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일본이야기

원나라의 일본정벌

구름위 2013. 12. 1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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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의 일본정벌 1. - 1274, 1281년

 

 

 

일본정벌의 배경

 

1260년에 몽골제국의 제 5대 칸으로 즉위한 후 국호를 원(元)으로 고친 황제 쿠빌라이 칸은 1268년에 제 2대황제인

오고타이 이래의 염원이던 남송(南서宋)침략을 개시하는 한편, 근간에 복속한 한반도의 고려를 통해 1266년에 일본에 처음으로 통교를 요구하는 사자를 보냈다.

 

원사일본전(元史日本傳)에 의하면 원나라 사신으로 보내진 것은 고려인으로 원나라 관직을 가지고 있던 조이(趙彝)의진언에 의해 이루어졌다. 고려의 송군비(宋軍斐), 김찬(金贊)이 안내하는 몽골사절단의 정사(正使)인 흑적(黑的)과부사(副使)인 은홍(殷弘)은 거제도까지 왔지만 항해의 곤란을 이유로 되돌아가 쿠빌라이에게 일본에 사절로 가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진언했다.

 

쿠빌라이는 이를 사절로 가기 싫은 핑계라 꾸짖고는 다시 고려에 명령하여 사절로서 고려의 국왕인 원종(元宗)의 측근인번부(潘阜)를 파견하여 1268년 정월에 큐슈의 다자이후(太宰府)에 도달케했다. 다자이후의 고케닌인 쇼니 스케요시(少弐資能)는원나라의 국서와 고려국왕의 친서를 받아들고는 이를 가마쿠라 막부로 보냈다.

 

하지만 일본측의 답서가 없어 7개월 후 번부는 고려로 돌아가버렸는데, 고려는 10월에 번부의 사절이 별스런 답변을받지 못했다고 번부 스스로 원나라 조정에 고하게 했다. 가마쿠라 막부는 5대 싯켄(執權)인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의 사후,아들인 호조 도키무네(北條時宗)가 어렸기에 방계인 제 6대 싯켄으로 호조 나가도키(北條長時), 7대인 호조 마사무라(北條政村)이번갈아 정사를 맡아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제대로 된 답서를 보내기 힘들었었다.

 

이윽고 성년이 된 호조 도키무네가 1268년 3월에 제 8대 싯켄으로 등극했는데 막부에선 원나라의 국서를 묵살했다.

그리고 막부는 2월 소동의 처리를 막 끝낸 후여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승려인 니치렌(日蓮)은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이란글을 막부에 상주하여 국난(国難)이 올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1268년 말경에 다시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인 신사전(申思佺), 시랑(侍郎) 진자후(陳子厚) 및 번부로 구성된 고려사절단이원나라 정사인 흑적과 부사인 은홍을 대동하고 일본으로 파견되었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이들의 접견을 묵살했다. 그렇지만사절단은 대마도에만 머물렀을 뿐 다자이후에는 가지않고 불손한 대마도인인 토지로(塔二郎)와 미지로(弥二郎)르 체포 후 이들과함께 귀국해버렸다.

 

1269년 7월에 고려국왕인 원종의 폐위사건으로 떠들석한 고려를 경유하여 대도(大都 - 베이징)에서 미지로 일당을 호송할사자로서 김유성(金有成), 고유(高柔)의 고려사절이 원나라로 갔다가 원나라 중서성의 국서를 휴대하고 다시 대마도로 건너갔다.다자이후의 관청에선 이들 사절단을 대마도에 머물게 한 후 사절단이 가져 온 국서를 가마쿠라 막부로 보냈다.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교토의 조정에 보냈는데 조정회의에서 국서를 검토한 결과 원나라의 통교요구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여거절의 회답을 보냈다. 그 회답은 문서박사(文書博士)이던 스가와라노 나가나리(菅原長成)가 써서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는 이 거부의 회답서가 나오기 전에 사절단을 추방하자고 상신했다.

 

조정은 이에 막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려와 원나라 사절단의 재삼 거듭된 요청을 물리치고 이들을 귀환시켜 버렸다.한편 1271년 9월에 고려에서는 몽골에 대해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공동으로 원나라에 대항하자고 하면서 군사적 원조를요청하는 사자를 일본에 보냈다.

