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임란 의병운동의 성격과 호남의병의 특성

구름위 2012. 10. 7.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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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래(순천대 교수 · 임진왜란사연구회 회장)

 

1.머리말

『近世日本國民史』- 朝鮮役의 저자 德富猪一郞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조선침략전쟁에서 실패한 것과 관련하여 몇 가지 요인을 지적하였다. ‘조선의 의병봉기’ · ‘조선수군의 우세‘ · ’명군의 지원‘ 등이 주된 원인이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개전 초부터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유격전을 펼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을 교란시키고 병참선을 유지시키지 못하게 했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조선의 의병을 ‘폭민’이라 표현하였으나 일본이 침략전쟁에서 실패한 요인을 분석한 것은 비교적 정확하였다. 그가 본대로 조선군이 임진왜란을 이겨낸 동력은 의병의 항전과 수군의 승첩에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의병이란 비정규군인 민병을 말한다. 비정규군인 의병이 당시 조선군의 주력이었다면, 임진왜란시 조선왕조엔 정규군이 없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국 각지에서 민병이 일어나 침략군과 싸웠다면, 그 나라엔 정규군인 관군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설령 제도상의 정규군이 있었다 할지라도 평소에 훈련된 상비군이 없었다면, 결국 조선은 국군이 없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임란의병의 문제는 이와 같은 시각으로부터 풀어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던 배경과, 지역적 여건에 따른 의병활동의 목표 및 의병의 유형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 글을 통하여 우리가 해결하여야 할 주된 목적은 호남의병의 특성을 밝히는 문제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먼저 1592년의 실정에서 호남지방이 처한 지역적 여건, 즉 전란극복의 보장처 기능을 갖고 있었던 전라도의 전략적 위치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1592년 개전 초부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성투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초반의 과정에서 보여준 호남의병의 활동성향을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검토하려고 한다. 근왕의병과 해상의병의 활동, 그것이 임진왜란시 전라도에서 나타난 의병운동의 특성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의병봉기의 배경, 임란의병의 유형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침략한 직후, 조정에 변보가 전해진 것은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의 장계에 의해서였다. 이 때 선조는 순변사 李鎰 · 좌방어사 成應吉 등 여라 장수들을 경상도 현지에 파견하여 적침에 대비케 하는 한편, 좌의정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군무를 총괄케 하였다. 당시의 도체찰사가 남긴 생생한 전쟁기록『징비록』에는 바로 그 날의 군사 실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일이 京中의 정예병 3백명을 인솔해 가고자 하여 병조의 選兵案을 가져다 보니 모두가 군사들이 아닌 여염집이나 시정의 白徒들이었고 서리나 유생들이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시 點考해 보니 유생들의 경우 의관을 갖추어 입고 시권을 지닌 그대로였으며, 서리들은 執務時 착용하는 평정건을 그대로 쓰고 나와 스스로 徵出을 면제해 줄 것을 하소연하는 자들이 뜰에 가득하여 전장에 내보낼만한 자들이 없었다. 鎰이 명을 받은 지 3일이 지나서도 출발하지 못하였으므로 우선 그를 먼저 가게 한 다음, 그의 별장 兪沃으로 하여금 군사를 인솔하여 뒤따라 가도록 하였다.

