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레포트로 작성한 나가시노 전투입니다.
사실 일본사는 관심없다능...
그래도 난 오스프리빠라능...
원래 교양이라 이번엔 개그 많이 줄였다능...근데 너무 재미없어서 좀 손 본거라능...
진짜 레포트는 이렇게 안낸다능(...)
내용은 오스프리를 기본으로 아케치공+다테님+앨런비님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남의 레포트 도와주신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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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言
나가시노 성 공성과 그에 이은 나가시노 전투는 일본 전국시대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다. 군사적인 중요성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병종의 유기적은 운영, 비교적으로 단순한 방어적 전술, 그리고 무엇보다 대규모의 화기 운영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다른 영주들도 나가시노 전투에서 증명된 전술적 교훈과 화기 운영에 신경을 쓰게 된다.
(나가시노 전투 전 중부 일본의 지도)
1575년 당시 전국시대의 모습이다.
서쪽의 붉은색 세력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을 의미한다. 지도상에서 볼 수 있듯, 오다의 세력은 이러한 평야 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물론 그런만큼 수많은 적과 맞닥뜨려야 했지만, 오케하자마 전투를 거쳐 아네가와 전투, 그리고 히에이잔 방화에 이어 아사이-아사쿠라를 격파한 시점에서 오다의 세력은 이미 전국 최대의 세력으로 떠올라 있었다.
중앙의 옅은 노란색은 도쿠가와의 세력. 오다 노부나가의 충실한 동맹자인 이 너구리 대마왕의 세력이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신겐의 사후 다케다 가문이 주춤한 틈을 타 이 너구리 세력들은 성공적으로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가시노 전투의 시발점 역시 도쿠가와와 다케다의 전쟁에서 시작된다.
귤색에 가까운 세력은 역시 다케다.
땅은 넓다. 후덜덜하게 넓어보인다. 안타깝게도 저 지방은 다 산지다. 때문에 골드마인 빼곤 벌이가 영 시원찮은 모양.
위에 슬쩍 모습만 내비치는 갈색 비스무리, 주황색 비스무리는 모에모에♡ 겐신짱이 다스리는 지역.
안타깝게도 나가시노와는 별 관계 없는지라 듣보잡으로 다루게 된다. (...)
(그래도 겐신쨩에 대한 나의 애정은 가시지 않는다능...하악하악)
2. 주요 등장인물
다케다 가츠요리
아들에게 전설적인 아버지의 명성보다 더욱 부럽고 벅찬 적은 없을 것이다. 다케다 카츠요리의 아버지인 다케다 신겐은 전국 시대의 전설적인 명장으로 카이의 호랑이로 불리며 큰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가츠요리는 신겐의 적자는 아니었다. 1544년, 신겐은 근처의 다이묘 스와 요리시게와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었고, 요리시게는 자결했다. 요리시게에게는 14세가 된 딸이 있었다. 이 딸은 엄청난 미인이었다. 신겐은 그녀를 자신의 넷째 부인으로 삼았다. 문제가 되는것은- 그 딸의 어머니는 신겐의 여동생이었으니, 이제 신겐의 첩이 된 소녀는 사실 신겐의 외조카였던 셈이다.
신겐은 이 소녀에게 푹 빠졌는데, 신겐의 추종자들은 이 소녀는 사실 구미호의 환생이고, 신겐에게 매혹의 술법을 걸었다고 믿기도 했다. 마침내 1546년 이 '여우 아가씨'는 카츠요리를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카츠요리가 9살일 때 사망했다. 어머니가 일찍 사망한 서자는 앞길이 힘든 법이다. 다케다의 가신들은 카츠요리를 불신했다. 카츠요리 자신도 어머니와 관련된 숱한 루머 속에서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신겐은 카츠요리를 아꼈다. "요리"라는 이름은 어머니 가문인 '스와'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이름이다. 신겐(하루노부)은 물론, 신겐의 형제들은 "노부"라는 이름을 많이썼다. 이는 신겐이 카츠요리를 각별히 배려했음을 뜻한다. 신겐은 항상 카츠요리를 데리고 다녔고, 쇼군에게 카츠요리에게 관직을 내려달라고 특별히 부탁하기도 했다.
한편, 상속 역시 카츠요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565년 장자였던 요시노부가 아버지에게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실패, 유폐되어 사망했다. 차남은 맹인이었고, 삼남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카츠요리는 그대로 다케다의 가업을 상속하게 된다.
