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한 外人의 탄식 "불쌍한 한국인…저런 왕은 처음 본다"

구름위 2016. 1. 2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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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1896년 2월 11일부터 이듬해 2월 20일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애초의 파천 자체는 친위쿠데타의 성격을 가진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늘리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당연한 결과였는데, 일각에서 영향력 증대 정도가 아니라 일거에 지배권 확립을 노리는 경향이 있었고, 그로 인해 민비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을미사변의 극단적 폭력성이 조선인들을 분격시켰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비판을 일으킨 상황에서 고종은 아관파천을 통해 일본의 방침을 따르던 정부를 전복시켰다.
친위쿠데타라면 친일 정부 전복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인데, 고종은 왜 1년 넘는 긴 기간 동안 공사관에 머물렀을까? 고종에게도 러시아의 힘을 조금이라도 더 빌리고 싶은 욕심이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러시아 측이 고종의 신변 확보를 통해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고종의 작은 이익과 러시아의 큰 이익이 합쳐져 파천 상태가 길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획책은 누가 했든 최종 결단은 고종의 몫이었다.

 

개인적 결단이라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본인의 품성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

 

앞서 이태진의 고종 옹호를 반박하면서 알렌의 일기가 잘못 번역되었다고 지적한 일이 있는데, 알렌이 고종에게 심한 경멸감을 품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매천야록>에도 있다(허경진이 옮긴 <매천야록>에서 발췌).
미국 공사 안련이 가고 모간이 대신 왔다. 안련은 우리나라에 머문 지 수십 년 되었는데, 돌아갈 때 사람들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한국 백성들이 불쌍하다. 내 일찍이 구만 리를 돌아다녔지만 상하 4000년에 한국 황제 같은 이는 처음 보는 인종이다."
<매천야록>에는 을미사변 직후 고종의 태도에 관한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시사점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예전에 상궁으로 있던 엄 씨를 입궁시켰다. 왕후가 있을 때는 임금이 두려워하여 감히 곁눈질도 하지 못했다. 10년 전에 우연히 엄 씨를 총애한 적이 있었는데, 왕후가 크게 화를 내며 죽이려 했다. 임금의 간곡한 만류로 엄 씨는 죽음을 면했지만 밖으로 쫓겨났다. 이제 다시 불러들이니, 변란을 당한 지 겨우 닷새밖에 되지 않았다. 장안 백성들은 임금이 양심도 없다며 모두 탄식했다. 엄 씨는 생김새가 민비와 비슷하고 권모와 지략까지도 그와 닮아 입궁한 뒤로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정사에 간여하여 뇌물을 받았으니, 점점 민비가 있을 때와 같아졌다.
상처한 사람은 웃음이 나와도 변소 가서 웃는다는데, 일 터지고 닷새 만에 엄 씨를 불러들였다니 왕의 자격보다 인간의 자격부터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민비의 죽음을 발표도 못한 채 왕비에서 폐하고 있던(10월 10일) 시점의 일이 아닌가. 오랫동안 고종을 가까이서 접해 본 알렌이 그 사람됨에 진저리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알렌 못지않게 고종을 많이 접했던 외국인이 러시아 공사 베베르였다. 1885년 대리공사 겸 총영사로 부임한 베베르는 아관파천 당시까지 주한 외교단의 원로일 뿐 아니라 왕실과도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고종이 공사관으로 건너왔을 때 베베르는 이임 발령을 받아놓고 후임자 스페에르에게 업무를 인계 중이었는데, 상황이 터지자 스페에르를 다른 곳으로 보내고 그를 유임시킬 정도로 요긴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종이 환궁한 뒤에야 조선을 떠났고, 4년 후 고종 즉위 40주년 축하 사절로 다시 와서 반 년간 머무르며 러일전쟁을 앞둔 외교전에서 한 몫을 맡기도 했다.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 묻혀 있다가 십여 년 전부터 널리 활용되고 있는 베베르의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은 1902년 대한제국 방문 때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관파천 당시 상황을 베베르는 이렇게 기록했다(노주석의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 131~149쪽 "베베르 수기 전문"에서 발췌).
민 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이 지나도록 고종은 일본군의 감시 하에 마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새벽 7시 30분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여자 복장으로 변장하고 고종과 왕세자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오는 데 성공했다. (…) 친일파 세 사람은 타살당하였다. 전 국민적인 축제 분위기였다. 이때 러시아 공사관 경비 해군은 100명이었으나 서울 주둔 일본 수비대는 10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 새로운 정치 상황에 직면하자 서울 남쪽에 있는 일본인 조계지로 이동한 분노에 찬 군중이 일본인의 목제 가옥을 파괴하지 않을까 염려해 방어를 하였다.
병력에서는 러시아 측이 상대가 안 되는 약세였지만, 일본이 그 단계에서 러시아와 정면 대결을 벌일 태세가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을미사변 후 조선인의 극심한 반일 감정이 일본군의 발목을 잡아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고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러시아 측의 어려운 사정은 베베르가 분명히 알고 있었다.

 

▲ 덕수궁에서 바라본 러시아 공사관(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석 달 후에 즉위한 니콜라이 2세 러시아 황제가 고종에게 가장 가까운 외국 국가원수였다. 대관식 때 민영환이 전달한 친서를 필두로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30통 가량의 친서가 발견되었다. 대한제국 출범을 앞두고는 니콜라이 2세에게 자신을 황제로 승인하지 않더라도 "곧바로 거절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고종이 퇴임 후에도 러시아 망명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러시아 외교문서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프레시안

 

고종이 처음 공사관으로 피신해 오셨을 때 공사관 입장은 난처했었다. 고종의 생명에 대한 염려와 또 밖에서 일본인과 한인 사이 충돌에 대한 책임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전에 청국군과 일본군의 전쟁과 일본인들의 개혁 강요로 나라는 온통 무정부적인 환란에 빠진 상태였다. 청일전쟁 후 지방세를 서울로 납입하지 않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파천으로 인해 러시아가 얻게 된 기회의 가치를 강조했다.
사실 러시아는 1884년 수교 이후, 10여 년간 대한제국에서 발생한 사건에 다소 무관심했었다. 극동에서 러시아의 주 관심은 청국과 시베리아의 경제 여건을 호전시키는 것이었다. 대한제국 문제는 뒷전에 있었다. 외무성에서는 대한제국에 관심이 없다고 하였다. 때문에 공사관은 자연스럽게 대한제국의 독립을 청국과 일본에 침해당하지 않도록 순수한 조언만을 하는 것으로 국한하고 독립을 지지하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해 온 후 상황은 급격히 변했으며 모든 국사는 러시아 제국국기가 게양된 러시아 공사관의 보호 아래 행해지고 있었다.

고종이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불안정한 성격의 고종과 협조 관계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 매우 조심스럽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협상에 따라 러시아 정책을 조정할 필요에 대비해 러시아 측이 궁극적 책임을 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고종은 심성이 선량하나 성격은 유약했다. 본인은 왕의 권위와 자유 의사에 조금도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예의를 갖추고 매일 밤 늦게까지 계속된 고종과의 좌담에서 이런저런 정책에 대해 충언을 드렸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모든 대신들은 공사관 건물 안에 병풍을 쳐 임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어 본인과 협의하라는 왕명을 받으면 대신들과 단둘이서 어떤 사건이든 논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 어느 경우나 본인은 자주 장문의 상소로 개혁을 즉시 이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일본인의 요구를 사전에 평가하기를 피했으며 고종이 사적으로 문의한 문제 해결에만 협력을 하는 것으로 자숙하였다.
이 상황이 조선인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지고 있었을까?

 

많은 지식인들이 <매천야록>의 기록과 비슷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12월 27일(음력)에 임금이 경복궁을 나갔다. 이범진과 이윤용 등이 임금을 아라사 공사관으로 옮기고 김홍집과 정병하를 잡아 죽였지만, 유길준, 장박, 조희연 등은 달아났다.
임금은 처음부터 헌정(憲政)에 묶인 것을 싫어하여 이범진, 이윤용 등과 더불어 아라사의 힘을 빌려 김홍집 등을 제거하려 했다. 아라사인들도 우리나라에 기반을 닦으려고 엿보다가 왜국에 선수를 빼앗기자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8월(을미사변) 이후 이범진 등이 아라사 공사관에 숨어들어 많은 뇌물을 주고 말했다. "만약 정국을 뒤엎는 데 원조한다면 마땅히 온 나라가 왜국을 섬기듯(아라사의) 명령을 듣겠다."
아라사 공사가 매우 기뻐하며 그 청을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니, 인천에서 잇달아 입성했다. (…) 임금이 경무관에게 명하여 김홍집 등의 목을 베게 했다. 이때 김홍집은 직방(直房)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달아나라고 권하자 탄식하며 말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박영효를 본받아 역적이라는 이름을 얻겠는가!"
이에 그는 정병하와 함께 체포되었다. 정병하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외쳤다. "대신인 우리를 어찌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는가. 재판을 받은 뒤에 죽게 해주시오." 그러자 김홍집이 돌아보면서 말했다. "어찌 말이 많은가. 나는 마땅히 죽겠네."

