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주벽화(周碧華)
현재 관료들이 사용하는 사무용품은 각양각색이지만, 만일 승용차를 제외한다면, 사무실안에서 휴대하고 다니는 사무용품중 가장 값비싼 것은 아마도 노트북컴퓨터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가격이 만위안이상은 할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관료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사무용품중의 하나가 아주 진귀하다. 현재 가격은 최소한 개당 2만위안이 넘는다. 이 사무용품이 바로 "홀판(笏板)"이다.
홀판은 바로 고대관료들이 어떤 일을 기록하는데 쓰이던 것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쓰는 각종 노트와 같은 것이다. 이는 "옥판(玉板)", "수판(手板)" 또는 "조판(朝板)"이라고도 불리웠다. 우리가 오늘날 볼 수 있는 영화에서 옛날 관리들은 두 손으로 하나의 좁고 긴 판대기를 들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홀판"이다. 조회에 참석할 때, 문무백관은 손에 홀판을 들고 나타난다. 황제에게 주청드릴 내용을 그 위에 적어놓고, 군왕의 훈령도 그 위에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기>>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임금의 앞에서 그리는 모든 것은 홀을 사용하고, 임금의 앞에서 명을 받으면 홀에 기록한다"
홀은 길이가 2척6촌이고 가운데의 폭은 3촌이다. 이 물건은 크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귀한 것일까?
이는 그 재질에서 유래한다. 홀은 각각 옥(玉), 상아(象牙) 또는 대나무(竹)로 만들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춘추시대이전이다. 사학자들은 상나라때부터 아마도 사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중국고대의 관료들이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했던 사무용품이다.
고인들이 종이를 발명하기 전에는 만일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서적의 공능을 지니는데, 이를 "독(牘)"이라고 불렀다. 만일 관리가 몸에 지니고 조회에 나갈 때 사용한다면 그것은 바로 "홀(笏)"인 것이다.
나중에 종이가 보급된 이후에는 홀은 실용적인 사무용품이 아니라, 예절적인 장식물이 되었다. 재료도 대나무에서 옥이나 상아로 승급된다. 당나라때 무덕4년이후 "홀"에는 등급이 나뉘기 시작한다. 5품이상의 관리들은 상아로 만든 홀을 쓸 수 있고, 6품이하는 대나무로 만든 홀을 쓸 수 있다. 형상에도 규정이 있었다. 3품이상의 홀은 전졸후직(前拙後直), 5품이상의 홀은 전졸후굴(前拙後屈)이었는데 나중에 상원하방(上圓下方)으로 바꾸었다. 명나라때는 오품이상의 관리들이 상아홀을 지닐 수 있었고, 5품이하는 이를 사용할 자격이 없었다. 이는 현재 관리들이 쓰는 노트북컴퓨터와는 달리 신분등급이 분명히 나타났다.
홀이 사용되지 않게 된 것은 청(淸)나라때 부터이다. 그 원인은 만주족은 기마를 위주로 하는 민족이어서 한손에는 채찍을 들어야 했고, 한손으로는 말고삐를 잡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홀을 잡을 빈 손이 남지 않게 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고대관리들은 원칙적으로 1인당 1개의 홀을 사용했다. 다만 공무가 바쁜 관리는 몇개를 지녀도 되었다. 몇개를 한꺼번에 들 수 없으면, 대자(袋子, 부대)를 준비해서 담았는데, 이를 나중에 "홀낭(笏囊)"이라고 불렀다. 홀을 많이 가져야 하는 경우에는 시종이 홀낭을 등에 매고 함께 조회에 나아갔다. 당나라때 장구령이 재상을 지낼 때, 나이는 많고 체력이 약하여 그는 시종으로 하여금 홀낭을 매고 함께 조회에 나갔었다. 생각도 못한 것은 나중에 이것이 유행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관리들은 하나 둘 그를 따라했고, 이후 시종으로 하여금 홀낭을 매고 들어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관리의 뒤에서 홀낭을 매고 따라 들어가는 자는 바로 현재의 의미로 따지자면 비서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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