카츠요리는 신겐의 말년 전투에 대부분 따라다녔다. 다케다 신겐은 1572년 최후의 전역인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군을 완파했는데 카츠요리는 이 전투에서도 중요 부분을 맡았다. 그러나 신겐이 미카타가하라 전투 후 급사하고 카츠요리가 가업을 계승하면서 밑에 깔려있던 가신들과 카츠요리의 알력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히 다케다 4명신을 주축으로한 다케다 24장군은 신겐의 유언에 따라 수세적인 전략을 취하려 했지만 카츠요리는 충고를 무시하고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했고, 노신과 새로운 영주의 대립은 다케다 가문의 불안요소로 떠오르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
나가시노 전투 당시, 이미 오다 노부나가는 센고쿠 최대의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1534년 생으로, 어렸을 적에는 오와리의 바보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대담하면서도 사려 깊은 장군으로, 카츠요리와는 다르게 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데도 더욱 유연했다(물론 실제로는 이런 이분법적인 비교는 의미가 없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오케하자마 전투는 기습설, 정면공격설의 이야기가 있지만, 그럼에도 오다 노부나가의 재빠른 기동과 판단이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이마가와를 격파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이, 도쿠가와 등과 동맹을 맺고 세력을 확대시켜나갔다. 1570년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아사이-아사쿠라 군대를 격파했고, 1571년에는 성지인 히에이잔을 불태우면서까지 그 세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오다 노부나가는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을 완료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을 손에 넣으면서 당대 최고의 세력으로 떠올랐다. 1573년에는 아사쿠라, 아사이를 멸문시켰고 이제 북방의 가이와 시나노를 노리고 있었다.
오쿠다이라 사다마사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군에 맞서 나가시노 성을 지키던 인물은 오쿠다이라 사다마사(1555-1615)였다. 오쿠다이라는 그 지방의 지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며, 충성스럽고 용맹한 수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원래 오쿠다이라는 미카와 출신이었고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었지만, 신겐의 생존 시 신겐에게 귀부했다. 물론 다케다 가문은 오쿠다이라를 제대로 신뢰할 수 없었다. 결국 사다마사의 부인과 남동생은 코후에 위치한 다케다의 본진에 인질로 잡혀있어야 했다.
1573년 신겐이 사망하자,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도쿠가와 가문으로 다시 고무신을 바꿔신었고, 츠쿠데 성을 빠져나와 도쿠가와 가문에게 귀순했다. 오쿠다이라가 배신하자 가츠요리는 사다마사의 가족을 책형(십자가형)에 처했다. 그 결과 사다마사는 다케다 가문에게 복수를 다짐했고, 이에야스는 나가시노 성을 수비할 믿음직한 부하 장수를 얻게 되었다.
3. 군대
사무라이 군대
사무라이는 전문 무사들이다. 서양의 기사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전문 전사들이면서, 다이묘를 위해 싸우는 봉건 전사들이다. 이런 최정예 전문 전사들은 대개 영주의 먼 친척들, 혹은 가신단의 젊은 남성들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이들에 비하면 썩 믿을만 하지는않지만 이웃 영지의 무사나, 예전의 적에서 징발된 무사들도 이런 부류에 든다. 물론 동맹을 맺은 영주의 무사들도 참가한다.
사무라이의 숫자나 부대의 질은 언제나 다르다. 대개 이들은 부유한 지주들이다. 대개 1000고쿠(石)마다 2명의 기마무자와 20명의 보병들을 동원했지만 어느 지역에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각 지역의 소규모 지주들은 각기 자기 부대의 숫자와 무장을 갖추고 소집에 응했음을 나타낸다.
영주의 최정예 부대 역시 사무라이들이다. 사무라이가 갖는 계급의 특징은 계속 변화하여 왔지만, 전국 시대에 이들은 말을 타는 기사 계급이었다. 기마무자들은 언제나 일본에서도 정예 군대였다. 초기의 사무라이들은 활을 쓰는 기마 궁수였다. 특히 이들의 활은 장궁이었고, 역시 활 쏘는데 방해가 되는 무거운 갑옷은 입지 않았다. 보통 우리가 갖는 소드맛스터에 대한 환상과는 다르게 초기의 무사들은 마상 궁술로 전투를 벌였다.
센고쿠 시대에는 사무라이 군대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말은 전투용으로 쓰기엔 작은 것이 많았고, 그런 주제에 비쌌다. 연비가 영 안좋은 꼴이나 없는 것보단 있는게 낫지 않은가 쩝쩝. 그나마도 사무라이 중에서도 계급 분화가 일어났다. 아직 계급투쟁의 역사를 역설할 마르크스옹이 활약할 때까지 250년이란 세월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무라이들은 계급투쟁을 벌이기보다는 계급상승을 노리며 무기와 갑옷만 갖추고 도보로 싸웠다. 영주들 역시 이런 하급 무사들을 활용하는 방안을 찾아냈다.
무사들은 이제 활만으로는 싸울 수 없었고, 길고 곧은 창의 활용이 늘어났다. 물론 무장은 제 돈 내서 사야함은 물론이었고, 그러다보니 자기 손에 익는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활 스킬 높게 찍은 놈들은 알아서 활 들고 다닐테고 창 스킬 찍은 놈은 창 들고 다니면 된다- 그러다보니 사무라이들의 무기로 결국 활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못했지만, 전국시대 말로 가면서 창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악하악 나으 사무라이쨩은 그렇지 않다능... 칼은 어떻게 된거냐능...]...이라고 묻는다면, 역시 닛뽄도는 보조무장.
사무라이들의 갑옷은 둥근 것이 도마루이고, 사각형이 조금 유행이 지난 요로이이다. 점차 도마루가 요로이를 대체해갔고, 갑옷은 소매와 팔, 다리, 안면갑까지 연장되었다.