즉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에서 사흘이 지나서도 군사 3백명을 모으지 못했다는 기록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의 국방실태가 어떠하였는가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당시의 실정에서는 정규군으로서 훈련된 관군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을 뿐 아니라 최소한의 상비군 조차 없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불과 18일 만에 도성까지 진격하였으니, 그 모양은 마치 동래에서 서울까지 계속된 일본군의 행군양상을 방불케 했던 셈이다. 비정규군이었던 의병의 봉기는 곧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근본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와 같다. 조선초기에 확립된 국방체제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까지 극히 부실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16~60세의 양인 장정을 대상으로 실시된 병역의무가 성종 때부터 그 허구성을 드러내면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군역의 布納化가 실시되어 番上 · 立番하는 군사들을 代立 · 放歸시키는가 하면, 조정이 군사의 代立價를 公定하기도 하여 군역 대신 納布로 대치함을 공인하였다. 또한 지방수령이나 병사 ․ 수사 등이 병역 대상자에게 군포를 거두는 대신 자의로 실역을 면제시키는 放軍收布制가 공공연히 자행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임진왜란 전에 이미 유명무실하게 된 군역제도 하에서는, ‘군역은 있으나 군사가 없는’ 괴이한 현상을 초래하였다. 그러므로 국방의 주체가 되어야 했던 정규군으로서의 관군은 제도속에서만 존재하였을 뿐 사실상 국방군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정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받은 백성들이 가깝게는 부모 형제와 향토를 보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봉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년 6,7월에 이르러 거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던 것은, 전쟁 발발 2개월 후에 조선 전역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지 않은 지역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침략을 받은 경상도에서 가장 먼저 의병활동이 시작되었으며, 도내 각처에 침략군이 포진해 있었으므로 난초부터 自保鄕里를 위한 의병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의 전역에 침략군이 진주하였으므로 그들에 대한 항전이 각 도, 각 고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민간의 비정규군이 주도한 출신지역 단위의 향토방위전이 펼쳐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의병의 대표적인 유형을 이룬 鄕保義兵이었다.

그런데 당시 전라도에서 일어난 의병은 의병활동의 성격상 타 도의 경우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향보의병과는 다른 유형의 勤王義兵으로서 봉기하였기 때문이다. 근왕의병이란 향토방위의 범위를 벗어나서 도성탈환을 위한 군사활동을 펼치거나, 적세가 치성한 타 도에 진군하여 실지회복을 위한 의병전투를 전개하는 등 의병활동의 목표가 국가방위 차원에서 이루어진 유형을 말한다. 임진란시 호남지방에서 근왕의병의 활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곡창 전라도가 보전되었기 때문이다. 임란 초기 전라도에서 일본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받은 지역은 무주 · 금산 · 진안 · 장수 등 북부의 일부 산간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 요인은 먼저 경상우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을 교란했던 영우의병의 활약에 기인하였고, 직접적으로는 7월초 금산 진안 일원에서 펼쳐진 고경명 휘하의 전라도 연합의병과 광주목사 권율군의 용전으로 전주를 포함한 도내 전역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라도의 인력과 물력이 온전하게 보존되었으며, 따라서 7년전쟁의 병참기지가 된 이 지역이 전락극복의 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배경에서 봉기한 전라도 근왕의병의 擧義理念에는 그들의 활동목표 또한 잘 드러나 있다. 에컨대 임진년 5월말 담양에서 회맹한 전라도 연합의병의 격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영남과 양호는 이 나라의 근본이다. 그런데 지금 영남은 비록 의병이 일어난다 해도 적의 소굴이 가로막혀 있어 곧 바로 서울로 달려가 왕실을 지키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호서 또한 천리에 걸친 지방이라 어찌 의기있는 장정들이 없을까만은 살략을 일삼는 적세에 눌려 스스로를 구할 겨를조차 없을 터인즉 오늘날 온나라에서 믿는 바는 오직 호남일도에 있지 아니한가.

의병의 목표가 곧 나라를 지키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한 가운데 당시의 실정에서 그 책임이 호남 일도에 있다고 못박았다. 고경명 휘하 전라도 연합의병은 도성방위를 목표로 북상하던 중 도중에 제1차 금산전투에서 패전하였으나 곡창 전라도 공략을 저지하는 데 공헌하였다. 전라도 근왕의병의 구체적인 사례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임란의병의 유형이 육상에서 이루어진 향보의병과 근왕의병의 활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군과 결합된 해상의병의 활동이 동시에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란시의 경우에는 전라좌수군과 연계된 해상의병이 좌수영 관내를 중심으로 決起,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 영남해역에서 활동하였다. 해상의 비정규군으로서 근왕의병의 성격을 갖는 셈이었다. 정유란시 명량해전에 참전하였던 해상의병의 예는 인근 연해지역에서 자원종군하였다는 점에서 임진란시의 해상의병과는 다른, 향보의병의 성격을 띤 유형이었다.

이렇게 볼 때, 임란의병은 성군이념과 활동목표에 따라 크게 근왕의병과 향보의병으로 나눠볼 수 있거니와, 중요한 것은 당시의 의병활동이 육상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해상에 있어서도 수군과 결합된 해상의병이 엄연히 존재하였으며, 그것도 상황에 따라서 근왕의병과 향보의병의 성격을 따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임란의병에 대한 이해가 보다 깊어져야 할 것이다.

