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1900년, 호주의 중국정벌기

구름위 2013. 10. 26.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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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둘러싼 영국군과 러시아군의 대치 

 

글: 설아간사(雪兒簡思)

 

1900년, 호주의 식민지정부는 영국정부의 부름을 받고, 팔국연합군과 함께 중국정벌에 나섰다. 이 기간동안 호주연방은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싸운 것은 호주식민군의 첫번째 아시아전투일 뿐아니라, 호주연방의 첫번째 해외군사활동이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팔국연합군은 구국연합군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드니에 있는 로얄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의 Garden Island에 있는 조선소에는 정문에 오래된 구리대포(銅砲)를 하나 놓아두었다. 이 구리대포는 스페인인들이 1595년에 제조한 것으로 명나라황제에게 선물로 만들어지고, 머나먼 북경까지 보내어졌던 것이다.

 

호주, 이 젊은 식민지는 그가 성립된 연방원년(1901년)에 대포, 칼 및 군함을 배경으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북방의 이웃에게서 일찌감치 문화재로 불리던 구리대포를 빼앗아 왔던 것이다.

 

"영국엄마"의 긴급구원요청

 

1899년부터, 의화단의 난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이는 각국 매체의 주요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러나 호주대륙의 6개 식민지에게 있어서, 그들이 더욱 관심을 가지던 이슈는 거의 무르익은 연방국가의 결성이었다.

 

여러해 동안의 정치적인 힘겨룸을 통해서, 1900년 3월, 호주의 각 식민지대표는 런던에 모여, 연방성립을 위한 최후협상을 시작하고, 연방헌법초안이 7월에 영국의회에 제출되어 심의를 받게 된다.

 

이때, 북경의 정세는 신속히 악하된다. 중국과 외국의 대립국면은 갈수록 악화되고, 대규모의 유혈충돌이 곧 발생할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6월 4일, 프랑스공사는 "함대를 가진 각국 공사들은 즉시 본국정부에 전통을 보내어, 각국의 해군사령관들이 북경에서 봉쇄되고 배외(排外)운동이 격심한 상황하에서 즉시 필요한 구원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6월 16일, 군사적인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각국연합군은 대고포대(大沽砲臺)의 중국수비군에게 최후통첩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 참혹한 전투를 거쳐, 대고포대를 점령한다.

 

열강의 큰형님으로서 영국은 이때 어려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극동의 국면이 이처럼 어지러워 졌으므로 영국의 이익과 권위를 위하여믄 반드시 군대를 출동시켜야 했다. 다만, 해가 지지않는 제국으로 불리던 영국은 이때 움직일 병력이 없었다. 영국군의 주력부대는 남아프리카에 붙잡혀, 네덜란드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역사상 "보어전쟁"이라고 칭하는 전쟁이다. 보어전쟁은 호주인들의 주의를 끌었다. 호주의 각 식민지는 남아프리카에 2500명의 정규군과 3500명의 민병(Citizen's Bushmen)을 파견하였으며, 남아프리카에서 오는 전사, 전상소식은 당시 신문들의 머릿기사를 장식했다.

 

가장 성숙한 식민지의 하나로서, 인도군대도 이미 대영제국에 의하여 세계각지로 보내어졌고, 영국주력군이 부족한 남아프리카로 보내어 후방의 방어를 담당했다. 이때 동아시아가 화급해졌으니, 영국은 할 수 없이 다른 식민지(혹은 유사식민지)에서 군사력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 조직된지 얼마되지 않은 웨이하이웨이(威海衛)의 "화용영(華勇營)"도 경진(京津, 북경천진)지구로 이동되었고, 홍콩군단, 싱가포르군단 및 약간이 인도군단이 합쳐서 영국군의 주력을 이루어, 팔국연합군에 참여하여 천진과 북경의 전투를 이끈다.

 

호주는 아시아태평양지구의 유일한 백인국가이며, 대영제국의 진정한 자제병이다. 영국정부는 호주 각식민지의 의견을 물었는데, 각 식민지는 흔쾌히 '조국이 부른다면' 바로 파병하여 참전하겠다고 밝힌다.

 

해군부대의 조직

 

호주는 사실 파견할 군대가 없었다. 육군의 주력은 이미 1899년 10월에 있는대로 모두 남아프리카로 보내어졌다. 황급히. 새로 군대를 모집해서 훈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유일한 방법은 해군(bluejackets)을 조직하여 중국에 보내는 것이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전투력있는 해군을 가지고 있었고, 자주 해군을 동원하여 육상에서의 군사활동도 수행했다. 1885년 호주의 각 식민지 해군들은 공동으로 "호주수단부대(Australian Sudan Force)"를 조직한 바 있었다.