무사들의 창은 대개 '모치야리(持ち槍 맞는지 모른다. 책임 안져)'라고 불리는 것으로 길이는 3.2~4m, 창날은 10cm~1.5m에 자기 꼴리는대로 랜덤찍는다. 날의 형태는 직선형이다. 무사들은 다양한 전투에서 이 창으로 싸우는 법을 고안해냈다. 가장 자주 쓰는 방식은 말 위에서 등자를 딛고 휘두르거나, 아니면 땅에 내려서 적에게 강력한 일격을 가하는 식이었다.
아시가루(足輕)
초창기에 아시가루들은 영주들이 징집한 잡병들이었다. 그러나 긴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국시대의 영주들은 이들을 잘만 훈련시켜 활용한다면 사무라이들을 능가하는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시가루들은 대개 같은 농촌의 농민들은 같은 부대를 이룬다.
창병 : 이들은 긴 창을 들고, 밀집대형을 갖춰서 적을 향해 전진하거나, 혹은 위 아래로 창을 내리치며 적의 접근을 막는다.
사실 장창병이란 놈들이 대개 거기서 거기긴 한데, 그래도 어느 정도 바리에이션도 감안되지 않을 정도로 벽창호인 놈들은 아니다. 대개 거기서 거기인 장점을 설명하자면-밀집 장창대열은 뭉쳐있을 때는 감히 상대가 들어올 수 없는 긴 거리에서 적을 공격하고, 부대의 질량을 실어 밀어내기 때문에, 특히 정면에서는 엄청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건 먼치킨 임페리얼 로마군도 못뚫는다. 그러나 창이 워낙 길어 개인이 쓰기엔 무리가 있어서, 대열이 무너지면 순식간에 위기를 맞게된다. 싫으면 5m 되는 대나무 막대기 하나 잡고 휘둘러보시길. 상대는 적당하게 90cm 정도 되는 막대기 하나 잡고 꼬나 달라들면 되겠다. 그럼 대개 칼 vs 창에서 칼파들이 좋아하는대로 칼이 창의 사정거리 내로 파고들어서, 애정을 듬뿍 담은 칼침찜질을 실컷 해주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서는 엄정한 군기와 단합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같은 색깔의 갑주, 깃발과 같은 것인데 그 중 유명한 부대로는 다케다 가문의 4명신 중 한 명인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아카조나에가 있다. 이들은 전부 붉은 옻칠을 한 갑옷을 갖춰입었는데 다케다군의 정예로 이름 높았다.
물론 아시가루들의 무장은 무사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질 낮은 것이었다. 대개 몸통을 가리는 옻칠한 갑옷과, 손목 보호대, 그리고 진가사라고 불리는 삿갓 비스무리가 아시가루들 무장의 대부분이었다. 그에 반해 사무라이들은 허벅지, 정강이받이, 투구, 안면갑까지 착용했다. 역시 게임이건 현실이건간에 현질에 돈지랄이 최고인 법이다.
아시가루들 사이에서 '동료를 버리고 달아나는 자'는 '같은 마을 사람 전체'를 위기에 빠트린 자로 치부되었고, 따라서 함부로 달아나면 마을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점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대부분의 장창병이 같은 점을 공유하지만) 아시가루 창병은 점차 일본 군대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이런 장창 아시가루들은 제대로된 무용을 평가받지 못했고 이들의 활약은 '단체'에 소속된 무명씨들의 작전으로 치부되었다. 뭐, 애초에 장창이 혼자서는 못하는게 사실인데, 그래도 역시 돈없고 빽없는자의 설움은 어쩔 수 없었다.
궁병 : 사무라이들이라면 몰라도, 아시가루 궁수들의 활약은 결코 얕볼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긴 활을 들고, 화살막이 방패(pavis)를 앞에 둔 채 활을 쏘았다. 다케다 가문의 병법서인 '갑양군감'에 따르면, 전국시대 전사자의 7할이 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활은 후에 조총이 등장하면서 점차 역할이 감소하지만, 조총과 조총 발사 사이의 간격을 메꾸는 역할을 했다. 궁병은 화승총과는 달리, 조준과 발사에 상당한 근력을 요한다. 당시의 궁병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병사들이었다.
철포 : 일본이 포르투갈과 무역을 개시하면서, 유럽의 아퀴버스(Arquebus)가 일본에 수입된다.(보다 초기형 화승총인 핸드건handgun, 즉 소형 총통류는 중국과의 무역을 통해 들어왔던 것 같다) 아퀴버스는 흔히 말하는 머스킷(musket)에 비하면 소구경 소총이지만, 연사력은 더 빠른 편이다. 유럽에서는 아퀴버스 만으로는 흉갑기병(cuirassier)을 상대할 수 없어서, 보다 대구경이고 화력을 중요시한 머스킷이 주류를 이루게 됬지만 일본은 아퀴버스가 주력을 이루게 된다. 물론 아퀴버스라 해도 활보다는 훨씬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화승총의 위력을 일찍 파악하고 성공적으로 운영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미 다른 영주들은 물론 다케다 가문에서도 수 백명 단위의 화승총병을 보유하고 있엇던 것으로 보인다. 비율상으로 따지면 큰 차이 없을 듯.
