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해군이야기

해군 전술 -1

구름위 2013. 6. 1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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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전술에 있어서의 낭만주의

조지 로드니 제독

로드니 경의 6대손.

1782년 4월 12일, 영국해군의 로드니 제독은 도미니카 앞바다에서 급작스러운 풍향의 변화로 영국과 프랑스 양국 해군의 전열이 혼란에 빠지자 순간적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의 선택에서 고려해야 할 장애물은 적, 프랑스의 콩 데 그라스 제독과 그의 함대만이 아닌 영국해군 철의 규율을 수호하는 전열전술이었다.

전열함. Ship of the line. 말그대로 전열을 구성할 수 있는 강력한 군함.

영국해군은 로버트 브레이크 제독이 1653년 해군교범에서 기술한 이래 전열 전술의 원칙에 철저했고 그 전통은 백년 이상 말라가, 미노르카, 퐁디셰리, 도거 뱅크에서 영국해군에게 우위를 보장해 주었다. 더 이상의 전투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 전투중 전열을 무너트리는 것은 군법회의 감이었다.

전열전술. 이렇게 스크럼을 짜고 길게 늘어서서 죽을때까지 포화를 교환한다. 그냥 그것뿐.

게다가 2년전 마르티니크에서는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상대측 전열의 후방쪽에 전력을 보강해서 돌파하려던 시도는 의사소통의 실패로 혼란만 가져오지 않았던가. 이 상황에서 로드니 제독은 전열을 다시 복귀시키는 것과 적 전열에 돌격하는 것 중 후자를 선택했다. 양쪽 모두 전열이 무너지게 된 상황에서 영국군은 혼란중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프랑스의 전열은 3군데가 돌파되었고  영국해군은 분단된 프랑스 해군에 집중포격을 가해 기함을 포함한 적함 4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해군 전술에 낭만주의의 여명이 비추는 순간이었다.

기존의 전열전술이 계몽주의에 기반을 두고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기초하여 전투에도 정연한 질서를 부여하고 있었다면 낭만주의는 질서보다 비합리성을 중시했고, 계몽주의가 예측 가능성과 규칙성을 중시했다면 낭만주의는 우연성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계몽주의자들은 보편적인 인간을 보았으나 낭만주의자들은 독특성과 차이를 중시했고, 비범한 인간과 "천재"의 역할을 중시했다.

그리고, 육지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천재가 혁신을 불러왔다면 로드니의 뒤를 잇는 영국해군의 소장파 제독들은 해전에 혁신을 가져왔다. 맥스웰 클라크의 대부인 클러크 경은 1790년, 해전전술에 관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영국해군은 대포의 포격능력과 조함능력에 있어서 우월한 능력을 가진 선원들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정연한 전열을 유지하는 것보다 혼전을 유도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의 사상은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해전에서 우연의 요소를 도입해서 대적하는 양측을 격렬한 변화속에 던져 승패를 명확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한 것이 18세기 말의 기술혁신이었다.

카로네이드 포. 대항해시대 해본 사람은 이게 얼마나 좋은지 안다.

스코틀랜드의 카론 제강소가 1778년 개발한 카로네이드는 혁신적인 제조방법을 사용하여 포환과 포강사이의 틈을 좁힘으로써 기존의 대포에 비해 절반정도의 중량에, 비교적 적은 폭발력으로도 높은 포구 속도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포였다. 가볍기 때문에 대량으로 탑재하고도 항해성능을 유지할 수 있고 근거리에서는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이 대포는 영국해군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 외에도 발화장치의 개량을 비롯한 포술상의 개량에 더해, 전열함의 목재외판에 동판을 덧붙여 방어력을 강화하고, 항해성능을 저하시키는 따개비나 해초류 등이 목판에 달라붙어서 장기간의 해상봉쇄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등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지자 영국해군의 숙련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했다.

 

요렇게 구리를 발라놓으면 방어력이 좋아지고, 장기간의 항해에도 속도가 유지된다.

하우, 저비스, 덩컨, 후드를 비롯한 영국해군의 신세대 제독들은 점점 더 대담한 전술을 시도하여 적의 전열을 분단시켜 승리를 얻어내었고 이러한 변혁은 호레이쇼 넬슨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군신 넬슨. 이때는 애송이.

아부키르에서 프랑스 해군 전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대승을 거둔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최대의 결전 트라팔가르에서도 대담하기 이를데 없는 방법으로 적 전열에 돌진해서 상대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영예의 절정에서 전사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트라팔가르 해전도.

신호체계의 향상도 이런 복잡한 기동을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넬슨의 유명한 깃발 신호. "조국은 제군들이 임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

 

오늘날도 트라팔가르를 지키고 있는 외팔이 외눈 장군.

이러한 전술은 대단한 위험부담을 안아야 했고 숙련된 적이 역이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휘하 제독들 이하 함대의 말단 수병 개개인에 이르는 아군의 질적 우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상대의 포격능력은 1천 야드 정도를 기준으로 하고 있었기에 그 이내로 접근하면 정상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점 등에 기초하여 전술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증기선 시대

넬슨의 승리로 영국해군은 범선 해군 시대의 정점에 도달했지만 그와 함께 해군에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로버트 풀턴이 허드슨 강에서 폭발하지 않고 움직이는 증기선을 공개한 것이 1807년인데 30년만에 외륜순 시리우스 호는 증기기관의 힘으로 18일만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2년 뒤에 이 기록은 14일 8시간으로 단축되었고 영국 정부가 1839년 우편물 수송선박에 보조금을 지급하자 기술 개발 속도는 순식간에 가속됭렀다. 1840년대에는 스크루 프로펠러가 도입되었고 대형 증기선의 선체는 목재에서 철판으로 바뀌었다. 시리우스 호의 엔진은 320마력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21년 후에 등장한 그레이트 이스턴 호의 엔진은 1,600마력이었다.