3. 호남지방의 전략적 위치와 의병활동의 특성

1) 7년전쟁의 병참기지, 호남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 9월, 선조는 명나라에 보낸 咨文에서 조선 8도 가운데 경상 전라 양도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우리나라의 형세가 처한 바는 전라 · 경상 이 양도가 가장 중요한데 경상도는 문호이며 전라도는 府藏이기 때문이다. 경상도가 없으면 전라도가 없게 되고, 전라도가 없으면 비록 다른 도가 있어도 이 나라는 끝내 의지해 근본을 삼을 만한 계책이 없게 된다. 이것이 곧 왜적이 반드시 이곳을 쟁취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꼭 이곳을 지키려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安危는 실로 전라도를 보존하여 지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글은 당시 조선왕조의 국력보존 여부가 전라도의 保守 여부에 달려있음을 역설한 것으로 또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임진란시 호남지방이 적의 직접적인 침해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 지방의 사회적 혼란과 전쟁이 몰고온 피해는 침략을 당한 타지방에 못지 않았다. 예를 들면 관군징발에 따른 강압적인 병력동원과 강제적인 군수물자의 징발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었고, 계속된 의병봉기로 하여 도내 전지역이 소동을 빚고 있었으며, 노약자까지 동원되어 채찍을 맞아가며 군량운반의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있었다. 따라서 국난극복의 보장처로 중시되고 있었던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망자가 속출하고 각 고을의 창고들이 텅텅 비어가고 있었다. 즉 전쟁준비를 위한 인력과 물력 동원의 기지가 되어 전쟁보다 더한 고초를 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우선 인력동원의 실태를 보면, 4월말에 전라도 순찰사 이광이 징발한 군사만 8천명을 헤아렸으며, 5월말에 재징발한 군사는 얼마인가를 확인할 수도 없다. 당시 국내에 존재한 관군이란 전라도 순찰사군 뿐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1592년에 동원된 호남의병의 대체적인 병력규모를 어림잡아 보자. 김천일 휘하의 나주의병, 담양에서 일어난 고경명 휘하의 전라도 연합의병(약 6천), 보성 · 장흥에서 임계영 문위세 등이 이끈 전라좌의병과 화순 ․ 광주에서 일어난 최경회 휘하의 전라우의병(양군이 각각 약 1천), 장성의 남문의병(약 1천 6백) 등 전라도 5대의병이 잇달아 봉기하였다. 그 뿐 아니라 11월에 들어가서는 복수의병장을 칭한 고종후가 사찰의 노예들을 대상으로 모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이상은 해전의 주력이었던 전라좌 · 우수군의 동원사례를 제외한 것만으로도 이와 같았으니, 도내에서는 더 이상 병력징발이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바꿔 말하면 당시의 전라도 남정이라면 노약자 할 것 없이 모두가 의병이 아니면 관군, 또는 좌․우의 수군에 반드시 빠짐없이 소속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의미한다.

동원된 군사들 중에서도 특히 어려움을 겪은 것은 해상군이었다. 육상군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선박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도 전문성이 요구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수군병력이 감소해감에 따라 그 결원을 충원하는 일이 더욱 더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1593~1594년에는 연해지역 곳곳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면서 한산도의 수군들 중에 8,9할이 질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때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병력손실을 우려하여 수군소속의 각 고을 관리들로 하여금 관내 백성들을 잡아서 수군으로 충당케 하였다. 또 휘하의 장수들을 연해지역의 시장에 파견, 장삿꾼들을 잡아들여 수군병력으로 충원케 하니 이로부터 연해지역에는 시장이 없어지고 촌락이 텅텅 비어버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1594년 정월, 전라좌의병의 성군에 참여했던 보성출신의 선비 박광전이 왕세자 광해군에게 올린 상언을 통하여 당시 호남지방의 실정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자.

