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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베트남 전쟁(중월전쟁)의 진실
중국 - 베트남(중월전쟁)간의 전쟁은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8일에 벌어졌던 국지전이다.
왜 같은 공산국끼리 전쟁이 났나? 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부터 남만(남쪽의 버러지)으로 치부당한 베트남으로서는 영토를 유린하고 조공을 요구하는 중국이 달갑지 않았고 베트남에 들어와 자본을 챙기는 화교를 싫어했다.
아무튼 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시아의 공산강국으로 동남아 국가들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과의 월남전 당시 중국계 화교들은 베트남을 오가며 장사를 했고 베트남이 소련의 지원을 받자 중국은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실은 외화획득이 주 목적이지만) 대규모 지원을 하게 된다.
1975년 북베트남 군이 남베트남을 통일하고 베트남 공산정부를 구성한다.
이것은 중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미국과 화해무드로 흐르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치고 동남아의 공산맹주로 나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된 것은 중국의 지원을 받는 폴 포트의 캄보디아 정권이 화교를 이용해 베트남의 경제권을 압박하자 베트남 공산군은 캄보디아로 진격해 친중계의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군을 몰아내고 친 베트남 캄보디아 정권을 세우게 된다.
1978년 5월 베트남은 중국의 자금줄인 자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과 화교들의 대량 추방하였고, 같은해 연말에는 중국 윈난성(雲南省)과 광시성(廣西省)의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 베트남은 중소국경분쟁과 이념차이로 갈등을 겪던 소련과 친선관계를 강화한다.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는 중국을 반동주의자라 욕하게 되자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고 그것을 소련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 욕하며 소련과 베트남의 대소패권주의(大小覇權主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이 전쟁은 중·소 간의 산물라고도 일컬어졌다.
하지만 베트남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고 오히려 무안만 당하게 되자 중국은 더 이상 참을수 없게 된다.
깝치는 베트남을 한 번 때려버려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중월 국경에서는 여러 번 소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되고 1979년에 들어서자 양 국은 군대를 국경선에 증강시켰고 마침내 이런 일련의 사태에 격분한 등소평(鄧小平)은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하였고, 국경 지대에 56만의 대군을 집결시켰다. 1979년 2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국경을 넘어 침공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 사실은 대외적인 발표가 없어 다른 나라들은 몰랐는데 미국 인공위성의 첩보로 전투가 벌어지는 게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에 중국은 대외적으로 이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이고 영토획득을 위한 전쟁은 아니다라고 발표한다.
6만정도의 중국군은 국경의 산악지대를 밀어버리고 베트남 국경 안쪽 30km내의 소도시들을 목표로 진격한다.
중국군은 5개사단 약 7만명의 병력으로 구경선으로부터 20-30Km 떨어진 인구 3~5만 정도의 작은 도시인 베트남의 몽카이, 하치만, 라이차우 3도시를 목표로 주공격 루트를 삼아 공격 한다.
1979년 2월 20까지 중국군의 침공군 병력은 더욱 늘어나 63형 전차 수백대를 포함하여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중국군은 후방에 580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이들 모든 병력을 운남성 일대로 집결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경선 일대는 주로 1,000~1,500m에 이르는 산악과 아열대림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중국군은 인해전술에 기초하여 아열대 산림을 벌채하가면서 길을 뚫고 이 뚫린 길로 병력을 투입하는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의 진지를 압박한다. 베트남으로서는 국경산악 지대가 돌파당하면 국경지역으로부터 160Km밖에 떨어져 있지않은 수도 하노이가 위태로워지며 이 산악지대를 벗어나면 홍 강 삼각주에 위치한 하노이까지는 방어가 불가능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지리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군으로서는 이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주력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병력을 대량투입하여 무조건 전진돌파하는 중국군의 전술에 맞서 베트남군과 베트남 지방예비군들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산의 능선을 중심으로 북사면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완강히 항전한다.
중국군은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베트남 진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많은 전차와 보병을 투입하지만 오히려 개전 24시간만에 63형 전차 13대를 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들 63형전차는 대개 베트남군 보병이 발사한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파괴되었다.
중국군과 베트남군은 쌍방간에 포병의 많은 화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산악과 삼림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상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초조해진 중국군은 2월 20일 목표한 대부분의 베트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는데 실패하면서 추가로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결국 1978년 2월 24일에는 20만명의 대공세 앞에 베트남의 돈단과 몽카이 방어진지가 돌파 당한다. 그러나 중국군은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하기까지 2,000명의 전사자와 40대 이상의 전차와 차량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베트남군은 완강하고도 적절한 작전을 펼쳐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비해 1/3 수준인 840명 사상이라는 병력손실에 그칠 수 있었다.
