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평정 (九州平定) - 1586년 ~1587년
전국시대 후반기, 큐슈(九州)지방은 강력한 전국 다이묘 3명에 의한 삼파전의 항쟁으로 전개되어, 이를 오토모(大友), 류조지(龍造寺),
시마즈(島津)씨의 삼국시대라 부를 정도였다. 그 중에서 사츠마의 시마즈씨가 휴가의 이토씨, 히고의 사가라씨, 아소씨, 히고의
아리마씨, 류조지씨 등을 누르고 오토모씨의 중신인 다치바나 도세츠마저 전사시켜 치쿠고의 북큐슈 일대도 영향력을 떨쳤다.
큐슈통일을 목적으로 한 시마즈씨의 행동에, 분고(豊後, 현재의 오이타 현)의 오토모 소린(大友宗麟)은 시마즈씨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당시 킨키, 시코쿠, 주고쿠를 평정하고 천하통일의 길을 걷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에게 도움을 구했다. 이 요청을 받고
간빠쿠(関白)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덴쇼 13년(天正13年, 1585년)에 시마즈씨와 오토모씨에게 조정의 권위를 빌려
정전을 명령했다.
오토모씨는 정전을 받아들였지만, 시마즈씨는 격렬한 토론 끝에 정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해 가신인 가마다 마사치카(鎌田政近)를
히데요시에게 파견하여 시마즈는 이전부터 오다 노부나가의 정전에 의거해 싸우지 않았지만 오토모측이 공격을 걸어왔다고 변명했다.
이 논리에 오토모측도 같은 근거로 시마즈측이 맺은 화평조약을 깨트렸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시마즈씨의 당주인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는 덴쇼 14년(1586년) 1월에 미나모토 요리토모 이래 명문인 시마즈 일족이
히데요시같은 <비천한 출신>의 간빠쿠에겐 예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표명했다. 3월에 히데요시가 시마즈씨의 사자인
가마다 마사치카에게 점령지의 절반을 오토모씨에게 돌려주는 조정안을 제시했지만 시마즈씨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오토모씨 공격을 재개하여 큐슈통일을 진행하자 분노한 히데요시는 오토모씨의 손을 들어주면서 큐슈침공에 나서게 되었다.
시마즈씨로는 큐슈지방의 대부분이 시마즈령인 현상을 무시한 히데요시의 큐슈분할안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4월 5일에 오토모 소린은 오사카 성으로 가서 직접 히데요시를 배알하고 시마즈씨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달라고 간청했다.
히데요시와 구로다 요시다카(黒田孝高)는 큐슈공격에 히데요시 본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히데요시가 복속시킨 모리 테루모도
(毛利輝元),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등 주고쿠 지방의 다이묘, 혹은 초소카베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소고 마사야스(十河存保)등
시코쿠 지방의 다이묘를 이용하기로 했다.
또 센이시 히데히사(仙石秀久)와 초소카베 모토치카 등을 오토모씨에 가세시키고 8월에는 오토모 소린, 요시무네(義統) 부자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에게 편지를 보내 구로다 요시다카, 미야기 도요모리(宮木豊盛)등의 출진을 전달했다. 그 전인 6월에
치쿠젠으로 침공하여 큐슈통일을 목적으로 한 시마즈군은 이와야성의 다카하시 죠운의 결사항전으로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9월에 히데요시는 모리씨에게 출진을 명령하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이 군사를 이끌고 부젠을 향하여 출진했다. 또한, 시코쿠의
소고 마사야스, 초소카베 모토치카, 노부치카 부자도 분고로 출진하여 오토모군과 합류해 10월에 다카하시 모토타네(高橋元種)의
고쿠라성(小倉城)을 공격했지만 오토모 가신단의 내분으로 일시적인 탈환에 그쳤다.
한편, 시마즈군은 휴가에서 시마즈 이에히사, 히고에서 시마즈 요시히로가 대장이 되어 분고에 일제히 침공을 개시했다.
요시히로군은 오카 성의 시가 치카츠구(志賀親次)의 격렬한 저항으로 고전하여 정체했다. 이에히사 군은 10월에 사에키 고레사다
(佐伯惟定)에게 한 번 패했지만 12월에 사에키를 우회하여 북상해 츠루가성(鶴賀城) 공략 중 오토모군 원군으로 온 토요토미 군과
정면충돌했다.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센고쿠 히데히사를 주장으로 한 토요토미군은 초소카베 노부치카, 소고 마사야스 등 유력 무장들이 대거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다. 기세가 오른 시마즈군은 오토모씨의 본거지인 후나이(府内)를 손에 넣고, 소린이 지키는 우스키성(臼杵城)을 포위했다.