일본이 주도한 갑오경장은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한 것이었고, 그 가장 중요한 지향점의 하나가 입헌정치였다. 입헌정치가 당시의 우국지사들에게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명분이었음을 황헌이 갑오경장을 "헌정"이라고 요약해 표현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고종이 근대적 입헌정치를 싫어한 것은 후에 독립협회와의 갈등 속에서도 거듭 나타나는 일이거니와, 전통적 전제정치의 기준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자의적 '통치'를 원했던 것으로 황현은 보았다.
하루는 임금이 조희연에게 노하여 군부대신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하자 여러 각료들이 그는 아무 죄가 없다고 주장했다.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했다. "대신 하나도 물리치지 못한다면 어찌 임금 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고는 옥새를 집어던지며 말했다. "짐은 임금이 아니니 경들이 이것을 가져가라."
대신들이 벌벌 떨며 감히 아무 말도 못했는데, 어윤중이 천천히 일어나 물러서면서 말했다. "성인이 말하길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써 섬긴다'고 했습니다. 폐하께서 신들을 이렇게 대하시니, 장차 신들은 어떻게 폐하를 섬기겠습니까. 바라건대 노여움을 푸시고 굽어 살피시어 공의를 펴소서." 임금이 잠자코 있었다.

민주공화정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전통 시대의 전제군주가 일방적 통치권을 가졌던 것처럼 상상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모두 바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규모가 큰 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된 질서는 나름대로 균형 잡힌 구조 속에서 긴장을 소화시키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임기에 관계없이 자리를 싹쓸이하는 오늘날의 행태를 '제왕적'이라고 손가락질하는데, 진짜 제왕들에게 매우 실례되는 얘기다. 옛날의 임금들은 그렇게 자의적으로 신하들을 대하지 못했다.
1890년대의 조선에서 고종이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있다고 옥새를 집어던지는 짓을 하기에 이른 것은 유교 정치의 원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무너져 온 결과였다. 충과 예 사이의 균형 관계를 당당히 내세운 어윤중 같은 사람이 오히려 예외적인 존재가 된 상황을 황현은 개탄한 것이다. 황현도 어윤중도 벌벌 떨고 있던 대신들도 올바른 정치 원리가 어떤 것인지는 모두 공부를 통해 똑같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원리를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드문 세상이 되어 있었다.
갑오경장과 아관파천을 거치는 동안 조선의 정치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정통파 관료의 비중이 계속 떨어져 갔다. '개화 관료'라 하여 과거를 거치지 않고 외국어나 기술을 갖고 채용된 사람들, 그리고 왕에게 맹목적 충성을 바치는 인물들의 비중이 커졌다. 왕 자신이 전통적 덕목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고, 전통적 덕목을 대치할 근대적 덕목을 갖춰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긴장이 줄어드는 '도덕적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벼락출세를 한 김홍륙이란 자가 있었다.

 

함경도 출신으로 소싯적에 연해주에 다니며 러시아어 익힌 밑천을 가지고 궁내관으로 통역을 맡고 있었는데, 파천 기간 동안 고종과 베베르 사이의 통역을 전담하면서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대한제국 출범 후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자 설 땅을 잃었다. 1898년 여름 비리가 적발되어 유배가게 되었는데, 떠나기 전에 고종과 황태자의 커피에 아편을 넣어 독살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당했다.
서영희는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에서 이 이른바 '독다(毒茶)' 사건을 하나의 의옥(疑獄)으로 보았다. 고종이 김홍륙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이다. 독다 사건 반년 전 이재순의 김홍륙 살해 음모 사건도 고종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본다. 합당한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유배 가는 것이 억울해서 독살을 시도했다는 얘기는 너무 황당하다.
어윤중이 조희연을 옹호할 때는 옆에서 벌벌 떨고만 있던 대신들도 어윤중의 말이 맞다는 것은 알고 그렇게 나서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관파천을 지낸 후 대한제국을 세울 무렵의 조정에서 누가 어윤중과 같은 말을 했다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을 것 같다. 아관파천은 조선의 조정이 고종의 수준에 맞춰 하향 평준화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였다.

 

지난 회에 을미사변 날짜를 1895년 11월 6일로 적었는데, 10월 8일로 바로잡습니다. 김안국 외 엮음 <동아시아사 연표>(청년사 펴냄)의 착오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지난 회의 오류는 수정했습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필자> 

 

 

 

나라 말아먹은 '민비' vs 조선의 상징 '명성황후'

 

[망국 100년] 日 야욕을 보여준 '명성황후'

 

19세기 후반은 세계 어디에서나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거니와, 조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급박한 사정을 겪은 곳의 하나였다. 19세기 초반까지는 비록 기능이 매우 쇠퇴해 있기는 해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을 넘길 때는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 빠져 있었다.
고종 즉위 직전, 1860년경이 되어서야 북경이 서양 오랑캐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며, 적어도 명-청 교체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상한 상황이 닥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1864~73년 세도 정치의 틀을 따르면서도 극단적 쇄국 정책과 함께 전례 없이 강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 대원군 집권은 위기에 대한 첫 국가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요즘 표현으로 출구 전략이 빈약한 정책이었다.

폭력적 수단에 의한 강압적 개혁 정책으로는 국가의 획기적 체질 개선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항의 필요가 절실해지는 데 비해 개항을 위한 준비는 더뎠다. 1873년 말 대원군이 정권을 내놓은 것은 더 이상 대책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개혁을 해놓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 정권을 넘겨받은 민 씨 일파는 역시 세도 정치의 틀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면서 국가의 진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책을 별로 강구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개혁 중 가장 의미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는 서원 철폐를 집권하자마자 뒤집어 놓은 데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 등 대외 관계의 진전이 있었지만, 사세에 떠밀려 진행된 일일 뿐, 능동적 조치를 취한 것이 거의 없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수신사를 일본에 보낸 후 4년이 지나서야 2차 수신사를 보낼 정도였다.
김홍집이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에야 장래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때 <조선책략>이 들어와 청나라 양무파의 정책 노선이 알려짐으로써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일본과 청나라에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움직임이었다. 탐색의 방향은 양쪽이었지만, 청나라보다 열성적으로 조선에 접근해 온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추세를 별기군 창설이 보여준다.
민 씨 정권의 부패에 대한 불만과 개화 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져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청나라 양무파 정권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국정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적극적 협조에 기대를 걸고 있던 급진 개화파가 1884년 말 갑신정변을 일으켜 반전을 꾀하다가 실패한 후 청나라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882~94년 조선 간섭기의 청나라 정책은 일본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서 변화의 계기를 억누르는 방어적 노선이었다. 시국에 관한 주견 없이 권력 유지에 만족하는 민 씨 집단이 주견이 강한 대원군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청나라의 선택을 받았다. 1891년 이후 민 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후에 영휘로 이름을 바꿈)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민영준은 원세개의 조종에 따라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 요청을 주도, 청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었는데, 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은 대단한 인물이다.
(이번 작업에서 조선 내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깊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무엇보다 동학농민전쟁에 이르는 경위와 양상을 개관하면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필자의 능력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작업에서는 비 연구자로서도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대외 관계와 지배층의 향배에 관심을 제한한다. 이후라도 사회경제적 상황까지 설명 범위에 끌어넣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보완 작업을 하고자 한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일본이 요구한 조건이 엄청난 것이었다. 조약을 체결하러 시모노세키에 간 이홍장이 일본 국수주의자에게 총격을 당하는 바람에 조건이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는데도 당시 열강들 사이의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1주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건의 완화를 권하는 '3국간섭'에 나섰다. 세 나라, 특히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3국간섭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요구 조건이 워낙 황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간섭이 성립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이 한 차례 승전을 계기로 일거에 동아시아 지역 패권에 접근하려 한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1890년 출범한 의회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92년 7월 출범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1893년 말 중의원을 해산했지만 새로 선출된 의회는 이듬해 5월 내각 탄핵 상주안을 가결했다. 1894년 6월의 사태 발생에서 8월 1일 선전포고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서두른 것은 국내의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을 종결함에 있어서도 여러 정파를 두루 만족시키기 위해 가혹한 강화 조건을 관철시켜야 했고, 조선의 뒤처리도 서두르게 되었다.
서두르는 과정에서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일본이 청나라를 따돌린 후 조선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왕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는 데 대한 반발로 고종 측근 세력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시도했다. 3국간섭에서 러시아의 힘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성과를 거두기에 조급한 일본인이 측근 동원에 능란한 왕비를 제거하고 왕을 공포에 몰아넣기 위해 일을 저질렀는데, 얼마나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사건인지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개항 이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위기의식을 가진 조선인이 국가의 진로를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이 엇갈리고 있었다. 청나라와의 전통적 협조 관계를 지키느냐, 이웃의 신흥 강국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방향이든 대다수 사람들은 조선의 국체 보존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보호되려면 자기가 속한 사회가 보호되어야 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로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인식한 것이 국가였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선택에서도 어느 쪽이 국가를 지키기에 좋은 길이냐 하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 개화의 효율성 같은 것은 국가가 지켜진 뒤에 부차적으로 따질 문제였다.
청나라는 전통적 관계 때문에 대다수 조선인들이 경계심을 덜 품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임오군란 이후의 간섭기 동안 많이 까먹었다. 대원군을 납치하고 부패한 민 씨 정권을 옹호하는 편의주의적 태도가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중국 상인의 과도한 보호 등 이익에 대한 집착으로 전통적 관계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켰다. 청일전쟁으로 완전히 쫓겨나기 전에 조선인들의 마음에서는 이미 스스로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청나라가 쫓겨나는 것을 보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주도권을 대세로 받아들였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 수행에 김홍집이 앞장선 것은 일신의 영달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뜻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아관파천 후 그가 죽음을 맞는 상황에 관해 다소 엇갈린 서술들이 있지만, 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애국심과 합리성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일본 주도의 개혁에 종사하고 일본의 어느 정도 이권도 인정해 줄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최소한의 신뢰를 깨뜨린 행위였다. 이 씨 왕조가 시원찮으니 다른 왕조를 세워야겠다든지, 이제부터의 세상에서는 왕국보다 공화국이 적합할 테니 왕실을 없애야겠다든지, 아무 대안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현존하는 국가의 상징을 군화발로 뭉개버린 것이었다. 상징성의 유린을 통해 조선 사회와 조선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일본에게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강화도조약 이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러나 왔지만, 적어도 말만은 이웃을 돕는 '선의'를 내세워 왔다. 그 가식을 꿰뚫어본 사람도 일본이 최소한의 체면만은 지켜 나갈 것을 기대하며 그 현실적 힘을 존중하려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을미사변에서 극악한 야욕을 극악한 방법으로 드러냈다. 내키지 않더라도 일본의 힘과 존재를 받아들이려던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자들이 못할 짓이 무엇이란 말인가!