 

육군을 조직하는 것과 비교하여 해군부대를 조직하는 것은 쉬웠다. 상당한 인적자원도 있었다. 호주는 당시 몇 갈래의 약간의 규모를 갖춘 해군부대를 만들고 있었었다.

 

1854년, 크리미아전쟁(Crimean War)이 발발하자, 영국과 러시아는 서로 부닥쳤다. 호주 각 식민지는 처음으로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러시아함대가 남하할 것을 우려했다. 당시 영국로얄해군의 호주에서의 역량은 아주 약했었다. 겨우 1척의 작은 포함과 1척의 측량함 그리고 4척의 작은 배가 있을 뿐이었다.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하여, 대영제국은 1859년부터 로얄오스트레일리아함대를 건설하여, 호주의 해역을 방어하도록 한다. 당시 "새로운 황금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빅토리아식민지(수도는 멜버른)은 해군을 자체적으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구매한 빅토리아호 경순양함은 1865년까지 호조본토해군의 유일한 군함이었다.

 

1860년대, 영국군대가 점차 호주를 떠나면서, 호주본토군대를 조직하고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1865년, <<제국식민지해역방위법안(Imperial Colonial Naval Defence Act)>>에서는 식민지에서 본토해군을 결성하도록 요구한다. 호주군의 역사상, 이는 본토해군이 대양을 방어(Blue Water Defence)하는 시작으로 본다.

 

빅토리아 이외에, 또 다른 두 개의 식민지 뉴사우스웨일즈(수도는 시드니), 퀸즈랜드(수도는 브리스베인)도 해군을 만든다. 이 3개의 본토해군은 점차 경험이 풍부한 장교들을 보유하게 된다.

 

6월 27일, 대영제국 식민부는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수도는 아들레이드) 식민지총독에게 긴급전보를 보낸다. 그리고 이를 각 식민지 총독에게 재발송하게 한다. 여기서 호주가 긴급히 3척의 중국에서 장강등 유역을 항행할 수 있는 선박을 징집하라는 것이었다. 제국정부는 제국직할하의 로얄해군 호주함대에서 2대를 빼내고, 호주예비역함대(Auxiliary Squadron)에서 1대를 빼내고자 했다. 후자의 경비는 호주 각 식민지와 제국정부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었다. 법률규정에 의하면, 군함을 호주이외의 해역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식민지연합회의의 동의가 필요했다.

 

6월 29일, 빅토리아식민지정부는 먼저 동의한다. 그리고 자기의 200명가량의 부대를 1주일내에 군복을 갖추어 출발준비를 시키겠다고 한다. 그리고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겠다고 한다. 이후 각 식민지정부도 속속 지지를 표명한다.

 

최대의 식민지인 뉴사우스웨일즈는 각 식민지가 자체무장 1척 혹은 여러척의 예비역 선박으로 중국에 직접 참전하자고 제안한다. 다만, 비용은 제국정부가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뉴사우스웨일즈정부는 심지어 제국군대의 중국에서의 행동에 대한 군사물자공급까지도 희망했다. 이를 위하여 뉴사우스웨일즈총리는 시골로 내려가서 양식상황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는 분명히 빅토리아식민지가 자체적으로 군비를 부담하겠다고 한 것과 비교하면, 뉴사우스웨일즈의 건의는 흡인력이 약했다.

 

여러 곡절을 거쳐, 호주 각 식민지와 대영제국정부는 최종적으로 뉴사우스웨일즈, 빅토리아의 두 식민지에서 각각 하나의 해군부대를 결성하고, 남호주식민지가 제공 군함 1척을 제공해서 중국으로 가서 직접 참전하기로 결정한다.

