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도단방(陶短房)
금전기의(金田起義)를 얘기하자면, "내토지쟁(來土之爭)"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배상제회(拜上帝會)의 "단방(團方, 團營의 암어이다. 方은 圓에서 땄다)"이 절대기밀에서 반공개로 바뀌는 순간이고, 규모가 큰 '내토계투(來土械鬪)'가 발발한 것이다.
소위 "내"는 객가(客家)를 가리키고, "토"는 광서(廣西) 원적의 한족, 장족등을 가키킨다.
광서는 계북(桂北)의 전주(全州), 흥안(興安), 자원(資源)과 계서북(桂西北)의 봉산(鳳山)4현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주현(府州縣)에는 모두 객가인이 분포했다. 배상제회의 활동이 집중된 계중(桂中), 계동(桂東)일대는 청나라때의 강희, 건륭기간동안 광동 가응주(嘉應州)등지에서 이주해오고 복건 영화 석벽동에서 기원한 객가족이 위주였다.
두 족군간의 갈등은 지방정부의 잘못된 조치로 집단분쟁으로 비화한다. 결국은 태평천국의 운동으로까지 발전한다. 청나라정부에 있어서, 이것은 반성해야할 심각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강도(鋼刀)를 휘두르며 먹거리를 다투는 '이류(異類)'
객가인은 농경기술이 '토인'들보다 선진적일 뿐아니라, 힘들게 일하고 잘 참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어쨌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고 현지는 평지가 적고, 산지가 많은 척박한 곳이다. 비옥하고 경작하기 좋은 평지는 기본적으로 '토인'들이 모두 점거하고 있었다. 객가인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고, 가시밭이 우거진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일찌감치 '토인'들에게 쫓겨난 요족, 묘족등과 함께 살았다(현지의 요족의 산가에는 "관청에서 평지를 차지하고, 한족들이 언덕을 차지한다. 요인들은 산골짜기로 쫓겨났네"라는 가사도 있다).
이들 산간지구는 비록 개간할 분지, 평탄한 곳이 있기는 해도, 지형이 열악하고 토질이 척박했다. 어떤 곳은 교통이 불편하여 '송아지를 짊어지고' 올라야 하는 곳도 있었다. 이런 곳은 송아지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송아지가 자라서 황소가 되면 농사에쓴다. 이들 황소는 죽을 때까지 산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객가인들은 힘든 것을 잘 참고, 농사를 잘 짓고 남녀모두 농지에서 일하는 전통을 살려, 몇 대인의 노력을 거쳐, 황무지를 하나하나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상업도 겸업하고, 목탄도 만들고, 양식도 하며 기타 부업을 했다. 그중 일부는 부유해져서 산을 내려가, 토인의 전답을 사고, 더욱 살기 편한 곳에서 더욱 편안한 생활을 구한다.
이렇게 되니, 그들은 원래의 주인 '토인'들과 갈등이 발생하게 된다.
'토인'들이 보기에, 이들 '내인'들은 분수를 지켜 자신의 고향에 머무르지 않고, 광서로 와서 먹거리를 찾았다. 이것만해도 분수를 지키지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왔으면, 산골짜기에 그냥 죽어라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들과는 정수불범하수(井水不犯河水,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다)했으면 될탠데, 지금 이들 '외인'들은 자신들이 돈을 좀 벌었다고 자신들의 땅으로 내려와서 농지를 다투고, 집을 다투고, 마을을 다투고, 묘지까지 다툰다. 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 '토인'들은 '향규민약(鄕規民約)'을 만들어 '내인'들에게 전답을 팔지 못하게 한다. 이런 방법으로 객가인들의 발전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바람이 새지 않는 담장은 없는 법이다. 일부 몰락한 '토인'들은 고가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객가인에게 토지, 주택을 판다. 이것은 자주 현지의 족장, 호족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리하여' 향규민약'으로 처벌하고 심지어 내토 양족의 충돌까지 벌어진다.
"내인"과 "토인"간에 또 하나 자주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는 '종교'였다.
속담에 "월속호귀(越俗好鬼, 광동지방의 풍속은 귀신을 좋아한다)"라는 말도 있다. 화남일대의 중국인들은 자고이래로 신앙 ,길흉화복을 중시해서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신령에게 의탁하고, 기원했다. 광서로 이사온 객가인들은 전통적인 조상숭배외에 마찬가지로 각지의 신명의 보우를 희망했다.