 

일본의 조정과 막부는 삼별초에 원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여 이를 또 묵살했다. 1271년 9월에 삼별초로부터 사자가 온 직후,원나라 사신인 조양필(趙良弼)이 원나라 복속을 요구하는 국서를 가지고 5번째 사절로 방문하자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조정에 상주했다.

 

당시 국서의 내용은 매우 위협적이며 강경했는데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실상의 최후통첩성 문건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위대한 중국의 황제이자 우주의 중심인 중원의 왕인 짐이 생각해보니 먼 옛적부터 작은 공국의 대공들조차

이웃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그런 대공들과 그들의 백성들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짐의 나라를 찾아왔다.

또한 짐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군주와 가신사이의 관계와 같으며 그 본질은 마치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같다.

그대들도 분명히 이런 사실을 잘 알고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 그대들이 짐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해주길 바란다.

짐의 청하는 쌍방간의 왕래를 거부하는 것이 합당한 일이겠는가? 만약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할 것이며

그런 사태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에 놀란 일본조정은 급히 이세(伊勢)의 신궁에 칙사를 보내 이국(異国)에 항복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점치게 했다.

조정내부에선 여러 논쟁이 일었는데 가마쿠라 막부가 이를 거부하고 조정내에서도 몽골의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는 반대여론이 높아 결국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은 원나라 사절단의 국서를 묵살하기로 했다.

 

쿠빌라이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지만 계속 무시당하자 화가 나서 드디어 일본을 힘으로 정복하기로결정했다. 원사고려전에 의하면 처음에 3가지 안건이 검토되었는데 첫째론 일본은 섬나라이기에 고려에 군사를 두고 국서를보내 복속시킨다. 둘째론 그 전에 남송을 공략해 한인(漢人)으로 일본을 친다. 셋째론 병력보충을 위해 고려군과 협공한다는것이었다.

 

고려사 및 원사에 의하면 몽골인 고관은 병력부족을 이유로 남송정벌을 먼저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고려의 충렬왕은고려를 경유하여 동쪽에서 먼저 일본을 치는게 상책이라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명하여 일본침략을 위한 함선을건조하게 하고 식량을 공급하게 했다.

 

이 때 군비는 고려가 부담하여 대소 900척이라 일컬어지는 선박들이 만들어졌다. 원나라에서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고 합포(合浦 - 마산)에 출진지를 만들었다. 이런 동향을 탐지한 가마쿠라 막부는1272년에 이국경호번역(異国警護番役)을 설치하고 진제이(鎭西)의 수령인 쇼니씨와 오토모씨(大友氏)에게 지령을 내렸다.

 

원나라군(몽골군)은 1273년 2월에 남송의 양양을 함락시키고 삼별초도 평정했다. 하지만 1269년부터 4년에 걸친 삼별초의항쟁에 의해 일본은 항전준비를 갖출 시간을 벌었다는 견해도 있다.

 

제 1차 일본정벌 (1274년)

 

 

일본의 분에이(文永) 11년, 원나라의 지원(至元) 11년 10월(1274년 11월)에 흔도(忻都), 김방경(金方慶)이 통솔하는몽골인, 한인(漢人), 여진인, 고려인 등 비전투원을 포함한 3만명을 태운 군선이 한반도의 월포(月浦, 혹은 合浦, 지금의 마산)를출발했다.

 

10월 5일에 정벌군은 쓰시마(對馬), 10월 14일에 이키(壹岐)섬을 휩쓸고 이어서 히라도(平戸)의 군기지를 전멸시켰는데쓰시마 도주였던 소 스케쿠니(宗助國)가 참살당하고 이키의 슈고였던 타이라노 카게다카(平景隆)는 자결하고 말았다.그리고 이전에 승려 니치렌의 경고대로 민중들이 살육당하고 살아남은 자는 손바닥을 꿰인 채 뱃머리에 내 달렸다.