 

7월 11일, 빅토리아부대의 조직이 완료된다. 구성원은 대부분 해군이었고, 평균연령은 35세였다. 3/4은 기혼자였다. 이는 남아프리카에 파병된 부대의 평균연령이 겨우 22세이고 거의 미혼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빅토리아식민지가 사병들에게 지급한 급여는 1일 7.6실링이었는데, 이는 사우스웨일즈식민지가 1일 5실링을 주던 것에 비교하면 훨씬 많은 편이었다. 빅토리아가 금광을 가지고 있어 재정이 풍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빅토리아부대는 심지어 1인마다 카키(Khaki) 의류원단을 제공해서 홍콩에 도착한 다음 군복을 새로 해입을 수 있도록 하였다. 호주군대에 지급한 것은 맥심45 기관총이었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도 7월말에 선발을 완료한다. 해군외에 그들은 원래 남아프리가전투에 보내려던 육군의 일부인원을 포함시킨다. 그리하여 중국파견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한다. 이들 육군사병은 비록 중국으로 가서 국가를 위해 싸우겠다고 하였지만, 해군에 편입되는 것은 반대했다. 이는 해군의 분노를 불러온다. 그들은 육군과 함께 싸우지 않겠다고 하게 된다. 결국, 이 소부대는 절충안으로 "뉴사우스웨일즈해군육군대경보병"으로 지칭하게 된다. 육군과 해군의 특징을 모두 살리게 되는 것이다.

 

대영제국은 살라미스호(SS Salamis) 병력수송선을 보내어 호주군단을 운송한다. 7월 30일, 빅토리아부대는 멜버른에서 성대한 무장시위를 벌이고, 현지민중의 환호를 받고, 출발선서를 한다.

 

8월 4일, 살라미스호는 시드니에 도착한다. 현지에서 음악회등 위로행사를 벌인다. 이후 뉴사우스웨일스부대가 선박에 올라, 두 부대가 회합한다. 8월 7일, 살라미스호는 성대한 환송의식을 치른 후 시드니항을 떠난다. 등대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가 내걸렸다: "일로평안(一路平安)". 그들의 배에는 다음과 같은 구호로 답변했다. "See You, 오스트레일리아"

 

그 후 살라미스호는 잭슨군항에 머물다가, 다음 날 중국으로 떠난다.

 

8월 10일, 남호주식민지가 파견한 군함인 Protector호가 잭슨 군항을 출발한다.

 

홍콩에서 장비를 바꿈

 

살라미스호는 뉴사우스웨일즈부대와 빅토리아부대를 싣고 8월 16일 적도를 넘고, 8월 26일, 홍콩에 마침내 도착한다. 홍콩의 빅토리아항구에 정박한다.

 

이때, 북경의 상황은 이미 많이 바뀌어 있었따. 팔국연합군은 8월 14일 북경으로 쳐들어갔고, 서태후와 광서제는 북경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전체 화북지역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영국군대는 화북지역에서 주로 유색인종으로 구성된 고용군에 의존했다. 홍콩에 파견된 Royal Welsh Fusilliers(황가웨일스수발총병)과 Royal Horse Artillery(황가기마포병)이 백인부대였다. 홍콩총독은 이 두 '자제병'을 급히 홍콩으로 불러들여 중국인들의 소란과 폭동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팔국연합군 중에서, 대다수 국가가 데려온 것은 본토의 군대였다. 그러므로, 실전경험이 부족했다. 호주군대의 "순영국혈통"은 영국지휘관으로 하여금 아주 흥분하게 만들었다. 호주군대를 신속히 화북에 배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홍콩기지에서는 호주군대의 낙후한 장비를 신식장비로 교체하였다. 그들에게 교부된 맥심45기관총은 임시로 빌려주는 것이었고, 임무가 끝나면 반환해야 하는 것이었다.

 

8월 29일, 영국사령부는 호주군대를 살라미스호로 계속 북상시켜 천진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중국야전군대영제국제1군(First Brigade British Contingent, China Field Force)"에 편입시킨다. 같은 날, 호주군대는 부두에서 방대한 독일원정군의 발더시(Alfred Graf von Waldersee)의 지휘하에 유럽에서 왔다. 독일군대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호주군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8월 31일 새벽, 살라미스호는 홍콩을 떠난다. 셋째날 오송구에 도착한다. 호주군대의 주요 장교들은 상해를 방문중이던 영국해군사령관 Jane Seymour를 예방하고, 최신명령을 받는다. 대고로 가서 경계업무를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호주군대를 실망시켰다. 대고항은 생활조건이 열악할 뿐아니라, 전투를 할 것도 없었던 것이다.

 

9월 4일, 오송에 주둔하던 영국해군 클라크 선장(Captain Clarke)은 호주군대에 동원령을 내린다. 그는 자세하게 호주인들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생수를 먹지 말고, 야채는 모두 주의하라. 중국은 위생조건이 열악하니, 쉽게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중국통이라고 자처하던 영국장교는 호주군대를 격려하며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기억하라. 너희는 여왕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너희를 호주군단이라고 부르겠고, 이것도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그래도 기억해라. 너희는 사실 호주에서 온 영국군단이다"

 

마침내 화북대지를 밟다.