 

▲ 이승만이 하야할 때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모두 이승만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권력의 무상함을 비감해 한 사람들도 있고, 국가 주권의 상징이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 아파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민비'가 정치에 관여한 데 대해서는 포폄의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을미사변을 통해 '명성황후'가 조선의 상징으로서 일본의 극악한 야욕을 드러낸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론의 여지없이 큰 공헌이었다. ⓒ프레시안

 

을미사변에 자극받아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 중에는 고종과 민비를 비판적으로 보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차 없이 보여주고 있었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의병으로 나섰다.

 

왕과 왕비의 존재는 국가 주권의 상징이었다. 그 존재에 대한 위협은 그들이 자기 노릇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을미사변 석 달 후인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있었다.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1월 28일에도 왕이 미국 공사관으로 도망하려다가 실패한 소위 춘생문사건이 있었는데 그 후 러시아 공사관 측과 긴밀하게 의논하며 준비한 결과 잠행에 성공한 것이다.
왕의 이어(移御)가 친일 정부를 바로 붕괴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을미사변으로 인한 인민의 분노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만도 1000여 명의 일본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병력은 겨우 100여 명이었다.

 

12년 전 갑신정변 때는 왕을 붙잡고 있던 소수의 일본 군대를 다수의 청나라 군대가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그 때에 비해 일본이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결하기 힘든 문제도 있었지만, 조선 인민의 반일 감정을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관파천이 고종 측의 독자적 결단이냐, 러시아 측의 획책에 따른 것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서영희의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관파천에 대해 고종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현직 러시아공사인 베베르와 스페에르가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기도 전에 고종을 설득하여 단행한 것이라고 추정한 연구도 있으나(최문형, 2000, "아관파천과 러일의 대립", <한국학논집> 34, 한양대학교), 당시 러시아 정부의 최대 관심이 만주에 있었고 조선은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두 공사가 본국 정부의 방침을 어겨가면서까지 아관파천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8쪽)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내게는 최문형의 관점이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가 조선보다 만주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주석의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이담 펴냄) 중 "러시아 외교 라인의 면면"(34~36쪽)을 보면 당시 러시아의 정책 결정자들에서 실무자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뒤섞여 있어서 정책 혼선이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를 통째로 포섭할 기회가 나타났을 때, 만주 진출 정책을 지키기 위해 기회를 외면한다는 것은 설령 대 일본 온건파라 하더라도 취할 길이 아니었을 것 같다.
노주석의 책에는 파천 당일 쉬페이예르(스페에르) 대리공사가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이 수록되어 있다.
1896년 2월 2일 전문으로 보고한 바와 같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밀지를 보내 수일 안에 왕세자와 함께 공사관에 피신하겠다는 희망을 밝혀 왔다. 전임 대리공사 베베르와 함께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보호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2월 3일) 고종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2월 9일 저녁 공사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이날 결행하지 않고 경비병 증원을 요청해 왔다. 공사관은 알렉세예프 극동 총독에게 긴급 요청, 2월 10일 해군대령 몰라스가 100명의 수병을 인솔하고 서울에 왔다. 고종은 2월 11일 새벽 7시 30분에 공사관에 왔다.
파천 이전에 공사관은 준비를 위해 극동 총독의 협조를 받고, 외무장관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 측의 독자적 결정을 러시아가 순순히 받아줄 수 있는 부담 없는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아무리 일본과의 정면 대결을 꺼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3국간섭처럼 일본을 견제할 필요는 분명한 상황이었다.
설령 조선에 대해 궁극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조선 정부를 포섭해 놓는 데는 협상 카드로서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아관파천의 기획에 러시아 공사관, 특히 1885년 이래 10년 넘게 조선에 주재하며 고종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던 베베르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 리가 없다.

 

 

 

 

 

구국의 결단? 갑신정변은 최악의 친일 행위!

 