1978년 2월 27일 부터 베트남은 반격에 나선다. 1978년 2월 28일 베트남군은 중국군에게 빼앗겼던 돈단을 다시 탈환한다.
베트남 병사들이 중국군의 숫적 위력 앞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중국 수뇌부에게 이 탈환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고 한다. 공군의 동원은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탓인지 양측에서 많이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중국군의 J6(Mig-19의 중국형)와 베트남군의 A-37이 일부 출격하여 주로 소규모 대지 공격에 투입되었는데 중국군의 J6이 15대이상 격추된데 비하여 베트남군이 1/3수준인 5-6대 정도를 잃었다.
1978년 3월 1일부터 중국군은 6.25때 투입되었던 정예의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 시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강화한다. 중국군은 6.25 때처럼 인해전술에 기초한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 진지를 파상공격하여 차례로 공략하게 된다. 베트남군은 몇몇 거점에서는 전멸상황까지 가면서도 항전하면서 전략적 철수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중국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탱할 수 없을 때에는 퇴각하는 방법이었다.
6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집중하여 어렵게 란손 시를 점령한 중국군은 이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그리고 1978년 3월 2일에는 국경선에 위치한 라오카이도 파괴한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안된 중국군은 이미 미군과 전투를 치뤄 본 베트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국을 괴롭혔던 정글게릴라전의 난해함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구식 소총으로 무장한 중국군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또 미군에게 노획한 탱크나 무기도 이때 등장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계속 치고 빠지기 게릴라 전법으로 중국군을 괴롭혀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 때 소련이 베트남을 계속 건드리면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유격대로 참전하겠다고 중국을 협박한다.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될 수 있는 상황에 빠진 중국은 결국 국경 30km지점까지 들어갔다가 전쟁초반에 대외적으로 선전한대로 징벌이 끝났으니 철군한다고 발표하고 전쟁을 끝낸다.
피해는 중국이 5천 정도를 잃었고 베트남이 4천이하를 잃었다고 추정된다. (물론 공식적인 양측의 발표는 만 단위 이상이지만)
<베트남 군에게 포로가 된 중국군 병사들>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했으나,
실제로는 처음에 의도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군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국경선의 확정을 둘러싸고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1989년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평화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협정이 체절되었고, 중월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와중에서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루트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를 해상을 떠돌기도 했다.
전쟁은 전쟁이지만 국제적으로 중국은 체면을 심하게 구겼다.
중국군 장비와 전술이 낙후됐다는걸 증명하고 문화혁명으로 인한 숙청으로 고급지휘관이 없어져 부대지휘관들은 실전경험이 없어 현대전에 무능했고 병사들은 훈련받지 못한채 항일유격대처럼 막무가내식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비판이 군부에서 나오게 된다.
베트남은 나름대로 중월전쟁이 끝났을 때 베트남은 세계 최강의 국가라며 뽐냈었다.
확실히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전쟁으로 생활이 궁핍한 가운데 베트남 국민들은 공산치하 정책아래서는 못 살겠다며 나라를 버리고 보트피플이 되거나 난민이 부지기수로 늘어나 국제문제가 되었고 한동안 경제상황이 나빠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소련 붕괴 후 베트남도 자유주의 경제정책도입으로 다시 동남아의 근대화로 부상한다.
이 후 각성한 중국은 군대의 현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1979년 4월 18일부터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확정 교섭을 개시하였으나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주장하는 중국과 이를 거부하는 베트남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려 교섭의 주목적인 국경선 확정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공산국 사이에 최초로 일어난 이 전쟁으로 파생된 긴장관계는 1988년 1월 두 나라가 국경분쟁종식에 합의함으로 해결되는듯 싶었지만 상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난사군도(南沙群島)에서 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양국 분쟁은 1989년 9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자 양국 사이는 긴장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분명한건 중국은 지금도 베트남을 고깝게 여기고 베트남은 중국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에 대해서 침략을 사죄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측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이 전쟁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하며 현재까지 사죄를 거부하고 있다.
중국 - 베트남(중월전쟁)간의 전쟁은 1979년 2월 17일부터 3월 18일에 벌어졌던 국지전이다.
왜 같은 공산국끼리 전쟁이 났나? 하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옛부터 남만(남쪽의 버러지)으로 치부당한 베트남으로서는 영토를 유린하고 조공을 요구하는 중국이 달갑지 않았고 베트남에 들어와 자본을 챙기는 화교를 싫어했다.
아무튼 7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은 아시아의 공산강국으로 동남아 국가들을 얕보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과의 월남전 당시 중국계 화교들은 베트남을 오가며 장사를 했고 베트남이 소련의 지원을 받자 중국은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실은 외화획득이 주 목적이지만) 대규모 지원을 하게 된다.
1975년 북베트남 군이 남베트남을 통일하고 베트남 공산정부를 구성한다.