 

9월 8일 오전, 호주군대는 대고구(大沽口, 지금의 천진부근)에 도착한다. 그리고 130여척에 이르는 각국함대의 대열에 동참한다. 그들은 항구를 관리하는 연합군장교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여러나라의 군대가 한꺼번에 움직이므로 항구관리는 아주 어려웠기 때문이다.

 

호주군단은 새로운 명령을 받는다: 빅토리아부대는 천진에 주둔하고,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계속 북경으로 진격하라.

 

9월 15일, 호주군대는 화북땅을 밟는다. 그들의 일기에서, 이 비옥한 토지는 전란으로 황폐해져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당고에서 천진으로 가는 길은 러시아가 점령한 하동지구였다. 여기는 거의 모든 마을에 불에 탔고, 거의 모든 집에 지붕이 없었다. 러시아인들은 중국인 노동자들을 강제노역시키고, 일이 끝나면 총살하거나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본, 미국과 영국연합군이 점령한 하서지역의 집들은 기본적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호주 종군기자 위느(Wynne)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 것같다고 했다.

 

그날 방 숙영을 하다가, 호주군대는 중국모기와 각종 작은 곤충의 맹렬한 공격을 받는다. 다음 날 오후 1시, 그들은 마침내 천진국제경마장(International Racecource) 숙영지에 도착한다.

 

그들에게 숙영지를 마련해준 것은 호주출신의 Keogh 대위(Captain Keogh)였다. 그는 호주군대를 위하여 천막을 쳐주어서 노숙하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Keogh는 원래 퀸즈랜드 사람이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비로 중국으로 왔고, 영국군 주천진사령관인 캠팰(Campell) 장군의 눈에 들어 그의 참모가 되었고, 인사를 담당했다. Keogh는 나중에 경찰책임자(Police Magistrate)가 되었고, 아래에 120명의 호주군, 40명의 독일군 및 일부 인도 및 중국경찰을 관할했다. 그리고 매일 3,40건의 사건을 처리했다. 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으므로 그는 여러차례의 군사작전과 경찰작전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제1차진격

 

9월 16일, 막 자리잡은 호주군단은 전투명령을 받는다. 빅토리아부대와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함께 300명을 파견하여 연합군에 의한 수륙요새 북당(北塘)을 공격하는 임무였다.

 

출발후에 영국군은 러시아인들이 통제하는 철도에 독일인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배를 타고 수로로 갔다. 10여시간을 간 후에 비로소 러시아군의 전투병원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철도사용을 불허했던 러시아가 이미 1시간전에 목적지를 점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가 났지만 영국군대는 거기에서 숙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충분한 먹거리와 마실물을 구할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다행인 것은 중국군대의 주력이 일찌감치 북당에서 물러났지만, 저격수를 배치하여 러시아군의 전사,전상이 아주 많았다는 점이었다.

 

호주군대의 첫번째 군사행동은 연합군내부의 알력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이 난다.

 

호주군대의 천진에서의 생활은 아주 힘들었다. 야채와 빵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았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의 한 병사는 독감으로 죽어서 첫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전체 호주군대의 약 1/4은 독감, 이질, 고열에 시달렸다.

 

군기위반사건도 비교적 많았다. 대다수의 군기위반은 음주소란이었다. 비교적 중대한 사건은 두 건의 중국의 빨래하는 여자를 협박한 것이었다. 이는 프랑스군에 의하여 지적되었고, 군기를 담당하던 뉴사우스웨일즈부대의 부사령관 Conner는 이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ㄱㅆ다.

 

10월 상순,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명을 받들어 북경성으로 향한다. 빅토리아부대는 천진에 남는다.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공동으로 연합군총사령관 발더시의 열병을 받는다. 이번 열병에서, 연합군내부는 의사소통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호주군대는 3일간이나 철도역에서 기다렸는데, 3일째 비로소 이 총사령관이 나타난 것이다. 사병들은 일기에서 원망을 많이 토로했다.

 

북경진입후의 살상행위

 

10월 10일,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북경으로 향한다. 이들은 홍콩으로 돌아가는 웨일즈부대의 무기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대량의 중국배를 고용하여, 짐을 실었다. 북경의 연합군부대가 가져간 3만건의 군용모포는 강가의 길로 중국인 일꾼들이 끌고 전진했다. 대위 Spain은 카메라를 가지고, 해군후보소위 Midshipman Murnin은 이번 기록에 대하여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 뒷사람들이 이들의 행동을 알 수 있게 한 것이다.

