투를 찍는 일이지만은, 우겸의 이런 대처 속에 명나라는 우선 황제를 비워두면 안되기에 정통제의 동생 경태제를 황제로 삼았습니다.
명나라로서는 다행인 일은 저 남쪽에 남경이라는 대도시가 있고, 그곳에 물자등이 풍부하다는것이었는데 우겸은 이 물자들을 북경으로 끌어모으고 우주방어요새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한편, 에센도 당황한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솔직히 쳐들어오긴 했는데 에센도 일이 이렇게 잘 풀려서 황제까지 잡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던지라...황제를 잡겠다고 쳐들어왔으면 솔직히 미친놈이죠. 아무튼 좀 당황하던 에센은 이쯤되자 "한번 중국을 먹어볼까?" 하면서 정통제를 데리고 여기저기 가면서, "너희들 황제다. 항복해라." 고 하지만....
"우리 이미 황제 있는데. 저 사람 우리 황제 아니다."
에센은 열이 받을대로 받아 그럼 한번 해보자며 북경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북경과 그 인근은 무적의 요새가 되어있었는데
전통시대 동아시아 군사전문가인 피터 로지에 따르면 명나라는 중국 왕조 중에서 ‘체계적’으로 군제에 화약무기를 보급하고 적용한 첫 왕조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명군의 화력은 당시 기준으론(양적인 면을 포함해서) 오이라트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고
우겸의 준비 역시 엄청난 수준이었습니다. 우겸은 22만의 병력을 북경의 아홉개 성문에 배치했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상서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이외에도 남쪽 외성의 역할을 하고 있던 옛 금의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포진하였고, 북경성 안은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 등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22만의 대군이 성문 밖으로 나오고, 우겸은 단호하게 성문을 닫아버리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장교가 군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가면 군대가 그 목을 베고 군대가 장교를 버리고 도망가면 뒤따르던 부대가 그 목을 베라!"
그리고 창평백 양홍(楊洪)을 필두로 하여 요동의 총병관, 산동, 산서, 하남, 섬서의 각 순무들에게 원군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며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1449년 10월 11일. 마침내 에센 타이시의 군대가 북경 근처에 도달했습니다. 이 전투 결과로, 몽골을 물리치고 한족의 제국을 건설한 명나라가 다시 몽골에 눌려버리느냐, 아니면 제국으로서 위엄을 유지하느냐가 달려있었습니다.
에센은 우선 창의문을 공격했으나, 왕횡에게 패배해서 오이라트의 선봉대만 수백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여기서 명나라의 화기맛을 본 에센은 12일은 우선 머뭇거리다가, 13일에 화기 사용이 불가능해질 정도로 비바람이 몰아치자 정찰대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우겸은 한술 더떠 덕승문 쪽으로 포병대를 보내, 빈 집에 배치했습니다. 집 안에 있으니 비바람이 몰아쳐도 화기 사용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리고 에센은 유인합니다.
여기에 걸려든 에센은 무려 1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오지만...쾅! 쾅! 쾅! 펑! 우지끈!
이 전투에서 오이라트 군의 막대한 피해는 물론, 에센의 동생을 비롯한 지휘관들까지 다수 전사하는 참혹한 피해만 입게 됩니다.
에센은 멘붕에 처하며 이 문 저문을 다 공격해보지만, 가는곳마다 나오는건 무지막지한 시즈 탱크의 포격, 사방에 깔려있는 장애물들, 요소요소에서 스나이핑을 해대는 명나라 군대들. 환관들이 전공 좀 올리겠다고 설치다가 당해 한때 명군에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으나, 아무리 싸워도 이건 답이 없습니다.
북경뿐만 아니라 다른곳에 보냈던 오이라트 군대도 명군의 어마어마한 화기에 발려버렸고, 중국 전 지역에서 수십, 수백만의 지원군이 꾸역꾸역 북경으로 몰려드는 상황. 아 이거 좉되겠다 싶은 에센은 15일 결국 퇴각하였고, 이 기회를 노린 명나라는 마지막으로 화기를 사용하며 신나게 불놀이를 했습니다.
명나라의 저력이란 가공할만한 수준이었고, 에센의 상황은 밥만 먹으려던것이, 생각지도 못하게 고기가 잡히니까 구워먹으려다가 탈난 것 비슷했는데, 포로로 잡은 정통제를 어떻게든 협상의 패로 써보려고 했지만, 명나라의 반응은 단호했습니다.