지난 해에 흉년이 들어 모든 곡식의 수확이 전보다 반이나 절감되었는데 각종 요역의 무거움은 도리어 열 배나 되어 해를 넘기기 전에 집들이 벌써 텅텅 비어버렸습니다. 지금 보는 바에 의하면 집에 조석의 끼니를 잇지 못한 사람들이 반이 넘는데, 영남지방에 양식 운반하는 값과 수군의 군량미가 매월 쌀로 7,8석이나 되어 그것을 내고나면 목숨을 이어갈 수가 없으므로 도망하고 유리하는 백성들이 잇달아 발생하여 촌락이 모두 비게 되고, 서로 안고 붙들고 가는 이들이 길에 가득하였을 뿐 아니라 굶어죽은 시체들이 겹쳐 쌓여 있어 그 참혹함이 차마 눈뜨고는 볼수가 없습니다. 조금 잘 사는 집도 사사로 감춰둔 것이 적발되면 관청에 모두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되나, 관청에서도 수합해야 할 양을 1/3 밖에 채우지를 못하여 공사간이 모두 함께 곤궁하니 식구들은 어찌하며 군량수납과 종자벼는 또 어찌할 것입니까. 이것으로써 말한다면 적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나라의 근본인 백성들이 먼저 뽑혀지고 만 것이니…살아남은 백성은 무엇으로 먹을 것이며, 적을 막아야 할 군사들은 무엇으로 군량을 이어갈 것이며, 백성이 어찌 백성이 될 것이며 나라가 어찌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위의 글을 통하여 임진왜란중 병참기지가 되어 있었던 전라도민들이 겪은 고초가 어느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도,󰡒8도 가운데 전라도만이 다소 보전되어 있어 군량이 모두 이 도에서 나온다.󰡓라고 하였지만, 전국 각처의 전쟁터에서 소요되는 군량의 대부분을 호남지방에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그 어려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연해지역의 경우에는 수륙교침의 양면부담을 지고 있었으니 순천 광양 낙안 흥양 등지에서는 군량 이외에 각종 잡부담까지 부과되고 있어 이 지역의 민생은 더욱 비참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특히 어려워진 것은 수군의 군량난을 해결하는 문제였다. 농민들이 수륙의 각 전장에 동원됨에 따라 농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 그 원인이 있었지만, 격군의 군량조달조차 불가능해진 수군의 경우 전선을 운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군량해결을 위한 최후의 방법까지 동원되었으니, 해상의 수군들이 직접 어로작업에 나서는 일이었다. 그물을 제작하여 집단적으로 어로작업에 착수한 전라도수군은 주로 한산도해역에서 잡히는 청어를 대량으로 잡아 말린 다음, 군관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곡물류와 교환함으로써 군량의 일부를 충당하였다. 군량사정이 극도로 어렵게 되면서 수군들의 조석 급식량이 2․3홉으로 줄어짐에 따라 굶주림으로 죽어간 군사들이 속출하는 실정이었다.

2) 전라도 근왕의병의 활동성향

임진란중 전라도 근왕의병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이었다. 도성수복을 목표로 북상진군하여 경기도 일원에서 일본군과 싸운 예가 그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경상우도에 赴援하여 영우의병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失地恢復을 목표로 의병전투를 벌린 예였다. 전자는 임진년 5월 중순에 나주에서 일어나 6월 초에 북상, 강화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천일 휘하 나주의병이 대표적인 예였다. 후자는 임진년 7월 제1차 금산전투 직후 보성과 광주에서 각각 봉기하여 경상우도에 진군, 제2차 진주성전투 직전까지 성주 개령지역 수복전투를 계속했던 전라좌 · 우의병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나주의병과 전라좌·우의병은 계사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모두 함께 의병활동의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와 같은 근왕의병의 존재는 개전 초기부터 조정에서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서애 유성룡이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을 때부터,󰡒호남의 충의지사들이 머지않아 봉기할 것󰡓 이라고 예견했던 것이 그것이다. 서애가 말한 ‘호남의 충의지사’가 바로 임진년으로부터 계사년 6월 진주성전투에 이르기까지 의병항쟁을 주도했던 전라도 근왕의병이었던 것이다. 원거리에서 펼쳐진 근왕의병의 작전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향보성 의병전투와는 달리 전장의 지리적 사정에 어두었던 만큼 우선 작전구사가 용이하지 않았으며, 일정한 병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군량조달 역시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작전지역에서 이루어진 현지 군사들과의 합동작전 또한 원활하지 못하였으니 타도에서 펼쳐진 의병활동의 고초가 어떠하였겠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한 예를 임진년 말 전라좌의병의 사례를 통하여 확인해 보도록 하자. 당시 전라좌 ․ 우의병은 곽재우 휘하 영남의병과 함께 조정으로부터 가장 신임이 두터웠던 의병부대로 인정받고 있었다.

