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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 왜 그리 무기력하게 망했나?

구름위 2016. 1. 23.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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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 왜 그리 무기력하게 망했나?

 

'망국', 나라를 잃는다 함은 왕조국가 조선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100년 후의 우리에게 그 왕조국가 자체를 아까워하는 마음은 별로 없다. 망국 10년도 안 되어 독립운동의 주류는 대한제국의 복벽에서 대한민국의 건설로 옮겨왔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왕조국가가 당시 한민족의 가장 큰 상징이었고, 한민족 사회의 전통 질서를 집약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상징으로서 왕조의 멸망은 이민족 지배의 계기였고, 제도로서 왕조의 멸망은 전통 질서의 단절이었다.
망국 단계 이전 왕조의 퇴화 현상을 먼저 살펴본다. 왕조 전기의 정치사회 제도는 중국에서 도입된 유교 정치 이념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 것이었다. 농업 사회의 안정과 번영에 극히 유용한 유교 정치 이념은 11세기에서 18세기까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권이 세계 최고 최대의 문명으로 발전하는 데 공헌했다. 한국 사회는 14세기 말 조선 건국을 즈음해 이 문명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수백 년간 높은 수준의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의 망국은 그 사이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적응 실패의 문제를 살핌에는 새로운 상황의 요구 내용을 파악하고 기존 체제가 이 요구에 제대로 부응했는지 따지는 쪽으로 시선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시대적 요구인 '근대화'의 과제에 어떻게 임했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매우 유효한 관점이다. 그러나 근대화 과제의 내용을 후세 사람의 기준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음미하는 데는 시야의 한계가 있다. 변화 주체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관점이다. 망국 과정에 대한 연구와 고찰이 이 관점에 지나치게 쏠려 온 데 아쉬움을 느낀다.
조선 왕조 아래 한국 사회가 누린 안정과 번영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높은 수준이었다.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체제였다. 성공적인 체제라면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날 것을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동력도 쉽게 찾을 수 있고 변화에 대한 합의도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론에서 후진국이 선진국을 추월하는 현상을 근래 많이 살피게 되었다. 아브라모비츠의 캐치업(catch-up) 이론에서 말하는 사회 역량(social capabilities) 같은 무형적 자산이 갈수록 각광받고 있는 것도 그런 현상의 일부다. '근대적' 질서와 다른 종류의 질서라도 나름대로 수준 높은 질서는 사회 발전을 뒷받침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무형적 자산이 각광받게 되는 상황 자체가 지금의 탈근대(post-modern) 추세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근대적 발전의 의미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을 때는 활용될 길이 없던 문명 역량이 새로운 발전의 의미를 추구하는 단계에서는 요긴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의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는 노력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전통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시각은 극단적 부정에서 극단적 긍정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쪽으로 많이 편향되어 있다. 일본의 식민주의 관점과 함께 근대 유럽의 독선적 문명관으로부터 20세기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압력과 충격을 받은 결과다. 그리고 이 관점이 대한민국의 특권 구조 유지에도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편향성의 보정이 지체되고 있다. 뉴라이트가 전통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지금 단계에서는 극단으로 치우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긍정의 관점을 시도하는 것이 편향성 보정을 위해 필요한 일 같다. 이 시대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기반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이 시대의 윤곽에 대한 어렴풋한 파악을 근거로 해서라도 새로운 시각의 제시에 나설 필요를 느끼는 것이 그 때문이다.
내가 파악하는 윤곽이란 이런 것이다. 조선 왕조의 성립 과정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문명 질서가 한국 사회에 자리 잡았다. 수준 높은 질서인 만큼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질서가 왕조 중기 이후 꾸준히 퇴화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19세기 중엽까지 적응력이 매우 약한 상태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해서는 진로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역량을 거의 발휘하지 못한 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항기의 상황만을 놓고 볼 때 한국 사회의 대응은 매우 무기력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학계에서 그나마 평가받아 온 대응이란 전통의 가치를 부정하고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는 '개화'였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는 노력은 '수구'로 폄하되었다. 어느 사회의 어느 변화에서도 전통을 등지는 개화는 '자기 부정'이라는 정체성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개화의 성공은 바로 식민지화를 향하는 길이다. 어떤 형태의 식민지화든.