창병 아시가루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화승총병 역시 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훈련을 통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4. 양군의 규모
다케다 군대의 규모
다케다 가문의 병법서인 갑양군감에 따르면, 나가시노 전투 당시 다케다군의 군대 규모를 보다 정확히 짐작할 수 있다. Opsrey의 Nagashino 1575-Slauter at the barricades에 따르면, 다케다군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기마무사 9,121
기마무사의 수행원(2명) 18,242
근위대 아시가루(보병) 884
아시가루 5,489
총합 33,736
하지만 나가시노 공략과 시카타가하라 전투에 나선 다케다군의 병력은 아래와 같다.
기마무사 4,254
기마무사의 수행원 8,508
근위대 아시가루 415
기타 아시가루 2,580
총합 15,757
그러나 갑양군감의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다케다 기마무사들 중 기마 전투원으로 활약하는 사무라이의 숫자는 전군의 10% 내외로, 우에스기나 호죠등의 가문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갑양군감 읽어볼 실력이 안되긴 하지만 말이지, 무사들이라고 해도 다 말타고 다니는건 아니니까, 실제론 9~10% 내외로 보는게 맞을 듯 하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이쪽은 다케다 가문에 비하면 명확한 수를 알 수 없지만, 그 규모는 오다군이 30,000 도쿠가와군은 8,000~12,500으로 추정된다.
전략단계
(다케다군의 진군로)
1575년, 다케다 가문의 봉신으로 막대한 재력을 소유하던 오쿠다이라는 갑자기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으로 돌아섰다. 다케다의 노장들은 오다가 아니라 우에스기를 견제하라는 조언을 했지만 카츠요리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미카와를 향해 남하했다. 존나 킹왕짱쎄서 나이트는 물론이고 라팔도 씹어먹고 데스노트도 소용없다는 다케다 풍림화산군은 아스케-츠쿠데-노다를 거쳐 요시다 성을 공략한다. 다케다군은 서전에서 승리해서 적당한 요새를 점령시키지만, 요시다 성에 배치된 강력한 수비군을 피해 없이 격파하는 것은 힘들다고 판단, 군대를 돌려 오쿠다이라 부자가 있는 나가시노 성으로 향한다.
나가시노는 다케다의 영지인 가이에서 미카와(도쿠가와 영지)로 진입하는 통로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1571년 신겐이, 그리고 신겐 사후에는 도쿠가와가 다시 손에 넣은 상태였다.
오쿠다이라는 4월부터 방어선을 굳히고 있었다. 방어 부대는 500명이고, 이 중 200명이 화승총병이었으며 최소한 한 대의 대포가 있었다고 한다. 요걸로 방어진을 허물어트렸다는데, 그럼 오오쓰쓰가 아닌건가? 사실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문제는 요 나가시노란데가 요충지에 맞게 아바타쓰고 흡혈 빨고 크리 쭉쭉 터지는 마앱보다도 귀찮은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는 거시어따.
나가시노 성은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지였다. 근처의 타키가와와 오노가와라는 두 강이 Y자 모양으로 합류하는 곳에 위치해 있어 적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고, 성 자체도 약 50m 정도 되는 절벽 위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성에서는 북쪽과 북서쪽의 방어진에만 치중하면 적을 막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쪽도 습지라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기는 쉽지 않은 곳이다.
당시 나가시노 성은 목조 건축물이었고, 석조 건축물은 외벽에만 사용되었다. 하지만 절벽에 의해 보호되는 중심부(혼마루)를 돌파하려면, 습지를 건너 석벽과 해자를 넘어야만 했다. 혼마루 외에도 바깥에는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라는 중심 거점이 있고, 이 거점들은 강과 방어시설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6월 14일, 가츠요리는 요시다 성 공격을 포기하고 군대를 돌려 6월 16일 나가시노 성 공격을 개시한다. 다케다군의 배치는 위와 같다. 6월 17일, 다케다 가문의 무사들이 북서쪽 방면에서 공격을 시작하면서 4일간에 걸쳐 나가시노 성 공방전이 벌어졌다. 다케다 군대는 총탄을 막을 때 쓰는 대나무 다발인 '다케타바'를 이용해서 접근했다.
(다케다바. 이걸갖고 머스킷한테 개겼으면 뇌를 깔끔하게 식혀주는 바람구멍이 추가됬으리라는데 한표.)
오쿠다이라 측은 다케타바를 향해 총탄을 쏟아부었고 다케다군은 약 8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총병은 총병끼리, 창병은 창병끼리 교전했다. 다케다군은 머리를 써서 강을 타고 뗏목을 통해 성에 접근하려고 했으나 급한 물살과 나가시노 성 안에서의 공격 때문에 그만 피라냐 먹이가 됬다. 피라냐가 없으면 피라미가 뜯어먹었다고 해 두자. 4일간에 걸친 격전에도 불구하고 나가시노 성은 여전히 버텨냈다.