임진년 12월 14일, 전라좌의병이 성주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것과 관련하여 임계영이 체찰사에게 올린 전투결과 보고서의 일부를 옮겨보기로 한다.

(12월)10일에 의병장 정인홍 및 관군의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약속하였는데, 그 뒤 4일 만에 우리 군사가 약속과 같이하여 종일토록 죽도록 싸워서 전장과 길바닥이 모두 핏빛이 되었으며 성밑에 쌓인 송장이 언덕과 같았습니다. 우리 군사들이 왜적의 머리를 탐내어 앞다투어 성밑으로 달려갔더니, 궁한 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칼날을 돌려 우리 용사들 10여 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부장 또한 말이 지쳐서 달리지를 못하므로 말에서 내려 걸으면서 용맹을 떨쳐 돌입하여 한 화살에 한 놈씩 죽인 것이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되자, 적이 그제야 물러나 달아났습니다. 흉적들 가운데 죽은 자가 3분의 2는 되었는데 한창 싸울 때에 쏴맞히고 쏴죽인 것은 낱낱이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성주를 수복한 것이 바로 그날이었는데 현지의 모든 장수들이 약속을 배반하고 응원하지 않았으니 그 분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즉 전라좌의병은 전투가 벌어지기 4일 전에 정인홍 휘하의 영우의병 및 현지 관군들과의 합동작전이 약속된 상황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현지의 군사들이 모두 참전을 기피한 가운데 전라좌의병 독력으로 성주승첩을 쟁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지의 의병종사관 정경운의『고대일록』을 보면 이 사건과 관련, 정인홍이 성주목사와 고령현감을 징벌한 사실까지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 겨울에서부터 계사년 봄이 오기 전 한겨울 추위속에서 이어진 천신만고의 의병항쟁, 이것이 임진란시 근왕의병의 전형이었다. 경상우도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했던 전라좌·우의병은 1593년 2월, 마침내 성주 개령지역을 수복하는 데 성공하였다. 난초부터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소굴을 이루고 있던 이 지역을 탕환하는 데 있어서 크게 공헌하였으니, 근왕의병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성과였다. 이후 양군은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임란 의병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임진왜란 의병운동사에서 근왕의 의병정신을 가장 충격적으로 떨친 것은 제2차 진주성전투였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사에 기록된 최대규모의 전투이자 최대의 격전으로서 한국의병전투사사상 최대의 희생을 치른 의병항쟁이었다. 나주출신 의병장 김천일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전투의 수성군은 그 주도층이 호남출신 의병지도자들이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년의 패전을 설욕한 후, 반드시 곡창 호남을 차지하겠다는 목표하에 9만 3천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총력전을 펼쳤다. 반면에 근왕의병이 주축을 이룬 수성군은 불과 1만여의 병력으로 밤낮 9일간에 걸친 1백여 회전의 악전고투를 감당하였다.

당시 진주성 주위에는 관군과 명군 그리고 향보의병이 모두 가까운 지역에 주둔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원군으로 와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연일 장마비까지 쏟아져 내려 낡은 고성을 무너뜨려 놓았다. 결국 성이 함락되던 날은 의병의 화살과 칼날마저 남김없이 다한 날이었다 하니 그 처절함이야 말로 어떤 설명이 가당했겠는가. 결국 성은 함락되고 수성군의 주축을 이룬 의병지도자 대부분이 순절하였다. 그러나 수성군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희생은 곧 곡창 호남을 보존할 수 있게 한 전략상의 승인으로 작용되었기 때문이다. 침략군의 궁극적인 목표가 진주성을 장악한 후 호남지방을 공략하는 것이었지만, 호남공격은 처음부터 좌절되고 말았다. 열흘 동안 계속된 혈전에서 입은 막대한 전력손실은 더 이상의 접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시작단계에서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진주성에서 치른 근왕의병이 치른 희생의 대가가 이와 같이 고귀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의병을 힐책한 자들이 없지 않았고 또 전쟁을 피해 퇴군한 자들이 많았으니, 이에 대해서는 명나라 장수 오종도가 의병장 김천일을 애도하여 남긴 다음과 같은 글 속에서 그들의 행동과 의병의 구국정신을 잘 비교해 주고 있다.

