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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에만 기대다 아들 뒤주에 가둬 죽여

구름위 2015. 10. 3.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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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에만 기대다 아들 뒤주에 가둬 죽여

뱌댜거 2015.03.13. 23:29 http://cafe.daum.net/hanryulove/5Qxi/12984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가 있다.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재위 1724?1776년)와 22대 정조(재위 1776~1800년)의 재위 기간을 뜻하는 것인데, 조선 스물일곱 임금 중에서 두 왕의 시호를 묶어서 표현하는 경우는 이때를 제외하고는 달리 없다. 예를 들어 태종과 세종 시대를 태·세종 시대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영·정조 시대라는 용어는 작위적인 표현일 뿐, 엄밀히 말해 영조와 정조 시대는 지향점이 달랐다. 그동안 국사교과서는 영조를 탕평 임금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이는 노론 후예 학자들의 자당(自黨) 임금 치켜세우기 성격이 강했다. 영조의 탕평책은 노론은 모두 등용하는 반면, 소론은 일부 온건파만 등용하던 불완전한 탕평이었고, 그나마 재위 31년(1755년)의 나주 벽서 사건으로 이런 명목상의 탕평책마저 붕괴되었다.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만 52년을 재위했지만, 재위 26년(1750년)의 균역법을 제외하고는 내세울 만한 치적은 별로 없다.

영조가 형식상의 탕평책마저 붕괴시키고 노론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결과가 소론에 기운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인 '사도세자 살해 사건'이었다

↑대신들의 당파 싸움 속에서 아들 사도세자를 희생시켜야 했던 영조의 고뇌를 다룬 SBS 드라마 <비밀의 문>. ⓒ SBS 제공

노론에 기댄 채 소론 견제에 몰두
영조는 왜 성공하지 못한 임금이 되었을까.

한마디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조에게 가장 뼈아픈 과거인 '경종 독살설'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훨씬 성공한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숙종 20년(1694년) 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난 이금(영조)은 경종 1년(1721년) 노론의 쿠데타에 가까운 지원으로 만 28세의 나이에 왕세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때까지 궁 밖에서 살았기에 백성들의 질고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인지 영조는 검소했다. <영조실록>은 재위 20년(1744년) 5월조에 "이때 임금은 목면으로 만든 침의(寢衣·잠옷)를 입었으며 …이불 하나 요 하나도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이었으며 병장(屛障·병풍)도 진설하지 않았다…여항(閭巷·민간)의 호귀(豪貴)한 집에 견주어도 도리어 그만 못했다.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와 검소한 덕에 대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검소함은 제왕의 미덕이지만 임금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새로운 어젠다를 제시하고 그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고 가는 능력이다.

영조 재위 시절은 사회 각계각층의 요구가 분출하던 시기였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는 이미 사회를 이끌어가는 능력을 상실했다. 크게 향상된 농업 생산력과 상공업의 발달은 신분제를 완화 내지는 해체시키고 능력에 따라 사람들이 대접받는 사회로 나아가길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발목이 잡혀 있었다. 재위 1년(1725년) 1월 영조가 경종의 능인 의릉(懿陵)을 참배하기 위해 출궁하자 군사(軍士) 이천해가 저주한 사건이나 영조 4년(1728년) 3월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며 이인좌가 봉기한 사건은 모두 경종 독살설이 낳은 비극이었다.
노론의 쿠데타에 가까운 지원으로 왕세제가 되었고, 경종 독살 혐의를 받으며 임금이 된 영조에게 이는 업보였다.

이 문제를 풀어야 할 당사자는 영조 자신이었다.

경종 재위 시절 임금을 몰아내려고 했던 노론과 자신의 행위는 '역(逆)'이었다. 반면 경종을 지키려 했던 소론 강경파의 행위는 '충(忠)'이었다. 영조가 즉위했다고 충역(忠逆)이 바뀔 수는 없었다. 영조는 소론 강경파의 행위를 충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소론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영조는 즉위 직후 소론 강경파 김일경 등을 사형시켰고, 이에 반발한 이인좌 등에게 봉기 빌미를 제공했다. 이인좌의 봉기 당시 노론은 몸을 사린 반면 소론 온건파인 오명항·박문수 등이 나서서 진압했다. 경종 때 목호룡 고변 사건으로 죽을 위기에 몰린 영조를 구해준 것도 소론 온건파였다. 소론 온건파마저 등질 경우 영조는 노론만의 반쪽 임금으로 전락할 것이었다. 그래서 영조는 이인좌의 난 직후 소론과 노론을 함께 비판하는 것으로 정국의 통합을 꾀하고자 했다.
"소론 김일경 무리들에게 효경(梟)의 성질이 있었다면, 노론에는 정인중 무리들이 효경의 성질이 있었으니, 피차에 어찌 역적이 없는 당이 있었는가?"(<영조실록>·<승정원일기> 4년 9월24일) 효경은 부모를 잡아먹는 짐승으로서 불효자나 역적을 비판할 때 사용한다. 경종 시절 세제였던 자신을 압박했던 소론의 김일경과 경종을 시해하려 했던 노론의 정인중 모두가 다 역적이란 비판이었다. 경종의 충신 김일경은 영조의 역적이 되고, 영조의 충신 정인중은 경종의 역적이 되는 모순된 현실이었다. 이 난제를 푸는 유일한 해법은 소론과 화해하는 것뿐이었다. 영조는 한때 그 길을 걸었는데, '탕평책(蕩平策)'이 그것이었다. <서경(書經)> '황극(皇極)조'에 "편이 없고 당이 없이 왕도는 탕탕하며, 당이 없고 편이 없이 왕도는 평평하다"란 구절에서 따온 탕평은 공평무사하다는 뜻이다.
영조가 공평무사한 왕도를 제창하며 탕평책을 표방하자 소론 온건파는 환영했다. 반면 김흥경·김재로·유척기 등 노론 대신들은 탕평책에 반발해 사퇴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소론의 현실적인 정치가들이 탕평파를 구성하게 되는데, 노론에서는 홍치중 등이, 소론에서는 조문명·조현명 형제 등이 대표적인 탕평파였다. 탕평파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였던 척박한 정치 현실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공존을 모색했던 정치 세력이었다. 노·소론의 탕평파들이 조정에 들어오면서 두 당의 극심한 갈등은 점차 완화되어갔다.