 

이틀 후, 그들은 양촌에 도착한다. 거기서 미국해군육전대의 초소를 만난다. 이는 호주군대가 처음으로 전투지에서 미국군을 만난 사건이다. 호주인들은 미국군으로부터 적지 않은 좋은 물건들을 구매한다. 맣은 경우 시드니보다도 훨씬 싸게 살 수 있었다. 이는 사람들을 아주 흥분시켰다. 그들은 미국군의 풍부한 물자조달에 부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그들은 낙오된 이탈리아사병을 만난다. 그는 막 중국인에게 총을 빼앗긴 상태였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와 함께 북경으로 간 사람중에는 4명의 방글라데시병사가 있었는데, 즉시 추적해서 몇번 수색한 끝에 총을 빼앗은 중국인을 잡아냈다. 호주군대의 장교가 이 중국인에게 내린 처벌은 그들에게 무거운 맥심기관총의 다리를 들고 몇시간동안 따라오게 한 후 풀어준 것이었다.

 

모닝은 일기에서 일요일에 숙영한 후, 무료하여, 마을에 가서 골동품을 구했다고 한다. 사묘에 모신 신상을 제외하고는 가치나가는 물건이 없었다. 그리하여 민가의 벽에서 서화를 떼어내서 전리품으로 삼았다고 한다.

 

십일간의 행군을 거쳐,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북경의 동교민항에 있는 영국공사관에 도착한다. 부대는 3부분으로 나뉘었다. 1명의 장교와 50명의 사병은 공사관방위를 책임지고, 3명의 장교와 60명의 사병은 라마묘로 보내어져 방위를 책임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장왕부(庄王府)로 보내어지고 거기에 사령부를 차렸다.

 

호주를 떠난 이래, 그들은 처음으로 집안에서 잠을 잤다.

 

라마묘는 호주군의 지휘소였다. 비단창고가 붙어 있었는데, 하루는 지휘소와 창고사이의 민간인집에 불이 붙었다. 호주군은 불을 지른 중국인을 붙잡았더니 불탄 집의 주인이었다. 통역관을 통하여 그가 유명한 의화단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용감한 의화단원은 먼저 집안 식구를 내보내고, 자기의 집에 불을 지른 것이다. 호주군대를 화공으로 죽여버리려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다섯 명의 호주사병은 행형대를 조직하여, 이 의화단원을 총살한다. 이는 뉴사우스웨일즈부대가 중국에서 행한 첫번째 처형이었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는 북경에서 여러차례의 의화단원 총살을 집행한다. 발더시가 부임한 후, 중국인들을 겁주기 위하여, 체포한 의화단원은 일률적으로 참수방식으로 처결한다. 호주군대는 이것이 너무나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하여, 더 이상은 행형업무를 맡지 않는다.

 

 장왕부의 호주군인

 

약탈의 광기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뉴사우스웨일스부대의 한 사병이 북경에서 보내온 서신을 실은 바 있다. 중국수도의 비참한 생활이 인간지옥과 같아도 적었다. 거리에는 수천의 주인없는 개가 이리처럼 중국인의 썩기 시작한 시신을 먹고 있고, 밤이 되면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북경의 각국 군대는 군기가 대체로 엉망이었다. 약탈은 거의 모든 국가의 장교들이 묵인했다. 서방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당시 열강군대는 북경에서, "강간이 레저가 되고, 도살이 오락이 되었다"

 

호주군대는 명을 받아 의화단 두령이 보유한 저택이라는 곳을 습격했다. 그리고 집안의 가구는 영국군사령부로 옮겨서 쓰고, 남은 것들은 모두 약탈했다. 진귀한 가죽, 비단, 도자기는 금방 경매되었고, 그방 약 350멕시코달러를 얻었는데, 여러 사람들이 나누어가졌다. 다만, 나누어가진 후에, 상사는 다시 명을 내려, 그들에게 물건을 원주인에게 되돌려주라고 했다. 원래 그들의 정보는 잘못된 것이었고, 목표주택의 이웃을 턴 것이었다.

 

호주군대로 중국인에 대한 약탈행위에 가담한다.