그러나 증기선이 발전했다 해도 이미 세계 해군의 정점에 군림하고 범주군함 관련 기술에서는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해군은 불안정한 기술을 도입할 필요가 없었다. 질좋은 목재, 공창, 목재군함을 운영하기 위한 기지, 비축시설 등이 완비되어 있는데 무엇때문에 기존의 우위를 버리고 모험을 해야겠는가. 1828년 해군본부의 비망록은 자신들의 할일을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해군본부위원회 위원 일동은 전력을 다해 증기선 채용을 저지한다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증기기관을 도입하자는 제안에는 대영제국의 해상패권에 치명타를 가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기술적인 발전을 시도해야 하는 것은 영국을 따라잡아야 하는 다른 국가, 프랑스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1822년 프랑스의 페크상 장군은 신형 유탄포를 사용하면 적의 목선을 간단하게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1837년 프랑스 해군은 그의 유탄포를 공식 채용했다. 그 이듬해에 영국해군도 이를 채용했고 1853년 흑해에서 러시아 해군은 오스만 투르크 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탄포의 위력을 입증해 보였다.

시노프 해전. 로스케 오승환을 작살나다.

예전처럼 대포를 맞으면 기껏해야 나무조각이 흩날리는 정도가 아니라 단번에 전투불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프랑스 해군은 함정에 철재 장갑을 덧씌우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 10년 전에는 증기기관을 채용한 해군 함정들이 실험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20여년 간에 걸쳐서 프랑스 해군은 영국 해권의 패권에 도전했고 매번 실패했다.

증기기관을 탑재한 신형 전열함 도입도 프랑스가 먼저였고 철갑선(ironclad) 도입도 프랑스가 먼져였지만 기술적으로 앞서있는 영국은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산업적 기반이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프랑스는 육군에 우선권이 있는 국가였기 때문에 해군국 영국을 이기는 것은 무리였다.

최초의 증기기관 탑재 전함 나폴레옹 호.

최초의 철갑선(ironclad) 라 글루와.

아무튼 영국과 프랑스의 건함경쟁은 군함의 기술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주포의 강화는 그것을 막기 위한 장갑의 강화를 불렀고 이로 인한 중량증가는 엔진이 강화를 필요로 했다. 공, 수, 주의 3요소가 경쟁적으로 발전하면서 대함거포주의로 가는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포격력과 방어력의 기약없는 무한경쟁을 타개하기 위한 외도들도 있었다.

1861년 햄튼 수로에서 북군의 모니터 호와 버지니아 호가 싸운 이래 초기의 장갑함들은 2천년 전에 유행하던 충각전법이 유효한 전법이 되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체적인 동력을 가지고 풍향과는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다면 충각 공격이 효과가 있지 않을까?

햄튼 수로에서 벌어진 최초의 철갑선간 "맞장" 결과는 무승부. 포탄이 떨어져서 들이받아보고 별짓 다했는데 결국 못이겼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1866년 리사해전에서 나왔다. 수적으로 불리한 오스트리아 해군이 이탈리아 해군에게 방추진형을 갖추고 돌격하여 포격을 뚫고 충각공격을 실시, 기함 이탈리아 호를 격침하는 데 성공하자 각국의 해군은 충각공격이야 말로, 철갑선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수단이라고 보았지만, 이것이 잘못된 예상이라는 것은 청일 전쟁의 압록강 해전에서 판명되었다.

리사 해전도. 이탈리아 해군은 여기서도 물을 먹는다.

당시의 함포는 조준력과 속사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구경 포로는 명중탄을 날리기가 어려웠지만 일본함대는 우세한 청국 함대에 대하여 소구경 속사포를 사용하여 상부 구조물을 무력화 시키는 전법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점차 함선의 속도가 빨라지고 포격능력이 발전한데 더해 신무기인 어뢰가 등장함에 따라 충각돌격은 시대착오적인 전법으로 사라졌다.

한편 어뢰의 등장은 더욱 큰 충격이었다. 소형의 어뢰정으로도 대형 전함을 침몰시킬 수 있다면 무엇때문에 엄청난 예산이 필요한 대형 장갑포함을 만들어야 겠는가. 프랑스의 청년 장교파는 식량과 원료의 대부분을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영국의 해상패권을 무너트리는 데는 고속의 어뢰정이 적격이라는 이론을 펴렸다. 장갑함 1척의 건조 비용으로 어뢰정 60척을 만들 수 있는 데 어뢰는 명중하기만 하면 기존의 어떤 전함도 침몰시킬 수 있었다.

결국 1881년 프랑스 하원은 어뢰정 70척의 건조예산을 가결하고 장갑함 건조를 중단시켰으며 5년 후에는 통상파괴작전용 고속순양함 14척과 어뢰정 100척을 건조하는 계획안을 가결시켰지만 불행하게도 구축함이라는 새로운 함종의 등장에 의하여 어뢰정은 유효성을 많이 상실했다.

아무튼 이로서 프랑스는 영국 해군과의 전통적인 경쟁관계에서 완전히 이탈해 버린 셈이다.

그리고, 지난 100여년 간 발전을 거듭해왔음에도 실제적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해상력은 미국의 역사가 겸 해군전략가 마한에 의하여 추켜세워지고, 그 전술과 기술적인 발전은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에서 실험대에 올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