노론 4대신 신원 시도로 실패의 길 걸어
그러나 영조가 경종을 내쫓으려다가 사형당한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신원(伸·일종의 사면 복권)에 뜻을 두면서 정국은 다시 꼬여갔다. 노론 강경파는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정계 복귀의 전제로 삼고 있었다. 경종 시절 노론 4대신의 행위는 분명한 역(逆)이었다. 그러나 노론이 경종을 제거하고 추대하려 했던 인물은 다름 아닌 세제 연잉군, 즉 영조였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탕평파들이 만든 이론이 '죄의 경중이 같지 않다'는 분등설(分等說)이었다. 즉 경종 때 연잉군을 세제로 추대하고 대리청정까지 시키려 했던 노론 4대신의 행위는 영조를 위한 충(忠)이지만 목호룡의 고변에서 드러난 대로 노론가 자제들이 경종을 죽이려다 사형당한 임인옥사는 역(逆)이라는 절충안이었다. 노론으로서는 연잉군의 세제 추대와 세제 대리청정 주청이 역에서 충으로 전환된다는 장점이 있었고, 소론으로서는 목호룡의 고변에 의한 임인옥사를 여전히 역으로 묶어둠으로써 이들을 처벌한 자신들의 정치행위를 충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분등설로 각 당의 탕평파들 사이에는 타협의 공간이 마련되었지만, 불씨는 여전히 존재했다. 노론 4대신 중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과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가 임인옥사 때 사형당해 신원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소론 탕평파 송인명은 "김창집과 이이명은 아들과 손자가 역적이니 죄가 없을 수 없으나 이건명과 조태채는 추죄(追罪)할 수 없으니 분등(分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조도 "이건명과 조태채는 관작을 복구하는 것이 옳다"(<영조실록> 5년 8월18일)고 동의했다. 이렇듯 '노론 4대신' 중 이건명·조태채가 신원된 것이 영조 5년(1729년)의 '기유(己酉)처분'이었다. 영조는 겉으로는 당쟁의 종식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영조는 "오른손으로는 소론 영수 이광좌의 손을 잡고 왼손으로는 노론 영수 민진원의 손을 잡고" 화합을 종용하기도 하고, 재위 13년(1737년) 8월에는 인정문(仁政門)에 나가 백관에게 "아! 당습(黨習)의 폐단이 어느 때에야 없어지겠는가?"라고 한탄하는 '혼돈개벽(混沌開闢)' 유시(諭示)를 내려 당쟁의 중지를 요구했다. 혼돈개벽 유시란 "이전의 일은 혼돈에 부칠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개벽이다"라는 선언이었다.

↑<대통령의 시간> 탈고 후 가족들과 외국에 나갔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1월30일 귀국해 인천국제공항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역사가 주는 교훈… 대통합의 길 가야
그러나 정작 당심(黨心)을 씻지 못한 장본인은 영조 자신이었다. 실제 영조의 속마음은 노론 4대신 중 신원되지 못한 김창집과 이이명까지 신원시키는 데 있었다. 소론으로서 이는 목숨을 걸고 막을 수밖에 없는 생사의 문제였다. 영조는 여러 차례에 걸친 시도 끝에 재위 16년(1740년) 1월 드디어 김창집과 이이명을 신원시켜 노론 4대신 모두의 죄를 씻어주었다. 나아가 임인옥사 자체를 무고라고 선언하는 '경신처분(庚申處分)'을 단행하고, 이듬해에는 영조판 과거사 완결인 '신유대훈(辛酉大訓)'을 선포했다. '신유대훈'은 경종 때 노론이 임금을 내쫓으려 했던 모든 행위를 충(忠)이라고 뒤집은 것이었다. 이로써 경종을 내쫓거나 독살하려고 했던 모든 행위가 무죄로 돌아갔다.
영조는 이로써 자신의 과거가 씻겨졌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영조의 과거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소론 온건파와 강경파는 물론 남인까지 모두 포용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조 자신이 노론에만 기댔던 당심(黨心)을 버리지 못했고, 이는 결국 소론을 지지하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비극을 낳았다. 반면 정조는 자신의 부친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벽파까지도 포용하면서 미래를 지향함으로써 조선 후기 유일하게 성공한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전직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자신의 집권기를 자화자찬한다고 실정(失政)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선 당시 자신이 내걸었던 중도 실용 노선을 폐기하고 보수 우파에만 기대는 안위를 자처함으로써 정치·경제·사회·통일 모든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한 대통령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현 정권도 마찬가지다.

이제 한국 사회는 그 누구도 과거 1970~80년대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변했고 발전했다는 뜻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인정하고 대선 공약처럼 대통합의 길을 걷는 것만이 예견된 실패를 막는 유일한 길임을 역사는 말해준다.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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