[망국 100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873년 말 대원군의 퇴진은 극한 상황에 몰린 것은 아니었다. 10년 전 안동 김 씨 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 앞에 권력의 전면에서 물러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었을지. 대원군은 집권 기간 동안 힘을 아껴서 쓰지 않는 강경 노선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일부 개혁 정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내외 상황은 갈수록 난감해지기만 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을 때, 실력은 지키는 채로 권력을 내놓을 기회로 받아들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권력의 배타적 속성은 이런 편리한 진퇴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원군 자신이 안동 김 씨 세력을 본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멀리 몰아붙인 것처럼 대원군에게서 권력을 넘겨받은 민 씨 세력도 대원군의 재기 가능성을 없애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금 물러서는 정도로 민 씨 세력과 타협을 바라고 있던 대원군은 큰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대원군 퇴진 이듬해 민승호의 폭사는 그의 배신감이 터져 나온 일로 생각된다.
고종의 즉위로 안동 김 씨 세도가 대원군 세도로 넘어왔고, 대원군의 퇴진으로 여흥 민 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권력의 주체는 바뀌었지만, 왕이 왕 노릇 못하는 세도 정치의 본색은 바뀌지 않았다. 민 씨 세도에서 고종의 친정(親政)을 명분으로 내걸기는 했지만, 고종 자신이 유교 정치의 왕도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얕은 이해관계에 따라서만 움직였기 때문에 주변 세력에게 철저히 농락당할 뿐이었다. 대원군이 경연 봉쇄 등을 통해 허수아비로 키운 왕이 대원군의 허수아비가 아니라 민 씨의 허수아비가 된 것이었다.
임오군란(1882)까지 계속된 민 씨 세도기에 조선 국가 체제의 부패는 극한에 이르렀다. 정규군 봉급을 1년 이상 체불한다는 것은 국가 기능의 완전한 마비 상태라 할 일이다. 민심이 조정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대안으로 쉽게 떠오를 수 있는 것이 대원군이었다. 앞 회에 인용한 황현의 기록처럼, 위엄이나마 서 있었던 대원군 시절로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널리 퍼져 대원군 부활의 발판이 되었다.
민비 시해(1895) 당시 일본 측이 조선군의 소행으로 꾸미려 획책하는 데는 뛰어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3년 전 조선 군인들이 민비를 죽이려 한 일에서 따 온 모티프일 뿐이다. 권력 투쟁이 왕비의 목숨까지 노리게 된 사태는 조선의 국가 체제가 밑바닥까지 무너진 상황을 보여준 것이다.
권력 투쟁이 정적의 목숨을 노리는 사태는 조선 전기부터 간간이 있었으나, 이것이 권력 투쟁의 일반적 양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숙종 때의 일이었다. 정권의 향배가 명예나 성취감 정도가 아니라 관련자들의 목숨을 좌우하게 되니 생산적 담론보다 극단적 정통론에 쏠리게 되어 조선의 정치가 쇠퇴한 것을 서술해 왔다. 그런데 이제 왕족 사이에서 서로 죽이려 달려들고,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폭력으로 정적들을 잡아 죽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원군이 임오군란의 진행에 어떤 식으로 관여했는지는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민비를 원흉으로 추궁하는 난군을 그가 제지하려 애쓰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민비의 죽음을 서둘러 선포한 데서 민비를 희생양으로 삼으려던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대원군의 극단적 폭력성은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불과 반 년 전 그의 서장자(庶長子)인 이재선의 모역 사건 연루를 겨우 면한 일이 있다. 퇴진 이듬해의 민승호 폭사 때는 감히 그에게까지 손길이 뻗치지 않았지만, 7년 동안 손발이 잘려 온 1881년 시점에서는 그의 신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던 것이다.
이재선 모역 사건에는 사실 이재선 자신보다 대원군이 더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는 소문이 당시에 파다했던 모양인데, 정황으로 그럴싸한 일이다. 황현은 이렇게 적었다.
이재선은 운현의 서자로, 갑자년(1864) 이후 별군직에 있었지만 머리가 아둔하여 콩과 보리를 분간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운현에게 서자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 이재선은 서대문 밖에 있는 민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무슨 죄에 연루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슬퍼했다. 이 옥사를 왕후가 꾸몄다고 말하는 자도 있지만, 안팎으로 운현이 화근이라는 얘기가 자자했다. 그러나 운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 변이 왕후에게까지 미치자 사람들은 이 사건도 운현이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다.
대원군은 민 씨 세도에 대한 광범위한 반감에 편승해 정권을 손에 넣을 수는 있었으나 운용할 능력이 없었다. 국가가 처한 상황은 10년 전보다 어려워져 있었는데 왕년의 측근들은 제거되거나 곁을 떠나 동원할 수 있는 인재가 적었다. 게다가 군난의 와중에 잡은 정권이었기 때문에 그를 믿고 따르려는 사람이 더더욱 적었다.
청나라 군대를 끌고 온 마건충(馬建忠)이 대원군을 '납치'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당시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일본과 경쟁하는 입장이었으며, 민 씨 세력의 친일 추세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업고 정권을 탈환한 대원군은 청나라에게 의지하는 입장이었다. 친청 태도를 보이는 대원군의 정권을 왜 청나라 쪽에서 붕괴시킨 것일까?
마건충은 양무운동의 지도자 이홍장(李鴻章)의 심복 막료였다. 양무파는 대결을 회피하며 실력 양성을 강조하는 현실주의 노선이었다. 타협을 모르는 대원군이 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는 임오군란 피해에 대한 일본의 항의를 적절히 처리할 길이 없었다. 이홍장이 이끄는 청나라는 조선에서 청나라 영향력의 상대적 우세만을 원했고, 절대적 우세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원군을 빼내고 온건한 인물들을 앞세워 일본과 타협을 맺었다.
조선 망국의 의미가 가장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사건이 임오군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외적으로는 전통적 천하 체제 속에서 조선의 위치를 정해주고 있던 중국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괴되었다. 중국과의 사대-책봉 관계는 현실적 힘에 의한 종속 관계라기보다 자발적 이념에 따른 거래 관계였다. 군대를 주둔시켜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통제하고 국왕의 아버지를 황제가 심문하겠다고 데려간 것은 전통적 관계의 포기였다. 조선과의 '특수 관계'를 전략적 이점으로 이용할 생각만 있었지, 그 특수 관계의 본질적 가치를 도외시한 조치였다.
내적으로는 국왕의 권위가 완전히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전통 체제 속에서 '중전'의 상징적 권위는 국왕과 대등한 것이었다. 정권 쟁탈의 목적을 위해 왕비를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쟁탈전의 구도에 따라서는 왕을 잡아 죽이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2년 후 갑신정변에서 왕을 겁박해 인질로 삼는 사태가 그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왕비를 잡아 죽이려 한 대원군이나 왕을 겁박한 갑신정변 주동자들보다 왕권 몰락의 더 큰 책임을 가진 것은 고종과 민비 자신이었다. 그들은 온 백성의 어버이로서 책임을 생각지 않고 탐욕을 위해 정권을 운용하는 모리배들 틈에 스스로 끼어들어 자기 몫 챙기기에 바빴다. 황현의 아래 기록들이 사실 그대로일지에는 의문이 있더라도,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1) 남정철은 과거에 급제한 지 이 년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외척이 아니고는 이처럼 갑자기 출세한 자가 근세에 없었다. 그는 감영에 있을 때 임금께 날마다 진상했는데, 임금은 그것을 충성으로 여겼다. 이에 그를 영선사로 임명하여 천진으로 보내 중용할 뜻을 보였다.
민영준이 남정철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 수레에 태워 바쳤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꾸짖으며 말했다. "남정철은 정말 큰 도둑놈이었구나. 관서에 이처럼 금붙이가 많았는데 혼자서 다 해먹었구나." 이때부터 남정철에 대한 임금의 총애가 시들해졌고, 민영준은 날로 부리기 좋은 인물이 되었다.
(2) 만수절이면 감사나 수령들이 으레 진상품을 올리는데, 항상 척신을 통해 궁중에 바쳤다. 정해년(1887) 7월에 민영소와 민영환이 함께 들어가 임금을 모셨는데, 이때 김규홍이 전라감사이고 김명진이 경상감사였다. 민영환이 먼저 김명진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왜국 비단 오십 필과 황저포 오십 필뿐이었다. 임금이 낯빛이 변하더니 용상 아래로 내던졌다. 민영환이 황공해하며 이 목록을 주어 소매 속에다 넣었다. 이어 민영소가 김규홍의 진상품 목록을 바쳤는데, 춘주 오백 필과 갑초 오백 필, 백동 오 합, 바리 오십 개에 다른 물건도 이 정도였다. 임금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감사들이 이렇게 예를 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김규홍이 나를 사랑하는구나." 민영환이 나가서 자기 돈 이만 냥을 더해서 바쳤는데, 그가 김명진의 사위이기 때문이다.

"왕이 왕 노릇 않는 것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이라는 맹자 말씀이 다시 생각나는 대목이다. 고종은 어린 나이에 어쩌다가 왕이 된 이래 20년간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 왕의 권한만 생각했지, 왕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키우지 않은 것 같다. 1873년 말 친정을 시작한 이래 강화도조약을 비롯해 많은 정책 결정이 있었지만, 상황에 떠밀려 당장의 곤경을 면하기 위한 결정이었지, 확고한 국가관에 따라 어려움을 감당하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 세계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19세기 말 조선의 큰 과제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조선의 정치가 큰 질곡에 빠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1884년 시점에 갑신정변처럼 난폭한 방법이 적절한 것이었을까? 정치의 질곡을 더욱 심화시키고 '개화'의 명분마저 퇴색시킨 모험주의자들의 난동을 선각자들의 영웅적 행동으로 미화한 것은 일제 식민사관의 선전이었다. ⓒ프레시안

 

갑신정변이 개화를 향한 적극적 노력으로 많은 평가를 받아 온 데 나는 의문을 느낀다.

 

1884년 조선의 상황에서 거대한 변화의 필요성을 전연 느끼지 않는 사람은 제 정신 가진 사람 중에 없었을 것이다.

 

정변 주동자들은 이 변화를 난폭한 방법으로 성급하게 일으키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난폭하고 성급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칭찬 받을 일이 아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이유가 없다면 오히려 비난 받을 일이다.

 

그런 이유를 그들이 주관적으로 느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웬만한 사고 능력과 도덕적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국가와 사회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쿠데타의 필요성을 생각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이 그들이 뭔가 획책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다고 하는데, 설마 그런 흉포한 짓을 저지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주동자 중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사람의 하나인 박영효(1861~1939)는 친일파 중에도 악질 친일파의 행적을 남겼다. 그가 갑신년의 동료들 중에서 특출하게 도덕적 품성이 처지는 사람이었을까? 꼭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없으므로 나는 그의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이 갑신정변 일당을 대략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윤해동은 <친일파 99인>(돌베개 펴냄)에서 "'개화'된 조국에서의 박영효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 친일의 거두로 남았단 말인가." 하고 한탄했지만, 나는 한탄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다. 1884년 이후 박영효의 행적 중에서 갑신정변보다 더 화끈한 친일 행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의 미화에 일제 식민사관이 역점을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는데, 그런 관점이 우리 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지고 잘 척결되지 않는 것은 과정을 경시하고 결과만을 중시하는 세태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화'가 아무리 필연의 대세라 하더라도, 사심이 개재한 것이 아니라면 그를 추구하는 방법이 그토록 독선적이고 난폭한 것이 될 수 없었다. 갑신정변은 임금이 임금 노릇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 못하게 된 조선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을 뿐이다

 

 

 

 

 

대원군 vs 민 씨…"나라 말아먹은 민 씨의 엽기적 행태"

 

[망국 100년] 매천이 본 대원군의 진실

 

지난 회에 대원군 정권의 성격에 관한 제 의견을 내놓은 데 대해 흥미롭게 여겨주는 독자들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통념과 다르면서 그럴싸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의견은 확실한 근거 없이 정황(情況)과 정리(情理)에 따라 짜 맞춘 것일 뿐입니다. 대원군 정권의 성격은 개항기 역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기초를 잘못 세워놓으면 이후의 진행을 바라보는 시각이 불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보완하고자 <매천야록>의 몇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은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 사료 총서>로 모습을 나타낸 이래 고종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의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대원군 집권기에 대한 '통념'도 이 자료를 중심으로 정리되어 온 것으로 보입니다.
황현은 1894년에 <매천야록> 집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이후의 일은 정밀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야록'보다 '실록'에 가깝습니다. 기록을 위해 꽤 적극적인 조사까지 한 것 같습니다. 1894년 이전, 특히 황현 자신이 약관이 나이이던 대원군 집권기에 관한 기록은 이와 달리 떠도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야사'의 성격입니다. 그래서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가 하는 것 못지않게 그런 내용이 어째서 담겨 있을까 하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죠. 번역문은 <매천야록>(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펴냄)을 이용했습니다. 허경진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필자>

 