개항기의 무기력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다. 20세기를 통해 한국 사회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그 발전은 국가 체제가 이끌어준 것이 아니라 '사회 역량'의 자발적 발현에 의한 것으로 나는 본다. 그 역량이 개항기에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작용했음을 확인한다면 그 역량의 존재를 확인하기 쉬울 것이다.
이 사회 역량의 실체를 표현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정신으로 일단 생각한다. 이 정신이 정치 체제에 나타난 모습이 근대 정치 사상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라 할 것이다. 자유주의-개인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어느 사회에나 재력과 무력과 정보력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유력 계층('엘리트 계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도덕성이 전제가 되는 것이 통념이므로 보다 중립적인 표현을 쓴다)과 그렇지 못한 무력 계층이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는 자유의 범위를 명시적으로 제한하지 않더라도 유력 계층이 자유를 집중적으로 누린다. 무력 계층을 억압할 자유를 포함해서.
중국에서 발원한 유교적 신분 질서는 유력 계층이 실력을 키우고 휘두르는 길을 제한하는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생산에 직접 공헌하지 않는 유력 계층의 역할을 억제함으로써 무력 계층에 대한 억압을 최소화하는 이 특성이 중국과 한국 농업 사회의 특출한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이 질서의 제도적 핵심은 권력의 공공성에 있었다. 19세기 말 유럽 사회과학자들이 '전제주의(despotism)'란 말을 동아시아 전통 사회의 전매 특허품처럼 쓴 이래 근대인의 통념이 되었지만, 유교 정치 질서의 원리가 결코 '전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근래의 연구로 충분히 밝혀져 왔다.
조선 후기 유교 질서 퇴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권력의 사유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권력의 공공성은 사회 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한 필수적 기반 요소다. 권력의 사유화는 광해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상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정조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성격을 가진 권도(權道) 정치를 시도했다. 이 시도가 좌절된 후 19세기의 조선은 권력의 공공성이 완전히 증발되어 버린 상황을 보여주었다.
균형과 조화의 매체인 권력의 공공성과 유력 계층의 역할을 제한하는 도덕 정치의 원리가 조선 시대 대다수 한국인에게 사람다운 삶을 보장해준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소의 퇴화가 19세기의 변화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을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몽골에 항복한 고려 vs 일본에 굴복한 조선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바닥에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사랑을 깔고 본다는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소속 사회에 대한 사랑 없이 역사를 본다는 것이 무의미한 행위라는 문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행위가 어떤 입장에서 이뤄지는가에 따라 사랑을 드러내는 방법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개인적 행위라면 사랑의 표현 방법에 아무런 제약도 필요 없다. 반면 공공성을 가진 연구 작업에는 사랑의 감정이 개입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감정 개입 없이 얻어낸 연구 결과가 자연스럽게 일으켜주는 감정이라야 안정성을 가진다. 감정을 앞세워 연구 결과를 얻어낸다면 그로부터 일어나는 감정은 일방적이고 소모적인 것이 되기 쉽다.
다수 독자를 위한 역사 서술은 그 중간이다. 연구 작업처럼 감정의 개입을 철저히 삼갈 필요까지는 없지만, 표현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물론 서술 목적에 따라 절제의 수준에 편차가 있다. 절제가 강한 서술은 독자의 감정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절제가 약한 서술은 필자의 감정을 독자에게 이입한다. 절제가 강할수록 지적 생산력이 큰 서술이 된다.
조선의 망국 과정에 관한 연구에는 감정을 앞세우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망국이란 주제가 분노, 치욕, 안타까움 등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향은 '민족 사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지금은 그런 경향이 억제될 필요가 있다. 민족 사회가 극히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조금 억지라도 쓸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민족의 위상에 자신감이 많이 자라난 지금 시점에서는 억지를 될 수 있는 대로 줄일 필요가 있다. 자신감이 큰 사회에서는 다양한 합리적 관점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독단성이 너무 강한 민족주의는 사회의 통합보다 분열에 이바지하기 쉽다.