 

한번은, 라마묘에 주둔하고 있는 호주군대가 중국정보원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북경의 북쪽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장신장(長辛莊)에는 의화단이 대량의 재물을 묻어두었는데, 개략 20만냥 백은이 된다고 하였다. 영국군의 전리품관리책임자인 Tulloch대위는 아주 흥분했고, 즉시 25명의 서남아인으로 구성된 사병을 데리고 가면서 호주장교 Bertie Black에게 통보하여 같이 가도록 한다.

 

목적지에 도달한 후 그들은 땅을 판다. 그 중국정보원은 다음 마을인 고려영(高麗營)에 가서 더 많은 재물을 묻어두었는지 알아보겠다고 하고 간다. 그런데, 이 중국인은 고려영에서 분노한 동포들에게 맞아죽는다.

 

장신장에서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Tulloch 대위는 즉시 그의 부하를 데리고 고려영으로 가서, 어디선가 총으로 그들을 공격한다. 그들은 현지의 우두머리와 부자를 붙잡아와서, 왜 영국군을 공격하는지 따진다. 그리고 3만5천냥 백은의 벌금을 내도록 한다. 그러지 않으면 마을을 없애버리겠다고 하고, 두 사람을 인질로 삼는다.

 

고려영에서 자금을 모으고 있을 때, Tulloch대위는 대규모 의화단원들이 결집한다는 정보를 듣는다. 그리하여 부하를 끌어모아 고려영을 공격하고, 40여명을 죽여버린다. 마을의 거의 절반이 폐허로 된다.

 

소식은 북경으로 전해진다. 영국군 사령관인 가슬리는 깜짝 놀라서, Tulloch대위에게 즉시 북경으로 되돌아오도록 명령한다. 영국군은 아주 황급히 퇴각하고, 대다수의 속죄금도 챙겨가지 못한다. 가슬리는 이런 행동을 엄금한다. 확실한 증거가 있지 않으면 절대로 적대행위를 하지 말도록 엄명한다.

 

1901년 1월 1일후, 가슬리장군은 친히 고려영을 토벌하고, 속죄금을 받아오려고 한다.

 

이 "빚받아내는 군대"는 눈이 내리는데도 목적지까지 힘겹게 찾아간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망간 뒤였따. 연합군은 할 수 없이 마을의 절을 부숴서 분을 풀 수밖에 없었다. 호주의 종군기자인 웨니는 이렇게 썼다. 이런 더러운 '군사행동'의 유일한 목적은 파괴와 약탈이며, 의화단을 진압한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이는 '가치있고 대등한 전투를 갈망했던' 호주군대는 점차 불만을 가지게 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게 된다.

 

1900-1901년의 화북지역은 이렇게 각종 핑계를 가진 사람들이 약탈하는 곳이 되어버린다. 먼저 의화단, 그 다음은 관군, 다시 각국 연합군.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일찌기 미국신문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북경에 진공한 것은 약탈의 축제이다" 확실이 늦게 도착한 호주군대는 성과를 올릴 좋은 기회를 놓쳤고, 약탈의 좋은 기회도 놓쳐버렸던 것이다.

 

"문명 신북경"의 건설

 

뉴사우스웨일스부대는 북경의 경찰업무도 담당했다. 그들은 중국인의 도박을 금지시키기도 했고, 여러차례 도박장을 급습하기도 했고, 도박꾼을 체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효과는 아주 미미했다. 위생방역측면에서, 그들은 중국인들을 모아서 거리를 청소시키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에게는 채찍 50대의 중벌을 과하기도 했다.

 

재미없는 경찰업무에 묶인 호주군인은 충분한 맥주가 없었으므로, 중국의 백주를 배우기 시작한다. 몇잔의 백주가 뱃속에 들어가면, 호주군인은 미치기 시작한다.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영국군은 백주를 마시는 것을 금지한다. 그리고 중국인에게 백주를 호주병사에게 팔게 되면 바로 채찍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치안책임을 맡은 호주군대는 몇명의 군관을 법관으로 임명하여, 중국인간의 분쟁을 처리했다. 한번은 한 중국기독교도가 와서 다른 중국인이 권세를 이용하여 그를 공갈협박했다고 고발했다. 후자는 일찌기 이홍장의 종복이었다. 그러나, 이홍장의 종복은 거꾸로 이 기독교도가 외국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협박했다고 반소를 제기했다. 호주군관은 양쪽이 모두 거짓말한다고 보고, 둘 다 채찍 50대를 맞도록 판결했다.

