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스핏헤드와 노아의 반란 - 1797년

구름위 2013. 12. 1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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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핏헤드와 노아의 반란 - 1797년 

 

 

 

영국 포츠머스 근교의 정박지인 스핏헤드(Spithead)에서는 1797년 4월 16일부터 5월 15일에 걸쳐 알렉산더 후드제독이 이끄는

영국해협 함대 16척의 수병들은 열악한 선내 생활조건과 낮은 급여에 항의하면서 개선을 요구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수병의

임금은 1658년에 정해져 계속 고정되었는데 이것은 40년 전의 7년 전쟁(1756년~1763년)에 결정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임금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도 원인이었지만 1761년부터 함저부에

동판 외피를 부착하는 수법으로 인하여 군함이 함저청소를 위해 항구에 들르는 시간이 적어졌기에 수병들의 해상근무가 길어져

고생스러워진 면도 있었다. 하지만 영국해군은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두지않아 수병들의 불만은 높았다.

 

스핏헤드의 반란은 선발된 대표에 의해 이끌어졌는데 이들은 2주 후 해군본부와 협상을 시도했다. 이들의 요구는 보다 많은 임금,

패서즈 폰드(회계장이 고기 1파운드 당 2온스(약 8분의 1)를 자신의 몫으로 하던 관습)의 폐지, 수병들이 싫어한 일부 장교들의 배제,

그리고 반란에 참가한 자들의 채찍형과 강제징병의 면제였다.

 

반란병들은 자신들의 함에 올라탄 채(대부분은 사관들과 함께)통상적인 근무를 이어나갔는데 몇 척을 수송선단의 호위임무 혹은

초계임무에 할당하고 또 프랑스군 함선이 영국근해에 나타났을 때는 반란을 중지하고 바로 출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불신은

높았는데 특히 반역자에 대한 은사에 관한 불신으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리고 몇 명의 악질사관을 육상으로 내 쫓는 사건이 여기저기서 발생했는데 상황이 일단 진정되자 하우 제독이 협상의 중개에 나서

모든 수병들의 은사와 악질사관의 재배치, 그리고 패서즈 폰드의 폐지와 급료인상을 약속했다. 반란 지도자들의 이름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문으로는 발렌타인 조이스가 주모자였다고 한다. 발렌타인 조이스는 후드 제독의 기함인 <로얄 조지>의 조타수였다.

 

스핏헤드에서의 영향으로 인해 5월 12일에는 템즈 강 하구의 정박지인 노아(Nore)에서도 군함 <샌드위치>의 수병들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다. 같은 장소에 정박해 있던 몇 척의 수병들은 동조하지 않아 반란을 일으킨 함의 포격을 피해 달아났다. 노아에 있던

각 함은 스핏헤드와는 달리 부대가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에 조직화는 곤란했다.

 

하지만 반란측은 재빨리 리처드 파커(해군사관의 경력을 가진 프랑스의 동조자)를 함대의 대표자 겸 총수로 선출했다. 반란군의

요구는 5월 20일에 8개 항목에 걸쳐 버크너 제독에게 넘겨졌다. 그 내용은 은사와 급료인상 외에도 전쟁정책의 폐기와 의회 해산,

프랑스와의 빠른 강화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요구에 해군본부는 격노했는데 해군본부는 이들이 임무에 복귀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겨 스핏헤드와는 달리

강경하게 나갔다. 반란자들은 불평에서 시작한 반항을 사회혁명으로까지 확대하면서 상선의 입항을 방해하고 런던을 봉쇄했다.

그리고 주모자들은 점거한 함선을 프랑스로 옮기는 계획을 세웠다.

 

반란의 성격이 변질되면서 일반 수병의 지지가 떨어지자 한 척씩 반란에서 이탈하는 함선이 늘어났다. 스핏헤드의 반란을 무사히

해결한 정부와 해군본부는 노아의 반란주도자들이 수병들의 임금과 생활문제를 넘어선 명백한 정치적인 집단행동으로 간주해

협상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반란자들은 식량공급이 끊기면서 사기가 더욱 하락했는데 리처드 파커가 프랑스로의 출항 신호기를 올렸어도 이에 따르는 배가

없었다. 대부분의 반란자들은 포격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거부하여 결국 반란은 실패했다. 파커는 바로 반역죄와 해적행위로

유죄판결을 받고 반란을 일으킨 군함 <샌드위치>호의 돛대에 매달려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보복으로서 합계 29명의 반란주모자들이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혐의가 가벼운 자는 채찍형을 받고 수감 혹은 호주로

유형이 선고되었다. 단 반란을 일으킨 대다수의 일반 수병들은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해군의 근본적인 환경은 개선되지

않아 1797년 9월엔 서인도 제도에서 프리깃함인 <헤르미오네>의 수병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났다.

 

휴 피고트 함장의 지휘하에 서인도 제도에서 임무수행 중이었는데 피고트 함장은 냉혹하게 규율을 엄수하여 사소한 잘못도

용서하지 않고 벌을 주는 함장이었다. 1797년 9월 21일에 피고트 함장은 범주용 돛을 감는데 걸리는 시간에 불만을 품고

태업을 한다는 수병들을 세워놓고 마지막 수병까지 돌아가면서 채찍으로 치라고 명령했다.

 

결국 3명의 젊은 조범수가 채찍형을 견디다 못해 갑판에서 추락하여 목숨을 잃고 말았다. 피고트는 이들의 시체를 그대로 바다에

버리게 했는데 항의하는 수병들은 다시 채찍을 맞았다. 분노한 수병들은 한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피고트와 8명의 장교를 살해해

바다에 던졌다. 이것은 영국해군 역사상 가장 잔혹한 반란 중 하나였다.

 

반란수병들은 그 후 베네수엘라의 라구아일라까지 항해하여 1797년 9월 27일에 배를 스페인 장사꾼에게 넘겼다. 반란자들은 먼저

장교들을 보트에 태워 바다로 흘려보냈다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다. 서인도 제도의 사령관이던 하이드 파커는 반란자의

체포에 나서 33명 전원을 잡아들였는데 이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그 중 24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못했기에 이후에도 아일랜드 연안과 희망봉에서 수병들의 반란이 잇달았는데 이것은 스페인 연안의

존 저비스 해군제독의 영국함대에까지 번졌었다.

 

 

 

출처 : 콘래드 질 <해상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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