조선 망국의 원인이 전적으로(또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의 침략 야욕에 있었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들 중에도 있다. 이 시대를 연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나는 연구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할 입장이 아니다. 연구자들이 제공한 연구 결과를 갖고 힘닿는 대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내 몫이다. 그러나 조선 망국의 내재적 요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마치 어두운 골목에서 '퍽치기'라도 당한 것처럼 봐서는 '망국'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1259년 고려가 근 30년의 항전 끝에 몽골족에게 항복한 것도 일종의 '망국'이었다. 1637년 조선이 만주족에게 항복한 것도 '망국'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 한민족은 정체성에 다소간의 손상을 겪었지만 결국 극복해 냈다. 1910년의 '망국'은 과연 어떤 위협을 가져왔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데 부적절한 애국심의 지나친 개입이 장애가 된다. 위기의 성격이 파악되지 못한 채로는 극복도 있을 수 없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덮친 서양 근대 문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보다 힘과 덩치가 훨씬 더 큰 중국조차 그 위세 앞에서 1840년경부터는 자세가 흔들리고 1860년경부터는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굳건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더라도 정체성의 큰 훼손과 그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수가 덮친 상황을 떠올려 보자. 어떤 구조물도 파괴를 면할 수 없는 큰 홍수가 덮친 상황을. 어느 누구도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자세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죽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니다. 모두 고생을 겪고, 더러 죽거나 다치기도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목숨을 지키고, 생활 방식을 바꿔서라도 새로운 조건에 적응한다.
홍수를 당한 사회의 조직, 특히 그 지도부의 대응 방식에 따라 피해 양상에 큰 차이가 생긴다. 지도부가 자기네만 살겠다고 민중의 피해를 외면함으로써 불신을 살 경우 피해가 극대화됨과 동시에 조직이 무너져버리고, 민중의 신뢰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피해도 줄고 조직도 살아남을 수 있다.
13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몽골 정복은 고려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무신 정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항복 후의 고려가 민족과 국가의 뼈대를 지키며 발전의 길을 찾은 사실에 비춰보면 오히려 무신 정권의 지도부 역할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양 근대 문명의 침공도 조선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대응 방식에 따라 피해의 규모를 줄일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대응의 1차 주체인 왕조국가의 대응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골절상 정도로 겪어낼 만한 충격 앞에서 민족 사회가 사경을 헤매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우리 민족 사회는 이 부상에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의 분단 상황을 필두로 양쪽 국가의 구조적 문제들 중 100년 전의 충격에서 유래하는 것이 많이 있다.
분단을 비롯한 제 문제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극복은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극악한 상황을 조만간 벗어나더라도 민족 사회의 제 문제를 획기적으로 극복할 길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답답한 상황이 우리가 근대적 가치관에 묶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통의 가치를 외면한 채 뿌리 없는 근대적 가치만을 쳐다보고 있는 한 서로 상치되는 근대적 제 가치의 갈등을 뛰어넘는 길이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을 모델로 한 경제 발전과 미국을 모델로 한 정치 발전에 한계를 느낀다면 이제 '우리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나친 애국심에 휘둘리지 말고 망국의 상황을 좀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볼 것을 내가 주장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망국 과정에서 전통 질서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일차적으로 왕조 체제의 퇴화 때문이었다. 전통의 가치 자체가 부실한 것이어서가 아니었다.
홍수가 닥쳤을 때, 사회 전체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개인의 더 큰 피해를 감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로 혼란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노리며 사회의 피해를 더 크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새로운 상황에서 공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고 사익만을 좇는 사람들이 사회를 계속 좌지우지한다면 그 사회는 홍수의 피해를 극복하기는커녕 홍수 자체의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공익을 받든 사람들의 노력이 좌절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좌절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노력이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폄하해서는 그와 같은 방향의 노력이 지금 다시 일어날 길마저 막히고 만다. 조선 왕조의 국가 기능이 얼마나 퇴화된 상태였는지 밝히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첫 열쇠다.

