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민중의 반일감정은 강렬하고,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점은 100년전에,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중감정이 성행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아이러니의 배후에는 연유가 있는 법이다.
1886년, 북양함대의 ‘정원(定遠)’, ‘진원(鎭遠)’, ‘제원(濟遠)’, ‘위원(威遠)의 네척의 군함이 일본의 나카사키(長崎)를 방문했고, 나카사키를 뒤흔들어 놓았다. ‘정원’, ‘진원’의 두척의 위풍당당한 거함은 일본인들이 그때까지 본적도 들은적도 없는 것이었다. 마음 속의 놀라움을 뭐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이 군함들을 보는 일본인들의 마음은 상당히 복잡했을 것이다.
이전 10년간 중국과 일본은 유구, 조선 및 대만문제를 놓고 대립하여 왔다. 이홍장이 이번에 ‘정원’ ‘진원’의 두 거함을 일본에 보낸 것은 일본을 겁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정원’ ‘진원’의 두 척은 동급의 자매함이다. 독일의 Vulcan이라는 조선소에서 만든 것으로, 1885년 10월에 인도되었다. 당시에는 세계최고급철갑선으로 불리웠다. 철갑선의 당시 해군에서의 지위는 현재의 항공모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340만냥백은을 들여서 만든 ‘정원’ ‘진원’은 확실히 남달랐다. 두 척은 배의 길이가 94.5미터, 너비가 18미터이고, 배수량이 7200톤, 항속이 14.5노트(진원함은 15.4노트)이다 두 척이 주요무기는 4문의 Krupp305밀리후방장착식 주포, 2문의 Krupp150밀리후방장착식 보조대포, 4문의 75밀리 Krupp대포; 8문의 37밀리 5관Hotchkiss기관포, 각 2문의 57밀리, 47밀리 Hotchikiss기관포; 3대의 14시어뢰발사관이 있었다. <<북양해군장정>>의 규정에 따르면, 이 전함은 총병(總兵)이 지휘했다. 북양해군의 계급은 제독, 총병, 부장, 참장, 유격, 도사, 수비의 순이었다. 이 두척의 주력철갑선이 무장을 갖춘 후 1988년 정식 해군으로 성장한다. 이때 중국의 해군력은 세계8위수준이었다.
일본인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원인은 바로 일본역사상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항상 학생이 스승을 대하는 심리였다. 그러나, 근대이래로 일본은 ‘탈아입구’의 길로 들어섰고, 폐쇄의 길을 걸었던 대청제국과 비교하여, 그들은 심리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양함대의 방문은 그들의 이러한 심리에 큰 타격을 주게 된다.
8월 13일, 북양함대의 수병들이 해안에 상륙한 후 일본경찰과 충돌이 발생한다. 그중 경찰 1명이 맞아서 중상을 입고, 북양수군의 수병 1명이 경상을 입는다(그 연유는 부끄럽게도 수병이 기원을 찾았다가 분쟁이 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원래 불만을 품고 있던 나카사키 경찰과 일본낭인은 극히 분노한다. 결국 15일에는 더욱 큰 충돌이 발생한다. 이번에는 북양수병이 아무런 준비없이 당했다. 일본경찰과 낭인은 칼을 들고 5명을 죽이고, 40여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일본경찰도 1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당한다. 혼란중에, 일부 현지 일본인들도 건물위에서 뜨거운 물을 붓거나, 돌맹이를 던지고, 어떤 사람은 아예 칼을 들고 참전하기도 했다.
이홍장은 ‘나카사키사건’을 보고받은 후, 분노하여 당시 일본의 주천진영사인 하타노를 불러, 거의 협박조로 얘기한다: “지금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우리 병선이 귀국에 정박해 있는데, 함체나 대포는 단단하니까, 지금이라도 바로 전투에 돌입할 수 있다.” 북양함대의 총교관인 Lang William도 즉시 선전포고하고 나카사키를 포격해서 보복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의 일본은 비록 변법유신을 시작했지만, 국가가 10년만에 완전히 변신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더구나 자원빈국이다. 일본인들이 비록 ‘완고하고 보수적인’ 중국을 멸시하고 있었지만, 중국은 어쨌든 오래되고 방대한 제국이다. 이런 역사의 그림자는 쉽게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시 중국의 국력과 군사력은 모두 일본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해군만 보더라도, 일본은 3척의 3000톤급 철갑선을 지니고 있었는데, 북양함대는 7000톤급의 철갑선만 2척이 있다. 그외에 순양함, 포함, 운송함등 그 양과 질에 있어서 모두 일본이 미칠 수 없었다.