(나가시노 성문)
다케다군이 갖은 선택지를 돌려봐도 법령변화 이후 로리캐릭에겐 H를 기대할 수 없었나니, 혹시 내가 헛수고 하는거 아닌가?-하는 의문이 병사들의 뇌리를 스쳐지나갈 즈음, 가츠요리는 이쯤해서 한번 쇼부를 보기로 했다. 20일에 다케다군은 밤에 두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마침 하늘에 구름이 끼어 달을 가리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다케다군은 후쿠베마루를 공격했다. 이 지점에는 지형적 장애물이 없었고, 목책이 유일한 방어진이었다. 시커먼 밤중에 다케다군은 갈고리가 촉수괴물 마냥 목책을 범해댔다. 목책을 넘는 병사들의 수가 불어나자 오쿠다이라는 군대를 후퇴시켜 다음 방어진으로 물러났다.
(나가시노 공성전)
다른 한 방향은 오테몬을 향한 것이었다. 다케다군은 맹렬하게 공격을 가해 망루를 함락시켰다. 망루가 공격의 기지가 될 것 같자 나가시노 성에서는 대포를 쏘아 스스로 망루를 무너트릴 수 밖에 없었다. 다케다군은 맹렬한 공격을 가했지만, 나가시노 측에서 토고로라는 젊은 무사가 분전하여 다케다 군의 장수 한 명을 죽이면서 공격의 기세가 둔해지자 다케다군은 일단 공격을 멈췄다.
21일, 다케다군에게 승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케다 가문은 금광으로 많은 부를 쌓았는데 금광 광부들이 땅굴을 파 성벽의 일부를 무너트린 것이다. 다케다군은 다시 맹렬한 공격을 가했고 나가시노측은 산노마루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나가시노 성에는 아직 니노마루와 혼마루가 있었지만, 그 와중에 식량 창고가 파괴된 것은 어찌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천하의 손오공이라도 밥 안먹으면 전투력이 급감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병사들이 창을 밀어 진흙벽을 허무는 장면)
하지만 혼마루와 니노마루까지 공격하기 껄끄러운 것은 다케다군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차례 선택지가 전부 게임오버로 이어지면서 다케다군의 물리적, 시간적, 정신적 손실 역시 만만치 않았다. 가츠요리는 일단 적의 식량 창고를 함락시켰으니 며칠만 기다리면 적이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가츠요리는 성을 완전히 봉쇄한 후, 적의 지휘관을 저격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가다가 성벽 위에서 알짱거리는 무사들의 머리가 퍽 터져나가는걸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목가적 살육의 나날이었다.
토리이 스네에몬의 탈출
이 상황에서, 나가시노 성 안에는 토리이 스네에몬이라는 34세 된 무사가 있었다. 그는 오쿠다이라의 가신으로 용맹할 뿐만 아니라 이 지방의 지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토리이 스네에몬은 이 방어진을 뚫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가서 지원군을 청하는 거의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사실 다케다군이 움직인다는 소식은 오다와 도쿠가와에게 전해져 있었고, 이미 오다 노부나가는 20일에 본거지인 기후에서 출전, 21일에 이에야스의 군대와 합류해 있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세력이 직접 공격받지는 않았지만, 이 요충지가 점령되었는데도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다면 도쿠가와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뿐만 아니라 가츠요리가 요새지를 버리고 적지로 나왔으니, 이 기회는 강력한 라이벌을 제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가 합쳐져 연합군은 점차 나가시노로 다가오고 있었지만 고립된 성 안에서 그 소식을 알리 만무했다.
23일 한밤중에 토리이 스네에몬은 성을 떠나 절벽 아래로 기어내려 강 밑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강 밑에는 밧줄이 쳐져 있어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스네에몬은 소리가 나지 않게 밧줄을 자른 뒤, 그 틈으로 빠져나와 도쿠가와의 본거지인 오카자키로 향했다. 스네에몬은 성대히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는 암울한 어조로 성 안에 남은 식량은 3일 뿐이며, 이제 오쿠다이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할복 뿐이라고 보고했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일단 고자되기보단 못해도 충분히 살떨리는 선택지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뒤, 다음날 인증샷 찍으러 군대를 움직이기로 약속했다.
토리이 스네에몬은 돌아오면서 임무에 성공했다는 신호를 올렸다. 하지만 가츠요리도 시각장애인은 아니어서, 이 신호로 누군가 성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다케다군은 예의바르게도, 그가 되돌아 올 때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토리이가 예전에 빠져나갔던 강둑으로 되돌아올 때 쯤되자 뭔가 발을 스윽 감싸는 느낌을 받았다. 차라리 물귀신이라면 좋았을 텐데, 실제로 그건 밧줄이었고, 밧줄에는 딸랑이라는 귀찮은 녀석이 붙어있었다. 곧이어 친구들이 "축하해 마이클!"이라고 외치며 나타나 토리이를 꽁꽁 묶었다. 깜짝환영파티는 성공으로 끝났다.
가츠요리는 토리이 스네에몬에게 지원군의 경로와 규모를 묻는 한편, 항복하라고 권유했다. 스네에몬은 고개를 끄덕인 뒤, 주군을 바꿨다는 증거로 성 밖으로 나가 [지원군은 오지 않는다, 항복하라]라고 외치기로 했다. 가츠요리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뻔한 스토리대로, 스네에몬은 [지원군이 온다. 끝까지 싸워라]라고 외쳤다. 가츠요리는 격분해서 토리이 스네에몬을 사형에 처했지만, 성은 용기를 내서 더 버텼다.
