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송나라때의 첩보전

구름위 2013. 11. 1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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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량(鄭秀亮) 

 

중국의 양송시기에 전쟁이 빈번했고, 간첩은 중시되었다. 첩보전이 빈번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송나라의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중심인 경성은 전국의 중요한 정부기관이 모두 집결되어 있고, 중추수뇌에 가장 근접한 곳읻. 그러므로 각지 간첩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었다.

 

당시 사람은 이렇게 탄식한 바 있다. 천자의 발 아래 외국간첩이 없는 곳이 어디인가? 관리인 왕존(王存)도 일찌기 이렇게 우려를 나타낸 바 있다: 요나라사람들은 우리 조정의 일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정부도 여러번 조서를 내려서, 공개적으로 경성내외에서 간첩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를 초빙한다. 1명을 잡으면 30만의 현상금을 주겠으며, 공명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거나, 간첩을 비호하는 자는 가장을 참수할 뿐아니라, 처자식도 유배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당시에 간첩은 정부의 골치거리인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큰 보상을 걸고 단속하려 한 것일 것이다.

 

당연히, 송나라는 방어만 한 것이 아니다. 송나라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간첩과 반간첩망을 만들고, 전체적인 체계를 갖춘다.

 

먼저, 간첩은 '자질'이 뛰어나야 한다. 충성스럽고 죽음을 겁내지 않아야 하며, 기민하여야 한다.  이것들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외에 당시 전투는 다반사였고, 적의 정세를 탐지하는 것이 간첩의 중요임무였다. 적에게 발견되지 않으면서 임무를 순조롭게 완성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주 산림이나 절벽골짜리를 지나거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길을 다녀야 했으므로, 신체적인 조건이 아주 중요했다.

 

전쟁의 필요로 송나라는 수영을 잘하는 '와인(蛙人)'를 모집하여 간첩으로 삼았다. 남송초기, 전문적으로 해상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기관인 수탁후(水坼)를 만든다.

 

남송때 사람이 쓴 <소충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어느 해에 원나라군대가 양양을 포위공격한다. 양양은 물샐틈없이 포위된다. 수도에는 엄밀하게 장책을 설치하여, 물고기나 새우조차 빠져나갈 수 없었다. 양양의 송나라 수비군사는 두 명의 '와인'을 파견하여, 물길에서 수십리를 잠행하게 하여, 구원병을 불러온다.

 

이외에 정부는 일부 전문가를 모집한다. 예를 들어, 외국어에 능통한 자, 지리지식과 회화능력이 있는 자, 일정한 수학지식이 있는 자가 그들이다. 이렇게 하여 다방면에서 적국의 정보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간첩이 되는 자는 모두 대단한 능력이 있는 자들이다.

 

다음으로, 비교적 시스템적인 간첩망을 건립한다. 송나라때, 간첩의 신분은 아주 복잡했다. 각 업종에 다 흩어져 있었다.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는 사신, 변방무역을 하는 상인, 적장의 심복, 애첩, 토착민, 외국인, 보통백성, 포로, 승려등등이 모두 간첩이 되었다.

 

송나라때의 위태(魏泰)가 쓴 <동헌필록>은 한 승려가 뒤어나게 반간계임무를 완성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송인종때, 서하의 이원호가 유륵차(裕勒且)를 송과 대하의 변경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한다. 유륵차는 용맹하고 전투를 잘했다. 송나라의 변경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송나라장수는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하루는, 송나라장수 종세형(種世衡)이 그를 위하여 간첩역할을 많이 맡아온 광신화상(光信和尙)을 부른다. 좋은 술과 요리로 대접한 다음 그에게 임무를 부여한다. 술도 충분히 먹고 밥도 배부르게 먹은 후, 광신화상은 임무를 받아 떠난다. 그러나 그는 서하변경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된다. 그의 몸에서 종세형이 유륵차에게 보내는 서신이 발견되는데, 그 서신에는 그저 문안을 묻는 말 밖에 없었다.