각국의 조정과 외교적 절충하에, 중국과 일본의 쌍방은 반년후에 합의를 이룬다. ‘싸움은 원래 언어가 통하지 않고, 서로간에 오해가 생겨서, 싸움에 이르고 사상자까지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이 체결한 천진조약에서, “양국의 사법부문은 본국법률에 근거하여, 각자 적절히 처분하며,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고 규정한다; 마지막으로, 각자의 사상자는 서로 부담하여, 일본은 중국에 52500원을 지급하고(그중 장교1명이 6000원, 사병 7명이 31500원, 장애가 남은 6명은 15000원), 중국은 일본에 15500원(경부 1명은 6000원, 순사 1명은 4500원, 장애가 남은 2명은 500원)을 지급했다. 나카사키병원의 치료비 2700원은 일본측이 지급한다. 이 일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쌍방이 모두 한 걸음씩 양보하여 상호 체면은 유지한 셈이다.
이홍장이 북양해군의 군함4척을 나카사키로 보낸 것은 확실히 무력시위를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지 못했던 점은, 북양함대의 두 척의 거함이 일본인의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을 거쳐, 일본의 반중심리는 더욱 고조되고, 군국주의분자들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북양함대를 적대시하게 된다. 그들이 보기에, 외국수병이 술에 취해서 자기나라로 와서 사건을 벌이고, 게다가 배상까지 요구하다니 이에 대한 원한과 모욕감이 아주 컸던 것이다. 자연히 선동하기 쉬워진다.(이런 일이 중국에 특유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해군을 대거 발전시킨다는 것이 일본내에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반드시 ‘정원’호를 이기겠다는 것이 일본해군의 목표이자 구호가 된다. 일본의 어린아이들에게 가장 유행하던 놀이는 바로 두 편으로 나누어 하나는 중국함대, 하나는 일본함대로 하여, ‘정원’ ‘진원’의 두 군함을 잡는 놀이였다.
일본의 반중감정은 일본정부의 고취하에, 금방 북양함대를 추월하는 동력이 된다. 나카사키사건이 끝난지 1달여후에 일본 메이지천황이 칙령을 반포한다: “나라를 세우는 임무는 바다를 지키는데 있다. 하루라도 늦춰서는 안된다.” 그후에 그는 몸소, 내탕금 30만엔을 내놓고 해군의 자금으로 쓰게 한다. 그후, 메이지천황은 다시 칙유를 발표하여, 6년간 매년 30만엔을 내놓겠다고 하며, 문무관리들도 봉금에서 1/10을 군함건조비로 국고에 납부하도록 한다.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도 연설을 통하여, 국민들의 기부를 호소한다. 일본에 강력한 해군을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번 헌금열풍속에서, 일본은 반년동안 200만여엔을 모금한다. 천황의 모친까지도 그녀가 가진 2개의 액세서리를 내놓을 정도였다.
일본정부는 재정곤란에도 불구하고, 매년 해군경비를 증가시키고, 거액의 공채를 발행한다. 그 수량은 재정수입의 30%에 이를 정도였다. 예를 들어, 1886년, 일본정부는 1700만엔의 해군공채를 발행하고, 1889년 이론해군의 군비는 이미 1000만엔에 달한다. 1888년이후, 일본은 대규모로 군함을 구매하고, 군함을 건조한다. 6년동안 군함 12척을 늘여서, 합계 18000톤이 늘어난다. 청일전쟁 전날까지, 일본해군의 주력함의 총톤수는 이미 37000톤에 이른다. 북양함대의 주력함의 총톤수인 30000톤을 이미 넘어선 것이다. 바로 이 6년동안 북양함대는 배 한 척, 포 한 대 구매하지 않았다. ‘세계8위’의 휘황한 명성은 이미 옛 말이 되고 말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당시의 세계해군의 군사기술이 날로 새로워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은 후발주자로 선발주자를 따라잡았다. 구입한 것이건 자체제작한 것이든, 장비들이 모두 선진적이었다. 평군항속은 북양함대를 훨씬 추월했다. 군함에 대규모로 장착한 속사포는 북양함대가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청일전쟁 전날까지, 북양함대는 총톤수, 항속, 화포능력에서 모두 일본함대에 뒤졌다. 이것이 아마도 북양함대가 우선 풍도에서 패하고, 다시 황해에서 패하고, 마지막으로 위해에서 패한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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