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중국역사상 무덤이 가장 많은 사람

구름위 2013. 9. 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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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보(杜甫)

 

    두보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은 모두 8곳이다. 호북성 양양, 호남성 래양, 섬서성 부현, 섬서성 화음, 호남성 평강, 사천성 성도 및 하남성의 언사와 하남성 공의이다.

 

원진이 지은 묘비명을 보면 두보는 언사에 묻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두보의 가족들은 이미 언사를 떠나 공의로 와 있었고, 그렇다면 공의에 가족들과 같이 묻혔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서에서는 '백주를 마시고 대취해서 죽었으며' 래양에 묻혔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죽은 방법이 너무나 두보답지 못하다고 하여 잘 믿지 않는다. 래양 사람들은 그러나 두보의 무덤을 계속 수리하고 있다. 호북 양양에도 묘가 있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은 그는 래양에서 죽었고, 처음에 악양에 묻었다가, 나중에 언사로 이장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다시 공의로 이장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도 그의 묘로 주장하는 곳이 8곳에나 있다.

 

2. 황제(黃帝)

 

중화민족의 시조답게 무덤도 많다. 그러나 7곳이어서 두보보다는 한 곳이 적은 편이다. 황제릉은 전국의 7곳에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섬서성의 교산이다. 여기는 서한시절에부터 역대 황제들이 제사를 지내온 곳이다. 다음으로는 하남성의 영보, 하남성의 신정 그리고 감숙성의 정녕에 있다. 그외에 하북에도 있고, 산동에도 있고, 북경에도 있다. 북경의 황제릉은 평곡현에 있는데, 고대에 헌원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3. 건문제(建文帝)

 

건문제 주윤문은 영락제(당시 연왕)의 정난지역으로 행적이 묘연하게 되었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이미 역사의 수수께끼가 되어 버렸다. 정사에는 궁중에서 불에 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일찌기 숭정제도 건문제는 능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야사에는 그의 무덤이 여러곳에 있다.

일설에는 사천 평창 불라사에서 숨어 있다가, 산언덕에 묻었으며 이후 망경사로 개칭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운남 대리로 도망갔다가 다시 사천 의빈의 월계하로 갔다가 융흥에 은거하고, 죽은 후에 융흥의 지하탑림에 묻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건문제가 "첨벽운"이라는 전진교의 도사로 위장하고, 삼청산에서 주지를 지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선덕원년(일설에는 정통5년)에 조정으로 돌아왔으며 죽은 후에 서산에 묻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강소 오현의 보제사에 숨어지내다가 요광효의 도움을 받아 궁륭산 황가암에 있었으며, 후에 궁륭산에 묻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건문제가 궁을 도망친 후 양란으로 이름을 바꾸고 무창에 숨어지냈으며 무창 홍산의 보통사에 묻혔다고 한다.

건문제의 무덤도 7곳이다. 당연히 그에 관한 전설은 아주 많다.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들 중에서 믿을 만한 곳은 한 곳도 없다.

 

4. 창힐(倉힐)

 

중국문자를 창조하였다는 창힐도 모두 6곳에 그의 무덤이 있다.

 

산동성 수광, 하남성 개봉, 하남성 우성, 하남성 남악, 섬서성 장안, 섬서성 백수의 여섯곳에 창힐릉이 있다. 이중 창힐이 황제의 비서역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섬서성 백수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 한편, 문혁기에 하남성 남악의 창힐묘에서 의외로 용산시기와 앙소시기의 기물이 나와서 고고학적으로 가능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5. 여와(女와)

 

사람을 만든 이 여신도 6곳에 능이 있다. 산서성내에 두 곳이다 하나는 예성현의 풍릉이고 하나는 홍동현의 조성이다. 하남성에도 서화, 영보에 있고, 섬서성에도 동관,임동,평리에 있으며, 산동성의 제녕에도 있다. 홍동현의 여와릉이 가장 유명하다. 언제지었는지는 모른다.

 

6. 치우(蚩尤)

 

치우는 황제와 싸움에서 져서 피살되었다. 그의 몸은 나뉘어져 각각 매장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그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다섯 곳이다. 문상현의 치우총, 양곡현, 산양군 거야,  하북 탁록의 "치우분", 하남 태전의 "치우분"등이 있다.

 

7. 징기스칸(成吉思汗)

 

하나는 몽고국의 긍특산 남쪽, 커루룬강이북의 지방

하나는 몽고국 항애산

하나는 중국감숙성의 육반산

하나는 내몽고 어얼뚜어스의 어투커기 경내의 이진후오로.

몽고황실은 원래 능묘를 남기지 않고, 비밀매장의 방식을 취하였다. 그래서 그의 무덤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추측이 있다.

 

8. 항우(項羽)

 

항우가 죽은 후, 항우의 시신을 한나라 장수들이 서로 얻기 위하여 싸웠다. 왕의, 여마동, 양희, 여승, 양무의 다섯 명이 나누어 가진다. 그러므로 그의 묘가 많은 것도 이해는 된다. 현재 모두 네 곳이 항우의 무덤이라고 한다.

 

하남성의 하양현에 한 곳, 산동성 동평현에 한 곳(사기 항우본기에는 왕곡성에 묻었다고 되어 있는데, 왕곡성이 지금의 동평현이다), 곡부에 한 곳(속칭 패왕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항우의 머리가 묻혀있다고 한다), 안휘성 화현 오강진의 봉황산에 한 곳(부근에 우희분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항우의 자결후 여기에 묻었는데, 묻은 것은 항우의 시체를 나눠가진 후 남은 것들과 피묻은 옷이라는 것이다)

 

9. 염제(炎帝)

 

중국인들이 스스로 염황자손이라고 하듯이 황제릉이 많은 것처럼 염제릉도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염제가 살았을 때 황제만큼 세력이 크지 못해서인지 무덤도 그보다 적다. 염제릉은 섬서성 보계, 호남성 수현, 산서성 고평의 세 곳에 있다. 수현의 염제릉이 명성도 높고 역사도 길다.

 

10. 복희(伏羲)

 

찾을 수 있는 곳이 세 곳이다. 하남성 회양, 호북성 양양, 산동성 미산. 하남성 회양의 것이 가장 유명하고, 주원장이 처음으로 배알한 곳도 이 곳이다. 다른 두 곳에는 실제로 능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