조금 길지만, 내가 매천의 기록을 귀하게 여기는 대표적인 대목부터 하나 내놓겠다.
한 사람이 다른 곳에서 시험을 보고자 하면 증명서를 받아 와야만 했는데 이를 '월소(越所)'라 한다. 증명서가 없이 월소한 자는 비록 합격하더라도 그 이름을 뺐는데, 이를 '발거(拔去)'라 한다. (…) 이시원이 영남 좌도에서 향시를 주관하여 명망이 높았는데, 그 뒤 영남 우도에서 식년시를 주관했다. 대구는 영남 좌도의 관할 구역이었다. 대구의 응시자 가운데 이 씨 성을 가진 자가 지난번 이시원이 주관한 향시에서 뽑혔는데, 올해는 서울로 가서 시험을 보려고 새재를 지나다가 이시원이 영남 우도의 시험을 주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영남 우도로 오며 생각했다. "이분이 온 걸 일찍 알았더라면 어찌 꼭 서울로 갔으랴. 내 반드시 합격하리라."
과연 그는 수석으로 뽑혔다. 수석으로 뽑힌 자의 답안지는 곧 조리(棗籬)에 내다 걸었는데, 이를 휘장(麾壯)이라 한다. 이시원이 휘장 뒤로 가서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글은 대구에 사는 이 아무개의 글이 아닌가. 이 사람은 내가 예전에 뽑은 사람으로, 그가 아니면 이런 글을 지을 수가 없다. 내가 온다는 소문을 듣고 왔을 것이고, 또 휘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증빙 문서가 없으니 법을 어긴 것을 어찌하랴. 부득이 발거할 수밖에 없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한탄했으나 그 사람은 기뻐 뛰면서 말했다. "휘장도 세상에 있고 발거도 세상에 있다. 또한 시관의 귀신같은 감식안도 있으니, 오늘의 나처럼 기이한 인연도 있지 않으랴." 그는 눈물을 흘리며 고무되어 돌아갔다.
이런 기록이 나를 잡아끄는 힘은 그 유머 감각에 있다. 과거제의 타락을 한탄하는 글이지만, 옳은 입장에서 그른 일을 꾸짖는 경직성이 없다. 발거당한 개인의 불행을 발거의 원칙이 살아 있다는 기쁨이 덮어버리는 역설 속에 과거제의 원칙이 무너진 데 대한 한탄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다. 관념에만 기대는 엄격한 논설보다 마음의 밑바닥을 열어 보이는 이런 유머에 나는 더 신뢰가 간다.
이시원 같은 훌륭한 시관과 대비되는 엉터리 시관 이야기도 있다.
흥인군 이최응과 심순택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명관(命官)에 임명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몽매하여 '어(魚)' 자와 '노(魯)'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시권을 대할 때마다 잘되고 못된 것을 분간하지 못했으므로 운이 좋으면 급제하고 그렇지 않으면 떨어졌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시험을 주관하면 문장 솜씨가 없는 자들이 모두 좋아했다.
흥선대원군의 형 흥인군에 대한 매천의 평가는 무척 박했다.
흥인군 이최응은 아우 대원군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민승호가 이최응을 추대하여 영의정으로 삼고 대원군과 맞서도록 했다. 임금에게 아뢰기 난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최응을 시켜 임금 앞에 나아가 아뢰게 했다. 이최응이 그들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그 남은 찌꺼기를 핥아먹자 운현이 몹시 한탄했다. 운현이 그의 침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휘장을 걷어 올리고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형님이 오래도록 나오지 않으시니 수양대군 같은 음모라도 꾸미는 것입니까?" 당시 이최응은 병중임을 알려 왔다.
대원군 실각 후 이최응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은 대원군 집권기 동안 조정에 종친의 비중이 많아졌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외척의 세도를 물리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인다는 대원군의 명분은 매천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컸을 것이다.
병인년(1866) 이후에 이따금 대과(大科)를 베풀었는데, 종친에게만 응시를 허용하여 종친과라고 불렀다. 또 대동보를 만들어 본관이 완산인 이 씨는 모두 붙여 주었으니, 한번 이 족보에 오르면 사족(士族)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천민들 중에서 본관을 완산 이 씨로 고쳐 대동보에 오른 자가 잇달았다. 종친부에서 화수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참석한 자가 육, 칠만이나 되었다. 흥선군이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라를 위해 십만 정병을 얻었다." 무진년(1868)에 대종회를 열고 종친문무과를 베풀었다.
원래 대원군의 처남이면서 민비 집안으로 입양되어 민비의 오라버니가 되고 대원군 실각 후 권력을 쥔 민승호도 매천의 눈에는 흥인군 못지않게 무능한 위인이었다.
민승호는 성품이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아둔하고 잘 잊어버렸다. 하루아침에 국정을 맡다 보니 기강을 제대로 잡지 못해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곧잘 속였다. 결국 반년도 채 되기 전에 모든 법도가 해이해지고 보는 이들이 어지러워했다. 얼마 안 되어 생모 상을 당했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여막을 지키느라 대궐에 나가지 못했다. 이에 봉서로만 의견을 주고받으니 때에 맞게 정사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임금을 사사롭게 뵙는 무리가 또한 중전의 뜻에 따라 정사를 돌보니, 정문(政門)이 쥐구멍 같아지고 권력도 많이 새어 나갔다.
이에 앞서서는 대원군 실각에 대한 일반인의 반응을 적어놓았다.
운현이 정권을 잡은 것은 십 년간 안팎으로 위엄이 두루 미쳤다.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가 삼천리에 바람처럼 행해졌는데, 천둥이나 끓는 물 같아서 관리와 백성들이 무서워했으며, 관청의 법률이라면 언제나 두려워했다. 아침저녁으로 헛소문이 마구 나돌았고, 시골 사람이 서울에 오면 붙잡아 죽인다고도 했다. 깊은 산골이나 먼 바닷가의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현이 정권을 내어놓자) 서로 기뻐하며 축하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운현이 정권을 내어 놓지 않았다면 나라가 망해 오늘 같은 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씨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백성들은 그 착취를 견디지 못해 자주 탄식하며 도리어 운현의 정치를 그리워했다. 이는 후한(後漢) 백성들이 슬퍼 탄식하면서 망조(莽朝) 시절을 다시 생각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운현의 어진 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경술 국치 때 56세 나이로 목숨을 끊은 황현은 16년간 적어온 <매천야록>을 바깥사람에게 보이지 말라고 자손에게 일렀다. 일제 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기록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는 1939년 이 기록을 발견했지만 비밀에 붙였다. 해방 후에야 빛을 본 이 기록은 1955년 출판된 후 고종 시대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었다. ⓒ프레시안

 

민 씨 정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대원군 정권을 왕망에 비유한 것을 보면 대원군에 대한 비판 자세는 확고하다.

 

그가 말하는 "백성"이 아무 교양 없는 무지렁이 얘기는 아니고 명색이 선비들 얘기일 텐데, 민심의 경박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매천은 대원군의 '공포 정치'를 그려놓았다.
대원군이 나랏일을 맡던 갑자년(1864)에서 계유년(1873)까지 십 년간은 온 나라가 떨며 무서워했다. 백성들은 서로 혀끝을 경계하며 조정의 일을 감히 말하지 못했으니, 언제나 귀신이 문 앞에 와서 두드리는 것 같았다. 예전 제도에서는 교령 아래에 반드시 '왕약왈(王若曰)'이라는 글자로 첫머리를 삼았는데, 이 십 년간은 '대원위분부'라는 다섯 글자만으로 안팎으로 명이 시행되었다. 갑술년(1874)에 임금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부터 비로소 예전의 제도가 회복되었다.
사람을 쓰는 데도 공포 정치의 기준이 적용되었음을 지적했다.
이경하는 운현이 가장 부리기 좋은 사람으로 뽑혔다. 그는 대장에다 포도대장까지 아울러 맡았으므로 죄인을 처형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일찍이 운현이 이렇게 말했다. "이경하는 다른 장점이 없다. 오직 사람을 잘 죽이므로 쓸 만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경하는 사람을 마구 죽이지 않았다. 사학(邪學)이나 사주(私鑄)처럼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만 죽였다."
매천은 대원군을 비판하면서도 살림 잘한 것은 인정했다.
원자가 탄생하면서 궁중에서는 복을 비는 제사를 많이 벌였는데, 팔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냈다. 임금도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하사한 상도 헤아릴 수 없었다. 임금과 중전이 하루에 천금씩 썼으니, 내수사의 재정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조나 선혜청에서 공금을 빌려 썼는데, 재정을 맡은 신하 가운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따지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운현이 십 년간 모은 것을 일 년도 안 되어 모두 탕진했다. 이 때부터 벼슬을 팔고 과거를 파는 나쁜 정치가 잇달아 생겨났다.
매천이 대원군을 아무리 비판하려 해도 민 씨 정권의 엽기적 행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나보다. 벼슬과 과거를 팔아먹은 것은 안동 김 씨 세도 정치에서도 횡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창고지기가 주인 눈치 봐가며 빼낸 것이라면, 민 씨 정권에 와서는 주인이 나서서 마구 팔아치우는 지경이었다.
이런 대목을 보면 매천도 대원군의 개혁 정책 자체는 지지했다.
군정(軍丁) 명부에 오른 자들에게 군역을 베로 대신하게 하면서 폐단이 많아졌다. 이는 약한 백성들에게는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된 반면, 사족들은 한가롭게 노닐며 죽을 때까지 신역을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예전에 이름난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했지만 관습에 끌려 끝내 개혁하지 못했다. 갑자년(1864) 초에 운현이 이러한 백성들의 원성을 힘껏 떠맡으면서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장정 한 사람 당 이 민(緡)씩을 내게 했으니, 이를 동포전이라 했다.
서원 철폐에 대해서는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역시 유림에 몸담은 입장이어서인지 대원군의 사적 원한으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곁들인다.
만동묘는 청주 화양동에 있는데, 묘를 창건한 것은 우암 송시열의 뜻이었다. 그래서 그 옆에 우암의 사당을 세웠는데, 세상에서는 화양동서원이라 부른다. 서원을 책임지는 자들은 대개 충청도에서 행패를 일삼던 양반집 자제들로서 묵패로써 평민들을 잡아다 껍질을 벗기고 골수까지 빼내니, 남방의 좀이라 불렸다. 백 년이 지나도록 수령들은 그 무리가 두려워 죄를 따지지 못했다.
운현이 젊었을 때 이 서원에 들렀다가 유생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크게 원한을 품었다. 그리하여 정권을 잡은 뒤 그 유생을 죽이고 서원을 철폐하라고 명했다. 운현은 이것이 편파적인 것으로 비칠까 봐 전국에 있는 서원과 사묘도 모두 철폐하라고 명했다.
남겨둔 곳은 마흔여덟 군데였는데, 모두 승무명현과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만동묘를 없애고 황묘위판(皇廟位版)은 북원 대보단으로 옮겨 모시니, 화양동서원은 드디어 철폐되었다.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서원 철폐를 지지하는 뜻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원군에 대한 불신의 뜻은 거두지 않는다.
처음에 서원은 좋은 뜻으로 설치되었지만 오래되면서 점점 어지러워졌다. <심경>과 <근사록>을 읽으며 몸을 수양하던 사람도 변방에 변란이 생기면 자진해서 창을 메고 군대에 들어갔는데, 그 자손들이 많은 곡식을 쌓으면서 마음이 교활해지기 시작했다. 단청이 화려한 집에 재물이 즐비했으니, 물질이 극에 이르면 변하는 것이 참다운 이치다. 서원을 철폐하라는 명령을 어찌 그만둘 수 있으랴만 그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이때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서원에 소굴을 만들던 유생들은 마치 비상지변이라도 당한 것처럼 하루아침에 처소를 잃었다. 미쳐 날뀌고 부르짖으며 잇달아 대궐 문밖에 엎드려서 상소했으니, 양식 있는 이들이 비웃었다.

