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역사책에서 볼 수 없는 아편전쟁 이야기 (I)

구름위 2013. 10. 28. 14:05
728x90

1. 아편의 내력

 

아편전쟁이 중국근대사의 시작이고, 아편전쟁은 중국인들의 아픈 곳이며, 굴욕의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에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편(鴉片)은 앵속(罌粟)의 초급제품이다. 앵속은 확실히 하느님이 인류에게 내려준 큰 대가족이다. 그에는 28속, 250여종이 있다. 주로 북반구의 거의 모든 온대와 아열대지구에서 생장한다. 그리고 이 지방들은 거의 전인류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스위스에서 발굴된 기원전 4000년의 신석기시대 마을유적에서 고고학자들은 '아편앵속'의 종자와 과실유적을 발굴했다. 그리고, 이것은 인공으로 교배시킨 품종이었다. 기원전 3400년에 이라크의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유역에서 인류는 이미 대규모로 이 작물을 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에 "쾌락식물(joyplant)"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적어도 기원전 2160년에, 아편은 이미 수의(獸醫)와 부인과(婦人科)의 약품으로 사용되었다. 이미 발굴된 기원전 1500년의 고이집트분묘에서 나온 '디비스아편'은 이미 고급품종에 속한다. 이것은 기원전 300년까지 계속된다. 고대그리스는 이미 아편을 보편적인 음료로 사용하였다. <<성경>>과 호머의 <<오딧세이>>에는 아편을 "망우약(忘憂藥, 근심을 잊어버리는 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하느님도 이를 사용한다. 적어도 기원전 2세기의 고대그리스 명의인 갈렌(Galen)은 아편이 질병(두통, 어지럼증, 귀어두움, 간질, 중풍,약시, 기곤지염, 기침, 해소, 각혈, 복통, 황달, 비경화, 신결석, 비뇨기질병, 발열, 부종, 마비, 월경불순, 우울증, 항독, 독충에 물린데등등)을 치료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번잡하게 계속 열거하지는 않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편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해왔다. 17세기의 영국의사이면서 임상의학의 창시자인 Thomas Sydenham은 "나는 위대한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만물의 창조자는 인류의 고뇌를 위하여 적합한 아편을 보내주었다. 그가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의 수량을 불문하고, 그것이 질병을 없애는 효능으로 볼 때, 어떤 약물도 아편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하다." "아편이 없으면, 의학은 절름발이가 된다" 이 의학의 대가는 이로 인하여 "아편철학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중국인들도 아편을 일찌감치 알았다. 문자로된 기록은 적으나, 적어도 기원전 139년의 장건이 서역에 사신으로 갈 때, 아편은 중국으로 전래된다. 삼국시대의 명의인 화타도 대마와 아편을 마취제로 사용한다. 당나라 건봉2년(667년)에는 아편을 수입한 기록이 있다. 당나라때의 아랍아편은 "아부용(阿芙蓉)"이라고 불렀다. 기원973년의 북송에서 인쇄한 <<개보본초(開寶本草)>>에는 아편을 앵속속(罌粟粟)이라고 불렀다. 뒤의 "속"은 과실이라는 의미이다. 징기스칸의 철기가 유라시아대륙을 짓밟은 후, 아편은 상품중의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그 때는 약으로 좋은 것이었다. 개략 1600년대에, 네덜란드상인들이 대만을 통하여 북아메리카의 인디인들이 피우는 담뱃대를 담배와 함께 중국에 전래해준다. 중국에서는 이때부터 흡연자가 생기기 시작한다. 흡연이 번져가는 속도는 중국의 통치자들을 놀라게 하였다. 숭정황제는 그리하여 흡연금지령을 내린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담배대신 아편을 담뱃대에 넣어서 피워보았다. 생각도 못한 것은 담배르 금지하는 바람에 아편을 흡입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18세기중엽의 청나라 관리 황유보는 처음으로 대만사람들이 아편을 흡입하는 구체적인 과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는 아편흡입자를 죽여버리는 것 이외에는 이 악습을 떨쳐버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단언한다.

 

2. 아편무역이 중국에서 흥기하다.