 

이원호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래서 광신화상을 엄히 고문한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다. 이 때 광신의 몸에 입은 솜옷이 이원호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자세히 검사하도록 한다. 과연 그 안에서 또 다른 서신을 발견한다. 이것은 종세형이 유륵차와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자는 밀약이었다.

 

이원호는 대노하여, 유륵차의 병권을 빼앗고, 얼마후 그를 죽여버린다. 송나라는 멋지게 반간계를 성공시킨 것이다.

 

다음으로, 송나라때의 간첩기술은 아주 선진적이었다. 첩보전영화를 여러분은 적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 암호라는 것에 대하여도 아마 인상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의 선조들도 송나라때부터 이미 암호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송나라사람들은 암호를 "자험(字驗)"이라고 불렀다. 소위 "자험"은 각종 정보를 사십자의 시 한 수 속의 어느 글자로 표시하는 것이다. <무경총요>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군대내의 일은 사십종이다 예를 들어: 청궁(請弓), 청전(請箭), 청마(請馬), 청양료(請糧料), 청초료(請草料), 청첨병(請添兵), 청고수(請固守), 적다(賊多), 적소(賊少), 사졸병(士卒病) 등등. 순서대로 배열한다. 만일 사십개 내의 어느 상황 혹은 몇 개 상황이 벌어지면, 오언율시를 써서, 사십항의 순서에 맞추어 하나의 기호를 시의 몇번째 글자 아래에 남긴다.

 

<적득고원초송별(賊得古原草送別)>을 예로 들면, 시의 사십글자는: "리리원상초(離離原上草), 일세일고영(一世一枯榮). 야화소부진(野火燒不盡), 춘풍취우생(春風吹又生), 원방침고도(遠芳侵古道), 청취접황성(晴翠接荒城), 우송왕손거(又送王孫去), 처처만별정(滿別情)"

 

만일 "피적위(被賊圍, 적에게 포위되다)"라는 상황이 발생하고, 사십항의 순서대로 제31항이라면, 시의 31번째 글자인 "우송왕손거"의 "우"자에 기호를 추가한다. 그렇게 하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장수는 손에 쥐고 있는 암호책을 대조해보면 상황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정보의 안전성이 크게 증가한다.

 

그외에 다른 '암호'도 있다. 명반물로 정보를 의복이나 포백(布帛)에 쓰면, 마른 이후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물이 들어가야 다시 보인다.

 

당시에 해음(諧音, 같은 음)이나 은어(隱語)를 써서도 정보를 전달했다. 시의생(施宜生)은 원래 송나라 사람인데, 나중에 금나라에 어쩔 수 없이 투항한다. 송나라 소흥30년(1160년) 정월, 그는 송나라에 하례를 보내도록 파견된다. 금나라사람은 간첩도 파견하여 암중으로 남송의 지도를 그린다.

 

당시 금나라사람들은 송나라를 공격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시의생은 남송에 경고를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곁에 금나라사람이 같이 있으므로, 그는 기회를 보아 송나라관리들과 얘기를 나눌 때 고의로 큰 소리로 말한다: "오늘 북방이 아주 강하다" 그후에 붓을 들어 탁자를 치면서, "필래(筆來), 필래(筆來)"(붓을 가져와라라는 말이지만 반드시 온다(必來)와 발음이 같다)라고 말한다. 남송은 그의 말을 듣고 경각심을 가지고 전쟁을 준비한다.

 

다른 간첩기술도 있다. 납서(蠟書), 옹청(瓮聽), 공표(空飄), 전서(箭書) 등등. 정말 각양각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간첩과 방첩전은 당시에 최고조에 이른다. 고인의 지혜는 정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대중오락문화에서 제임스 본드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첩보전이 근현대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간첩이라는 직업은 최소한 24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여왕 엘리바제스 1세때 신하인 프란시스 월싱햄 경(Sir Francis Walsingham)은 16세기에 최초의 간첩망을 조직한다. 중국은 송나라때, 전쟁이 빈선했고, 간첩이 중시되었으며, 첩보전이 상당히 빈번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