"그 명령이 운현에서 나왔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매천은 서원 철폐 정책이 정당하다고 보면서도 대원군이 이 정책을 추진한 동기에 대해서는 석연치 않은 것이다. 위 글에서 대원군이 젊었을 때 화양동서원에 들렀다가 모욕당한 일에 원한을 품은 이유를 상정했는데, 대원군에게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면이 있기는 있다. 대원군이 실각한 1년 후 민승호가 선물로 위장된 폭탄에 목숨을 잃은 것은 동기와 수단 양쪽에서 대원군이 의심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복수심이 강하고 복수의 수위를 잘 조절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일이다.
서원 철폐 후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 기록을 남길 때 매천이 대원군의 개혁정책에 찬성하면서도 석연치 못한 마음을 보인 점이 두드러진다. 대원군 실각 후 나라 꼴이 더 엉망으로 되는 것을 보며 백성들이 대원군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그 자신이 적었지만, 그는 대원군 정권의 근본적 한계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직설적으로 가리킨 것은 없다. 대원군의 노선이 왕도의 정치 철학에 이르지 못한 패도의 정치 공학에 머무른 것으로 매천이 본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나라 말아먹은 '안동 김 씨'…진심이었을까?

 

[망국 100년] 실종된 왕권

 

안동 김 씨 집권기에 조선의 나라꼴이 어떠했는지에 관해서는 엽기적인 이야기가 수없이 많거니와, 이조원(1758~1832)이라는 한 인물이 말년에 겪은 일에서 당시 상황을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가 1792년 문과 장원 후 35년간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걷다가 1827년 2월 호조 판서에서 봉조하로 물러난 것은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에 나서기 열흘 전의 일이었다.
다음 달에 서유규라는 자가 격쟁(擊錚)을 하여 이조원이 그 13년 전에 역모를 꾀한 일이 있다고 고발했다.

 

당시 서유규의 아비인 초산 부사 서만수가 탐학죄로 옥에 갇혔는데, 서만수는 1814년에도 강동 부사로 있다가 평안 감사였던 이조원의 고발로 파직된 일이 있었다. 서유규는 아비가 이조원의 죄를 알고 있어서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이조원 일당이 아비를 탄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역모 사실을 아는 서만수가 고변도 하지 않고 있다가 죄인들의 음모에 희생당하고 있다?

 

탐학죄로 한 번 파직된 수령이 다시 관직을 얻는다는 것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단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던 모양인데, 이후 일의 진행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3월의 일에 관해서는 <순조실록> 27년(1827) 3월 29일자에 이런 기사가 있다.
대호군 김기후가 상서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의 나이 구질(九?)에 가까워 의관을 바르게 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중에 삼가 듣자니, 엄수(嚴囚)한 죄인 서만수의 아들 서유규가 징을 쳐서 원정을 하였는데, 내용인즉 그가 봉조하 신 이조원을 나무라고 욕하는데 매우 장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 지금 스스로 중죄에 빠져서 방헌(邦憲)에 의하여 장차 처벌을 받게 된 즈음에, 문득 신의 성명을 끌어내어 신의 술책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등의 말로써, 애매하게 무함하고 함부로 감히 할 수 없는 말과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을 보태어, 갑자기 신의 집안 멸망시키려고 한 것은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서만수는 중죄를 범한 죄수로서 자식을 내어 보내어 징을 울리게 한 것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게다가 감히 할 수 없는 말과 차마 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방자스럽게 남을 무함하여 경에게까지 미쳤으니 말하기도 통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중에 머물러 있으니 경은 번거롭게 진달할 필요가 없다. 내가 이미 그의 거짓됨과 흉패한 정상을 다 알았으니, 다시는 입에 올리지도 말고 장주(長奏)에도 올리지 말라." 하였다.

효명세자는 이 고발을 무시했고, 서만수는 4월에 유배되었다가 5월에 죽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몇 달 후 다시 불거졌다. 8월 4일에 서유규가 다시 격쟁을 했고, 세자는 그를 즉각 유배에 처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형조 판서와 참의가 그 날로 고발 내용의 조사를 청한 데서 시작해 3사가 총동원하여 이조원의 국문을 청하고 나선 것이다. 같은 내용은 서면으로 올리라 해도 모두 세자와의 대면을 요구하는(請對) 인해전술의 압박으로 나왔다. 세자는 이에 정면 대응, 한동안 체차와 사적 삭제, 유배 등 징계 처분에 바빴고, 그 결과 3사가 텅 비다시피 되었다고 한다.
형조 상서 이후 논란이 계속되던 끝에 7일 후 거물급인 대호군 조정철이 이조원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상서를 올리면서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튿날 거물 중의 거물 김조순이 가세하면서 세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1814년에 있었던(또는 있었다고 주장된) 일의 내용은 <순조실록> 여러 곳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로만 표현되어 있다. 앞뒤를 맞춰 추측컨대 순조의 병이 심할 때 유사시에 대비한 의논 중에 꼬투리 잡힌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말을 했냐, 안 했냐, 일종의 진실 게임인데, 언론이 총동원되어 혐의를 주장한 끝에 안동 김 씨 영수 김조순이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8월 12일자 <순조실록> 기사는 이렇다.
영돈녕 김조순이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어제 중신 조정철의 상서를 보건대, 이조원의 갑술년 겨울의 패설과 흉서를 성토하기를, '그때의 정승이 서로 편지를 왕복하여 엄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였고 신도 그 일을 미리 알았다.'고 운운하였습니다. (…) 대체로 사람을 악역(惡逆)으로 단정하는 것은 천하에서 가장 신중히 해야 할 일인데, 신이 이에 대하여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상세히 알지 못하는 일을 가지고 그 사이에서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 흉서를 신이 직접 보지 않았는데, 신이 어찌 감히 이조원에게 죄가 없다고 하겠으며, 신이 입으로 엄히 배척하지 않았는데 또 어찌 감히 이조원에게 이런 사실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대체로 이 일의 긴요한 점은 흉서가 있었느냐의 여부와 엄히 배척한 일이 있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데, 이에 따라 이조원이 귀신이냐 사람이냐가 저절로 판단될 것입니다. 대신에게 하문하여 처리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차자 내용이 이러하니, 한번 대신들에게 묻겠다." 하였다
.
결국 세자는 부왕의 재가를 얻어 8월 16일에 이조원을 유배에 청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도 국문 요청이 쏟아졌지만 유배지를 원악도(遠惡島)로 바꾸는 양보에 그쳤다. 흑산도에 안치되었던 이조원이 효명세자가 죽은 후인 1832년 3월 유배지에서 죽자 그의 죄를 더하자는 논의가 조정에 일어나 시체의 목이 잘렸다. 그의 이름은 실록에 꼭 한 차례 더 나타난다. <헌종실록> 원년(1835) 1월 17일자.
이조원의 죄명을 효주(爻周)하고 김기서를 방송(放送)하라고 명하였다.
"효주"란 지워버린다는 뜻이다.