 

17세기말, 강희제는 외국인들이 광주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부가하여 8개의 가혹한 부대조건도 단다. 그 중의 하나는 반드시 호부에서 비준한 '공행(公行)"을 통해서만 대외무역에 종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관청이 특허한 상행이 된다. 그래서 부패한 문호가 되는 것이다. 광동의 지방관리와 관료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뇌물을 주고 특허를 획득한다. 호부관원은 뇌물을 받는다. 전체 18세기의 대외무역발전에서 영국인들이 점차 포르투갈인, 네덜란드인들을 대체하고, 중국무역에서의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무역의 범위도 아주 넓었다. 찻잎, 설탕, 잠사, 자기, 종이, 진주, 장뇌, 육계, 동, 명공, 금은, 사제품, 칠기, 식물유, 죽기, 대황등의 상품으로 유럽인들의 면화, 양모, 양모제품, 철, 다이아몬드, 고추, 시계, 산호, 호박, 샥스핀, 물고기, 쌀등의 상품을 교환했다. 아편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무역의 발전으로 서방문화, 종교, 도덕관념등이 중국에 침투하게 되었다. 조정은 이로 인하여 중국의 전통문화가 동요되고, 조정의 통치가 동요될 것을 우려하였다. 민간에서도 서방전도사들이 가져온 종교와 문화에 접촉하게 되면서, 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부패한 황실은 서방의 물건에는 유혹이 있다고 보고, 한편으로는 외국상인들로 하여금 변방의 광동지역에만 한정하도록 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건으로 물건을 물물교환하는 것을 금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마음 대로 수입하는 물건을 허가하고, 수출은 반드시 금은으로 바꾸도록 한다. 중국의 시장이 유한하므로, 심각한 수출초과는 영국을 위주로 한 상인들이 무역을 도저히 계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외에 영국상인을 위주로한 외국상인들은 중국내지의 광활한 시장에도 침을 흘리고 있었다.

 

중국의 찻잎은 영국인들이 마시면서 거의 중독이 되었다. 상인들은 반드시 금은으로 찻잎을 구입하다보니 거액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내지시장에는 외국상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유한한 무역액으로 이러한 적자를 메우기는 불가능했다. 이런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상인들이 금새 발견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상품들에 대하여는 관리들이 수입을 금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는 면화이고 하나는 아편이다. 면화는 주로 이집트와 인도에서 났다. 이집트로부터의 운송원가로는 도저히 이익을 볼 수 없었다. 인도의 면화도 이익이 박했다. 그러나 인도에서 나는 아편은 폭리품목이었다. 관리들은 이를 가지고 큰 돈을 벌었다. 중국은 이미 앵속을 많이 생산했지만, 아편의 품질은 인도아편과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더구나 국산아편만으로는 도저히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아편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는 다음으로도 증명된다: 옹정제는 1729년 아편무역을 금지시키고, 100대의 곤장, 3개월의 칼을 찬 수감, 신강유배 및 사형까지 처벌하였다. 그러나, 아편을 피우는 자에게는 벌을 면제해주었고, 아편수입을 제한하는 어떠한 규정도 두지 않았다. 아편을 심거나 생산하는데에대하여 엄격히 처벌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아편수입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금지령이 반포된 당해연도에만 합법적인 아편수입이 200여상자였다. 1767년에 이르러서는 1000상자로 늘어났고, 1790년에는 4000상자로 늘어났다. 불가사의한 조치는 그저 조정이 우매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분명한 원인은 아편수입시 정부에 관세를 내므로, 정부는 그 수입을 버리기 힘들었다. 이 세금은 1796년까지도 계속 징수되었다.

 