다만 광서에도 마찬가지로 '신선이 곳곳에 있다', 무술나술(巫術儺術, 나술은 역귀를 쫓는 것)이 아주 유행하는 곳이다. 계중, 계동일대는 청나라때 잡묘(雜廟)가 곳곳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갖가지 신명은 대부분 현지화된 신선이다. 비록 그들중 많은 경우는 사실 '외지인'이지만(예를 들어, 뇌신의 원래 성은 진씨로 광동 해강사람이다. '반왕'은 중원전설에 개천벽지의 반고이다), '종교해석권'은 일찌감치 '토인'의 수중에 있었다. '내인'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토인'은 자주 '신선술'을 써서 제사를 지냈고, '신령부체'등 수단을 빌어 객가인들을 현지신명숭배체제에서 당당하게 배제시켰다. 혹은 이 기회를 빌어서 큰 돈을 뜯어내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자연히 내토충돌의 도화선이 된다. 도광30년의 '내토지쟁'이전에, 하현(賀縣)에서 규모가 적지 않은 내토계투가 발발한 적이 있다. 원인은 바로 묘회에서 내토 양족간에 '화등(花燈)'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다가 벌어진 시비였다.
사실상, '월동객가(광동성 동부의 객가)'가 계중(광서중부)로 들어온 초기에, 내토양족간에는 그다지 격렬한 충돌이 없었다. 갈수록 치열해진 것은 첫째, 사람은 많아지는데, 땅은 적다는 것이다. 척박한 계중은 금방 직접적인 이해충돌로 발전한다; 둘째, 아편전쟁후, 대량의 광동실업유민, 산병유용이 광서로 들어와서 살 길을 찾으려 했다. 전쟁배상금으로 은값이 오르고, 세금이 과중했다. 원래 팍팍한 생존조건이 더욱 무너지게 된다. 내토양족의 생존압력은 더욱 강화된다. 1849년 광서는 큰 가뭄이 든다. 계중의 많은 곳에서는 낱알 한 톨도 거두지 못한다. 다음해에는 다시 대규모의 전염병이 발생한다. 계중의 백성들에게는 설상가상이었다. 게다가 상로(商路)도 단절되고, 비적이 들끓었다. 각지의 천지회 폭동에 대응하기 위하여, 관청은 다시 원래의 세금외에 추가세금까지 거두었다. '내인'과 '토인'은 부득이 생존을 위하여 한톨이라도 식량을 더 차지해야 했다. 강도를 휘두르며 먹거리를 두고 싸우는 '이류'가 되었다.
귀현(貴縣), 민감한 지방
"내토지쟁"의 발발지는 광서 귀현이다.
도광30년, 즉 1850년 음력 팔월, 광서 귀현의 동북에 있는 태허라는 객가족 마을에서 우연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우연한 작은 사건이 결국은 수백개의 마을을 석권하고 수만호의 내토촌민이 관련되는 대계투로 발전하는 도화선이 된다.
원래, 대허에 한 객가족 부자가 있었다. 이름은 온아옥(溫亞玉)이다. 난세에 의식에 걱정이 없고 생활을 풍족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온씨부자는 첩을 하나 들이고자 했는데, 그가 마음에 든 여자는 하필이면 이웃동네 '토가'집안의 아가씨였다. 마음이 동한 그는 여러가지를 생각지 않고 후한 선물을 가지고 여자의 집으로 가서 혼인을 청한다.
