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처절했던 남원성의 혈전 - 최종장.남원성의 최후 1597년 8월 16일, 그리고....

구름위 2012. 10. 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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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낮에 시작된 전투는 16일 새벽까지 진행 되었습니다

16일 새벽부터 남원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왜군의 공세는 더욱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동이 터올때쯤 명나라 천총 장표가 전사하고 그가 지키던 남문이 무너졌습니다.

왜군은 남문으로 봇물터지듯 몰려들었고

다른 문을 방어하던 명나라군과 북문을 방어하던 조선군이 막기 위해 달려갔지만 

남문을 봉쇄하는 건 역부족이었습니다. 

 

왜군은 양원에게 탈출하라고 전해줬고 양원은 부하 50명과 접반사 정기원을 데리고 동문을 통해 탈출했습니다.

양원이 명나라군과 백성들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을 본 백성들은 울부짓으며

조선군이 지키던 북문을 향해 몰려갔고 새벽이후로 왜군이 별다른 공격을 하지 않던 북문의 조선군들은

백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성문을 열어줬습니다.

 

이때 북문의 수비대장이던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에게 양원이 보낸 명나라 군관이 찾아왔습니다

 

명나라 군관 : 절도사 나으리, 부총병께서 동문을 통해 탈출하라고 전해오셧습니다.

장수들은 동문으로 탈출하면 왜적들이 그냥 보내주기로 약조했다 합니다.

부총병께서는 벌써 동문으로 탈출하셧사옵니다.

 

이복남 : 내가 탈출하면 성안에 남아있는 백성들은 어쩐단 말인가!

나는 남아서 백성들이 탈출할 시간을 벌 것이니 불가하다고 아뢰게나

 

그리고 잠시후 이복남의 몸종도 남원에 있던 이복남의 7살난 셋째아들 이경보를 데리고 이복남을 찾아 왔습니다

 

몸종 : 나으리 이제 이 성은 틀렸습니다. 도련님과 함께 탈출하시지요

 

이복남 : 나는 오늘 죽음으로 나라의 은혜를 갚을 것이다. 너희들이나 탈출하도록 하여라.

 

몸종 : 나으리, 그럼 마님과 아드님들께는 제가 뭐라 전하겠습니까?

 

이복남: (자신의 앞니를 뽑으며)가족들에게 이 이빨을 전해주고

나는 여기서 왜적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전해다오.'

(아들을 보며)경보야, 아비는 여기서 죽겠지만 너는 꼭 살아남거라. 꼭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이복남은 남아있는 조선군을 수습하여 식량창고에 불을 질러 왜군이 사용할 수 없도록 한 후

주변에 장작을 쌓고 북문으로 몰려오는 왜군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남원성 전투 기록화

 

이때 이것을 본 명나라 기병대는 탈출하기 위해 일제히 북문으로 달려갔고

역시 탈출하려 몰려드는 조선백성들을 짓밟으며 북문을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북문을 통해 이경복과 함께 탈출하던 몸종은 여기에 휘말려 이경복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왜군이 북문을 비워둔 것은 사실 함정이었습니다.

앞서 달려 나가던 명나라 기병대는 곧 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왜군 복병에게 포위당했고

전의를 상실한체 말에서 내려 목숨을 구걸하다가 모두 살해 당했습니다.

또한 북문으로 탈출하던 대부분의 백성들도 왜군의 복병들에게 목숨을 잃었고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복남은 산성별장 신호와 함께 북문으로 향하는 왜군에 맞서 싸웠는데

신호는 화살이 떨어지자 칼을 뽑아들고 왜군무리에 뛰어들어 싸우다 최후를 맞았으며

주위의 모든 조선군이 죽자 이복남은 쌓아둔 장작하나에 불을 붙인체 들고 화약고로 걸어 들어갔고

잠시후 남원성에서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이 남원성 전투에서 명나라군장수 이신방,장표,모승선이 전사했고

