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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13 장경국 사망

구름위 2014. 2. 10.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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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 13일 장징궈 사망

어느 나라인들 다르겠습니까마는 중국의 현대사는 참으로 많은 곡절과 파란 속에 펼쳐졌으며 별같은 인물들이 출몰하여 역사의 씨줄과 날줄을 엮었습니다. 땅 넓고 인구 많은 지상 최대의 나라이면서도 열강의 반식민지가 되었고 세계대전의 전쟁터로 화했으며 그 와중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경험하고서 덩치가 너무나 차이가 나서 의미가 없긴 하지만 일종의 ‘분단국’으로 남아 있으니 그 사설이 짧을 수야 없겠죠. 1988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난 대만 총통 장징궈 (이하 입에 밴 장경국으로 부릅니다)의 일생 또한 매우 복잡하고 처연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 장개석의 아들입니다.

장경국을 얘기하려면 우선 그 어머니 모복매부터 시작해야겠죠. 장개석의 고향 절강의 풍습대로 장개석은 소년의 나이에 네 살 연상의 모복매에게 장가를 듭니다. 결혼식날 이웃 악동들이 폭죽 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때 아직 정신 못차린 꼬마 신랑 장개석이 폭죽 줍기에 뛰어드는 일이 있었다죠. 이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기에 장개석의 어머니도 노발대발했고 가마 속 모복매도 눈물을 흘렸다지요. 불길한 징조는 대개 실현되는 법. 장개석은 전족을 한 ‘구닥다리’ 아내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일본 유학이다 혁명이다 밖으로 나도는 남편을 바라지하며 장씨 가문을 지키던 모복매였지만 장개석은 거의 눈길을 주지 않았고 기껏 찾아온 아내를 두들겨 패기도 했던 못된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어찌 장개석의 첫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게 장경국이죠.

장경국은 청년의 나이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후일의 박정희도 그랬지만 장개석은 한때 ‘붉은 장군’으로 불리울만큼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었죠.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본질을 안 후” 또는 돈의 맛을 보고 자신의 처신에 대해 저울질을 끝낸 후 무자비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합니다. 1927년 장개석은 상해 쿠데타를 일으켜서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하는데 이때 모스크바에 있었으며 “인터내셔널”을 가장 즐겨 불렀다는 (김명호 교수의 <중국인 이야기> 재밌습니다 보세요) 장경국은 격렬하게 아버지를 성토합니다.

“.... 장개석의 혁명 사업은 이미 끝났다. 그의 혁명에 있어서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혁명을 배반한 이상 이제부터 그는 중국 노동자 계급의 적이다. 과거에 그는 나의 부친이며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적의 진영으로 돌아선 이상 그는 나의 적일뿐이다.” 아주 견결한 공산주의자의 아버지 부정이었지요. 하지만 스탈린은 그런 기특한 공산주의자에게도 그리 정답지 못했습니다. 장경국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우랄 산맥 근처의 노동자로 전전하는데 거기서 러시아 아가씨를 사귀게 됩니다. 후일 장방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이 러시아 여인은 머나먼 중국의 총통의 아들과 결혼하게 되죠.

1936년 장개석이 공산당의 씨를 말리겠다는 기세로 공산당 토벌에 몰두할 무렵 장경국은 다시 등장합니다. 프라우다에 실린 그의 글은 단어 하나 하나가 벼려진 칼날이었고 매서운 창끝이었죠. “나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후 세 차례의 반란에서 그 때마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었으므로 그는 중국 인민의 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열혈 공산주의자로서 뿐이 아니라 상처받은 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 이렇게 아버지를 씹어대지요. “어머니는 기억하십니까. 누가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의 머리를 잡아챘으며, 누가 어머니를 2층에서 아래로 던졌습니까. 그 모두가 장개석의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가정폭력은 이렇게 큰 트라우마를 남깁니다. 각설하고.

그런데 서안 사변, 즉 만주군벌 장학량이 장개석을 감금하고 공산당과 연대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자고 강청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역사의 선로는 완전히 뒤바뀝니다. 스탈린은 일종의 ‘인질’이었던 장경국에게 별안간 귀국령을 내리고 고국에 가서 투쟁할 것을 지시합니다. 장경국은 러시아인 아내를 데리고 귀국하게 되지요. 장개석도 인간인지라 그렇게 자신을 독하게 밀어붙였던 아들이라도 만나고 싶어 어쩔 줄 모릅니다. 하지만 체면이 있어서 ‘참을 인(忍)자만 쓰고 앉았다가 원로들에게 혈육을 만나는 기쁨을 외면하지 말라는 충고(?)를 듣고서야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장경국은 장개석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아들로서의 예를 다합니다. 그리고 별 나이 차이도 안나는 새어머니 송미령에게도 ‘어머니’라 부르며 빈틈없는 예의를 갖추죠. 러시아인 아내도 서투른 중국말로 ‘어머님’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장경국은 일대 변신을 합니다. 장개석의 충실한 조력자가 된 거죠. 새어머니 송미령과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고 후일 일본군 폭격에 돌아가게 되는 친모 모복매의 사진을 집무실에 걸어 두었을 정도지만 아버지에게는 충실한 효자로 돌아갑니다. 장개석이 대만으로 쫓겨온 뒤 장경국은 안보 기관 쪽 일을 맡아 보면서 아버지를 도왔고 38년간 계속된 계엄령 하에서 대만 민주주의와 대만 출신 인사들을 탄압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만의 정보 부서도 우리나라 중앙정보부 못지 않은 전횡을 휘둘렀습니다. 반정부적 언동을 하던 대학 교수가 대학 교내에서 시체로 발견돼도 흐지부지 수사가 끝나는 정도의 일이 무시로 벌어진 게 대만이었죠.

장개석이 죽은 뒤 잠깐의 과도기를 거쳐 총통 직에 오른 장경국. 그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면서 경제 성장에 힘을 쏟았고 죽기 1년 전에는 계엄령을 해제하여 민주화의 물꼬를 스스로 틉니다. 2대째 세습 정권이면 당연히 3대째에도 욕심을 낼 수도 있었겠지만 혼혈의 부담 때문인지 아니면 민주화 의지 때문인지 그는 “장씨 가문 통치는 2대 뿐”이라고 선언하며 후계자로 대만 출신인 이등휘를 지목하지요. 그리고 1988년 1월 13일 그 파란만장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끝내게 됩니다.

아시아적 특성이라고 할지 유교적 가치가 살아 있던 나라들에는 세습이라는 단어가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싱가포르가 그랬고 대만이 그렇고 일본에도 그런 인물들 많고 한국도 선거를 통해서 전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의 직위에 앉게 되죠. 그런데 싱가포르의 이광요나 한국의 박정희나 중국의 장개석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다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거나 핵심 인자였거나 그에 친숙한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그런데 셋 다 공산주의라면 치를 떠는 (또는 떠는 체 하며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관철했던)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장경국 역시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고 부르짖었던 열혈 청년 공산주의자 (뭐 인질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합니다만)에서 아버지의 충실한 조력자로 반생을 살지요. 역사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재미라는 게 안전장치가 없는 롤러코스트 같기는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