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한국전

특전사 모체인 ~ 영도유격대

구름위 2013. 11. 27.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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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전사 모체인 ~ 영도유격대
다들 아시는 내용인데 특전사 자료실에 영도유격대에 대한 내용이 없어 올립니다. 가장 기본적인 자료인데 없어서 올려야 한다고 판단하고 올립니다.

부산 영도섬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태종대'. 이곳에는 이름도 군번도 적혀 있지 않은 조그마한 비석 하나가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진 비바람을 등지며 5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비석은 영도유격부대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도깨비' '산돼지'로 불리며 북한군의 혼을 빼앗았던 영도유격부대. 세월의 무심함 속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이곳에는 유격대원 900명의 손톱-발톱-머리카락이 묻혀 있다.

유격부대는 한철민(육사 8기 특별반-당시 대위) 대장을 중심으로 1950년 11월 부산 영도에서 창설됐다. 한 대장은 함경남도에서 반공청년단체인 '양호단'을 조직해 활동하다가 육사를 거쳐 육본정보국 소속 동두천 파견대장으로 대북 정보 활동을 벌여왔던 인물.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윤치영 전 국회부의장의 소개로 한국전쟁 당시 주한연합고문단사령부(JACK)의 지휘하에 유격부대를 창설, 북한 땅을 누비며 공중전-해상전을 전개했다.

군번도 계급도 없이 오로지 조국 통일의 염원을 품고 자원한 부대원은 총 1,200여 명. 그러나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연병장에 묻고 북으로 떠난 900여 명의 부대원 중 살아서 돌아온 40여 명을 포함해 생존자는 200여 명에 불과하다. 비정규 특수부대인 유격부대는 정전 후 유엔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도깨비부대'란 별명답게 이들이 남긴 전과는 혁혁하다. 창설된 지 채 1년도 안 된 1951년까지 공식적으로 4,800여 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확보한 무기 및 주요 문서가 1,800여 점이고, 군사 시설 및 장비 파괴만 855점에 달한다. 서류상 남아 있는 것들만 집계한 것으로 비공식적으로 이들이 올린 전과는 혜아릴 수 없을 정도다.

북파된 900명 중 귀환자는 40명뿐
영도유격부대는 강원북부-함경남도-함경북도를 주요 거점으로 오봉관구-백호관구-청룡관구-황룡관구 등을 4개 작전권으로 나눠 활동했다. 또 해상유격대를 조직, 강원 북부에서 함경북도로 이어지는 해안선을 따라 철교-터널-철로를 폭파하고 아군의 철도 수송 요충지를 철통같이 지켰다.

목숨을 내걸었건만 정전 후 병적과 군복무 필증 하나 없이 이들에게 돌아온 것은 정부와 미군의 매몰찬 외면뿐이었다. 부대가 해체된 후 200여 명의 생존자는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는 영도유격부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이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조지 앳처슨(83)이란 백인 노병에 의해서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비밀리에 북한 지역을 다니며 특수부대를 훈련시킨 지휘관이다. 일명 'UDT'라고 불리는 수중폭파조를 이끌고 해안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영도부대에 해상대를 창설, 주요 해안의 교통 요충지에서 적의 수송 차량을 차단한 인물이다.

앳처슨은 "당시 미 중앙본부의 승인하에 극비리에 북한 지역 출신 민간인들을 모아 훈련시킨뒤 이들을 적지에 침투시켜 정보를 수집했다"며 "이들의 정보가 있었기 때문에 함경도 일대의 침투작전이 성공리에 끝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앳처슨이 50여 년이 넘도록 생사조차 알지 못했던 영도유격부대의 생존자 황보현(75)님을 만난 것은 2001년. 앳처슨은 한국전쟁 기념으로 미 정부로부터 받은 은성훈장을 황씨를 통해 영도유격부대로 보냄으로써 재회의 기쁨을 대신했다.

님은 "생명을 걸고 조국의 평화를 지킨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합당한 대우다"며 "현재 국방부와 미군을 상대로 영도유격부대를 증명할 수 있는 물증들을 수집 중"이라고 말했다



* 영도유격부대 약사 *
영도유격부대는 1950년 9월 윤치영 선생님의 보살핌으로 육군본부 정보국 소속 육군중위 한철민과 미 합중국 중앙정보부 극동 지부장 한스. 토프트 사이에 대북유격전에 소요되는 군수 지원을 전제로 성립되여 15인의 창설기간 요원을 제외한 모든 병력이 1951년 1월4일(1.4후퇴)자유를 찾아 월남한 함경남도, 함경북도 및 북부 강원도의 동해 3도 출신 반공청년 1, 200명을 선발, 부산 영도 태종대에서 1952년 12월 5일 까지 적후방에 침투 유격 작전을 수행 하였다.

지원처인 미 C. I. A 극동지부는 일본 동경 아쯔기에 위치 하였으며. 한국 지휘부는 부산 동래 태화관에 위장 간판 극동공군, 기술 지원단(F.E.A.F-T.A.G)을 걸었으나. 공식 명칭은 주한 연합 고문단 사령부(J.A.C.K)였다 그리고 직속 부대인 영도유격부대는. 부산 영도 태종대에 설영하고 본부 예하에 4개처 행정, 작전, 정보, 보급처를 5개대.

교육, 해상, 통신, 의무의 단위부대를 두고 대북 침투 유격부대는 (총사령관 최제부)휘하에. 4개 관구 사령부(황룡, 청룡, 백호, 오봉)을 구성 작전지역을 북강원도와 함경남도, 함경북도 전역이 였다..

해상 유격대는 미 7함대의 지원 아래 동해안 원산에서 라진 간의 철교, 터널, 철로의 폭파와.철도 수송의 저지와 육상 수송의 저지도 동시에 수행함과 동시에 중요 군사 요충지에 대한 기습 공격과 부락기습 요인 납치 및 침투 부대의 상륙과 철수등 특수 작전을 수행하고 지상 유격부대들은 하늘과 바다로 적후방에 침투 현지 반공애국투사들을 규합하고 적정 제보(폭격 및 함포 유도)와 후방 교란등 유격전을 수행 하였다

영도유격부대가 거둔 확인전과는 적사살 4,810명 군시설물(병사,우라늄선광장, 탄약 제조창, 군수물 창고등) 공공기관과 운송 수단물등의 파괴 378건 화기와 기타 노획물 다수였고 이로 말미암아 인민군 최고 사령부는 영도유격부대의 대북 침투 병력을 소탕하기 위하여 최전선의 2개 사단 병력을 후방에 이동 배치 하였다

침투 병력은 900여명이 였고 귀환자는 33명에 불과 하였다 1952년 12월 5일 J.A.C.K 에 의해 예고 없이 단행된 강제부대 해체는 휴전후에 야기될 복잡 다난할 제문제를 사전에 봉쇄코자 시도한 전략적 행위 였으나 북에 이미 침투된 수백명의 유격대원들과 이에 동조한 수천명의 재북 반공 애국 청년들의 그후의 운명에 대하여 그누가 책임을 져야 할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