이 '토인'은 집안이 가난했다. 가난하면 뜻을 세울 수 없다. 무슨 '내토'를 따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례를 기꺼이 받았고 혼인을 응락한다. 그런데, 그는 이전에 일찌감치 다른 '토인'에게 딸을 주기로 약속을 한 바 있었다. 그 미래의 시댁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는 분노하여 마을 사람들을 모아서 그 집을 찾아와 따진다. 그 아가씨의 혼인을 물리라고 핍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집에서는 이미 온씨네에서 보내온 채례를 절반이상 써버렸다. 대허로 가서 온씨에게 얘기했더니 온씨는 동의하지 않았다. 혼인을 물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채례로 보낸 것은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토인'은 지두사(地頭蛇)라는 점을 내세워 사람도 많다는 점에 의존하여 혼인도 물리고, 돈도 돌려주지 않겠다고 한다. 온씨집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내인' 동족들을 끌어모아서 죽어라고, "돈을 주든지, 아가씨를 보내든지' 하라고 협상의 마지노선을 제시한다. 원래 쌍방이 모두 한가지씩을 잘못했으므로, 각자 한 걸음씩 양보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양쪽은 모두 체면과 이익때문에 서로 조그만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양보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동족을 끌어들여서 도움을 구했다. 결국 혼인은 성사되지도 못하고, 팔월이십팔일 대계투가 발발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계투가 발발하기 전에 항상 "견관(見官)"의 과도기가 있었다. 쌍방은 모두 관청을 찾아가서 얘기를 했다. 만일 관청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서 잘 조정해주고, 공정하게 처리해주었다면, 아마도 완화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현도 좋고 심주부도 좋고, 양족의 분쟁에 대하여 못들은 척했다. 어떤 지방관은 "주먹이 센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싸우라는 말이 아닌가?
지방관은 왜 일을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가?
원래, 청나라때 지방관은 평가가 엄격했다. 만일 관할구역내에서 난리가 일어나고, 사람이 죽으면, 지방관은 모두 엄중한 처분을 받는다. 그래서 각급 문무관리는 모두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저 그럭저럭 넘길 수 있으면 넘기는 것이다. 당시 지방에 비적이 많아서 많은 군관들이 비명에 죽었다. 제독 민정봉은 책임을 질까봐 겁내어, 전사한 군관을 모조리 '병사'한 것으로 처리했다. 광서순무 정조침은 더더욱 '분식'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찌기 부하관리들에게 정중하게 말한 바 있다. 상부에 '비적상황'에 대하여 보고하는 것같은 재미없는 짓은 하지 말라.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부현의 하급관리들도 내토쟁투같은 일에 관여해서 골치아프고자 하지않았다.
그외에, 지방관은 또 다른 고려도 있었다.
현지 지방관은 모두 외성인이다. 다만 그들은 대부분 '토인'에게 편향되어 이썼다. 왜냐하면 '토인'들은 현지에서 살고 있으며 내력을 잘 알아서 단속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내인'은 외성과 관계가 밀접했다. 당시 계중, 계동남에는 '회비(會匪)', '정비(艇匪)'등 수륙의 반청무장세력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광동출신이었다. 그리고 현지 객가와 친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비록 내토양족은 모두 "당비(堂匪, 천지회)"이지만, '내인'이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광동에서 온 광마(廣馬)의 전투력은 본토의 '토마(土馬)'보다 훨씬 강했다). 지금 내토 쌍방이 대치하고, '토인'은 '내인'보다 몇 배가 많다. 만일 계투를 방임한다면, 승부는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하면 '비적을 제거하는' 돈과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객가인들은 서로 도우는 전통이 있다. 그리고 전투를 잘하고 용맹했다. 계투가 일단 발발하면, 대허 부근의 많은 객가촌은 한꺼번에 나선다. 그리고 함께 뭉쳐서 싸우므로, 일시에 '토인'들이 어쩔줄 모르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전쟁은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자, '토인'의 사람이 많다는 장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들의 구원병은 비록 늦게 오지만, 사람수는 훨씬 많았다. 마찬가지로 '토비', '고비'(분명 '토마'일 것임)등을 불러서 싸움에 가담시킨다. 한달여가 지난 후, '토인'들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많은 객가촌은 함락되고, 객가인들은 대거 피살된다. 살륙을 피한 남녀노소는 할 수 없이 집과 땅을 버리고, 황급히 도망쳐서 목숨을 건져야 했다.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토인'들은 곳곳에 방화하고, 함락된 객가촌을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도록. 다시는 자신들과 땅을 놓고 싸울 수 없도록.
이렇게 패배한 '내인'들은 무리를 이루어 계평(桂平)방향으로 도주한다. 마침 병마를 모으고 있던 자형산의 배상제회 진중에 들어간다. 이것이 1850년 음력 십월초사흘의 일이다. 이때 금전기의의 첫번째 전투 평님화주산인촌전투를 벌인지 이틀이 지난 때였다.