시타라하라 전투
한편, 적의 지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가츠요리는 아버지의 가신들과 이후 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바바 노부하루, 야마가타 마사카게 같은 원로 장군들은 이기고 있는 시점에서 명예로운 후퇴를 건의했다. 하지만 가츠요리는 이 제안을 쉽게 선택할 수 없었다. 1575년 미카와 원정에서 가츠요리는 오직 두개의 작은 요새를 태우는데 성공했다. 요시다 공격은 실패했고, 이대로라면 나가시노마저 잃게 된다. 아버지의 위대한 업적에 비교해 봤을 때,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짐은 물론이고,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노신들에게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다케다 가문이 웅거한 가이, 시나노 지방은 산악지대였다. 따라서 방어에 유리하고, 강력한 군사들과 금광을 통해 세력을 얻을 수 있었지만, 경제력으로 보면 오다가 차지한 평야 지역에 비할 수 없었다. 물론 평야지대는 방어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미 오다가 아사이, 아사쿠라를 비롯한 적수를 제압한 시점에서 그 단점은 이미 효력을 잃었다.
1572년 아사이와 아사쿠라가 남아있던 시점에서 오다 노부나가 세력은 다음과 같다.
석고 276만석, 동원 병력 55,000
그것이 1575년에는 이렇게 변해 있었다.
석고 447만석, 동원 병력 89,400
-즉 오다군은 거의 1.5배에 달하는 세력 성장을 이뤘고 이에 비해 성장이 늦은 가츠요리에게는 빨리 승부를 내야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오다는 공격전에만 3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 만약 이대로 물러난다면, 다음 번 공격은 더더욱 힘들어질 것이다.
가츠요리는 과감하게 회전에 승부를 걸었다. 불과 3년 전, 미카타가하라에서 다케다군은 이에야스군을 완파한 경험이 있었다. 오다군의 군사적 특징은 경제력에 기반을 둔 용병제에 있다. 즉, 기본적으로 농부들인 아시가루들을 상비군으로, 대규모로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만큼, 서로간의 단합이란 점에서는 다른 군대에 비할 수 없다. [미카와(이에야스)의 병사 한 명은 오다의 병사 세 명을 상대한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 미카와의 병사들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다케다의 군대이다. 가츠요리는 다케다군을 신뢰하고 전장에 운을 걸었다. 하지만 수적으로 2배 이상 차이나는 전투는 다케다의 정예라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맞서 싸우기 위해 시타라하라로 나가는 다케다군)
바바 노부하루는 만약 싸우더라도 나가시노 성을 점령하고 그 안에서 싸울 것을 종용했다. 나가시노 성이 굳건하더라도, 저 상황에서는 1천명 이하의 손실로 점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츠요리는 바바의 진언을 무시하고 회전으로 나섰다. 성을 공격하다가 앞 뒤로 적을 맞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최악의 상황이다.
27일 저녁
토리이 스네에몬에게 했던 약속대로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 3만 8천은 25일 오카자키를 떠나 27일 저녁, 나가시노에서 5km 떨어진 시다라하라에 도착했다. 연합군은 레노가와라는 강 건너편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시다라하라는 평지였던 미카타가하라와는 달리, 100m 앞에 강이 흐르고 그 강둑에 군대를 배치시켜두고 있었다. 연합군은 유리한 지세에 자리잡은 것도 모자라 방책까지 만들어두었다. 뿐만 아니라 3천에 달하는 철포대의 존재 역시 오다 군에게 큰 힘이 되었다.
최근까지 설명에서, 이러한 배치는 오다군이 다케다군의 기마돌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해 왔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를 부정하는 견해도 적지 않다.
우선 갑양군감 14품에서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즉, 다케다 기마대가 실제로 말을 타고 싸웠는지는 불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나가시노 전투 직전에 내린 비로 전장은 질척질척한 습지대가 되어 있어 기병이 활동하기에는 매우 불리한 전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일본군의 기마 배치이다.
일반적으로 기병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는 다수의 기병을 하나의 부대로 배치한다. 말이 달려오는 충격력, 공포, 돌파력을 한데 모아, 긴 창을 겨누어 적을 일격에 격파하는 것이다. 특히 Couched lance(겨드랑이에 창을 끼워 돌격하는 방식)라는 전투법이 도입된 이후, 기병들은 보병들을 '밀어서 짓눌러버리면서' 적진을 붕괴시킬 수 있게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기마 배치는 다르다. 기마 무자들은 자기 병사들을 이끌고 영지에서 나오며 그 자체로 하나의 부대가 된다. 여기까지는 서양 기사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기사들이 여러 부대 단위로 뭉쳐서 기병 부대를 형성하게 됨과 달리, 일본 기병은 장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들은 각기 부대에 분산 배치되어 보병들을 지휘하며 싸운다. 즉 여러 기병이 함께 모여 대오를 이룬 뒤, 강력한 충격력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기마 충격전을 벌일 수 없다는 뜻이다.
(위와 같은 랜스차징은 불가능하다. 아래처럼 놀아야지 뭐...)
물론 특수한 경우 기마대를 편성한 사례는 있다(시오리지리 고개 전투, 다테가의 기마철포대) 그 경우는 장교를 차출한다는 뜻으로, 보병 지휘를 포기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철포 기마대는 일부러 그런 목적으로 편성한 부대이니만큼 따로 봐야하긴 하지만.
