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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탈린의 자식들 / 러시아에 항복한 독일군 원수 파울루스 / 스탈린그라드 전투 영웅 추이코프

구름위 2012. 10. 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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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자식들

 

옛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 1953)의 외동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지난달 22일 미국 위스콘신 주 리치랜드의 한 양로원에서 숨졌다. 그러면서 독재자 가족의 불행한 삶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된다. 스탈린은 평생 두 번 결혼해 혼외 자식을 포함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1906년 결혼한 에카테리나 스바니제는 이듬해 아들 야코프(1907~1943)를 출산한 뒤 발진티푸스로 숨졌다. 1919년 41세의 스탈린은 19세의 나데즈다 알릴루예바와 재혼해 아들 바실리, 딸 스베틀라나를 얻었다. 이 부부는 싸움이 잦았는데 32년 한바탕 다툰 뒤 알릴루예바는 권총 자살을 했다.

장남 야코프 주가시빌리(1907~43)는 아버지의 고향 그루지야 성(姓)만 쓰도록 허용됐다. 평생 찬밥 신세로 14세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스탈린은 소심한 성격의 야코프를 평생 미워했다. 권총 자살에 실패하자 “총도 똑바로 못 쏘는 녀석”이라며 경멸했다. 독·소 전쟁에 포병 중위로 참전했다 41년 7월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가 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 또는 아돌프 히틀러의 조카인 레오 라우발 중위와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공식적으론 스탈린이 “모든 소련군 포로와 바꾼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야코프는 전우들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거절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는 원수와 중위를 맞바꿀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야코프라는 아들은 모른다”며 외면했다고 한다.

차남 바실리 스탈린(1921년생)은 공군에서 초고속 승진했다. 19세에 입대해 이듬해인 41년 12월 소령으로, 몇 달 뒤엔 대령으로 진급했다. 47년 상장(소련군에선 별 셋)을 달고 모스크바군구 공군사령관을 맡았다. 52년 군사 퍼레이드 때 폭격기 추락 사고가 나면서 해임됐다. 스탈린 사후 중노동수용소에 갇혔다가 60년 풀려났지만 2년 뒤 알코올 중독으로 숨졌다.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스탈린 사후 어머니의 성을 썼다. 열여섯 살에 40세의 영화감독 알렉세이 카플러와 사랑에 빠졌다가 실연당해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다. 카플러는 시베리아 유형을 떠났다. 이듬해 모스크바대 급우인 그레고리 모로조프와 결혼했지만 곧 헤어졌다. 49년에는 아버지 오른팔인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아들 유리와 결혼했지만 이듬해 이혼했다. 63년엔 모스크바에 와 있던 인도 토후 가문 출신의 공산주의자 브라제시 싱과 사랑에 빠져 소치 별장에서 동거했지만 66년 사별했다. 67년 미국으로 망명해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았다.

스탈린은 북극권 솔비체고드스크에서의 유형 시절 집 주인 마리아 쿠자코바와의 사이에서 콘스탄틴 쿠자코프(1911~96)라는 아들을 얻었다. 레닌그라드 대학을 마치고 공산당 당료로 일했다. 스탈린 생전에 비밀경찰이 출생의 비밀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아갔다.

극동지역에 살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고, 6·25전쟁을 배후 조종하며 한국과 악연을 쌓은 스탈린은 자식들과도 악연이다.

중앙일보 국제 데스크 ciimccp@joongang.co.kr

 

 

[역사 속의 인물]러에 항복한 독일군 원수 파울루스

 

그만큼 치열한 전투는 없었다. 2차세계대전 중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진 6개월간의 공방전은 독일, 소련군을 합해 200만명의 사상자가 나올 정도로 대재앙이었다. 1942년 말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 점령에 실패하고 오히려 역포위를 당했다.

제6군 사령관은 교사의 아들이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Friedrich Wilhelm Ernst Paulus, 1890~1957)대장이었다. 귀족(융커) 출신이 장악한 독일 육군에서 그만큼 승진한 것은 성실하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제6군은 탈출 기회가 있었지만 히틀러의 사수 명령에 따라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독일 영화 ‘스탈린그라드’(1993년)에 참혹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히틀러는 그를 원수로 진급시키고 ‘항복하지 말고 자살하라’고 강요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오스트리아 상병(히틀러의 군대 계급)을 위해 죽을 수는 없지”라며 1943년 1월 31일 항복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 9만1천명 중 시베리아로 끌려가다 절반이 죽고 훗날 귀국한 것은 6천명에 불과했다.

그는 나치에 대한 선무공작을 하다 종전 후 동독에서 경찰 간부를 지냈고 1957년 오늘, 죽었다.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자책과 분노 속에 비참한 말년을 보낸 군인이었다.

박병선 논설위원

 

 

[역사 속의 인물]스탈린그라드 전투 영웅 추이코프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내 방식대로 싸워야 한다. 적이 장기를 펴도록 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이를 잘 보여준 군인이 1942년 오늘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흐름을 소련 쪽으로 돌려놓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바실리 추이코프(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 Vasily Ivanovich Chuikov, 1900~1982) 원수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러시아 혁명 후 붉은 군대에 들어갔다. 소련군 엘리트 양성소인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했고 중국 장졔스 총통의 군사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가 스탈린그라드에서 구사한 전법은 적 ‘껴안기’이다. 독일군 진지선에 최대한 가까이 붙는 접근전이다. 독일군의 장기는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전차와 보병이 질풍같이 진격하는 제병합동전술이디. ‘껴안기’는 이를 무력화시켰다. 독일 포병과 항공기는 독일군 진지에 폭탄을 떨어뜨릴 우려 때문에 마음대로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전투는 거리, 지하실, 방. 계단 등 모든 곳에서 벌어졌다. 독일군은 건물 하나를 장악하기 위해서 방마다 전투를 해야 했다. 일대일 ‘맞짱’에 익숙한 주먹이 뒷골목 깡패의 비열한 싸움기술에 말려든 셈이었다. 처음 해보는 이 같은 시가전은 독일군을 질리게 했다. 이렇게 독일군이 적에게 껴안긴 사이 소련군은 반격을 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정경훈 논설위원

 

 

 

 

 

[역사 속의 인물] 소련 전쟁영웅 예레멘코 원수

좁게는 독소전, 넓게는 2차대전 전체의 흐름을 연합국 쪽으로 돌려놓은 것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였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구 소련 지휘관 중 한 사람인 안드레이 예레멘코(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Andrey Ivanovich Yeryomenko)는 지고는 못사는 불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7번 부상당했으며 그중 네 번은 중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야전 병원 침상에서 지휘를 계속하며 결국 죽지 않고 전쟁에서 살아남았다. 그의 부상 경력은 군 경력만큼이나 화려했다. 1차 세계 대전 참전 때 처음 부상당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으나 그때마다 운좋게 살아남았다.

1892년 오늘 우크라이나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2차대전에서 성공을 거둔 소련 장성들처럼 1차 대전 중 기병대 부사관으로 참전했다가 혁명 뒤 군에 남아 성공가도를 달렸다. 엘리트코스인 레닌 정치군사학교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독일군의 공세를 틀어막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은 독일군 전사자 22만명에다 파울루스 원수 등 24명의 장군을 포함, 9만1천여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뒀다. 1955년 소련연방 원수로 승진했고 1970년 11월 사망했다.

 

정경훈 논설위원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neostrik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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