나랏일을 그르쳐 임금을 피란하게 하고, 군사를 거느리고도 구원하지 않아 성읍을 잿더미 되게 하고서도 부끄러움이 없이 여전히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비록 살아 있을지라도 어찌 의병장의 죽음만 같으리오.

이와 같이 근왕의병의 활동은 처음부터 많은 희생을 전제한 것이었고, 그것이 또한 근왕의병의 이념이자 행동양식이었다. 사실 의병의 전력은 뛰어난 전쟁능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결사구국하려 한 정신전력에 있었고, 때로는 이기기 어려운 싸움인 줄 알면서도 한사코 관군 앞에 서서 싸운 까닭도 온나라 백성들에게 전란극복의 의지를 감발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호남의 의병지도층 인사들이 모두 선비 유생층의 문사들이면서도 스스로 전란극복의 주역을 자임하였고, 따라서 그들이 평생 신봉해온 충의윤리를 의병전투의 현장에서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3) 전라좌수군과 결합된 해상의병의 활약

조선왕조는 개전초 육전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사실상 관군이 없었고, 이로 인해 민병인 의병이 정규군의 역할을 대행했던 실정이다. 육상군의 실정이 그러하였듯이 해상군의 경우에도 정규군의 기능이 발휘될 수는 없었다. 난전에 중앙정부가 육상방위에 대하여는 중시하였지만 海防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사실을 보면, 수군의 실태에 대해서도 짐작이 가는 것이다. 특히 작전 기능상 육상군과는 큰 차이가 있었던 해상군의 경우에 기본적으로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선박을 다루지 못하는 군사는 거기에 소속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해전에 참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므로 수군병력의 인적 자원은 그 만큼 제한되어 있어 선박에 익숙한 연해지역 주민들만이 수군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난전부터 軍政不實에 기인하여 제대로 정규군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전라도수군의 경우에 해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장 두가지 조치가 선행되어야 했다. 하나는 행정력을 동원하여 군적에 오른 군역 대상자를 징집하여 정규군을 확보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연해지역 사민들이 자발적으로 해전에 참전하거나 후방지원에 참여케 하여 수군병력을 보강하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임란 1년전 전라좌수영에 부임했을 때 바로 착수했던 것이 첫 번째 조치였고, 전쟁이 발발하여 해전이 시작된 후에 취해진 것이 두 번째의 조치였었다. 임란 초기에 전라좌수군이 해전을 주도하여 거듭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문제는 순군부대에 자원참전했거나 후방지원의 활동이 있었다면 그것이 모두 의병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우리는 관심을 갖지 못해왔을 뿐이다. 그리고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군의 병력실체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채 주로 수군지휘부의 전쟁능력만을 강조해왔다. 그리하여 임란의병은 육상에만 존재한 것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나 󰡔난중일기󰡕를 통하여 많은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임진왜란시 전라도 수군과 결합하여 군사행동을 같이했던 해상의병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임란 초기 조선수군의 주력이었던 전라좌수군과 기본적인 해상전력에 대해서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전라좌수군의 편제에는 먼저 전라좌수영 관내인 순천도호부 · 보성군 · 낙안군 · 광양현 · 흥양현(고흥) 등 다섯 고을에 소속된 수군들이 있었다. 아울러 전라좌수영 관내에는 전통적인 수군진으로서 5개진포가 있었으니, 사도진(흥양) ․ 여도진(흥양) ․ 발포진(흥양) ․ 녹도진(흥양) ․ 방답진(돌산) 등 五浦의 수군들이 따로 있었다. 다시 말하면 임진왜란시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는 5관 5포의 수군, 즉 10개 수군부대가 존재하였다. 그리고 5관의 수군들은 각 고을의 수령들이 지휘통솔하였으며, 5포의 수군들은 그들의 첨사 또는 만호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었다. 다시 말하면 5관 5포의 지방관 및 첨사 ․ 만호들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총수로 한 각 단위부대의 지휘관들이었다. 전라좌수군의 군사조직은 전라좌도 연해지역의 총동원체제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소속된 수군이 임진왜란 해전에 동원됨으로써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군사동원체제 특유의 몇 가지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전시 연해지역의 행정 및 군사권을 수군절도사가 모두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군령이 일원화되어 강력한 지휘통솔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이순신의『난중일기』나『임진장초』가운데서 관련기록들을 쉽게 확인할 수가 있다.

