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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고궁(瀋陽故宮)의 네번에 걸친 겁난

구름위 2013. 9. 28.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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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고궁은 1625년에 건축되었고, 6만여평방미터를 점하고 있다. 자금성과 함께 중국에 현존하는 2개의 황궁건축물중의 하나이다. 사료기재에 의하면,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하고 옮아가기 전까지 황궁은 심양에 있었고, 북경으로 천도한 후에는 이 황궁은 "배도궁전(陪都宮殿)", "유도궁전(留都宮殿)"이 되었다.  나중에 심양고궁으로 칭한다. 심양고궁은 제1대황제 누르하치가 건축을 시작하고, 누르하치 사후 청태종이 완공한다.

 

첫번째 겁난: 제정러시아군의 약탈 파괴

 

1900년 9월, 제정러시아의 침략군이 심양고궁에 들이닥친다. 당시 제정러시아군은 의화단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우장(牛莊)과 요양(遼陽)을 점령한 후 심양(瀋陽)으로 몰려왔다. 10월 1일, 제정러시아군은 심양성에 진군하고, 심양고궁은 그들의 주둔장소가 된다. 태양이 서쪽으로 떨어질 때, 쿠사코프의 보병이 심양고궁으로 왔고, 코카서스기병이 궁전의 방어를 책임지고, 돌격대와 순라대는 성경장군(盛京將軍)의 관저를 방어했다. 성경장군 증기(曾琪)는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봉황루에 소장된 황제와 제후의 그림과 옥보를 꺼내고 선황의 고궁과 보물들은 버려둔 채 부도통인 진창(晋昌)과 심양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심양고궁의 많은 보물은 제정러시아군의 손에 들어갔다.

 

제정러시아군은 심양고궁을 점령한 후 갖가지 이유를 들어 떠나지 않고, 2년반을 머문다. 1903년 3월 11일에서야 심양고궁에서 철수한다. 청나라 관리들이 심양고궁을 접수했는데, 이들이 점검해보니 소장품을 분실한 것과 손괴된 것이 만여건에 달하였다. 그중 봉상각에서 없어진 기물이 3000여건, 대소은정이 8000여개, 6000냥, 각종 금기, 금정, 금조가 만냥이상, 동칠간루에서 없어진 자기가 6300여개, 서칠간에서 없어진 서적, 묵각이 540여건이었다.

 

 

제2차 겁난: 원세개의 문화재운송

 

심양고궁에는 원래 약 12만건의 진보를 수장하고 있었다. 현재의 수장품들은 기본적으로 나중에 모은 것들이다. 당시에 유실된 국보는 다시는 돌려받지 못하였다.

 

1913년 겨울, 북양정부의 내무총장인 주계금이 글을 보낸다. 대총통 원세개의 비준을 받아 북경고궁 건청문 이남의 "외조(外朝)" 부분, 즉 태화전등에 "고물진열소(古物陳列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부의가 "내정"에 거주하고 있고, 궁내의 국보는 '개인자산"이므로 가지고 나와 진열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북양정부는 내무부에 명하여 봉천고궁과 열하고궁에서 소장하고 있는 청나라의 궁정문화재를 북경으로 옮겨와서 청궁예술품진열전람에 쓰기로 한 것이다. 1914년 1월에서 3월까지, 심양궁전에 있던 고동정이, 송원명청의 서화, 내정옥기, 어용무기장비, 명청자기등 11만여건을 모두 상자에 넣어 기차로 북평고물진열소로 옮겼다. 그런데, 운송되었던 대부분의 소장품들은 몇단계를 거쳐 각지로 흩어지고, 다시는 심양고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25년, 북경고궁박물관이 성립되고, 심양과 승덕에서 북경으로 운송해온 문화재를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킨 후부터는 문화재를 남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진귀한 문화재는 최종적으로 대만으로 옮겨갔다. 심양고궁에서 옮겨간 절대다수의 문화재는 일부가 대만으로 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세번째 겁난 일본인의 소장품분산

 

1926년부터 1936년까지 심양고궁은 박물관이었다. 동삼성박물관(1926-1932), 봉천고궁박물관(1932-1936)이라는 이름으로..이후 만주제국수호릉묘판사처로 되었고, 많은 소장품이 외부로 유출되었다. 그 때 심양고궁은 만주 황실이 통제한 금지(禁地)였다. 원래의 고궁박물관의 각 궁전은 봉천능묘판사무처가 관리했다. 이러한 상황은 1945년 8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1937년 4월까지, 심양고궁의 소장품은 청나라때의 기물, 도서, 기록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만주국국립박물관, 만주국국립도서관, 만주국봉천능묘판사무처등에 나뉘어져 세 곳에서 보관했다. 심양고궁은 다시한번 소장물품이 다 비어버린 것이다. 동북이 함락된 후, 동삼성박물관에 소속된 소장품은 다시 한번 외부로 유출되고, 심양고궁의 원래 문화재, 내부서적, 청대자료는 모두 나뉘어져 분산되었고, 성경황궁소장품의 통일성은 없어지게 되었다.

 

네번째 겁난: 국민당의 국보비밀운송

 

3번의 대겁난을 거친 후에도 심양고궁에는 문화재가 여전이 약간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일부분중의 절대다수가 다시 국민당이 요심전투폭발전에 비밀리에 운송해 가버린다. 1948년 6월, 요심전투가 폭발하자, 국민당은 철수하면서 3톤에 달하는 문화재를 두번에 나누어 당시의 북평(북경)으로 옮긴다.

 

제1차 민각서는 17포, 88종, 109함, 551책이었고, 제2차는 옥보29개, 옥책 32개, 송요자기 45건이었다. 6월초에는 이미 옥보, 옥책, 민각서, 요자정품, 청실록, 만문노당등이 다 옮겨갔다. 같은 달에 다시 문소각 사고전서를 북평으로 옮겨갔다. 이로써 해방전까지 심양고궁은 철저하게 아무 것도 없이 비어있는 고궁으로 바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