 

 

 

부자가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는데…조선은 왜?

 

지금 유엔에는 192개 국가가 가입해 있다. 남극 대륙을 비롯한 약간의 특수 지역을 제외한 지구상의 육지 모두가 이 192개 국가의 영토로 나뉘어 있다. 전 세계가 배타적이고 평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로 분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예외를 빼고는 각 국가의 영토가 하나씩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빚어진 상황이다. 100년 전에는 주권국가의 영토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가 더 많았다. 그리고 200년 전에는 '국가'라 부를 만한 정치 조직을 가지지 않은 지역과 주민이 더 많았다. 300년 전에는 유럽에조차 오늘날 통용되는 국가의 개념이 적용될 만한 곳이 몇 안 되었다.
국가는 고대 세계에서 만들어진 제도다. 외적 규범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다. 국가의 요건을 결정하는 일반적 기준도 없었다. 다만 같은 문명권 안에 여러 개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이 되면 상호 교섭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다소간의 프로토콜이 형성되었지만, 각 국가의 내부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자연 발생적 정치 조직으로서 국가의 기본 기능은 국내 질서의 유지였다. 그런데 근대로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국제 경쟁의 주체로서 기능이 더 큰 국가들이 나타났다. 14세기 후반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격감을 계기로 기존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여러 방면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역 간의 경쟁이 심화된 결과였다.
항해 활동, 식민지 획득에서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지역 간 경쟁이 장기화되고 일상화되면서 경쟁에 적합한 정치 조직 형태가 우승열패의 과정을 통해 좁혀졌다. 그것이 민족국가를 틀로 하는 '근대국가'였다. 특히 19세기 산업화 단계에서 국가의 기능이 극대화되어 '국가주의' 시대를 열었다.
19세기는 원자론의 시대이기도 했다. 19세기 벽두에 돌턴이 발표한 원자론은 자연 정복을 꿈꾸는 자연과학 숭배의 절정을 가져왔다. 똑같은 원자들의 조합 속에서 물질의 궁극 원리를 찾아냈다는 환상이 정치 사상까지 휩쓸었다. 사회를 독립적 개인의 물리적 조합으로 보는 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국제 관계도 세계를 배타적 주권국가들의 물리적 조합으로 보는 만국공법 체제가 대세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산업화의 확장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경쟁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승패의 결정적 열쇠는 근대국가의 효율성에 있었다. 독일처럼 급조된 국가라도 근대적 효율성을 갖추면 강자가 되었고, 러시아처럼 오래된 국가라도 그러지 못하면 약자가 되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쳤다.
전근대 국가에 비해 근대국가는 '공동사회'(Gemeinschaft)보다 '이익사회'(Gesellschaft)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공동사회의 원리를 고도로 구현한 유교 정치 질서는 이익사회로의 전환에 특히 강한 저항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중국과 한국보다 일본이 적응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일본에도 이익사회화에 대한 저항이 있었지만 인접국들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국가 건설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다.
공동사회 성격의 국가에서는 권위와 권력의 분리가 관념상 용납되지 않았다. 아무리 군주가 무능하고 조정이 부패했더라도 군주와 조정을 통하지 않는 개혁 시도는 최악의 범죄, '대역(大逆)'이었다. 공화제도 입헌제도 긴 세월을 통해 농업 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 준 문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천황의 권위와 막부의 권력 사이의 분리를 경험해 온 일본에서는 전통의 저항이 덜했다.
중국과 한국의 권위주의적 유교 정치 질서에는 주기적 왕조 교체가 불가피했다. 도덕적 권위가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위의 재생산이 힘들었고, 권위의 발판 위에 권력이 운용되었기 때문에 권위의 손상이 권력의 쇠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왕조의 권위와 권력이 쇠진하면 왕조 교체를 통해 권위와 권력을 일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19세기의 청나라와 조선은 왕조의 말기 상황에 빠져 있었다. 조선이 청나라보다도 더 심했다.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엘리트 계층은 사회의 보전을 위해 노력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이런 노력의 대부분이 '근왕(勤王)'의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군주와 측근 세력은 이 노력을 권력 사유화의 심화에 이용하기만 했다.