 

당시 고려장수였던 김방경이 이 때 잡은 일본인 남녀포로 200명을 고려국왕과 왕비에게 헌상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기도한데, 이러한 정벌군의 상황이 큐슈의 하카다(博多, 현 후쿠오카)에 전해지자 쿄토와 가마쿠라에는 급보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이에 일본측은 쇼니씨와 오토모씨를 시작으로 큐슈의 고케닌들을 중심으로 다자이후(太宰府)에 집결하도록 했다.

 

원나라군은 10월 19일에 하카다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서쪽의 이마즈(今津)에 정박하여 병력 일부를 상륙시켰다.

10월 20일에 선단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모모치하마, 나가하마, 나노츠, 히가시하마 하코자키하마 등에 상륙했다.

하카다만 서부에서 상륙한 몽골군은 벳부(別府)에 진을 쳤다.

 

싸움시작에 앞서 일본군은 개전을 알리는 효시(소리를 내는 화살)를 쏘았는데 몽골군은 이를 바보들이라며 비웃었다.

일본의 무사들은 처음에 가문의 이름을 대고 일기토로 나서며 소수의 병력으로 선두싸움을 시도했지만 화포를 울리며집단으로 공격해오는 몽골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일본군도 집단전술로 변환하여 모모치하마에서는 키쿠치 다케후사(菊池武房)가 이끄는 230기의 기마대가

2천명 남짓한 몽골군 보병을 격파하기도 했다. 하카다에선 해안부근에서 격렬한 궁시전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패주했지만쇼니 카게스케(少弐景資)는 추격해오는 유복형(劉復亨)을 활로 쏘아 쓰러뜨려 내륙으로의 침입을 막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는 끝나 일본군은 다자이후로 돌아갔다. 한편 몽골군은 하카다를 점령했지만격전으로 화살이 소모되고 편제가 무너져 다자이후 공략을 단념한 채 하카다의 시가지에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고 철수했다.

 

고려사 <김방경전>에 의하면 군진으로 돌아간 후 고려군의 주장이던 김방경과 파견군 총사령관인 홀돈(忽敦)과의

사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수록되어 있다.

 

김방경 : 병법에 <천리의 현군, 소수로 그 첨봉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본국보다도 먼 적지에 나온 군은 사기가 높아 전투력이

            높아진다>라고 합니다. 우리 군은 적잖게 적진에 있습니다. 우리 군은 자진하여 싸웠는데 이것은 진목공(秦穆公)의

            맹명(孟明)에 나오는 분선(焚船)과 한(漢)나라의 한신(韓信)이 말한 <배수의 진>과도 같으니 다시 싸워야 합니다.

 

홀돈 : 손자병법에 <작은 적의 방비는 큰 적에 대비한다>라고 했소. 소수의 병력이 역량을 다해 싸워도 다수의 병력 앞에는

         결국 무너지는 법이요. 피폐한 병사를 이용하여 날마다 증가하는 적군의 상황에 대처한다는 것은 완벽책이 아니오.

         철수하는 것이 옳소.

 

이러한 토론끝에 유복형이 부상당한 채 돌아오자 정벌군은 철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1차 정벌군은 어디까지나일본에 대한 위력과시와 정찰의 목적이 강해서 처음부터 철수수순을 밟고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함선으로 하카다와고려간의 북상은 남풍이 부는 맑은 날이 아니면 위험해서 이 시기를 기다려 1개월이나 날씨를 살피기도 했다.

 

하치만구도쿤(八幡愚童訓)이란 사료에 의하면, 싸움이 한창일 당시 가마쿠라 무사단이 반격의 거점으로서 가호를 빌었던하코자키 하치만궁 신사에서 병화(兵火)에 의한 화재가 일어나 신사를 태우고 그 불길이 적진까지 다다랐다고 한다.한밤중에 불타는 하치만 궁 앞에서 흰 옷을 입은자 30여명이 나타나 활을 쏘자 몽골군은 놀라 달아났다고 한다.