씁쓸한 한 이야기는 1793년, 영국의 첫번째 외교공사인 McCartney가 700여명의 방대한 사절단을 이끌고 각종 선물을 가지고 북경에 도달하였는데, 사절단의 규모나 선물의 방대함은 영국국왕이 얼마나 중시하는지 충분히 알만했다. 영국왕 조지3세는 그가 준 수권서에, 스스로 양보할 수 있는 모든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필요하면 동인도회사에서 아편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데 대하여도 영국왕은 승락하였다. 이것은 중국의 아편금수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영국특사는 중국의 내지시장을 원했다. 그러나 McCartney는 건륭황제에게 반드시 중국식으로 절해야 한다는 요청을 거절했고, 이것은 외국을 모두 오랑캐로 보고, 선물은 모두 조공품으로 보는 청나라조정의 입장에서는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조정은 이들에게 기한을 주고 떠나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그가 보내온 선진적인 과학기기들은 모두 황궁에 설치해서 장난감으로 활용된다. 중영간의 상업관계와 외교관계를 건립하자는 요구는 토론도 하지 않고 거절해 버린다. 영국국왕은 영국과 중국간의 정상적인 무역을 전면적으로 전개하고 싶었으나, 이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McCartney는 청나라 관리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이런 결론을 얻는다: 청왕조는 이미 부패하고 쇠약했다. 힘도 없다"라고 하면서 "낡아빠진 일등전투함"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영국국왕에게 청왕조가 망하는 것에 주의하고 이 때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이익을 얻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한다. 1816년 영국국왕은 다시 아미스더사절단을 중국으로 보낸다. McCartney가 완성하지 못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하게 한다. 그러나 결과는 역시 황제에 절하는 문제로 대치하고 만다. 이번에는 대화도 하지 않고 바로 그들을 출국시켜버린다.

 

아편수입은 국고의 은량을 급격히 감소시켰다. 1799년, 가경황제는 아편금지령을 내리고, 아편의 수입, 판매를 금지하며, 앵속의 재배도 금지한다. 이것은 원래 본국의 앵속을 재배, 가공하여 큰 돈을 만지려던 관료들과 황실친척들이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그들은 겉으로는 명을 받드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비밀리에 앵속을 재배하고 가공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입금지를 틈타 밀수를 시작한다. 밀수의 경우에는 세금도 내지 않으므로 이익이 더 커지게 되엇따. 1800년, 최소한 서남각성에서 생산하는 아편은 수입물량을 초과하게 된다. 1830년이 되어, 절강, 복건, 광동등의 관료들과 황실에서는 모두 앵속의 재배와 가공을 눈감아준다. 그리하여 생산량이 크게 증가한다. 아편수입이 금지되면서 아편가격도 급격히 올라간다. 밀수로 인하여 황제의 금지령은 그저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조정이 원래 수취하던 관세수입은 그대로 관리와 밀수상인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외국 주로 영국의 아편상과 결탁하여 아편수입은 거의 무인지경으로 이루어진다.

 

위원(魏源)이 기술한 바에 의하면, 광동의 수군순행함은 매월 3만6천냥씩 받고 밀수를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수군부장 한조경은 전문적으로 밀수선을 호송해주었고, 아편밀수는 아예 수군이 운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매만상에서 수백상을 수고비로 떼었다. 한조경은 이로 인하여 상까지도 받는다. 복건수군도 밀수를 도와주는 것을 주요업무로 삼는다. 심지어 "오랑캐배의 아편을 일시에 수입할 수 없으면, 왕왕 수군의 포대부근에 쌓아두었다" 절강성의 관군도 이에 못지 않았다. 영국정부의 청서(Blue Book)에 의하면, '과거20년간, 중국고급관리와 정부공무원은 아편밀수를 공개적으로 묵인하였다. 전임과 현임 순무는 모두 그 가운데 이득을 취했다. 듣기로 북경의 군기처도 암중으로 허가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아편판매상들이 외국선박에서 아편을 밀수하도록 종용한다. 어떤 때는 심지어 관선으로 운송을 담당하기도 한다" 마르크스도 미국신문에 발표한 평론에서 "아편밀수를 종용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관리들의 부패행위는 점차 이 가장제의 권력을 부식시키고, 이 광대한 국가기관의 각 부문을 연결시키는 정신적인 연계를 부식시킨다."고 적었다.