'서세동점'의 모습으로 닥쳐온 세계적 '근대화'의 물결 앞에 동아시아 전통의 흐름은 큰 굴절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십 년만의 큰 홍수 앞에 논밭을 지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논밭이 떠내려가더라도, 복구 노력에 힘을 잘 모으는 사회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반면,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힘을 모으지 못하는 사회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인주의를 억제하는 유교 정치의 전통은 한국 사회에 닥친 충격을 완화하고 극복을 쉽게 해줄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었다. 이 전통을 앞장서서 짊어지는 것이 유생층과 그에 기반을 둔 관료층이었다. 조선 망국의 날까지도, 그 이후에도 이 전통을 짊어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뜻이 의병과 자결보다 더 효과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은 그 뜻을 집약해 구현해야 할 왕조 체제가 퇴화해 있기 때문이었다.
1905년 보호조약을 맺을 때 의정부 8대신 중 확고히 반대한 것은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당시 대신의 대부분은 정상적 유교국가에서 고급 관리가 필요로 하는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고종 즉위 전, 안동 김 씨 세도정치 하에서도 이런 인물들을 대신으로 줄줄이 늘어앉힌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종 치세를 통해 조선 정부의 탈유교화가 꾸준히 진행된 결과였다.
유교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500년 동안 조선 크기의 나라가 그만한 안정을 지켜왔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드문 일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질서의 인프라를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인프라가 조선 시대를 통해 유가 이념으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에 망국에 임해서도 한국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유가 이념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유가 이념보다 더 일반적이고 현대인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엘리트 계층의 도덕성'이라 할 수 있다. 완력이든 재력이든 정보력이든 남들보다 힘을 더 가진 유력 계층일수록 사회를 보호하는 데 책임감을 느끼는, 공익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억지로 강제되는 도덕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추세다. 소속한 사회가 보전됨으로써 가장 큰 혜택을 얻는 것이 유력 계층이기 때문이다.
유력 계층 구성원들이 공익을 중시하는 도덕성을 잃고 사익에만 매몰됨으로써 자원이 낭비되고 신뢰가 무너지면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겪는 손해가 개인의 이익보다 더 크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아주 약간의 이익을 볼 뿐이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집단의 손실을 초래하는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다.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질서의 인프라가 죄수의 딜레마를 면하게 해줄 수 있는 자원이었다.
100년 전의 망국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죄수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토를 황폐하게 만드는 4대강 사업, 결선투표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 등 누구나 필요를 인정하는 대의민주주의 개혁의 방치, 그야말로 소수 집단에게조차 이익이 안 될 남북 대결 정책 집착 등, 대한제국 지도부를 방불케 하는 퇴행적 행태가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보다 식민지가 되던 '과정'을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때고 지금이고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1차적 요인은 힘 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때고 지금이고 힘 있는 사람들 중에 공익을 중시하고 사회를 보호하려 애쓴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왜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가, 그때의 사정과 지금의 사정을 나란히 살핌으로써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하는 데는 적극적 자기희생으로 의병과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의 몫도 있지만, 스스로를 보통사람으로 여기며 소박한 원칙과 자연스러운 상식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몫이 더 크다. 이민족의 지배를 피하고 싶어 하던 그 많은 사람들의 소망이 어째서 어그러졌는가? 국가 부채가 자꾸 늘어나고, 자연 환경이 파괴되고, 민족 문제 해결이 지체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 오늘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100년 전의 실패를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중국도 부러워했던 일본…한국은 도대체 왜?