 

김기서는 이조원의 '역모'에 연루된 사람이었다. 이조원의 옥사는 왕이 바뀌자 바로 무효로 돌아갈 만큼 허술한 것이었다.
부패로 단죄된 일개 지방관의 아들이 원로 대신의 13년 전 '역모'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손에 넣었을까? 그리고 뭘 믿었기에 격쟁을 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일까? 한명숙 전 총리에게 뇌물을 줬다고 주장하는 곽영욱보다도 더 황당한 고발자다. 그런데 이 고발이 결국 먹혀들어 (고발자 자신은 귀양을 갔지만) 조선조 최고의 관복을 누린 사람의 하나이며 당대의 명필로도 이름을 날리던 이조원이 귀양길에 오른다. 그리고 5년 후에는 시체의 목이 잘리는 수모를 당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에 비하면 훌륭한 법치국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현상이 3사 관원들의 행태다.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3사는 조선 왕조에서 왕권의 보루였다. 이조원에게 설령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탈 없이 고위직을 지켜 온 원로대신의 13년 전 일이 국가에 대해 '강력하고 현존하는' 위협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일에 3사가 총력을 기울여 쏟아 부은 극간(極諫)은 왕과 세자를 몰아붙이는 '정치 공세'였다. 왕권에 아무 보루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것이다.
이조원의 옥사는 국왕에게조차 세도 정치에 대항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효명세자는 3년간의 대리청정을 통해 왕권 부활을 꾀했으나 결국 의문스러운 죽음에 이르고(1830) 세자의 노선에 호응한 신하들은 그 후 모두 혹독한 보복과 탄압을 받았다. 4년 후 세자의 아들이 8세의 나이에 왕이 되었지만 15년 재위 기간 동안 안동 김 씨 세도에 대항할 수 있는 길은 똑같은 성격의 경쟁자 풍양 조 씨 세력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 "치세지능신(治世之能臣), 난세지간웅(亂世之奸雄)"은 김조순(1765~1832)에게도 적용되는 말이 아닐까? 정조의 강한 영도력 아래서는 유능한 인재로 촉망받던 그가 안동 김 씨 60년 세도를 일으키게 된 것은 야심보다 형편에 몰린 일이었던 것 같다. 조선 왕조를 망치는 데 누구보다 큰 역할을 맡았지만, 그의 본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프레시안

 

헌종 때가 되어서는 왕조의 틀조차 지키지 못하게 된 상황을 동궁(東宮)이 빈 데서 알아볼 수 있다. 1849년 헌종이 23세에 죽을 때까지, 그리고 1863년 철종이 33세에 죽을 때까지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채로 있었던 것은 정상적 왕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계자의 위치를 분명히 해놓는 것은 계승을 둘러싼 분쟁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제왕 교육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었다.
병약한 헌종이 재위 15년이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했다면 입양으로라도 세자나 세제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입양 대상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이하전(헌종이 죽을 때 8세)을 안동 김 씨 측에서 꺼렸던 모양이다. 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안동 김 씨는 순원왕후 김 씨를 통해 전연 예상 밖의 인물 이원범을 후사로 정했다. 이하전은 13년 후 21세의 나이에 역모 혐의로 사사당했고, 고종 즉위 후에 신원되었다.
왕실의 예법은커녕 양반다운 교육도 받지 못한 '강화도령'을 왕위에 앉힌 것은 똑똑하고 힘 있는 왕을 귀찮아 한 당시 세도가의 취향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전주 이 씨 집안에서 만만한 인물 골라온다고 골라온 것이 죽은 헌종의 아저씨 항렬이었다.

 

지난 회에 이야기한 조선조 마지막 예송 '천묘(遷廟)' 논쟁이 여기서 파생되었다. 종묘에는 지금 왕의 4대조까지를 소목(昭穆)이라 하여 별도의 자리에 모시는데, 철종이 즉위하자 4대조를 어디에서 자를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집안 항렬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왕위 계승을 기준으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 이 논쟁도 시비에 관계없이 정통 노론을 자임하는 안동 김 씨 세력이 반대파를 몰아내는 데 이용되고 말았다.
철종이 33세에 죽을 때까지 후사를 세우지 못한 것은 진짜 심했다.

 

철종은 아들을 다섯이나 얻었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종실 중 유력한 후보였던 이하전은 사사당했다.

 

권력 독점이 절정에 달한 안동 김 씨는 "이대로!" 분위기에 빠져 있었고, 풍양 조 씨를 중심으로 한 견제 세력과의 긴장 관계에만 몰두해 후사를 세우는 것과 같은 국체의 기본까지 소홀히 하고 있었다.
60갑자의 마지막 해인 계해년(1863) 연말을 앞두고 철종이 후사 없이 죽었을 때 조선 왕조는 멸망에 아주 가까이 가 있는 상태였다. 관료 체계는 더 이상 부패할 여지가 없다고 할 만큼 철저하게 부패해 있었고 민란이 무차별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북경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유린당한 소식도 들어와 있었다.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풍양 조 씨 측의 획책을 방관하며 안동 김 씨 권력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주자학의 덫에 걸린 東道西器論

 

[망국 100년] "서양 오랑캐가 중국 문명에 감화될 것이니…"

 

개화 사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박규수(1807~1877)는 1848년 관직에 나아간 이래 185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1861년 중국 사행, 1862년 진주민란 안핵사 등 특이한 임무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보이고 이후 10여 년간 조선의 정책, 특히 대외 정책의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마침 그의 활동 전모를 잘 보여주는 김명호의 <환재 박규수 연구>(창비 펴냄)가 나와 있으므로 그의 활동을 통해 19세기 중엽 조선의 상황을 살펴본다. 별도로 표시하지 않는 자료는 모두 이 책에서 재인용하는 것이다. 진주 안핵사로 있을 때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규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 하나를 우선 옮겨놓는다.
지금의 군자들은 항상 말하기를 "기강이 서 있지 않다"고 한다. 무릇 기강이란 천하에서 가장 허약하고 취약한 물건이다. 스스로 설 수 없으며, 반드시 충실히 길러주고 뿌리박게 도와야만 겨우 설 수 있다. 예의와 염치로 충실히 길러주고, 충후와 은신으로 뿌리박게 도우며, 상벌과 호오(好惡)로써 채찍질하고 격려한 뒤라야 겨우 일어서서 수백 보를 갈 수 있지만, 그래도 그중 한 가지라도 빠져 기우뚱거리고 자빠질 우환이 금세 닥칠까 두려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충실히 길러주고 뿌리박게 도와주는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기강에 대해 오로지 "서 있지 않다"고만 나무라니, 가강에게 입이 있다면 "아아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들은 우리 역대 임금님들이 고생하며 길러낸 적자(赤子)이다. 지금은 제대로 입히고 먹이지 못할 뿐더러 가르치지도 못해서, 마침내 예의 법도를 알지 못하게 되어 웃어른에게 성을 냈으니, 그 죄는 매질해야 마땅하나 측은한 생각이 드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도륙하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어질지 못하므로 지혜롭지도 못한' 자일 따름이다. 지금 도(道) 전체가 모두 동요하고 이웃 도 역시 동요하는데, 이는 무슨 까닭일까? '도륙' 두 자로 처리해버리고자 한다면 아마 어려울 것이다.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친다'는 것은 이 경우를 말한 것이로다! 한심하고 한심하다! 어쩌면 좋을까, 어쩌면 좋을까!