이것은 중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가져다 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닉슨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미국과 화해무드로 흐르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베트남이 미국을 물리치고 동남아의 공산맹주로 나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된 것은 중국의 지원을 받는 폴 포트의 캄보디아 정권이 화교를 이용해 베트남의 경제권을 압박하자 베트남 공산군은 캄보디아로 진격해 친중계의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군을 몰아내고 친 베트남 캄보디아 정권을 세우게 된다.
1978년 5월 베트남은 중국의 자금줄인 자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주민과 화교들의 대량 추방하였고, 같은해 연말에는 중국 윈난성(雲南省)과 광시성(廣西省)의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기에 이른다.
또 베트남은 중소국경분쟁과 이념차이로 갈등을 겪던 소련과 친선관계를 강화한다.
미국과 유대를 강화하는 중국을 반동주의자라 욕하게 되자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비난하고 그것을 소련의 지원에 의한 것이라 욕하며 소련과 베트남의 대소패권주의(大小覇權主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혀
이 전쟁은 중·소 간의 산물라고도 일컬어졌다.
하지만 베트남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고 오히려 무안만 당하게 되자 중국은 더 이상 참을수 없게 된다.
깝치는 베트남을 한 번 때려버려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놈펜을 공격하는 베트남군
베트남에 투입전 사열중인 중국군
중국군 포로를 감시하는 베트남 여성 민병대원
중국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베트남 여군들
교전중인 중국군
교전중인 베트남군
공격 대기중인 중국군
베트남 국경 도시를 소탕중인 중국군
취사중인 중국군
중월전쟁의 영웅 劉保健.
중월 국경에서는 여러 번 소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지게 되고 1979년에 들어서자 양 국은 군대를 국경선에 증강시켰고 마침내 이런 일련의 사태에 격분한 등소평(鄧小平)은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하였고, 국경 지대에 56만의 대군을 집결시켰다. 1979년 2월 17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베트남 국경을 넘어 침공하게 된다.
전쟁이 일어난 사실은 대외적인 발표가 없어 다른 나라들은 몰랐는데 미국 인공위성의 첩보로 전투가 벌어지는 게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에 중국은 대외적으로 이는 베트남에 대한 징벌이고 영토획득을 위한 전쟁은 아니다라고 발표한다.
6만정도의 중국군은 국경의 산악지대를 밀어버리고 베트남 국경 안쪽 30km내의 소도시들을 목표로 진격한다.
중국군은 5개사단 약 7만명의 병력으로 구경선으로부터 20-30Km 떨어진 인구 3~5만 정도의 작은 도시인 베트남의 몽카이, 하치만, 라이차우 3도시를 목표로 주공격 루트를 삼아 공격 한다.
1979년 2월 20까지 중국군의 침공군 병력은 더욱 늘어나 63형 전차 수백대를 포함하여 10만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중국군은 후방에 580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이들 모든 병력을 운남성 일대로 집결 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국경선 일대는 주로 1,000~1,500m에 이르는 산악과 아열대림 지역으로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중국군은 인해전술에 기초하여 아열대 산림을 벌채하가면서 길을 뚫고 이 뚫린 길로 병력을 투입하는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의 진지를 압박한다. 베트남으로서는 국경산악 지대가 돌파당하면 국경지역으로부터 160Km밖에 떨어져 있지않은 수도 하노이가 위태로워지며 이 산악지대를 벗어나면 홍 강 삼각주에 위치한 하노이까지는 방어가 불가능한 평야지대가 펼쳐지는 지리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베트남군으로서는 이 산악지대에서 중국군의 주력에게 타격을 입힐 필요가 있었다. 무식할 정도로 병력을 대량투입하여 무조건 전진돌파하는 중국군의 전술에 맞서 베트남군과 베트남 지방예비군들은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고 산의 능선을 중심으로 북사면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완강히 항전한다.
중국군은 엄청난 병력의 손실을 감수하고라도 베트남 진지를 공략하기 위하여 많은 전차와 보병을 투입하지만 오히려 개전 24시간만에 63형 전차 13대를 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이들 63형전차는 대개 베트남군 보병이 발사한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파괴되었다.
중국군과 베트남군은 쌍방간에 포병의 많은 화력을 동원하기도 하였지만 산악과 삼림으로 이루어진 지리적 특성상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에 초조해진 중국군은 2월 20일 목표한 대부분의 베트남군의 방어진지를 돌파하는데 실패하면서 추가로 10만명의 병력을 투입하게 된다. 결국 1978년 2월 24일에는 20만명의 대공세 앞에 베트남의 돈단과 몽카이 방어진지가 돌파 당한다. 그러나 중국군은 이 작은 도시를 점령하기까지 2,000명의 전사자와 40대 이상의 전차와 차량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베트남군은 완강하고도 적절한 작전을 펼쳐 엄청난 공격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비해 1/3 수준인 840명 사상이라는 병력손실에 그칠 수 있었다.