 

19세기 후반의 조선인은 어떤 시대적 과제를 생각하고 있었을까?

 

범위를 좁혀서, 대원군 집정기(1864~73년)에 지식층의 인식은 어땠을까?
19세기 전반기 내내 조선 정치를 지배한 세도 정치의 폐단이 당시 지식층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다. 유교 교양을 갖춘 지식층에게는 유교 정치 이념에서의 일탈을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중세사회 해체 같은 문제는 나라꼴만 바로잡히면 저절로 해소될 일상적 문제 정도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대원군의 정책 중 조세 개혁은 부패의 척결에, 경복궁 중건과 공포 정치는 왕권 회복에 목적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교 국가 질서 회복의 의미가 큰 방향들이다. 서원 철폐는 특권 구조의 청산으로서 같은 방향으로 더 적극적 의미를 가진 정책이었다. 대원군의 개혁은 기본적으로 유교 국가의 중흥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대외 관계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 내내 대외 관계의 거의 전부가 중국과의 관계였던 상황이 고종 즉위 직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제2차 중영전쟁으로(1856~60년) 북경이 유린당하면서 대외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일어났고, 열강들이 조선을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조선에 대한 직접 압력은 크지 않은 단계여서 대원군은 쇄국 정책으로 차단시켜 놓은 채 국내 개혁을 계속했다.
대원군의 개혁은 상당한 가시적 성과를 거둔 데 비해 지식층의 호응을 통한 개혁 세력의 확장에는 실패했다. 개혁이 강압적 수단에 의존하면 독선적이고 편의적인 경향에 빠져 개혁 이념의 발전을 기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 세력의 성장과 확대가 불가능하다. 드러나 있던 개혁의 명분을 권력 투쟁에 이용하는 데 그치고 만다. 이념의 발전이 없으니 개혁을 위해 끌어 모은 세력 속에서 확보해 놓은 권력을 놓고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민 씨 세력은 그래서 대원군 세력으로부터 분화되어 나온 것이었다.
1870년대 들어 일본의 조선 진출 노력 강화에 따라 쇄국 정책이 한계를 보이면서 대원군의 실각을 재촉했다. 그러나 조선 지식층의 '개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은 아직 미미했다. 당시 조정의 개화파 지도자이던 박규수만 하더라도 서세동점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도 '수시변통(隨時變通)' 정도의 조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해의 1차 수신사 이후 4년 후에야 2차 수신사를 일본에 보내게 된다.
1876년 이후 일본의 바뀐 모습을 보며 개화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이 확대-심화되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에도 진지한 관심이 일어났다. 개혁의 명분이나마 내걸었던 대원군 정권보다도 퇴행적인 민 씨 정권 아래 유교 국가 중흥을 위해서라도 비상한 수단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일본과 청나라의 문물 발전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겹쳐졌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이 주목받고 이듬해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중국에 보내면서 조선에 '개화'의 이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개화의 목적에 대해서는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을 둘러싼 민 씨 세력은 개화에서 이권과 군사력이라는 피상적인 이득만을 취하려 했다.

