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고격(古格)은 낯선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이 350년전에 사라진 왕국의 가치를 안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격왕국은 중미의 마야문명, 이탈리아의 폼페이고성과 놀랄만큼 닮은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문명의 최전성기에 멸망하였으며, 이런 돌연한 멸망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보존되어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후의 수세기동안 사람들은 거의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인류의 활동으로 인하여 그 건축과 건물이 파괴되지 않았고, 그의 문자와 종교를 고치지 않았고, 그의 벽화와 예술품격을 뜯어고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멸망당한 현장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의 고격지역에는 이런 기괴한 현상이 있다. 10여호의 사람들이 비어버린 도시의 폐허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고격의 후예는 아니다. 그렇다면 당시 10만여명에 이르던 고격인들은 어떻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일까? 여기에는 도대체 어떤 천재지변이 있었거나 전염병이 있었길래 번영하고 부강하던 문명이 돌연 철저하게 사라진 것일까? 고격문명은 어떻게 사라진 것일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고격왕국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드물고, 역사의 기록도 파편만 남아 있고, 서로 모순되어, 고격왕국의 면사를 벗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오히려 그의 신비감만 더해주고 있다. 옛날의 고격은 하나의 거대한 미궁과 같다. 티벳 서부의 많은 비밀이 그 안에 갇혀 있다. 10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까지, 고격왕국은 티벳의 서부에 자리하고 있었고, 불교가 융성했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했으며, 티벳에서 토번왕조이후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위치는 청장고원의 서쪽 끝인 자다상천하(티벳어로는 랑친장부)유역이 통치중심이었고, 북쪽으로는 일토(日土)와 마주했다. 가장 북쪽 경계선은 오늘날의 캐시미르경내의 스노우산이다. 남쪽으로는 인도와 경계를 마주했으며, 서로는 라다크(현재의 인도가 점령한 캐시미르)이다. 가장 동쪽은 일찌기 강디스산록에 이른 적이 있다. 수도인 자부랑은 현재의 자다현의 현성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상천하 남쪽이다. 측량에 의하면, 자부랑의 북쪽은 향자, 향파, 동거, 피앙유적지가 있다. 서쪽으로는 다향, 남쪽으로는 달파, 마나, 곡룡유적지가 있다. 모두 상당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들처럼 현재까지 마을을 이루거나 행정소재지가 되어 지도상에 이름을 남기고 있는 거점들을 제외하고도, 고격왕국은 대량의 유적이 황량한 벌판위에 흩어져 있다. 잘려진 담장과 무너진 동굴, 기울어진 불탑은 부지기수이다.
고격유적지는 상천하 남안의 자부랑촌의 높이 300미터 되는 흙언덕위에 있다. 현존하는 유적지는 고격이 멸망할 때 남겨진 유적이다. 최초로 이 고성유적지에 대하여 고찰을 한 것은 1912년 영국인 맥스 양이다. 그는 인도에서 상천하를 따라 거슬러 올라와서 이 곳에 도착했고, 고찰을 했다. 이후 탐험가, 여행가와 예술가들이 이 곳을 찾아왔다. 진정한 과학적인 고찰이 이루어진 것은 1985년 티벳자치구의 문관회가 조직한 고찰대이다. 그들은 현지측량을 하여, 유적지 총면적이 72만평방킬로미터라고 확정했고, 조사하여 등기한 건물유적이 445개, 동굴이 879개, 조보(조堡)가 58개, 암도가 4개, 각종 불탑이 28개, 동굴매장지 1곳, 무기고 1곳, 돌그릇창고 1개, 크고 작은 양식창고 11개, 불상을 모신 동굴 4개, 벽매장터 1곳, 목관토장터 1곳이다.
자부랑의 북쪽에는 "노파"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다현의 한 향(鄕)이다. 티벳어에서 노파는 "야련인(冶煉人)"을 의미한다. 전설에 의하면 고격왕국시절에 이 곳은 금은기물을 야연하던 곳으로 유명하다는 것이고, 당시 아리삼위는 탁림사를 주사(主寺)로 하여, 그 아래에 24개의 사원의 금속불상을 모두 노파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노파에서 주조한 불상은 금, 은, 동등 서로 다른 원료를 배합하여 만들었는데, 기술이 아주 뛰어나서, 전체 불상에 이은 틈이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가치가 순금불상을 초과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고격은안(古格銀眼)"이라고 부르는 동상인데, 고격에서만 만들었다고 하며, 불상중의 가장 정교한 제품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는 것이 많지 않아서 더욱 진기하다. 이로써 볼 때 고격왕국시기의 금속제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상 티벳의 서부는 "황금지향"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신비한 전설이 전해진다. 여기에는 거의 모든 산에 광물이 있고, 광산채굴자가 있으며, 은동의 장인이 있다는 것이다. 고격의 부강은 아마도 황금백은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탁림사, 자부랑, 피앙동거에는 모두 금은으로 쓴 경서가 발견되고, 그 수량도 적지 않다. 이런 경서는 문자를 약간 청람색을 띄는 흑색 지면위에 한줄은 금즙으로, 한줄은 은즙으로 썼다. 햇볕에 비추면 금과 은이 빛나 휘황찬란하다.
고격왕조의 소실은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전설에 의하면 1630년, 고격왕국과 동종(同宗)인 서부임족 라다크족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고격왕국은 멸망했다는 것이다. 고격왕국의 역사에 대하여 원래 서장의 토번의 마지막 찬보는 랑다마라고 하는데, 내부분열로 토번이 망한 후, 랑다마의 후예중의 한 명이 아리지구로 도망쳐와서 고격왕국을 세웠으며 개략 9세기무렵이라고 한다. 고격왕국은 산위에 건립되어 있어서 아주 웅장했으며 왕국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주민들은 모두 경건한 불교도들이었다. 나중에 포르투갈사람들이 인도에 도착하고 인도에서 고격왕죽으로 와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먼저 왕후를 설득하고 다시 국왕을 설득하여 천주교로 개종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마침 이 때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는데, 바 로 사원의 라마들이 라다크족과 결탁하여 라다크족이 고격왕국에 침입하였다는 것이다. 내부의 라마들과 힘을 합하여 고격왕국은 무너졌다고 한다. 이후 라다크인들은 고격왕국의 폐허에서 약탈방화를 저지르고, 나중에 티벳에 주둔하고 있던 어루터 몽고인들이 병사를 보내어 비로소 라다크인들을 티벳에서 쫓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때가 개략 명나라 왕조 말기라고 한다. 최근 사람들은 고격왕국의 유적지에 있는 장경동에서, 종이로 만든 가면(아마도 귀신을 쫓는 용도)을 발견했는데, 가면을 만든 종이에는 포르투갈어로 성경의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이 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라마들이 포르투갈 전도사에게서 빼앗은 성경으로 귀신을 쫓는 가면을 만들었을 때, 그들은 아마도 아주 기뻐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기록상으로 볼 때, 전쟁으로 인한 도살과 약탈은 고격문명을 훼멸시켰다고 보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전쟁의 포화가 끝난 고격왕국은 점차 거대한 폐허로 변해갔다. 사서의 기재는 오차가 있다. 전쟁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자다현의 지리환경으로 봐서, 현재의 상천하는 분명 그 때의 상천하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사막화가 상당히 심한데, 당시에는 10만명을 먹여살릴 수 있을 정도의 오아시스가 형성되어 있었을 것인데, 지금은 거의 얼마 남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흙숲과 사막이 잇을 뿐이다. 이런 지형변화가 아마도 고격왕조의 진정한 소멸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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