광동 천지회의 골간이 광서로 들어오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내토지쟁에서 '내인'과 '토인'은 각각 '외부지원세력'을 끌어모았다. 처음에는 관청에 의존하고자 했지만, 이어서 약속이나 한 듯이 천지회에 도움을 구했다.
광동은 원래 천지회활동의 중심지대였다. 광서는 강희, 옹정, 건륭을 거치면서 천지회활동의 기록이 거의 없었다. 가경12년(1807년)에 광동에서 대규모의 '징판양비(懲辦洋匪)"(밀수단속을 이유로 해금을 강화한 것)활동을 벌인다. 많은 광동의 천지회 골간은 수,륙 양로를 거쳐 광서로 들어온다. 서강, 심강유역의 광활한 지역에 흩어진다.아편전쟁때, 청왕조는 대량의 병용, 수군을 모집하여 광동 각지에 배치한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대거 내보낸다. 전후에 광동의 경제가 불경기여서 일부 사람은 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천지회에 대량으로 가입하거나(병용,수군에도 원래 천지회 비밀당구가 있었다. 그들중에 많은 사람은 원래부터 천지회 인물이다), 강도약탈로 살아갔다.
도광26년(1836년), 광동천지회의 '정비'는 먼저 광서로 들어갈 생각을 가진다. 그들은 일년내내 수상에서 생활한다. 그래서 광동광서를 오가는 수로를 잘 알았다. 광서는 광동만큼 부유하지 않지만, 상업완래가 빈번하고, 살아가기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뿐아니라, 광동의 청군은 적지 않은 규모의 수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서는 지방단련만으로 수면의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비'에 있어서,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들의 선박은 '파산정'으로 배가 단단하고 편평하며 양쪽에 여러개의 노가 있어서, 젓기에 편리하고 가볍다. 물이 깊은 주강에서는 청나라수군의 전선을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광서의 내하에서는 단련의 작은 배를 상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비'의 구성은 복잡했다. 그러나 골간은 광동 조경부 학산현에서 온 사람들이고, 학산의 객가인이 위주이다. 학산객가는 강희연간에 월동 혜주, 조주부에 소속된 각주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광서 계중의 객가의 발원지인 가응주는 바로 그후 옹정10년(1732년), 광동총독 악미달의 건의에 의해, 혜주부에서 흥녕, 장락을 분리하고, 조주부에서 정향, 평원, 진평을 분리할 때 건립한 직예부이다. 즉, 학산객가와 계중객가는 마찬가지로 석벽동-가응주체계이다. 단지 이주시기가 조금 빨랐을 뿐이다. 그들의 사투리와 가응주객가는 대동소이했다. '정비'의 두령 임문병(任文炳), 대두양(大頭羊, 張釗), 대잉어(大鯉魚, 田芳)등은 모두 학산객가이다. 객가의 '한식구' 전통이 있어, '정비'는 광서에서 금방 본거지를 마련하고, 심주, 오주, 유주 각부의 강에서 활약을 시작한다.
약간 후, 광동 육로 천지회무리들이 양광의 접경지인 흠주, 빈주등지에서 광서로 들어온다. 그리고 신속히 '정비'와 하나로 뭉친다. 그들중 핵심인물 진만(秦晩), 이사창(李士昌), 이사규(李士葵, 광동 흠주 사람)등은 모두 객가였다. '반은 광동인, 반은 광서인'이라는 편리를 이용하여, 양광의 접경지의 깊은 산에 본거지를 마련한다. 이들 육로의 광동 천지회무리는 '회비'라고 부르고 속칭 '광마'이다. 한 무리의 인원수는 많지 않다. 단지 몇십명 몇 백명이다. 다만 대다수는 전투경험이 풍부한 정예장병이다.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그중의 일부 '회비'는 수륙을 겸했다. '정비'와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예를 들어, 장가상(張家祥, 나중에 청나라명장이 되는 장국량, 광동 고요객가임), 나아왕(羅亞旺, 나중에 태평천국의 명장 나대강이 됨, 광동 게양객가)등이 있다.