 

핵심 인물 민영익은 이런 입장에서 일시 개화파의 영수처럼 떠오르기도 했다.
관료-지식층에서는 그보다는 개화의 의미를 넓고 깊게 보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움직임에도 개화를 권력 추구의 수단으로 여기는 경향이 곁들여졌다. 급진 개화파의 갑신정변에서는 그런 경향이 강했다. 온건 개화파가 일본 메이지유신보다 청나라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은 것은 권력 구조의 변동을 추구하는 급진 노선이 권력 쟁탈의 도구로 이용당할 위험을 꺼린 데도 큰 이유가 있었다.
한편, 대원군 세력은 일반 국민의 개화에 대한 반감과 변화에 대한 불안감에 편승해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1882년 임오군란 시점의 대원군은 1874년 이래 권력 탈환에만 집착하면서 시대 상황에는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최소한의 상황 관리 능력도 청나라 측의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반일'을 표방하면서도 축출되었다. 당시 청나라 외교를 장악하고 있던 양무파에게는 '반일' 여부보다 개혁 거부가 더 심각한 문제였다.
청나라의 임오군란 개입은 조공 관계를 명분으로 한 것이었지만, 원론적 의미에서는 천하 체제를 스스로 부정한 행위였다. 조선의 상황을 단기적 이해관계에 활용하려는 양무파 정책은 전통 체제를 포기하고 일본과 같은 차원의 경쟁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이로써 천하 체제를 배경으로 전통 체제의 회복을 지향하던 온건 개화파가 입지를 잃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 양측의 입지와 명분이 모두 훼손된 상황에서 개화 이념 발전의 길이 막힌 채 민 씨 세력의 피상적이고 편의적인 개화만이 진행되다가 청일전쟁을 맞았다. 이로써 촉발된 갑오개혁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조선 지식인-관료층의 주체적 개화 노력이 적극적으로 발현된 사례였다. 그러나 권력 쟁탈전의 양상이 곧 되살아나고 일본의 대 조선 강경파가 책동해서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이 연이어 일어남에 따라 조선 지식인-관료층의 정치적 역할이 사라져 버렸다.
19세기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근대화'가 지상 과제였다고 지금의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는 이 과제에 대한 인식이 '개화'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생각은 당시 상황을 두루 살펴봄으로써 얻은 것이지만, 이후의 역사 진행에 좌우된 측면도 있다. 1930년대에 군국주의 문제가 불거질 때까지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유일한 동아시아 국가로 간주되었다. 조선 지식층이 1876년 개항 때부터 일본을 개화의 유력한 모델로 인식하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청일전쟁의 진행을 목격하면서 일본이 권하는 개화를 절대적 기준으로 받아들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개화의 필요성은 조선에서 중세사회의 해체라는 내부적 변화보다 외부 변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인식되었다. 내부적 문제는 개화와 관계없이 왕조 체제의 유교 질서만 회복되면 당연히 해결되리라는 것이 1894년까지의 일반적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개화를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들면 저절로 해결될 부수적 문제로 보았다. 내부적 위기와 외부적 위기를 구조적으로 결합하는 인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개화 정책 중에는 물론 내부적 변화를 꾀한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변화 결과가 좋아보여서 그대로 모방할 뿐, 조선 자체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려는 노력은 별로 없었다. 그러니 겉보기 변화는 따라 하면서도 '권력의 사유화'라는, 근대적 기준과 전통적 기준 어느 쪽에서 봐도 국가 구조를 악화시키는 변화가 대한제국까지 계속된 것이다.
조선 말기의 개화 운동은 내부적 변화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목적의식이 박약하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의미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지던 실학의 현실 인식 노력이 개화 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한 것이다. 19세기 세도 정치가 정치의 수준을 너무 떨어뜨려 놓아서 사회경제 현상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1868년의 대정봉환에서 1889년의 헌법 발포까지 20여 년 동안 외부 상황에 크게 휘둘리는 일 없이 새 국가 체제 건설의 길을 주체적으로 모색해 갔다. 그 과정에서 일본 자체의 사회경제 조건이 근대국가 건설의 기반 조건으로 검토되었다. 일본의 개화는 일본에 적합한 근대화의 길로서 시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었음에 반해 조선의 개화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소극적인 '선택'의 대상일 뿐이었다.
일본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를 가르는 이유로 나는 두 가지를 중요하게 본다. 첫째는 일본이 먼저 그 길을 갔기 때문에 조선이 그 길을 독자적으로 찾아갈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판자촌의 한 집에 불이 나면 옆집에서 따로 불이 나기 전에 옮겨 붙게 마련이다.
서양 열강들은 조선에게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중 가장 이해관계가 컸던 러시아에게도 부수적인 의미에 그쳤다. 오직 일본만이 조선에 거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조선을 그냥 놔두지를 못했다. 그 때문에 조선은 일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진로 모색의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또 하나 이유는 조선의 유교 정치 체제가 안정적 틀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푹푹 썩기는 했어도 틀은 멀쩡했다. 일본은 수준 낮은 정치 체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근대 유럽이 제시하는 틀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이 적었던 반면, 조선에게는 수준 높은 질서 체제로부터 약육강식의 미개한 틀로 내려오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유교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던 중국은 어떠했는가. 조선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버린 단계에서는 신문화운동이라는 주체적 반성의 기회를 가졌다. 그 후 중국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놓고 좋고 나쁘고를 평할 기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지금의 중국이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자기 장래를 남의 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역량으로 헤쳐 나갈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자세의 근거가 191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1900년대에 강유위, 양계초 등 중국의 개혁가들은 일본을 부러워해 마지않았다. 거꾸로 1950년대의 일본 좌파 지식인들은 전쟁 가해자의 길을 걷지 않고 공산국가를 이룩한 중국을 부러워했다. 그 후 문화대혁명의 질곡에 빠진 중국인들을 번영 속의 일본인들이 동정했으나, 지금은 다시 부러워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은 1910년 이후 어느 때도 의미 있는 상대로부터 부러움을 산 일이 없다.