형제 간에 마음을 털어놓은 이 글 한 대목만 보더라도 예의 법도의 원리를 생각하며 당시 관료층의 편의주의적 폐단을 걱정한 정대한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19세기 초·중반 조선의 상황을 거울삼아 비춰보기에 적합한 인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바로 이 안핵 사명을 둘러싼 시비에서 박규수의 또 한 가지 측면이 나타난다. 그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민란에서 양반층의 역할에 깊은 우려를 가지고 이웃 여러 고을에 보낸 관문(關文)에도 이를 표명했는데, 이것이 영남 사림에 대한 모욕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의 파당성에 대한 비판이었다.
1854년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갔을 때 박규수 자신이 이런 비판의 소지를 심어놓았었다. 그가 감사 조석우를 탄핵한 한 가지 이유는 자기 고조할아버지 조하망(1682~1747)의 문집을 공금으로 간행했다는 것이었고, 특히 그 문집 중에 소론 영수 윤증을 기리는 글에 송시열을 비난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을 적시했다.
이를 계기로 조석우에 대한 규탄이 널리 일어나 조석우는 유배에 처해지고 조하망의 관직까지 추탈되었다. 또 박규수가 이 때 건의한 주요 조치 하나가 무신란(1628) 진압에 공을 세운 감사 황선의 사당 복구와 사액(賜額)이었다. 영남 사림, 특히 소론 계열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찍힐 만한 행적이었다. (무신란은 경종 독살설에 의거해 소론 세력 중심으로 일으킨 내란이었다.)
암행어사로서 민생과 관련된 박규수의 문제 파악과 대책 제시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리고 절친한 벗 서승보의 아버지 밀양 부사 서유여를 봉고 파직함으로써 절교까지 당한 데서는 편파성을 피하려는 노력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실무 차원에서는 엄정했지만 이념 차원에서는 파당성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암행어사로 나가기 전 조선조 마지막 예송이라 할 수 있는 천묘(遷廟) 논쟁에서도 그는 여지없는 당색을 보여준 바 있다.
여기서 박규수의 파당성을 지적하는 것은 이것을 그의 개인적 인격보다 당시의 정치적 환경 문제로 보기 때문이다. 그의 출사(出仕)가 늦은 이유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는 문제다. 그가 젊었을 때 효명세자(지난 회에 "소명세자"로 잘못 올린 것을 여기서 바로잡는다.)의 지우를 입었고, 세자의 때 이른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출사를 단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마침내 출사한 때가 효명세자 대리 청정기 이후 처음으로 안동 김 씨 세력이 퇴조한 때였으며, 그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풍양 조 씨 조종영이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의 진퇴는 당파의 출입에 맞춰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효명세자와의 개인적 의리보다 관직에서 뜻을 펼 수 있는 여건에 따라 출사를 결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당대의 큰 인재로 널리 알려진 인물도 당파의 지원 없이 출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가학(家學)에 대한 그의 집착에서도 사사로운 기준으로 입지를 마련해야 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그가 박지원의 손자라는 점은 크게 인식하지만, 그가 할아버지 박지원 못지않게 7대조 박미(1592~1645)를 내세운 사실은 소홀히 생각한다. 일세의 문장가였던 박미를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여기기도 했겠지만,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받았던 그를 기회 있을 때마다 내세운 데는 당파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하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 1873년 박규수가 우의정에 임명될 때 그 아버지 박종채에게는 영의정, 할아버지 박지원에게는 좌찬성이 추증되었으니 조상의 뒤를 이은 면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가 박지원의 북학을 이어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정통론에 사로잡혀 외국군에게 유린당한 북경에 가서도 사교 활동에만 몰두하던 손자의 모습을 그 할아버지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프레시안

 

그의 파당성을 인식하는 것은 그의 정세 인식을 이해하는 데도 필요한 일 같다.

 

그는 관직에 나서기 전부터 <해국도지> 등 당시의 첨단 정보를 가지고 정세 변화 파악에 애쓰고 있었다. 그 정세 인식의 결과인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그의 파당적 성향이 개재된 것은 아니었을까?
박규수가 관직에 나설 무렵 윤종의의 <벽위신편>에 붙인 글 "벽위신편 평어"에 그 시점에서 그의 세계 정세 인식이 나타나 있다. 대부분의 새로운 팩트(fact)는 <해국도지>에서 습득한 것인데, 팩트를 넘어선 해석에 그의 의견이 나타나는 것이 있다.
첫째는 서양의 정교한 기술이 원래 중국에서 발원한 것이라 하는 '서학중원설(西學中源說')이다. 주나라 말의 혼란기에 주인(疇人, 기술자)의 자손들이 흩어진 한 줄기가 서양 문명의 원류가 되었다고 하는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청나라 역산학자들이 서양 기술 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둘째는 영국인과 미국인 선교사들이 말라카와 싱가포르에 만든 중국 연구기관의 존재를 중시하여, 서양인들이 언제고 중국 문명의 큰 이치를 깨달아 감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벽위신편 평어"의 마지막 대목은 이런 내용이다.
중국의 서적이 해외의 싱가포르와 말라카로 날로 수출되어, 이를 번역하고 교습하는 중국인과 서양인이 노상 수천, 수만에 이른다. 지금 저 서양인들의 사서(邪書)를 탈취했다가 수백 년이 지난 뒤 다시 그들의 사서와 대조해보면, 그때의 사설이 필시 오늘날의 사설보다 한층 교묘해져 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혹시 저 서양인들이 중국의 유가 서적을 오래도록 열심히 학습하다 보면 홀연히 한 걸출한 인물이 출현하여 문득 크게 깨닫고 하루아침에 올바른 길로 돌아올는지도 알 수 없다. 이러한 몇 가지 일은 훗날을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그것이 적중할지 아니할지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두 의견 다 유가 사상의 우월성에 대한 독단적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독단적"이라 함은 그 우월성에 대해 "왜?"도 "얼마나?"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십여 년 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북경을 유린한 시점에서(1861) 박규수가 문안사 사행에 참여한 것은 정세를 직접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때도 그의 독단적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북경에 체류하며 비변사에 보낸 장계를 보면 그는 상황을 최대한 낙관하고 있었다.
서양 오랑캐는 그 의도가 토지에 있지 않으며, 통상과 포교에 전력할 따름이다.

 

북경에 들어온 후 친왕의 궁정을 점거한다거나 주민의 집을 산다거나 하여, 사는 집을 넓히는 것이 마치 영구히 안주할 계책인 것 같다. 식구를 거느리고 가구를 운반하여 오는 자들이 날마다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우선은 침탈로 인한 소요를 일으키는 폐단은 없다. (…) 소위 양교(洋敎)는 비록 교관(敎館)을 세우고 해금이 되었어도 호응하는 자가 없다. 오직 건달 무뢰배 중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음을 즐기고 재물을 대주는 것을 탐하여, 몰래 학습하는 자가 간혹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귀국 직후 친척 박원양에게 보낸 편지(7월 9일자)에 적힌 낙관론은 조금 심했다.

 

황제가 외국 군대를 피해 북경을 도망친 것을 관례적 피서행에 갖다 댄 것은 봉대침소라 할까?
서양 오랑캐가 요구하는 바는 곧 배상금 독촉과 시장 개방 등의 일에 불과했다. 그러나 허락을 받지 못하자 군사를 일으켰고, 전쟁이 계속된 지 오래다 보니 주화와 주전의 양론이 일어나는 것은 자고로 그런 법이다. (…) 군주란 멀리 도피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주화파에게 이끌려 잠시 그 예봉을 피하면서, 한편으로 화의를 허락하고 조약 체결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자 오랑캐가 곧 철군하여 모두 떠나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약간의 상인 무리이다.
황제가 이미 열하에 도착했는데, 그곳 또한 생소한 지역은 아니다. 풀이 푸르면 떠났다가 풀이 시들면 돌아오니, 강희(康熙) 이래 다 그렇게 했다. (…) 황제가 떠난 것은 미상불 서양 오랑캐의 소요에 지나치게 겁을 먹은 것이었지만, 그가 잠시 열하에 머물고 있는 것은 반드시 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문안사(問安使)는 원래 함풍제가 피신해 있던 열하를 향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열하까지 올 필요가 없다고 하여 북경에 오래 머물었고, 부사 신분의 박규수는 그 동안 중국 인사들과의 교류에 공을 들였다. 이 때 중국 인사들과 나눈 글 속에서도 정도(正道)의 승리에 대한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그의 북경 체류에서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이 명나라 고적 방문에 중점을 둔 것으로, 그의 존명(尊明)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김명호가 지적했다. 이 존명 의식과 그의 친청적 자세 사이의 '모순'을 김명호는 문화 중심적 화이관에 따른 현실적 대청관이라고 해명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박규수의 화이관에 별개의 두 층위가 정리되지 않은 채 병존했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명쾌할 것 같다. 그 하나는 박지원에게 이어받은 현실적 대청관이고, 또 하나는 노론 정통론에 따르는 소중화주의다. 본인에게 굳이 물었다면 명나라의 정통성이 조선과 청나라를 포괄하는 동아시아 문명권으로 이어졌다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청나라 지도부는 북경 함락의 충격으로 인해 '동치 중흥'이라 불리는 양무 운동을 시작했다. 양무 운동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나 30여 년 후의 변법 운동에 비해 피상적 수준에 그쳤다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의 중국으로서는 획기적인 태도 변화였다. 이에 비해 박규수는 공적 문서에서도 사적 문서에서도 훨씬 더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와 그의 문인 김윤식이 양무 운동에 호응하는 정책을 나중에 조선에서 추진하기는 했지만, 중국에서 먼저 진행된 양무 운동을 따라가는 소극적 태도를 넘어서지 않은 것 같다.
박규수는 같은 시기 조선 지식인 가운데 세계 정세의 변화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고 가장 첨단 정보를 검토한 사람의 하나였다. 그리고 변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해서 개화파의 선구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양무 운동이 터져 나올 정도로 큰 충격을 받고 있던 북경 현장에 가서도, 서울에 돌아와서도 동시대 중국의 주류 지식인들만큼 강한 위기의식을 보여주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형이상학적 담론에 매몰된 조선 후기 주류 성리학의 폐쇄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박규수가 일찍 <황조경세문편>을 구해보고 "고염무에서 위원으로 이어지는 청조 경세학의 성과에 접함으로써, 은둔 초기의 복고적인 예학 연구로부터 서세동점의 세계사적 격변에 대처하기 위한 경세학으로 점차 학문적 방향 전환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김명호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노론이 매달려 온 주류 성리학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박규수가 뛰어난 재능과 빼어난 덕성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은 김명호의 책에서 여러 모로 확인된다. 문제는 그런 인물조차 넘어설 수 없었던 정치적·사상적 장벽의 존재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소홀히 한 경세학은 실무를 처리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주자를 제쳐놓고라도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는 길을 찾는 것이 경세학의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