 

이 흰 옷을 입은 자는 가마쿠라 무사단이 아닌, <하코자키 신사의 신들>이란 묘사가 남아있는데,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하룻 밤 사이 몽골군의 선단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원사(元史)의 세조본기(世祖本紀)와 일본전(日本伝)등에는 그 기술이 없지만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선 밤중에 큰 폭풍우가 닥쳐 함선이 난파되어 합포로 귀환시 파견군의 미귀환자가13,5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정설에서 일본의 무사들은 일기토로 당당하게 싸우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패주했지만 운 좋게도 폭풍우, 이른바 카미카제(神風)란 태풍의 힘으로 원군선단이 하룻밤에 철수한 것이라 본다. 그러나 여기에 관해서도 각 사료마다 계절과 태풍의 연관성이 적다하여논란의 부분도 있다.

 

아무튼 몽골군은 철수 후 남송과의 전쟁에 주력하여 대부분이 강남으로 이동했다. 한편 제 1차 원정이 정찰위협의 침공이아니라는 설도 있는데 그 근거로는, 본래 몽골제국의 군사행동에선 사전에 병력 100~1만 규모로 적진에 정찰위협을 단계적으로실시한 후 본격적인 침공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원사일본전(元史日本伝)에선 몽골군의 화살이 곧 바닥났다는 것을 보아도3만(비전투원 포함)이라는 적지않은 병력이 단순히 정찰만을 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몽골군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선 일반역사서에서 태풍의 힘에 의해 물러난 것이라 교과서까지 답습되어가르쳐져 왔는데 앞서 말한 하코자키의 화재로 인해 번진 거센 화염에 퇴로가 막힌 정벌군이 군선까지 피해가 닥칠 것을우려하여 야밤에 모든 병사를 태울 수 없어 낙오자와 부상자를 내버려두고 가동이 가능한 배만을 몰아 후퇴했기에 태풍은 관계가 없다는 주장도 최근 나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군선제작에 관여한 고려인들이 지배군인 몽골의 가혹한 작업과 감시, 기간안 완공이란 재촉과

형벌에 쫓기어 군선을 급히 만드느라 내구도가 약해져서 도중에 파선되는 선박들이 많았다고도 한다.

 

제 2차 일본정벌 (1281년)

 

 

1275년에 쿠빌라이는 다시 예부시랑인 두세충(杜世忠)을 정사로 하는 사자를 일본에 파견했다. 호조 도키무네(北条時宗)는가마쿠라의 다쓰노구치 형장(지금의 에노시마 부근)에서 두세충 이하 사신 5명의 목을 베었다. 호조 도키무네는 이들이 사신이아니라 일본을 염탐하러 온 스파이라 생각했었다.

 

1279년에 원나라는 강남군 사령관인 남송의 옛 신료였던 범문호(范文虎)의 진언에 의해 사자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지 못한채소식이 없자 다시 주복(周福)을 정사로 하는 사신을 재파견했다. 그러나 이들 사신일행 5명도 다자이후에서 전원이 참수형에처해지고 말았다.

 

이 해에 남송을 완전히 정복한 원나라는 일본과의 동맹과 남송의 제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중 쿠빌라이는도망쳐 온 수병에 의해 사신들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특히 일반 사신보다 고관이던 두세충의 처형소식에 매우 진노하여일본으로의 재침공을 결의하여 1280년에 침공준비를 위한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하게 했다.

 

1281년에 원나라는 고려군과 함께 동로군(東路軍) 4만을 편성하고, 구 남송군을 주력으로 한 강남군(江南軍) 10만의합계 14만의 대군을 일본으로 향해 출발시켰다. 허나 일본은 이번엔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하카다 연안엔 약 20km에 달하는방벽(원구방벽)을 세우고 반격군을 정비했다.

 

이 방벽은 제일 강력한 부분이 높이 3m, 폭 2m 이상이었는데 먼저 도착한 동로군은 방벽이 없는 시카노시마(志賀島)에상륙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반격으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지난 번 침공시 몽골군의 전법을 숙지한 일본군은 우세적으로 싸워 동로군은 해상으로 물러났다. 허나 작은 배로 몽골군의 배에 뛰어드는 무사들도 적지 않았다.