 

 

 

"대한민국은 아직 독립국이 아니다"

 

100년 전의 '국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에는 허점이 많다. 일본의 야욕에 의한 대형 범죄라는 것이 표준적 인식의 골자인데, 그 범죄 행위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해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을 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이 사건이 민족사회의 발전을 위해 다행한 것이었다는 상식에 역행하는 해석까지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간으로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하자. 여자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의 존재를 고맙게 여기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해서 강간한 남자에게 꼭 감사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그 출생 배경으로 인해 아이가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에 대해서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독수(毒樹)에는 독과(毒果)만 열린다 하여 강간으로 얻은 원치 않는 아이를 없애버릴 수도 있지만, 일단 생겨난 아이를 하나의 생명으로 존중하고 아끼는 것도 훌륭한 태도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연꽃이 더러운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것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폭력에 의해 잉태된 아이가 축복받은 환경에서 잉태된 아이보다 잘못된 길로 자라날 위험이 크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더 조심스럽게 키울 필요가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이 '근대화'다. 어둠 속에서 잉태된 불륜의 씨앗이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진다는 <맥베스>의 대사처럼 폭력 속에 잉태된 조선의 근대화가 강인한 체질을 보이는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그 강인한 체질을 잘 살리라고 아이를 폭력적 성격으로 키워내는 것이 잘하는 짓일까? 어미가 만족을 얻고 아이가 행복을 얻는 길일까?
아이가 사회 속에서 좋은 역할을 맡으며 행복하게 살고, 그럼으로써 어미가 낳고 키운 보람을 거두기 위해서는 아이의 소질과 능력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하는지도 판단해야 한다.
폭력에 유린당한 경험을 가진 인간은 폭력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일이 폭력으로 결정된다는 관점에 빠져 폭력을 숭상할 수도 있고, 폭력의 해악을 뼈저리게 느껴 평화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낄 수도 있다.
어느 사회에나 두 가지 태도가 병존한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나는 폭력보다 평화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더 일반적 성향이고, 상황에 의해 휘몰리는 일이 없다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평화적 성향을 보이리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상황은 많은 사람들을 폭력적 성향으로 휘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셤 법칙과 같은 형태의 현상이다. 폭력의 확산 특성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미꾸리 한 마리가 온 개울물을 흐려 놓는" 것처럼 폭력을 숭상하는 소수가 사회를 폭력으로 흐려 놓으면 평화적 성향의 사람들도 자기방위를 위해 폭력을 쓰는 일이 잦아지다가 폭력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폭력의 확산 억제는 인류 문명의 원초적 과제다. 종교, 도덕, 법률, 국가 등 문명의 여러 제도들이 폭력 확산의 억제, 즉 질서 기능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여러 문명의 서로 다른 전통들은 서로 다른 질서 구조를 발전시켜 왔다. 하나의 사회 안에서도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그 질서 구조가 진화를 계속 일으켜 왔다. 전통의 1차적 기능은 질서 유지에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발생한 근대 문명은 인류 역사상 특이하게 폭력성이 강한 문명이다. 폭력성이 강한 문명은 쉽게 파멸에 이르는 법인데, 이 근대 문명은 산업 기술, 즉 자연에 대한 폭력성을 고도로 발전시킨 덕분에 상당 기간 지속되면서 세계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므로 인류에게는 이 현상을 억제할 수단이 없었다. 각지의 문명 전통이 근대 문명의 폭력성 앞에 퇴화하거나 파괴되었다.
폭력성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근대 문명이 순전히 폭력성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온 세계가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 잠긴 것처럼 보여도, 각 지역의 문명 전통은 위축된 형태로라도 근대 문명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다. 근대 문명의 폭력성을 허용해 준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상태가 한계에 이르면서 질서 구조의 강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 탈근대 상황이다. 전통적 하부구조가 탈근대 시대의 새로운 문명을 빚어나갈 기반이 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경제의 '고도성장'에 도취되어 왔다. 고도성장은 근대 문명의 폭력성을 대표하는 명제다. 유럽 선진국들이 자원 공급의 증가가 둔화되는 저성장 시대에 대비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가 '근대의 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전통의 상실에 있다.
전통 질서의 형태는 지역과 문명마다 달랐지만 어디서나 공통되는 것은 엘리트 계층의 도덕성이다. 어느 사회에도 무력과 재력과 정보력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엘리트 계층이 존재하고, 엘리트 계층은 다른 계층보다 강한 도덕성을 가지고 소속한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맡는다. 도덕성은 질서 구조의 핵심적 요소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가 이 도덕성을 표현하는 주된 통로가 된다. 엘리트 계층이 사회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도덕적 실천을 통해 사회 자체를 지키려는 자세가 보수주의다.
한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은 한국 사회 고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이 박약하다.

 

보편적 가치인 재물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미국 등 다른 사회에 편입하는 데 대한 저항감이 약하다.

 

한국 사회의 특성에 대한 애착이 적고, 안보에 대한 의식도 피상적이다.

 

내부적 안보에 대한 경계심이 약하기 때문에 양극화 등 불안 요소를 걱정하지 않고 고도성장에 집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 식민지인의 의식구조다. 대한민국은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엘리트 계층의 의식구조는 독립국가의 정체성에 맞춰져 있지 못한 것이다.
'국치'의 의미에 대한 인식의 허점도 이 의식 구조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왕조의 개폐는 이민족 지배 없이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00년 전에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의 본질은 전통의 단절에 있었고, 전통의 단절로 잃어버린 것이 도덕성이었다. 전통과 도덕성에 집착한 사람들을 대거 도태시키고 도덕성이 박약한 집단에게 사회의 주도권을 맡긴 것이 식민 통치의 가장 큰 죄악이었다.
19세기 후반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큰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인식의 속도가 상황 변화의 속도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망국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이 실패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조선 왕조의 국가 기능이 퇴화해 있어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는 일본의 야욕이 상황을 급박하게 만든 것이었다.
조선 왕조가 망하고 일본이 식민 지배를 펼치게 된 사실은 당시 상황으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볼 측면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 망하고 어떤 식의 식민 지배가 펼쳐졌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가 된 조선이 쉽게 독립하지 못하도록 지배를 펼쳤고, 조선의 전통을 말살하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었다. 조선의 재물을 빼앗아가는 것보다 조선인들을 식민지인의 의식 구조에 빠뜨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야욕은 조선 망국의 원인 중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일본의 야욕이 패전으로 좌절되었다고 해서 한국이 독립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의식 구조를 벗어나야 독립국이 되고 건강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 한국은 아직도 식민지 사회다. 정해진 식민 지배자가 없는데도 미국이든 국제 거대자본이든 상전을 모시고 싶어 하는 식민지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