1848년, 서광진은 양광총독의 직위를 이어받는다. 그가 보기에, 비록 양광은 모두 자신의 관할구역이지만 광동은 교통이 편리하고 조정의 이목이 많았다. 치안을 잘못하면 결과가 심각했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광서는 산멀고 물먼 곳이다. 약간 혼란스러워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명을 내려 광동에 전선을 추가로 모집하고, 조주, 흠주, 혜주, 염주의 각부에 단련을 크게 늘이고, 관병을 추가파견하여 수륙양로에서 천지회 '회비' '정비'를 광서로 쫓아낸다. 이렇게 이웃으로 쫓아보내는 방식으로 광동은 잠시 평정을 찾는다. 그러나 광서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신사(紳士)도 천지회 두령이다.
광동에서 광서로 들어온 '회비', '정비'는 원래 광서로 출장온 셈이다. 기지는 여전히 광동에 두었다. 광서에서 성공한 후에는 통상적으로 모두 '본거지로 되돌아갔다' 이제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들중 일부는 관청에 의탁하여 관청에 투항한다. 또 다른 무리는 광서에서 현지의 땅을 놓고 싸운다. 이런 상황하에서, 자기사람인 광서 내인들이 전투를 벌이면서 도와달라고 하자 호소력이 생긴 것이다. 1844년부터 광서 빈주, 상주, 귀현의 여러 내토계투에 모두 '회비' '정비'가 개입한다. 1850년 대계투에도 그들은 당연히 참가했다.
광동본토의 천지회는 가경15년91810년)에 옹녕현에서 시작한다. 우두머리 심혜평(沈惠平)등의 구호, 회규는 모두 광동에서 전래되어온 구초본(舊抄本)이다. 설사 본토 천지회라고 하더라도, 최초에는 광동에서 발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광서 천지회는 점차 자신의 특징을 갖추게 된다. 하나는 본토화, 비밀화이다. 왕왕 '비적', 단련과 구분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신사, 연총(練總)이지만, 실제로는 천지회두령이다. 둘은 당구화(堂口化)이다. '당'을 반공개조직으로 하고 마찬가지로 '당'을 명호로 하는 현지의 일부 무장세력과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관방에서는 '당비'로 칭했다. '광마'에 비하여, '당비'의 생존능력은 더욱 강했다. 그러나 전투력은 훨씬 약했다.
원래 '당비'와 '광마'는 모두 천지회의 일가이다. 피차간에 적지 않은 협력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정비"중 일찌기 "토마" 이천보(광서 계평 구협촌 사람)가 있었다. "토마"인 "진아귀(장족, 무선동향 하평령촌 사람)은 광서의 각지를 전전할 때 진만등 '광마'의 호응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천지회에 대한 진압을 속속 강화하면서, 광동, 호남, 귀주의 천지회가 대거 광서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적지 않은 '당비'의 홍문형제정은 고향을 보위하자는 본토감정에 압도했다. 많은 '당'은 내토계투가운데 중립적인 입장에서 관망한다. 최종적으로는 '토인'의 진영에 가담해서, '내인' 및 객가인동포인 '광마'형제와 적이 된다.
'당비'는 토착이고 가족을 데리고 다녀 행동이 불편했다. 그리고 전투력이 원래부터 '광마'만 못했다. 이것이 바로 <태평천국기의기>에서 말하는 "토인"은 설사 '비도'와 결합해도 첫싸움에서 지는 현상이 발생한 이유이다.
그러나, '당비'가 계속 집결하면서, 인원수의 우세가 점차 작용을 나타낸다. 결국 전투력은 강하지만 인원수가 적은 '광마'는 더 이상 객가를 보호할 수 없게 되고, '내인'과 함께 패전한다. '광마'의 광서에서의 전성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함풍5년(1855년) 광주성을 포위공격하다가 실패한 이문무, 진개 등의 부대가 광서로 물러나서, 심주부등지에 '대성국(大成國)'을 건립할 때 비로소 재기한다.