 

강남군은 총사령관인 우승상 아자한(阿刺罕)이 병으로 인해 아탑해(阿塔海)로 교체됨으로 인해 동로군보다 출진이 늦었지만히라도 부근에서 동로군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폭풍우가 내습하여 원군 선단은 혼란에 빠졌는데 이를 호기로 본 일본군은선박을 습격하여 이를 괴멸시켰다. 가까스로 상륙한 몽골군도 수비군에 의해 소멸되고 말았다.

 

이에 원나라로 되돌아 간 병사들은 후에 풀려난 포로들을 합해도 전체의 약 1, 2할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일본군은

고려인과 몽골인, 한인(漢人)은 포로로 하지않고 살해했지만 교류가 있던 남송인(南宋人)은 포로로 삼아 목숨을 살려주어옹호했다. 하카다의 도진마치(唐人町)는 남송인들의 거주지였기에 그런 이름이 현재까지 남아져 있다.

 

이 싸움에서 원군의 해상전력은 3분의 2가 상실되고 나머지 군선도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한편 두 차례의 원정당시

양군의 병력은 여몽연합군이 약 14만, 가마쿠라군이 약 4만정도라고 여겨진다.

 

 

 

정벌의 영향과 여러 후유증들

 

 

쿠빌라이는 세 번째 일본정벌을 계획하여 1287년에 일단 해산된 정동행성을 부활시키고 1288년에는 고려국왕인

충렬왕을 정동행상서성 좌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 때는 원나라 내부에서도 고려북방의 요양행성(遼陽行省)을중심으로 한 쿠빌라이의 가신 중 하나인 나얀의 반란진압으로 혼란스러웠다.

 

반란은 쿠빌라이가 친히 진압했지만 이 전후처리에 불만을 가진 왕족 카치운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1290년대까지

혼란상황은 이어졌다. 그리고 몽케 시절에 복속했던 베트남의 진조(陳朝) 대월국(大越國)에서도 가혹한 물자징발에 반발한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대월국과의 전쟁은 극심한 소모전이어서 결국 원나라 군대는 운남으로 철수 중 습격을 받아 괴멸되고 말았다.

 

이러한 남방에서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일본으로의 재정벌은 사실상 어렵게 되어버렸다. 쿠빌라이가 이들을 다시

원정하고 복속시킴으로서 남방은 안정되어졌지만 대규모의 정벌군 동원은 무리였던 것이었다. 쿠빌라이의 3번째 정벌은결국 수포로 돌아간 채 그 후임으로 취임한 테물은 즉위 후 일본원정계획의 포기를 밝혀 사실상 쿠빌라이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한편, 일본에선 원군의 침공 이후, 카마쿠라 막부의 주도로 석축의 건설과 순번제의 이국경비역을 설치하는 등 하카다 만의방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전투에선 이겼어도 일본측이 실질적으로 얻은 소득은 없었으며, 은상의 대부분도 일부에게만 주어져전국에서 큐슈로 동원된 고케닌들은 이국경비역을 돌아가면서 서도 충분한 보수가 없어 가난과 빚에 시달렸다.

 

가마쿠라 막부는 덕정령(무사들의 빚을 백지화한다는 발표)을 발포하여 고케닌들의 곤궁을 해결하려 했지만 오히려상인들은 이런 막부와 무사들을 신용하지 못해 돈을 빌려주지 않자 고케닌들의 생활은 더욱 빈곤해져 불만이 더욱 높아졌다.

당시 일본에선 전쟁의 승리가 귀족들과 공가의 염불 및 신사에 기부한 공덕이라는 관념이 있어서 일부 귀족들은 고케닌들의토지를 매입하여 신사에 바치기도 했다.

 

승리는 신의 공덕이라는 것이라는 생각까진 괜찮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전비소모와 부족한 재원, 은상을 제대로 받지 못해빈민으로 전락한 고케닌들의 불만이 상당하여 무사들과 고케닌이 기반인 무가정권의 가마쿠라 막부는 그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몰락한 고케닌들은 결국 도적으로 변해서 귀족들을 습격하는 등, 이러한 혼란은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할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출처 :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제국의 흥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