소린은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화포사격 등으로 시마즈 군의 공세를 버텨냈다.
그 후 시마즈군은 북상하여 키츠키성(杵築城)을 공격했지만 키츠키 시게나오(木付鎮直)의 저항으로 실패했고 분고 남부의 사에키
고레사다가 시마즈씨에게 빼앗긴 성들을 탈환하여 후방이 차단되고, 시마즈 요시히로군이 시가 지카쓰구에게 몇번이나 연패하는 등
불리한 상황이 이어지던 가운데 1587년 3월에 토요토미의 대군이 부젠에 도착하자 분고에서의 결전이 불가능해진 시마즈군은 시가,
사에키 등의 격렬한 반격을 받으면서 휴가로 철수했다.
소린은 히데요시의 출진을 몇 번이나 재촉하여, 덴쇼 15년(1587년)에 히데요시는 직접 큐슈정벌의 군령을 내려 3월에는 스스로
출진하여 히고 방면으로는 히데요시, 휴가 방면으로는 아우 히데나가가 이끄는 총 20만을 넘는 대군을 출진시켰다. 히데요시의
큐슈 상륙을 알게 된 시마즈군이 큐슈 북부 대부분을 포기하자, 시마즈씨의 지배는 급속히 붕괴하여 토요토미 군은 재빨리
시마즈 지배하의 성들을 함락시켰다. 이에 시마즈군은 계속 후퇴하여 본국 사츠마의 수비를 강화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휴가, 치쿠젠, 히고에서 잇달아 시마즈군을 패배시키며 토요토미군이 사츠마로 압박해오자 결국 토요토미 히데나가의 화평공작에
의해 시마즈 요시히사는 삭발하여 류하쿠(龍伯)라는 법명으로 출가해, 5월 8일에 다이헤이지(泰平寺)에 머무르고 있던 히데요시를
방문하여 항복했다.
히데요시는 이미 요시히사의 항복의사를 전해듣고 있었고, 요시히시가 속세를 떠날 자세를 보였으므로, 그를 사면하였다.
요시히사가 항복한 뒤에도,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이노성에서 농성하였고, 시마즈 도시히사의 저항 등이 이어졌다. 최종적으로
시마즈씨는 큐슈의 대부분을 몰수당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와 이주인 다다무네의 전후처리 결과 사츠마, 오스미 2개국에
휴가의 모로가타 군 및 휴가 사도와라(佐土原)를 인도하는 것으로 큐슈 정벌을 종료했다.
히데요시는 히데나가를 통하여 오토모 소린에게 휴가를 주고 이토 스케타카를 감시역으로 삼아 이주인 다다무네에게 오스미
1개 군을 주고 나머지를 헤츠기가와 전투에서 아들 노부치카를 잃은 초소카베 모토치카에게 주려고 했지만 소린과 모토치카의
고사로 실행되지 않았다.
히고의 대부분은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에게 주어졌다. 히고의 히토요시는 사가라 요리후사에게 주어졌으며 그 외, 시마즈씨
치쿠젠의 아키즈키 다네자네는 휴가로 이봉되고, 다네자네의 차남인 다카하시 모토다네는 노베오카와 미야자키가 주어졌다.
이토 스케타카에게는 휴가의 오비성이 주어졌지만 오비성에 있던 시마즈씨 가신이 성을 넘겨주지 않아 교섭 후인 1년 뒤에 획득했다.
패배한 시마즈씨는 많은 영지를 잃어 재정문제가 발생해 이주인 히사하루, 우와이 가쿠겐 등 영지를 잃은 가신에게 대신할 땅을
주지 못하여, 쿄토 등에서 돈을 빌리고 다이묘의 직할지를 매매하는 등 여러 수단으로 재정난 극복을 강구했다. 또 재정난 극복을
위해 토지조사도 시행했지만 이것이 가신들의 불만을 부추겨 후에 우메킷타 잇키라는 반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출처 : 오와다 테츠오 <전쟁의 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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