 

아편이 이처럼 붐을 이루게 된 것에는 시장에서 거대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인사인 장상남의 조사에 의하면 북경관료중 아편을 피우는 자가 10명중 1,2명이 있었고, 막료중에 아편을 피우는 자는 10명중에 5,6명이었고, 수행인원이나 하급관리중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적었다. 임칙서의 보고에 의하면, '아문에서 아편을 피우는 자가 많다. 막우, 환친, 수행인원, 서판, 차역중 아편을 피우는 자가 10명중 8,9명이다" 1831년의 형부에서 올린 상소에 의하면, "현재 직성지방에는 모두 아편을 피우는 자가 있다. 각아문은 더욱 심하다. 개략 살펴보면, 총독,순무이하 문무아문의 상하자중 절대 아편을 피우지 않는 자는 그 수가 아주 적다" 황실내부에서도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많았다. 신기영의 관리대신인 계상은 바로 유명한 아편장이이다. 심지어 자희태후 본인도 아편흡입자였다. 청나라조정의 아편금지조치중에서 1품이상관리, 60세이상인사는 금지대상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도광황제의 심복대신중에서도 군기대신, 목창아, 중신 기선, 기영, 이리포등이 모두 아편밀수로 돈을 번 자들이었다.

 

청나라관청과 군인들이 참여함에 따라, 아편밀수의 수량은 심지어 금지전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영국상인인 동인도회사는 인도아편을 독점하였는데, 그들이 주강입구의 영정도에까지 가져와서 도매하면, 중국의 관청배경이 있는 밀수상들이 이를 사갔다. 1790년에는 4000상을 수입하였는데, 금지령이후인 1810년대에는 4,494상자에 이른다. 1821-1828년에는 9,708상자에 이른다. 1828-1835년에는 18,835상자에 이르고, 1835-1839년에는 30,000여상자이상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영국의 이화양행의 Dr. Karl Gutzlaff는 매년 흠주관리에게 2만달러씩을 뇌물로 주었고, 아편은 장기간 안정적으로 흠주항구에 평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밀수로 인하여 아편수입이 급증하자 동인도회사는 급히 인도의 앵속재배를 늘였고, 아편생산량을 늘였다. 그러지 않으면 수요를 공급이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계에 의하면, 아편전쟁전 40년동안 중국이 수입한 아편은 3억위안이상이다.

 

3. 영국의 아편에 대한 논쟁

 

영국의 아편무역은 중국만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세계에서, 아편무역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시장의 수요는 무역액을 엄청나게 불리웠다. 1830년대, 아편은 영국의 중국에 대한 무역에서 절반을 차지했다. 이익만 있으면 손을 대는 영국정부는 대량의 수입을 얻어갔다. 아편무역은 영국본토에서도 정상무역이었다. 그저 아편을 흡입하는 시장만 있으면 공급했다. 1868년에 이르러 영국은 비로소 <<독품약점법안>>을 만든다. 이 법안은 영국본토의 아편무역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제한할 뿐이었다. 진정으로 아편을 금지한 것은 1914년이다. 영국은 심지어 상당히 많은 양의 아편제품을 제조했다. 예를 들어, 자주보는 아동아편사탕인 "Balagoli"는 1920년대에까지도 유아를 안정시키는 가정상비약품이었다. 1885년 미국에서 입법으로 미국본토의 아편무역을 금지했다. 그러나 금지령이 엄격하지는 않았다. 전형적인 사례는 저명한 코카콜라음료는 1903년가지도 미량의 카페인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이의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1780년대에 아주 강력하게 정부가 아편무역을 단속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Shaftesbury백작은 "나는 이 국가가 이런 죄악의 거래를 종용할 정도로 극악하다고 믿지 않는다. 아마도 노예무역을 종용하는 것보다 더 악랄할 것이다" T Arnold박사는 영국이 아편무역을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 "이처럼 사악한 것은 최대의 민족죄악이다"라고 하였다. Gladstone은 제1차아편전쟁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읽은 것에 의하면 이것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다. 국가로 하여금 영원히 치욕을 느끼게 할 전쟁이다" 중국-영국관계를 처리하던 관리인 George Staunton은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편밀수가 없었다면, 전쟁도 없었을 것이라고" 심지어 동인도회사의 아편대리처부장인 Sam도 이렇게 썼다. "아편제품은 인민의 건강을 망치고, 도덕을 망가뜨린다. 아편을 재배하는 곳이 있으면, 바로 아편을 피우는 사람이 있다. 더 많이 심을수록 더 많이 피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편무역에 반대하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아편에 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하였다. 또 다른 일부사람은 아편이 가져다주는 거액의 이익때문에 반대하지 않았다. 당시 영국신문은 아편무역에 반대하고 찬성하는 의견이 대체로 1:5였다. 그래서 영국의회에서는 오랫동안 아편금지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