실패한 '광마'는 어디로 갔는가? 금전기의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천지회 무리가 태평군에 가입한다. 예를 들어, 나아왕, 범연득, 소삼낭, 변삼난, 양원청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인원은 청군에 투항한다. 혹은 태평군에 먼저 들어왔다가 다시 청군에 투항한다. 예를 들어, 장쇠, 전방, 관지 등이 그들이다. 비록 기록상으로 그들이 귀현의 내토지쟁에 참가했었다는 내용은 없지만, 이를 통하여 추정해볼 수 있다. 내토지쟁에서 패배한 '광마'는 광동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광서에 자리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위에서 얘기한 두 가지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내토지쟁으로 격화된 양광의 천지회 갈등은 태평천국 건국후에도 여전히 계속된다. 태평군이 영안주에 들어간 후, 성안의 장병 가운데 많은 수는 광동 흠주, 귀선에서 온 객가인, 구천지회 무리 그리고 호남에서 패퇴해온 천지회 인원이다. 성밖에서 청군의 포위공격을 돕는 '장용'중에도 적지 않은 홍두건을 쓴 원래의 광서천지회 인원이 있었다.
당연히,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다. 청군의 진영에도 광동인, 객가인이 없지 않았다. 예를 들어 동관 관성적의 심주지부 장경언이 광동에서 모집한 '동용'에는 광동인들일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광동 객가인이다. 청군에 투항한 장쇠등도 포위공격에 참가한다. 다만 이들의 '지원'은 믿을만하지 못했다. 장쇠 등은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고 최종적으로 청군측에 의하여 숙청된다. '동용'의 제1차 300명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조리 반기를 든다. 새로 모집한 3000명도 자주 포위된 성내에서 양식, 유황(화약제조에 쓰임)을 밀수했다. 많은 지방지에서는 이를 나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객가인'의 '우리가 남이가' 식의 정서는 설사 너죽고 나살기식의 전쟁터에서라 할지라도 여전히 미묘한 효과를 발휘했다.
'자기사람'의 하나님
귀현 내토지쟁의 발발지인 대허의 이웃마을인 사곡촌은 바로 홍수전의 표친(表親)인 사곡 왕가의 거주지이다. 홍수전, 풍운산이 광서에 도착한 후 처음 자리잡은 곳이기도 하다. 비록 왕가는 배상제회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고, 양수청, 소조귀를 당해내지 못했지만, 홍수전과의 친척관계로 인하여, 철저히 배제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상당한 실력과 영향력을 보유했다. 대허의 서쪽, 귀현의 서북부에는 배상제회의 주요활동구역인 용산이 있다. 석달개, 진일강등 배상제회의 핵심인물이 모두 용산일대의 부호이거나 광부의 우두머리였다.
배상제회는 원래 반공개적으로 활동했다. "사람들마다 홍선생을 알았다." "홍선생"의 표친이 이웃이고, 객가의 '자기사람'인 대허 '내인'은 당연히 배상제회에 대하여 낯설지 않았다. 1849년 여름, 홍수전은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배상제회에 "앞으로 전염병이 도는데, 신자들은 목숨을 구해줄 것이다"라는 예언을 퍼트리게 한다. 다음해 연초에 과연 말한대로 자형산지구에 전염병이 돈다. 죽은 사람이 가장 적은 곳이 전심, 화뢰 이수는 바로 배상제회 신도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비록 이것은 우연의 결과이기는 하지만(배상제회의 예언은 원래 군중들에게 가산을 버리고 의거에 참가하도록 독려하기 위한 것이고, 배상제회의 신도들 중에도 죽은 사람이 적은 것은 홍수전이 의술을 알았을 뿐아니라, 배상제회내에 이준창, 하조원등 원래 군의출신이 있었던 것과도 관련있다), 다만 비상시기에 배상제회의 명성과 신비성은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객가인은 똘똘 뭉쳐서 계투가 벌어지면 주변의 동족들을 끌어모아서 전투를 벌였다. 지척으로 가까운 사곡촌도 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귀현의 동북, 서북의 객가마을도 모두 참가했을 것이다. 배상제회의 핵심무리와 수뇌는 절대다수가 객가인이다. 홍수전의 표친은 계투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치대로라면, 배상제회는 절대로 수수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대다수의 기록을 보면, 내토계투의 초기에 배상제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기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
비록 이에 대하여 많은 논자들은 배상제회가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 한 중요한 증거로 보지만, 소조귀가 말한, "요귀와 요귀가 서로 싸워서 둘 다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는 말은 내토지쟁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소조귀는 단련과 같은 류를 '외소(外小)', '외인'으로 보았고, 관병과 같은 류만을 '요(妖)'라고 칭했다. 그리고 이 말은 대허계투가 개시되기 전인 사월 이십이일에 했다. 분명 청군과 당시에 활약하던 '회비'의 교전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홍수전은 일찌감치 천지회를 폄하하고 배척했었기 때문이다) 계투가 시작된 후, 소조귀는 반복하여 '인내", "양인삼척(讓人三尺)"을 강조하고 무장자위를 주장한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무리를 모아 '내인'을 도와주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금전의 '단방'은 이미 시작되었고, 양수청의 병이 아직 호전되지 않아서, 소조귀는 새로 일을 만들어 기의를 일으키고 건국을 하는 일에 지장을 받고 싶어하지 않았었다.