(다테 가문의 기마 철포대. 실제로는 갑옷을 입었고, 이것은 자세한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갑옷을 벗긴 형태로 보인다.)
나아가 일본말의 품종상, 오다의 명마가 겨우 140cm밖에 되지 않는다는 기록을 신뢰한다면 마종 역시 강력한 기마충격전을 수행할만한 전력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즉, 다케다 기마대에 관하여 지휘관만 말을 타고 나머지는 보병전을 한다거나, 혹은 기병은 존재했으나 다른 기병같은 기마 충격전은 불가능했다는 견해, 특이한 견해로 다케다 기마대가 보급부대 수송용으로 활용되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다케다 가문의 기마돌격은 과장되었거나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대부분이다.
다케다 기마대라는 강력한 기병돌격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과장되었다는 결론이다.
오다의 3단 사격도 마찬가지이다. 오다군의 철포가 3천정이라는 설이있고 1천정이라는 설이 있는데, 철포 3천정은 후대인 에도시대 군기시에 등장하는 것이고, 오다 가의 1급 사료인 노부나가 공기(信長公記)에 따르면 철포는 1천정, 그리고 우회부대에게 5백정의 철포가 지급되었다. 3천정은 당대 포르투갈과의 무역과 일본 자체 생산량으로는 그런 철포 수급이 불가능하리라는 주장이 있으며, 기존 일본의 궁수 운영법과 마찬가지로 1천정의 철포를 셋 한조로 나누어 각기 장전과 발포를 담당하여 3천 명의 철포대를 운영한게 아니냐는 추측도 존재한다. 즉, 실제로 3단 철포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그리고 강력한 선형 대형이 아닌 상태에서 1 천정 밖에 되지 않는 철포를 분산운용할 경우, 철포대의 효력이 감소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얼마 안되는 철포를 둘로 나눈 것으로 보아 철포 사격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추측도 있다.
6월 28일 오전 5시, 다케다군의 공격
(오다-다케다군의 배치)
다케다군은 크게 3,000명씩 네 부대로 나뉘어 있었다. 우익은 아나야마 노부유키의 지휘 하에 바바 노부하루, 사나다 형제를 비롯한 다케다가의 명장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일본군의 편제는 기본적으로 무사들의 사적인 세력을 기본으로 한다.
중앙부대는 가츠요리의 삼촌이자 신겐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카도의 지휘 하에 3,400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좌익은 가츠요리의 사촌인 다케다 노부토요의 지휘 하에 야마가타 마사카게를 비롯한 다케다의 가신들과 3,700명의 병사들이 배치되었다. 중앙의 후위부대는 다케타 카츠요리 자신이 직접 부대를 이끌었다. 숫자는 약 3,000여명.
대신 시다라하라 평원에 도합 5만에 달하는 대군이 들어갈 공간은 없을 것으로 보고, 실제로는 오다군 2만에 다케다군 6,000이 전군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케다군은 시다라하라 동쪽의 숲에서 접근해간다. 이 지점에서 오다 군대까지의 거리는 약 200m.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는 다수의 화승총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다케다측으로서도 생각이 있었다.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다케다 가문 역시 철포대에 대한 위험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위에서 예로든 다케다의 대나무 다발 역시 그러한 위협에 맞서서 효율적으로 백병전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단 지난밤의 비는 공격해 들어가는 다케다군에게도 문제가 되었지만, 화승이 비에 젖거나 습기가 차면 철포가 제대로 발사되지 않는다. 다케다 가문의 병사들의 용맹성에 대한 신뢰도 있었을 것이다. 오다군의 철포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다케다 군대는 재빨리 접근해서 오다군을 구축하고 측면을 잡으면 전군이 움직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밀어낸다는 것이 가츠요리의 작전이었을 것이다.
(오다군이 레노가와를 따라 새웠던 방책도 이러한 것이다.)
하지만 진흙탕이 된 지형에다, 레노가와를 건너야 하는 상황에서 수적으로 열세에 있는 다케다군의 공격 속도가 둔화되었다. 여기에 오다가 이끄는 철포대의 사격이 쏟아지자 다케다군의 피해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다케다 군대의 공격도 일제히 공격이 아니라 부대를 1,2번 부대 식으로 축차투입하는 바람에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방어에 점차 피해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케다군 역시 강군.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보다 좀 앞서서, 사카이 타다츠구가 이끄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일부 군대가 다케다군을 우회하여 나가시노 성으로 전진했다. 철포 500정을 받은 이 부대는, 나가시노 성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은 다케다 노부자네의 군대를 급습했다. 소수였던 노부자네의 군대는 저항했지만 500정의 철포와 불화살이 다케다군의 방책을 불태우고, 곧 이어 오다군의 군대가 밀려들었다. 다케다 노부자네는 전사했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나가시노 수비대인 오쿠다이라군과 합류했다.