 

종군기자인 웨니는 <<데일리 텔리그라프>>에 보낸 기사를 통해서, 이홍장의 종복을 채찍으로 때린 것은 사람들에게 그의 주인이 더 이상 그를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를 채찍으로 때린 것은 신앙을 남용하여 사적인 이득을 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홍장의 종복은 채찍을 맞은 후에 호주군관에게 세번 절을 하였다. 원래 그는 서양인의 손에 들어가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보정부(保定府)로 진공: 추악한 약탈행위

 

천진에 머물던 빅토리아부대는 1900년 10월의 보정부전투에 참가한다. 이번 행동은 10월 12일에 시작하였고, 모두 25일이 걸렸다. 호주군대의 전시기록에 의하면, 마을은 기본적으로 파괴되었고, 행군은 아주 힘들었으며, 물자조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지의 젖소 한 마리가 잘못 호주군대로 뛰어들었는데, 이는 빅토리아부대에게 오랜만에 소고기를 포식할 기회를 부여했다.

 

군수물자공급은 아주 곤란했다. 호주군대는 1인당 1일 겨우 2개의 옥수수빵을 공급받았다. 이런 곤경은 10월 20일이 되어야 완화되었다. 그날 그들은 팔십주에 도착하고, 한 민가에서 대량의 닭과 달걀을 얻는다. 이 집의 주인은 가족을 안전지대로 대피시키고, 자신은 호주군대를 위하여 음식을 해주고, 땔감을 날랐다. 호주군인 하나는 집주인이 아이들 옷을 몰래 숨기는 것을 보았다. 그는 호주군인들이 아이를 해칠까봐 두려워한 것이다.

 

10월 21일, 연합군이 보정에 도착한다. 그러나 중국수비군은 이미 투항했다. 빅토리아부대는 소위 전도사와 서양상인을 학살하였다는 '죄인'들을 감독했고, 이들을 독일군에게 보내어 처결하게 하는 업무를 맡았다. 독일군은 죄수들에게 스스로 무덤을 파게 하고는, 1열로 세워놓고 총살했다. 시신은 바로 자신이 판 무덤 속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 묻어버렸다. 살인업무를 엄격하고 정교하게 하는 것을 보고 호주군대는 깜짝 놀란다.

 

보정부 정벌은 사실 군사적으로 전혀 필요없는 짓이었따. 이는 그저 중국평민에 대한 잔혹한 보복행위였다. 독일인들은 주중국공사 Klemens Freiherr von Kettler가 청나라군대에 살육당하자, 그 보복행위를 한 것이다.

 

출발일부터 11월 7일 천진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빅토리아부대는 "기본적으로 적을 만난 적도 없고, 적과 전투를 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본 것은 모두 약탈, 방화와 처결이었다"

 

호주군을 따라 움직인 Keogh대위는 사후에 독일인들이 계획대로 교통용구를 준비하지 않았다고 질책하고, 프랑스인들이 고의로 호주군대에게 가장 먼 길을 돌아가도록 어레인지했다고 비난했다(행동은 프랑스군이 통일적으로 지휘했다).  그리하여, 프랑스군대가 제일 먼저 약탈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북당전투에서 러시아군이 기차를 배정하지 않고 자기들이 먼저 공격했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의 기자가 Keogh에게 물었다. 왜 연합군간의 협력이 이렇게 잘 안되느냐고. 그러자 그는 "우리 브리튼인은 규칙을 지키지만, 다른 나라는 각자 마음대로 해서 그렇다"고 답변한다.

 

영국인과 러시아인간에 하마터면 전투가 벌어질 날 뻔 하다.

 

보정부 정벌후, 빅토리아부대의 주거환경은 많이 개선된다. 결국 천막에서 집으로 옮긴다. 그리하여 추운 겨울을 지낼 수 있게 된다.

 

바이투트는 11월 14일 중국기독교도를 호송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그는 다른 호주사병과 함께 300발의 총알을 가지고, 안내인과 통역인과 함께 출발한다. 도중에 두명의 일본사병도 참가한다. 이 6명의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은 저녁에 한 방에서 함께 휴식을 취했다. 이에 대하여 바이투트는 만감이 교차한다. 다음 날 저녁 그들은 의화단에 의하여 곤경에 빠진 기독교도를 찾아낸다. 55명의 부녀아동, 4명의 상인 2명의 중국관리를 천진까지 호송한다. 위험에서 빠져나온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여러번 감사인사를 했다.