1978년 2월 27일 부터 베트남은 반격에 나선다. 1978년 2월 28일 베트남군은 중국군에게 빼앗겼던 돈단을 다시 탈환한다.
베트남 병사들이 중국군의 숫적 위력 앞에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항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중국 수뇌부에게 이 탈환 소식은 엄청난 충격이 되었다고 한다. 공군의 동원은 전면전으로의 확전을 우려한 탓인지 양측에서 많이 동원되지는 않았지만 중국군의 J6(Mig-19의 중국형)와 베트남군의 A-37이 일부 출격하여 주로 소규모 대지 공격에 투입되었는데 중국군의 J6이 15대이상 격추된데 비하여 베트남군이 1/3수준인 5-6대 정도를 잃었다.
1978년 3월 1일부터 중국군은 6.25때 투입되었던 정예의 325사단과 338사단을 주축으로 란손 시를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강화한다. 중국군은 6.25 때처럼 인해전술에 기초한 제파공격으로 베트남군 진지를 파상공격하여 차례로 공략하게 된다. 베트남군은 몇몇 거점에서는 전멸상황까지 가면서도 항전하면서 전략적 철수를 병행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이는 중국군에게 가능한 한 많은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탱할 수 없을 때에는 퇴각하는 방법이었다.
60,000명 이상의 병력을 집중하여 어렵게 란손 시를 점령한 중국군은 이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한다.
그리고 1978년 3월 2일에는 국경선에 위치한 라오카이도 파괴한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가 안된 중국군은 이미 미군과 전투를 치뤄 본 베트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국을 괴롭혔던 정글게릴라전의 난해함과 소련의 지원을 받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구식 소총으로 무장한 중국군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또 미군에게 노획한 탱크나 무기도 이때 등장했다고 한다.
베트남은 계속 치고 빠지기 게릴라 전법으로 중국군을 괴롭혀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그 때 소련이 베트남을 계속 건드리면 소비에트 붉은 군대가 유격대로 참전하겠다고 중국을 협박한다.
앞뒤로 공격을 받게 될 수 있는 상황에 빠진 중국은 결국 국경 30km지점까지 들어갔다가 전쟁초반에 대외적으로 선전한대로 징벌이 끝났으니 철군한다고 발표하고 전쟁을 끝낸다.
피해는 중국이 5천 정도를 잃었고 베트남이 4천이하를 잃었다고 추정된다. (물론 공식적인 양측의 발표는 만 단위 이상이지만)
<베트남 군에게 포로가 된 중국군 병사들>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했으나,
실제로는 처음에 의도했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군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목표를 이룬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내내 국경선의 확정을 둘러싸고 중국군과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다가 1989년에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평화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협정이 체절되었고, 중월간의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와중에서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루트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를 해상을 떠돌기도 했다.
전쟁은 전쟁이지만 국제적으로 중국은 체면을 심하게 구겼다.
중국군 장비와 전술이 낙후됐다는걸 증명하고 문화혁명으로 인한 숙청으로 고급지휘관이 없어져 부대지휘관들은 실전경험이 없어 현대전에 무능했고 병사들은 훈련받지 못한채 항일유격대처럼 막무가내식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비판이 군부에서 나오게 된다.
베트남은 나름대로 중월전쟁이 끝났을 때 베트남은 세계 최강의 국가라며 뽐냈었다.
확실히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전쟁으로 생활이 궁핍한 가운데 베트남 국민들은 공산치하 정책아래서는 못 살겠다며 나라를 버리고 보트피플이 되거나 난민이 부지기수로 늘어나 국제문제가 되었고 한동안 경제상황이 나빠진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소련 붕괴 후 베트남도 자유주의 경제정책도입으로 다시 동남아의 근대화로 부상한다.
이 후 각성한 중국은 군대의 현대화를 추진하게 된다.
1979년 4월 18일부터 중국과 베트남은 국경확정 교섭을 개시하였으나 베트남군의 캄보디아 철수를 주장하는 중국과 이를 거부하는 베트남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려 교섭의 주목적인 국경선 확정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공산국 사이에 최초로 일어난 이 전쟁으로 파생된 긴장관계는 1988년 1월 두 나라가 국경분쟁종식에 합의함으로 해결되는듯 싶었지만 상호 영유권을 주장하는 난사군도(南沙群島)에서 다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양국 분쟁은 1989년 9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군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잡았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철수하자 양국 사이는 긴장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분명한건 중국은 지금도 베트남을 고깝게 여기고 베트남은 중국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트남은 중국에 대해서 침략을 사죄하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중국측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략이 전쟁의 원인이다."라고 주장하며 현재까지 사죄를 거부하고 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소~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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