둘째는 실전의 전투요원인 수군들이 평소 바다와 선박을 알고 또 여기에 익숙한 연해지역민들이란 점에서 해상작전이 그 만큼 원활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들 대부분이 모두 가까운 지역주민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육상군과는 달리 상호간에 강한 결속력을 지녔다는 점이다.

셋째는 해안지역이란 지역적 특수성에 따라 토착민들 가운데 해상전투에 전문성을 띈 특수군이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전라좌수군의 사상자들 가운데 鮑作 ․ 土兵 등의 이름을 가진 군사들이 바로 그 예이다. 이들에 대하여는 임란초기 이순신이󰡒장건하고 활 잘쏠 뿐 아니라 선박에 익숙한 군사들󰡓임을 강조하였을 만큼 실전을 통해 강인한 전투력을 보여준 해전의 용사들이었다.

이와 같은 수군제도의 특수성과는 또 다른 요인으로서, 임란 초기 해전시 전라좌수군이 연전연승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군사력이 있었다. 전라도 연해지역에서 이순신 휘하에 자진종군했던 해상의병의 활동이 그것이다. 이들은 임진년 8,9월 사이에 순천부를 중심으로 전라좌도 연해지역(현재의 동부전남지역)에서 자발적으로 뛰어든 다양한 신분계층의 군사들이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관내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직접 모집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전직관료 ․ 무과출신 ․ 유생 ․ 승려층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가까운 도서지역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인사들도 있었다. 이들 해상의병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에 들어가 직접 전선에 탑승하여 해상전투에 참전하였을 뿐 아니라 연해지역 요해처를 파수하기도 하고, 전라좌수영을 방위하거나 수륙간을 왕래하면서 군량보급 등의 후방지원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때로는 자발적으로 이순신의 군관이 되어 전라좌수사를 보좌하면서, 전라좌수영 관내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이순신의 모친을 보호하는 등 다각적인 면에서 임란 해전을 협찬하였다. 해상의병의 활약에 대하여는 이순신이 선조께 올린 다음의 장계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수군부대에 자원해온 의병장 순천교생 성응지와 의승장 守仁 ․ 義能 등은 이번 난리통에 자신들의 편안함을 돌보지 않고 의기를 격발하여 군사를 모아 각기 수백여명 씩을 인솔해와 나라의 수치를 씻으려 함이 참으로 가상합니다. 해상에 진친 뒤 군량을 스스로 마련하여 두루 공급하면서 어렵게 이어 댄 노고의 정상은 관군(수군)보다 배나 더함이 있었는데 아직도 그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고 더욱 힘쓰고 있습니다. 지난날 전투에서 적을 침에 있어서도 뚜렷한 전공을 남겼으며 여전히 나라를 위한 충의심에 변함이 없으니 극히 가상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응지와 수인 ․ 의능 등은 조정이 특별히 표창하여 뒷사람들로 하여금 격발케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순천에 거주하는 전만호 이원남이 의병을 모집하여 거느리고 전선을 타고 와서 수군부대에 소속하기를 청함으로 곧 바로 장수로 배정시켜 적을 토벌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뒤에 순천교생 출신의 의병장 성응지와 의승장 수인과 의능 등의 활동에 한정하여 그들의 포상을 요청한 글 가운데 일부이므로 해상의병 전체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러나 해전에 자원하여 스스로 군량을 마련하여 떨친 그들의 의기와 전공이 정규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는 지적만으로도 전라좌수군이 초기해전에서 제해권을 장악함에 있어서 해상의병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라좌수영 관할구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해상의병은 전라좌수군과 결합, 해전에 자원한 뒤 군량을 스스로 마련해 가면서 전투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떨친 의기와 전공 또한 정규군에 못지 않았다. 해상의병이 수군과의 연합작전에 의해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예로서 1593년 2월에 있었던 웅천상륙작전을 들 수 있다. 이 해전에서 순천 의병장 성응지와 송광사의 의승장 삼혜 및 흥양출신 의승장 의능 등의 군사들은 10여척의 전선에 분승한 뒤 동쪽으로는 안골포에, 서쪽으로는 제포에 상륙하여 적을 유인하면서 교란작전을 펼쳤다. 이 때 적의 수군이 수륙으로부터 협공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의병과 이순신 휘하 수군이 합세하여 정면공격을 가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해상의병의 활동 가운데서도 특히 의병장 성응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는 용호장이란 군호를 갖고서 순천 광양 한산도 등지의 수륙간을 왕래하면서 종횡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1594년 8월, 왜란의 종식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순신이 매우 애석해 했었다. 그리고 1592년 9월, 부산포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순천감목관 趙玎의 활약상도 눈에 띄게 현저하였으니, 이에 대하여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다시 선조께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그 동안 4차에 걸쳐 출전하여 10회의 접전끝에 모두 다 승리하였으나 수군장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포해전 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전일의 전투에서는 적선의 숫자가 많아도 70여척에 불과했는데 이번은 대적의 소굴속에 포진한 4백여척 속으로 뛰어들어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종일토록 공격, 적선 1백여척을 깨뜨림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머리를 들지 못하고 겁내 떨게 하였습니다. ···(중략)…그 중에서도 순천감목관 조정은 비분강개하여 자력으로 전선을 마련하여 자신의 종들과 목동들을 거느리고 자원출전하여 이 해전에 참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왜적을 다수 쏴죽이고 적의 군수품도 다량 노획해왔는데 이 사실을 중위장 권준이 두세 차례씩 보고해왔을 뿐 아니라 본관이 보는 바도 그와 같았습니다.

