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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12.23 베리야 참혹한 말로

구름위 2014. 2. 10. 16:15

19531223일 베리야의 최후

 

누군가 말했다. “인간이 창조한 어느 악마도 인간만큼 잔인하지는 못했다.” 허긴 그럴 것이다. 인간이 지금까지 저지른 악행들을 보노라면 인간이 쌓은 덕과 선이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면적이 넓으니까. 뭐든 무리가 있으면 그 가운데에는 특출한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20세기에는 유별나게 그런 인재들이 많았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이상으로 보지 않고 사람 죽이는 것을 술 한 잔 들이키는 것보다 쉽게 여기는 사람들. 19531223일 목숨을 잃은 소련의 NKVD (KGB의 전신)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도 그 랭킹에서 다섯 째 밖으로 빠지라면 서러워할 인재일 게다.

 

그도 스탈린처럼 그루지아 출신이다. 스탈린처럼 신학생 출신이었다는 말도 있는데 스탈린이나 베리야나 신학생으로 매진했다면 대체 어떤 러시아 정교 사제가 됐을지 궁금하다. 아무튼 그는 일찌감치 혁명에 뛰어들어 1920년엔 체카에 들어간다. 체카란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꾼 소련 정보기관 최초의 이름인데 이 체카의 창설자는 뜻밖에도 폴란드인이면서도 러시아 혁명에 몸바친 펠릭스 체르진스키다. 이후 소련의 피의 숙청의 일단을 표현하자면 이 체카와 그 후신 조직들의 수장은 베리야에 이르기까지 5명이었는데 그 중 체르진스키를 제외하고는 천수를 누린 사람이 없다.

 

한창 정보기관의 수장이 돼 스탈린의 의중에 따라 대숙청을 벌이다가 보면 어느 새 정보기관의 책임자 자신이 숙청의 대상이 돼 있었다. 키로프 암살의 배후로 추정되는 야고다도 그랬고 그 뒤를 이은 예조프도 마찬가지였다. 이 예조프란 사람이 사실 걸물이었다. 163센티미터에 불과했던 스탈린보다도 머리 하나는 작았던, 150센티미터가 간당간당한 이 피에 굶주린 난쟁이작은 거인처럼 소련 전체를 아작냈다. 엄청난 수의 소련인들 뒤통수에 총알이 박혔고 그만한 수가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긍지높은 소련 적군(赤軍)의 장교와 원수들도 절반 이상이 그 마수에 걸려 희생됐다. 그런데 스탈린도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치 자기가 김두한에게 살인을 사주해 놓고 김군 사람 그만 죽이게꾸짖은 이승만과 같은 심정이랄까. 스탈린은 예조프의 대숙청에 제동을 걸고 다른 사람을 앉힌다. 평판은 영 좋지 않았지만 영리함과 잔인함은 누구 못지 않은 사내. 라브랜티 베리야였다.

 

그리고 스탈린은 대숙청의 소용돌이와 아무 관련 없다는 듯 자신의 충복이었던 예조프에게 인민의 적칭호를 선사했고 베리야는 그 적에 대한 심판을 단행한다. “독일과 일본의 스파이이것이 소련 정보기관 수장에게 가해진 죄명이었다. 베리야는 예조프에게 스탈린 동지를 암살하려고 했지?”라고 추궁하지만 예조프는 이럴 수는 없다며 울부짖는다. “이왕 죽는 것 명예롭게 죽게 해 다오.” 그러나 스탈린은 이 얘기를 들고 냉소했다고 전한다. “그 친구에게 명예란 게 남아 있었나?”

 

후임 베리야는 예조프의 대숙청의 무리를 인정하고 수만 명의 정치범을 석방하기도 하는 등 유화적 제스춰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이 작자의 잔인함 또한 예조프를 능가했다. 이를테면 폴란드 인들이 치를 떠는 카틴 숲의 대학살, 즉 폴란드의 장교와 주요 인물 수만 명을 죽여 버리고 암매장한 것이 그였다. 얼마 전 러시아 정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베리야는 이렇게 보고한다. “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자들로, 풀려나는 즉시 다시 우리에게 대항하려 들 것이니 총살형 처분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스탈린은 이를 승인한다. 그의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폴란드가 두 번 다시 독립국이 되는 일이 없도록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충성했다. 스탈린이 독일이 소련을 침공할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을 때 그 비위에 거스르지 않았다. 그가 세계적으로 펼쳐 놓고 있던 정보망이 독일의 공격을 예고하고 있었고 심지어 날짜까지 고해 바쳤음에도 그는 스탈린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운명의 독소 개전 전날 1941621, 그는 스탈린에게 이런 아부를 바치고 있었다. “우리 국민과 저는 독일이 결코 소련에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당신의 현명한 예언을 기억합니다.” 그 후로도 그는 스탈린의 수족이었고 군부를 감시했고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베리야의 후손들은 부인하지만 그는 성도착증 환자였고 그의 측근 요원들은 그에게 필요한 10대 소녀를 주기적으로 공급했다고 전한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 중의 하나로 끌려왔다가 아내가 됐다는 전설이니......

 

스탈린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렀을 때 여러 가지 이야기가 얽혀 있다. 예조프가 그랬듯 베리야에게 싫증이 난 스탈린이 베리야를 잡으려들자 베리야가 먼저 독살을 해 버렸다는 말도 있고 후루시초프나 몰로토프 등 소련의 실력자들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이 베리야의 인간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풍경은 스탈린의 임종 무렵 그가 보인 행동일 것이다. 그는 의사들에게도 욕을 퍼붓고 놀랍게도 스탈린에게도 욕을 쏘아댔다가도 스탈린이 회복 기미가 보이면 키스와 충성의 맹세를 퍼붓는 기묘한 행동을 번갈아 했던 것이다. 스탈린이 죽은 뒤 그는 잽싸게 뛰어나가 권력의 한 축을 차지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원한을 사고 있었고 또 미제와 서방에 협력했다.”는 반역죄로 처단된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가 전한다. 원한이 많았던 소련 장군 주코프가 목졸라 죽였다고도 하고 공산당원들이 때려죽였다고도 한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장성택이 어떻게 죽었는지처럼 모른다.

 

베리야와 그 선임자들의 최후를 보면 쌍둥이같은 장면들이 북한의 현대사에 펼쳐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미제의 간첩은 전가의 보도로서 북한 뿐 아니라 남한 주사파들에 의해서도 쓰여져 왔고 숙청당한 사람을 사진에서 지우는 촌스러운 말살형도 행해지고 있으며 숙청의 연속 가운데 자애롭고 은혜로운 수령의 모습이 형성된 것도 같다. 피에 굶주린 난쟁이 예조프는 스탈린을 어떻게 맞이했고 스탈린은 그가 죽은 후 바로 자신을 뒤따른 베리야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그리고 장성택은 김정일을 만나 무슨 말을 했을까. 사뭇 궁금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