 

빅토리아부대가 참가한 가장 중요한 행동은 러시아군대에 대항한 것이었따. 1901년, 연합군이 천진을 점령하고, 영국군은 엔지니어의 건의를 받아, 경진당철로변에 샛길을 만들고자 한다. 이는 러시아인들의 방해를 받는다. 러시아인은 샛길이 지나는 토지가 그들의 조계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쌍방은 갈수록 대치가 격화되고, 일촉즉발의 상태가 된다. 빅토리아부대는 명을 받고 증원에 나선다. 뉴사우스웨일즈부대도 북경에서 긴급히 60명을 천진으로 보낸다. 러시아군이 배치한 6천명과 비교하면, 영국군은 겨우 1900명에 불과했다. 약세가 분명했던 것이다. 영국은 홍콩에서 황급히 대량의 지원군을 받는다. 정예 로얄웨일즈머시너리는 다시 화북으로 이동명령을 받는다. 결국 다각적인 외교적인 노력을 거쳐, 영국과 러시아는 무장충돌을 면하게 된다

 

연합군이 점령한 지역의 경찰로서, 빅토리아부대는 자주 군기가 빠진 각국 군대를 만나게 된다. 일찌기 한 프랑스부대와 마찰이 발생하는데, 프랑스군은 칼을 들고 공격하여, 호주병사가 여러명 다치기도 하였다.

 

남호주 군함

 

뉴사우스웨일즈부대, 빅토리아부대와는 달리 남호주식민지는 Protector호 군함을 파견한다. 홍콩에 도달한 후 정식으로 영국로얄해군에 편입된다. 그리고 남호주식민지군의 남색군기는 로얄해군의 백색군기로 바꿔달게 된다. 그리고 영국해군이 사람을 보내어 함장을 맡고, 원래의 함장은 참모장으로 격하된다. Protector호군함은 산해관과 진황도를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러나 사고로 모두 취소된다. 그들은 그저 운송과 호송업무를 맡으면서 중국에서 평화로운 시절을 보낸다.

 

11월 2일, 영국해군은 Protector호에게 호주로 돌아가라고 명을 내린다. 그런데, 화북에서 홍콩으로 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난다. 11월 24일, 이 함대는 홍콩에서 로얄해군을 퇴역하게 되고, 다시 호주해군의 편제에 들어가고 남호주로 되돌아간다. 12월 18일, 그들은 시드니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신년까지 그대로 머물다가 1901년 1월 1일 연방성립식을 거행할 때 참가한다.

 

해외에서 5개월간, Protector호는 한번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이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호주함장 Clare는 <<아들레이드 업저버>>와의 인터뷰에서, 자기의 부대는 중국에 있던 영국군함중 가장 우수한 것의 하나였고, 질병에 걸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다른 군함에는 대체로 15-20%의 환자가 있었다. 선박도 잘 관리되어 있었고, 수리가 전혀 필요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참전시키지 않은 것은 가장 큰 유감이라고 하였다.

 

귀국 귀국

 

1901년 3월부터 호주군대는 중국에서 철수하기 시작한다. 방어업무는 홍콩에서 온 로얄웨일스머시너리가 전부 승계한다. 17명으로 구성된 뉴사우스웨일스부대는 스스로 화북에 남아서 고액의 급여를 받으면서 화북지역에서 영국이 통제하는 철도를 관장한다.

 

귀국전에, 뉴사우스웨일즈부대의 1등해병 나이트는 정신질환으로 자살한다.

 

3월말, 뉴사우스웨일스부대와 빅토리아부대는 방어업무를 인계하고 천진에서 만난다. 3월 29일, 영국군이 파견한 운송함을 타고 호주군대는 대고항구를 떠난다. 호주병사들은 거의 모두 크고 작은 중국의 '기념품'을 가지고 있었다. 전체 군단은 2개의 큰 기념품을 가지고 떠났는데, 하나는 본문의 처음에 언급했던 스페인구리대포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이미 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던 동종(銅鐘, 구리시계)였다. 이는 지금도 호주의 수도 캔버라의 전쟁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운송함은 4월 5일 홍콩을 떠나, 귀국길에 오른다. 20일후, 부대는 시드니에 도착한다. 거기서 엄격한 검역을 받은 후, 5월 3일, 호주정부는 시드니에서 군단을 위한 성대한 환영의식을 행한다. 두 부대는 모두 시드니의 저명한 원형부두를 통하여 상륙한다. 그리고 열병을 받고, 민중들의 환호를 받는다. 이후, 빅토리아부대는 시드니의 Redfern역에서 기차를 타고 멜버른으로 간다.

 

1903년, 두 부대의 모든 사병은 대영제국으로부터 '중국전쟁훈장"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