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제위 61년 기간동안
내치와 외치에 성공하여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다.
그는 대만의 정씨 세력과 삼번의 난을 제압하여 실질적인 중국통일을 이룩했다.
그 뿐만 아니라, 만주쪽으로 침투해 온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고 오히려 북쪽으로 영토를 더 확장했다.
또한 티벳과 외몽골,정벌하여 서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오늘날의 중국이 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내치에도 신경을 써서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여 수천년동안 정체되었던 인구를 폭발적으로 증가
시켰으면, 세금을 늘리지 않는 것을 정책으로 삼아 백성들의 부담을 감소시켰다.
이 밖에 여려가지 업적으로 쌓아 많은 학자들은 청나라 강희제야 말로 역대 중국 황제들중
최고의 황제였다고 추켜 세웠다. 당태종이나 당현종 명 영락제, 원세조 보다도 청강희제가
한수 위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렇게 완벽할 것 같았던 청나라 강희제도 오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후계자 문제였던 것이다.
강희제는 여진족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 왕조들의 전통에 따라 황후가 낳은 정실 아들을 2살때
태자로 삼아 후계자 수업을 받게 했다.
항상 자주 원정이나 사냥터로 데리고 가거나 최고의 학자들을 선발하여 이들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우게 하여 문무를 겸비한 황제로 성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심지어는 정무에 바쁜 와중에도 손수 그가 태자의 교육에 참가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했다.
외몽골 원정 같은 여러 많은 정벌전에 손수 참가했을때 태자를 섭정으로 삼아 통치를 맡기기도 할
만큼 태자에 대한 강희제의 기대는 매우 컸다.
그렇지만,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다. 이렇게 완벽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태자는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기대만큼 부응하지 못했다.
자질이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심적인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태자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면서 방탕한 생활에 빠졌고, 여러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심지어는 주변 사람을 꼬드켜 쿠테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결국 강희제는 참고 참았던 인내를 버리고 태자를 폐하고 자신의 후계자 문제에 대해 일체 논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는 초강수를 두었다. 태자는 자금성 어느 구석진 궁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이게 역효과가 났다. 태자는 강희제의 2번째 아들이었는데 강희제의 다른 아들들이 태자 자리를
노리고 권력 다툼을 벌였던 것이다. 맏아들과 8번째 아들, 14번째 아들이 눈에 띌 만큼 세력을 크게
형성하여 권력 싸움을 하면서 많은 신하들이 여러 세력으르 나누어 부화 뇌동을 했다.
국정이 혼란해지자, 강희제는 임시조치로 태자를 복원시켰지만
아들들의 후계자 싸움을 갈수록 심해져 효과가 없었고 태자 또한 예전의 바탕한 세월로
돌아가 결국 강희제는 끝모를 수렁에 빠졌다.
강희제는 태자를 폐했고 마침내 밀지를 통해 차기 황제를 정하고 죽을때 공개하는 제도로 후계자문제를
봉합했다. 아들들의 후계자 타툼을 멈출 수는 없었지만, 부황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했기 때문에 나쁜 판단은 아니었고 후에 이 제도는 태자 밀건법이
명명되어 청나라 후계자 승계 정통이 되었다.
그럼 강희제가 누굴 자기의 후계자로 삼았을까?
사실 강희제는 4번째 아들과 14번째 아들 사이에서 고민을 하였다.
이 두사람이 그래도 아들들 중에 제일 낫기 때문이다.
4번째 아들이 14번째 아들보다 능력이 뛰어났지만 14번째 아들은
자기와 꼭 닮아 문무를 겸비했고 자신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고민 끝에 14번 아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려고 했지만, 마지막에서 망설였다.
그것은 손자문제였다.
14번째 왕자에게는 똑똑한 아들들이 없었다.다음 황제자리는 그 아들이 잘 하겠지만, 그 아들에 아들이
집권하면 또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손자때까지는 청제국이 번창하기를 바랬다.
그것에 비해 4번째 아들은 똑똑하고 영민한 아들 홍력이 있었다.
강희제는 손자 100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손자 홍력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얼굴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것 까지 닮았다.
자신의 노년에는 손자 홍력을 교육시키는 맛에 인생의 재미를 느꼈다.
자신이 유일하게 훈육을 한 손자는 홍력밖에 없었다.
결국 강희제는 홍력을 염두에 두고 14번째 아들을 버리고 후계자를 4번째 왕자 윤진으로 정했다.
어차피 4번째 아들 윤진에게는 제대로 된 자식이 없어서 홍력이 결국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4번째 왕자가 황제가 된 다음의 후계자 문제까지는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되었다.
강희제는 62년이라는 오래 제위기간을 보내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때까지 강희제가 누굴 후계자로 할까 말이 많았지만, 다들 4번째 왕자에게는
눈이 안 돌아갔다. 14번째 아들이나 8번째 아들 둘중에 한명이 되겠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강희제가 죽고 유력한 신하 여러명과 아들 일부가 참관하는 자리에서 강희제가 남긴 밀지를
공개되면서 4번째 아들 윤진이 공식 황제가 되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말이 많았다.
4번째 아들 윤진이 황제가 올라(옹정제라 칭함) 13년동안 국정을 다스릴때
옹정제가 강희제를 시해하고 밀지를 조작하여 황제로 올랐다는 소문이 궁궐은 물론이요 민간에
까지 퍼졌다.
심지어는 옹정제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해녕 진씨의 아들하고 바꿔치기 하여
그 진씨 아들이 바로 홍력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은 옹정제가 정당하게 황제 자리를 올랐으면
홍력 즉 건륭제도 옹정제의 친자 라는게 맞아서 당시 이런 괴소문들은 단지
괴소문이라고 주장했다.
어째든 옹정제는 황제 자리에 무관했지만, 아들을 잘 둔 덕에
무관했던 황제에 오른 행운을 얻었다. 여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역대 황제들은 자신의 후계자에만
신경썼지 그 후계에 후계에는 신경을 안 썼지만, 강희제는 손자때까지 눈여겨 봤다는 것이다.
강희제의안목 때문에 그의 사후 청나라는 70-80년동안 계속 전성기가 지속되었다.
'역사 ,세계사 > 중국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명나라와 청나라를 위협했던 유목 집단, 오이라트 (0) | 2012.10.08 |
---|---|
[스크랩] 중국의 식인풍습이 현대 중국인 사회에 끼친 영향 - 교문각 발행 중국의 식인문화(요약) (0) | 2012.10.08 |
[스크랩] 280년간 중국을 지배한 민족 - 만주족 (0) | 2012.10.08 |
[스크랩] `문화대혁명`(문혁)을 알아야 중국이 보인다 (0) | 2012.10.08 |
[스크랩] 당나라에 맞서 싸웠던 남조와 기타 중국 서남부 이민족들의 전쟁사 (0) | 201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