"필요 없다."
이미 새로 황제가 있는데, 정통제가 와 봐야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습니다. 전전긍긍한 에센은 결국 그냥 아무조건도 없이 정통제를 풀어주게 됩니다.
이때까지 에센은 몽골을 통합하고, 북으로 바이칼 호수, 동쪽으로 만주, 신강 위구르 지역까지 장악하며 대단한 기세였지만 아직까진 그냥 "타이시" 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센은 황금씨족을 살해하고 자기가 칸이 됨으로서 이 규칙을 깨버립니다. 하지만 1년만에 부하에게 살해당해서 허무하게 죽고 말죠.
그 후로 오이라트는 다시 본래 자기들 세력으로 돌아간듯 한데, 그냥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마침 몽골쪽에서 알탄 칸이라는 희대의 영웅이 나오면서 휩쓸고 다녀 뭘 할수도 없었구요. 알탄 칸 때는 이전의 토곤, 에센 때 오이라트가 몽골을 통합했던 것처럼 반대로 통합되었다고 하기도 하는듯 합니다.
1600년대 중반에 들어 오이라트는 다시 독립을 하지만, 이 중에 오이라트의 토르구트 부족이 무슨 일인지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뭐 다툼이 벌어졌다고도 하는것 같은데 아무튼 여기에 오니까, 바로 옆에 러시아가 있습니다.
러시아는 이쪽으로 온 오이라트, 이른바 칼믹의 자치를 인정해주고, 대신 전쟁이 나면 기병대를 지원해주라고 하고 형식적인 복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1600년대 말기에 이르러 중국 본토가 뒤흔들리죠. 만주족의 깃발이 중원 천지에 나부끼게 됩니다.
그전부터 후금의 홍타이지는 내몽골을 공격했고, 이에 외몽골과 오이라트는 막강한 적의 출현에 드디어 휴전을 맺게 됩니다. 청나라의 세력이 가공할만 했기에 둘이 싸우면 죽도 밥도 안됬죠.
이전의 몽골의 알탄칸이 테브트로 군대를 진격시키고, 몽골 내부에 티베트 불교를 사방에 전파시켰는데, 그 때문에 티베트의 여러 다툼에 몽골이 매우 깊게 관여했는데 여기에 오이라트까지 참여합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오이라트의 준가르부가 오이라트를 통합하게 되죠.
이 준가르의 거물이 가르단이었습니다.
본래는 승려로 라싸에서 공부하던 가르단은 준가르로 돌아오고, 실력자가 되어 준가르를 차근차근 통합하고 세력을 확장시킵니다. 그리하여 가공할만한 음모를 꾸미는데, 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연합하여 청나라를 압박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르단은 맞수를 만나도 지나치게 만났습니다. 엄청난 인물이 그의 라이벌이었죠.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는 오배의 파벌을 제압하고 삼번을 토벌하고, 대만을 복속하고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 남진을 저지해내었습니다. 이제 남은 적은 준가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준가르가 망한것이 아닙니다. 준가르의 체왕랍탄은 다시 한번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지를 건너 티베트를 공격, 포탈라궁을 약탈하였습니다. 그러자 강희제는 군대를 보냈습니다.그런데 뜻밖의 패배를 당하자, 이번에는 아들인 14황자 윤제를 사령관으로 사천과 차이담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기어코 그들을 쫒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강희제는 7대 달라이 라마를 자신들의 손으로 세워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켜 대략의 판세를 만들었습니다.
이 체왕랍탄도 암살당하고, 이제 갈단첸링이 준가르를 이끌어나가는데 타슈겐트를 정복하는등 세력을 키움과 동시에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화기를 생산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시대는 변했고, 더 이상 유목민족이라는것이 이점이 되지 않는 때가 되는 - 역사가 변하는 모습에 조금은 서글픈 모습이 준가르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제법 세력을 부리던 준가르는 갈단첸링이 죽자 내분이 일어났고, 1755년 청나라의 건륭제는 이 지역을 장악, 준가르를 멸망시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반란이 일어나며 이들은 청나라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건륭제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합니다.
대학살을 감행한 것입니다.