위의 장계에서 이순신이 강조하여 국왕께 보고한 대로 순천출신 조정은 전선까지 스스로 마련, 해전에 자원참전하여 뚜렷한 전공을 세운 대표적인 예로 꼽혔다.

전라좌수영 관내의 해상의병 활동에서는 부자 ․ 형제와 숙질 등 일가 문중의 인사들이 집단적으로 전라좌수군의 지원군으로 활약했거나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적극 협찬했던 사례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들은 군량과 전선운용에 필요한 물자들을 스스로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모친을 수영에서 가까운 곳에 모셔 봉양하는 등 다양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군인 정규수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실전의 전력강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어 수군승첩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정유재란시 명량해전에서 보인 피란민들의 활동상 또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향보성 해상의병의 한 유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전쟁능력을 상실한 조선수군을 대신하여 연해지역의 士民들이 피란선단을 동원, 해상의병으로 참전한 그들이 일본군의 서침을 저지하고 대첩을 거둔 좋은 예였다. 따라서 해상의병의 활약은 조선군의 해상권 장악을 뒷받침하여 임란극복을 가능케 해준 중요한 사례로서 그들의 역할은 육상의 의병활동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4. 맺음말

지금까지 임란 의병운동의 배경과 의병의 유형에 대하여 간략히 살려본 다음, 호남의병의 특성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임진란시의 호남의병이란 육해상에서 동시에 일어난 근왕의병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1592년 6월 이후 1593년 6월에 이르기까지 국가보존을 목표로 하는 의병활동을 주로 경기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위에서 본대로 전라도 근왕의병의 특성은 첫째, 8도 가운데 유일하게 육해상에서 모두 봉기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도경을 벗어난 원거리에서 작전이 계속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군량조달이나 지리적 사정 등 작전수행이 그 만큼 어려운 악조건에서 전개되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의병활동 과정에서 향보의병에 비하여 보다 많은 희생을 치루었다는 점을 세 번째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고경명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장윤 등 유독 호남출신의 의병지도자들이 전투현장에서 대부분 순절했던 사실만으로도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끝으로 근왕의병의 속성이 그러하였지만, 호남의병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또 하나가 繼起的인 의병활동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고경명의 의병운동 이후 전라우의병과 고종후의 복수의병이 계속 일어났고, 최경회의 진주성 순절 이후 최경장의 繼義兵軍이 그 활동을 이어갔으며,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거의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순국한 후에도 다시 의병운동이 이어져 광주의 김덕령군이 성군했던 사실들이 모두 그것을 말해준다.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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