(나가시노 성을 포위한 다케다군을 공격하는 오다군)
배후가 위협받자 다케다군의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좌익을 맡아 돌격하던 야마가타가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우익에서 상황을 뒤집으려던 바바 노부하루의 공세가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패퇴하면서 다케다군의 사기는 바닥을 향해 치달았고, 곧 전열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다케다군이 시타라하라에서 물러나자 오다군은 추격에 나섰다. 바바 노부하루를 비롯한 다케다군의 수많은 명장이 이 와중에 전사했다. 승리는 오다의 것이었다. 다케다군의 전사자는 1만에 이르렀다는 설이 있고, 반대로 다케다군 전사자 1천, 오다군 6백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2천의 병력 손실로도 압도적인 수세에 몰린 것을 감안했을 때, 어느 쪽이든 작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 후-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다케다군은 나가시노 이후에도 7년 가까이 살아남았다.
장수들의 손실과는 별개로, 병력적인 면에서 따지면 다케다의 손실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풍요로운 미카와를 정복하여 오다와 다시 한 번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려던 다케다의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으며 다수의 명장 손실, 여기에 가츠요리가 입은 위상의 손실은 큰 위험성을 가져왔다.
카이와 시나노는 산지 지방이라 중앙집권이 쉽지 않은 곳이다. 즉, 기존 영주들에게 그동안 이익을 보장하고 그 대가로 영주 세력을 다케다가로 묶은 것이다.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뿐더러, 그동안 이러한 약점은 다케다 신겐이라는 인물이 가진 카리스마와 정치적 감각, 위상에 의존해왔다. 이 상황에서 가츠요리가 입은 실패와 세력균형의 무너짐은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휘하 다이묘들의 이반이 시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뛰어난 장군들의 사망, 정예 직속병력의 손실은 이러한 이반을 부추겼다. 가츠요리는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우선 부친의 라이벌인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 힘을 합치는 한편 다시 한번 세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잦은 원정 부담을 짊어진 영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원래 가이-시나노 지방의 중과세는 신겐 시대부터 있었던 일이다. 신겐은 적지를 약탈하고 이 이익을 영주들에게 분배하면서 충성을 받아내면서 세력을 키웠다. 하지만 점차 그 방식으로는 거대화하는 오다의 세력과 맞서기엔 무리가 있었고, 가츠요리는 최대한 가이의 중앙집권화를 시도하려 했으며 어느 수준으로 이를 이뤄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신과 영주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이익을 제한하는 중앙집권화에 반대했고, 나가시노 전투의 패배에 따라 불만은 더욱 급증했다. 가츠요리는 여러 방면으로 공세를 펼치며 이를 극복하려 했으나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고, 점차 거대해져가는 오다와 도쿠가와로부터 버티기 위해 요새인 신부 성을 건축하느라 다시 영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이러한 불만은 계속 증대되어갔다.
여기에 세력을 키운 미카와의 도쿠가와의 공세도 더욱 거세어져 갔다. 가츠요리는 갖은 방법을 써서 이를 극복하려고 했지만 기울어가는 세력을 이끌 수는 없었다. 1578년 우에스기 겐신이 사망하고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면서 우에스기 가문과의 연계도 힘들어져갔다.
1582년, 기회를 노리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다케다 가문을 향해 공격에 나섰다.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은 이반작전을 펼쳐 다케다의 영주들을 교란시키며 코후를 향해 전진했다. 가츠요리는 성을 불태우고 달아났고 변변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영주들의 배신에 의해 사방이 적에게 둘러쌓이게 되었다. 결국 추격당하던 가츠요리가 자결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다케다 가문은 사실상 멸문했다.
그동안 나가시노 전투의 문제를 가츠요리의 혈기와 부주의로만 판단해왔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 했듯, 가츠요리 시대의 문제는 신겐 시대부터 내재되어 왔던 것이며 가츠요리에게만 책임을 부담지울 수 없다. 가츠요리는 강력한 세력인 오다 노부나가와 적수들에 맞서 새로운 체계를 구축해야했다. 그러나 신겐 시대에는 성공적이었던 방식은 이제 가츠요리의 시대에는 맞지 않은 것이 되어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뿌리 깊은 관행이어서 기반이 약한 젊은 가츠요리가 행했던 중앙집권화는 실패를 동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불안전한 중앙집권화의 요인은 나가시노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구체화 되었고, 그 이후에 이 갈등은 보다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즉, 불완전한 기반에 있던 다케다 가문의 약점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 나가시노 전투의 의의이다. 동시에, 이는 일찍 중앙집권화에 성공하고 강력한 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오다의 방식이 다케다의 방식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반 사안에 대한 파악 없이 가츠요리를 무절제한 인물로 그리며 희생양으로 삼거나, 혹은 오다 노부나가의 천재성, 무기와 전술만으로 나가시노 전투의 의의를 파악하는 것은 사실에 맞지도 않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나가시노 전투는 사실상 전국시대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압도적인 우위를 증명하는 전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는 강력한 도전자인 다케다의 도전을 분쇄했고, 더 이상 적수가 없는 강력한 지위로 나아가게 되었다. 1578년에는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마저 사망하면서 더 이상 오다의 패권에 위협을 걸 수 있는 존재는 남지 않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가시노 전투는 마치 삼국지의 관도 대전처럼 사실상 이후의 전국시대 일본 판도를 결정지은 전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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