대학살, 전염병 등이 겹쳐지며 준가르의 오이라트 인구는 절망적인 숫자로 줄어들었습니다. 이 땅의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서쪽으로 간 오이라트, 칼믹이 그 빈땅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잘 살고 있던 칼믹이지만, 러시아가 예카테리나 2세가 되자 칼믹에 요구하는 군사지원은 무리한 수준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볼가강 유역의 비옥한 지역으로 농민이 유입되는데 그 결과 유목지가 줄어들게 되었고, 러시아 관원들이 1700년대에 들어와서 슬슬 유입되어 오더니 1750년대에 이르러 러시아 법률을 따를 것을 요구하고 소금과 어업권을 러시아 인 들이 장악하기 시작, 이들의 경제권을 압박합니다.
이에 칼믹은 1756년 청나라의 건륭제에게 사절을 보내서 연락을 치하더니, 17771년 1월5일에 볼가강 동쪽에 집합하여 러시아를 떠나기 시작합니다. 조상들의 고향으로 귀환하는것이었죠.
모두가 이 결정에 따른것은 아니었습니다. 가기 싫은 사람도 있고, 준비가 덜 되서 못간 사람도 있고. 그렇게 남은 몇만명이 지금 러시아에 남은 오이라트의 후예입니다.
17만에 육박하는 칼믹은 걸어가기 시작했는데, 이 소식이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귀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카자흐인 키르키스인 등 칼믹에 적대적인 유목민을 선동하여 이들을 추격케하는 한편 러시아군도 추격에 나서게 합니다.
이제 절망적인, 죽음의 행군이 펼쳐집니다.
명절을 축하하던 칼믹들은 갑자기 기습을 받고 90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합니다. 다시 전열을 정비해 싸워 적을 물리치기도 하지만, 이쪽은 군대만 있는게 아니라 부녀자, 아이들까지 있으니 싸울때마다 참혹한 피해가 벌어졌습니다. 진군을 하면서도 추격을 피하기 위해 늪지를 걷고, 식량은 떨어졌습니다. 사방에 눈이 덮여 가축에게 무엇을 먹일 수도 없었습니다. 늪지에서만 3천여 명이 죽고, 바람이 끝도 없이 불고 눈이 내려 하루에 십리를 가기도 힘들었습니다.
또한 교활한 러시아군은 일부러 숲에 불을 지르기도 했는데, 겨울의 초원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타올라 칼믹들은 불에 타죽고 이를 피하기 위해 사막에 들어섰는데 그것 또한 참혹했습니다.
카자흐 기병대들은 사막까지 칼믹을 추격했습니다. 전투병들뿐으로 몸이 가벼운 그들은 보급에 여유가 있었지만 가족들이 딸린 칼믹은 아무것도 없었고, 한번 추격대에 공격을 당할때마다 많은 숫자가 죽어버렸으며, 마침내 사막을 벗어났지만 적들이 한술 더떠 초원에 불을 지르고 우물은 메우거나 독을 탔습니다. 더구나 키르기스 등 그곳에 본래 거주하던 유목민들까지 공격해왔습니다.
절망, 죽음과의 사투에서 조상들의 고향으로 돌아온 숫자는 8만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이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미 전염병이 너무 퍼지고, 체력이 바닥나고 정신적으로 반쯤 실성해버려 이를 버틸 기운이 없던 사람들은 입국 절차를 하는 동안에도 사망, 최종적으로는 7만명 가량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관리 서혁덕은 그 참혹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투항한 자들을 살펴보니 노약자나 부상자,아녀자들이 많았는데 ,너나 없이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들이 우리주둔지로 들어온 후 모두들 통곡하고 애원할 따름 었습니다 .그들의 참혹하고 궁핍한 모습을 보면서 실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옷이 제대로 없었으며 ,그나마 입고있던 옷도 다 찌져지고 아이들은 아예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도 부지기수 입니다 , 도중에 극도의 기아에 허덕였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고기를 포식한 후 온몸에 열이 나자 물로 뛰어 들어 배가 불어 죽거나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소수민족들 많은 위구르에서도 또 소수민족은 그들은 저기서도 이리치우고 저리치였습니다. 무슬름 위구르 독립 운동가였던 야쿱 벡이 있었을때 위구르에게도 치이기도 했지요.
http://gall.dcinside.com/list.php?id=samgugji&no=294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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