사곡 왕가를 주변화시킨 "주당사건"은 아마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록 소조귀는 왕가와의 권력투쟁이 일찌감치 1849년초에 격화되었지만, 여러번의 교전을 거쳐 이미 절대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천형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경술(1850년)년 팔월 이십일, 소조귀는 "귀현의 형제들이 주당의 사람들에게 유혹될까봐 우려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신경을 써서 하범하여" 은혜와 위엄을 같이 보였다. 이때 왕가는 일찌감치 권력핵심에서 밀려났다. 옛 일을 다시 언급하는게 무엇때문일까? 경술년 팔월은 바로 대허의 내토계투가 시작된 시기이다. 대허는 사곡촌에 이웃한 마을이다. 소위 "주당유혹"이라는 말은 아마도 이웃의 정과 객가인의 전통으로 사곡왕가가 귀현의 다른 객가인과 연합하여 도와주려고 하다가, 소조귀를 불쾌하게 만들어 저지한 것이 아닐까.
다만, 이렇게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태도는 금방 풀린다: 구월 초십일, "천형"은 말한다. "팔방에서 일어나고, 일어나면 다시 식지 않는다. 싸워야 한다." 십오일에는 다시 지시한다. "만일 '외소'가 침입하면 그들과 죽어라 싸워도 좋다." 이를 전후하여 <천형성지>는 여러번 계속하여 배상제회 신도와 '외소'간의 교전에 관한 기록이다. 그중 적지 않은 부분은 확실히 '내토지쟁'의 흔적이 있다.
확실히, 같은 객가인이 많은 배상제회의 신도들가운데, 눈이 벌개져서 벌이는 내토쟁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세를 점한 '토인'이 '내인'을 학살할 때, 절대로 같은 객가이며 무기를 들고 무리를 이룬 배상제회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배상제회가 싸우지 않으려 해도, '외소'들이 달려들었을 것이고, '양인삼척(삼척을 양보하다)'을 해도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십월이 되자 40여일간 악전고투를 벌인 내토계투는 마침내 토인의 승리로 끝난다. 집에서 쫓겨나고, 갈 곳이 없는 내인은 이때 퇴로가 없었다. 같은 일족이며 계투후기에 이들을 도왔으며, 사람이 많은 배상제회로 몰려간다. 그곳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배상제회는 군영과 대오를 나누고, 계율을 지켰다. 이때 '내인'에게 그것이 무슨 장애는 아니었다. 현지의 '신선'계통에서 주변화되었던 그들이 당연히 그들이 보기에 객가 '자기사람'이 데려온 하나님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이들 객가인들의 가입으로 배상제회는 설중송탄(雪中送炭), 여호첨익(如虎添翼)이 된다.
<심주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배상제회는 원래 겨우 수백명이었는데, '내인'중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이 모조리 투신하면서 삼천여명이 된다. 배상제회의 명성이 크게 떨쳐진다. 만일 '내인'이 오지 않았다면, 태평군의 기의는 아마도 실현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기재는 확실히 과장된 점이 있다.
그러나, '내인'들은 이미 돌아갈 고향이 모두 파괴되었으니, 뒤돌아볼 필요조차 없다. 그리고 배상제회의 핵심과 동족이고 전투경험도 있다. 그들은 핵심역량으로 성장한다. 금전기의후 태평군의 전투력에 미친 공헌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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