조선군장수 이복남,김경로,신호,임현,이덕회,이원춘이 모두 전사했습니다

접반사 정기원은 양호와 함께 탈출했으나 결국 한양까지 이르지는 못했는데

양호의 말로는 말에 익숙하지 못해 자꾸 떨어지다가 어느순간 되니 없더라고 했으나 진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현재 교토시에 위치한 코무덤

 

이렇게 수비군이 전멸하고 저항이 잦아들자 왜군은 본격적으로 "할당량"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남아있는 백성들을 학살하고 코를 베어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때 남원성에서 수집하여 일본으로 보내진 코는 총 3726개 였습니다.

 

그리고 이복남의 아들 이경보는 수풀속에 숨어있다 며칠후 왜 우군에게 발각되어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경보가 잡혀온 것을 본 조선인 포로들은 이경보를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본 왜군은 그 아이가 누군지 물었습니다

 

"저 분이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나으리의 아드님이십니다"

 

그 보고는 곧 왜 우군의 총대장이던 모리 히데모토에게 올라갔습니다.

 

모리 히데모토 : 그 아이가 그 용감한 조선 병마절도사의 아들이란 말이냐!

그 아이를 본국으로 보내라! 호랑이의 자식이 개일리는 없는 법

내가 그 아이를 돌보겠노라.

 

그렇게 이경보는 아버지의 원수에게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남원성이 함락되는 것을 인근 산위에서 지켜본 조경남은

왜군이 곧 주위를 수색할 것이란 생각에 불안에 떨며 가족들을 데리고 더 멀리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후....

 

남원성 함락 소식이 조정에 전해진 직후 선조는 명나라군의 명복을 비는 제를 지내게 하고

명나라 장수들에게 조의를 표하는등 굽신굽신 하는사이

정작 이복남의 가족은 함경도에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이복남의 고향은 강원도였습니다)

결국 굶주림을 못이긴 가족은 조정에 도움을 요청했고

장계가 올라오자 선조는 쿨하게(?) "도와줄 수 있는지 알아보라"며 화제를 접습니다.

 

왜군은 남원을 함락시킨데 이어 전주를 거쳐 북상하여 직산에 도달하는데

 

9월 7일 직산에서 해생이 이끄는 4000의 명나라 기병과 구로다 나가마사의 5000의 왜군이 격돌합니다.

명나라군이 이겼다고 선조는 재조지은이 어쩌고 저쩌고 굽신굽신 하지만

이겼다고 하기 뻘쭘한게 서로 소모전만 한터라 명나라군도 왜군 못지않게 피해를 입었다는 거였죠...

하지만 명군이 만만치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왜군측은 일단 항구로 이동해 보급을 받은후 다시 치고 올라가기로 합니다만.....

 

9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된지 딱 1달후

이순신 장군은 명량에서 겨우 12척의 전함으로 133척의 왜군함대를 격파합니다.

당항포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죽은 형 구루지마 미치유키에 이어

이 전투에서 선봉을 맡은 그의 동생인 왜장 구루지마 미치후사도 목이 베여 메달렸고

이로서 일본에서 해적가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구루지마 가문은 멸문했습니다. 

또한 히데요시가 조선수군의 최후를 직접보고 보고하라고 보낸

모리 다카마사는 타고 있던 배가 격침되면서 물에 빠졋다가 겨우 구출되었으며

최후방에 있던 수군 총대장 도도 다카토라마저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을 정도의 대패였습니다.

 

이렇게 서해의 해상보급로가 이순신에 의해 다시 차단되자 왜군은 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해안지역에 왜성을 쌓고 종전때까지 더이상 공세를 펼치지 못한체 방어만 하게 되었습니다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남긴 저작 "난중잡록"

 

남원성 함락 36일후인 1597년 9월 22일

남원에서 도망쳤던 서생 조경남은 친구 한명과 종 2명을 데리고 의병을 일으켜 정유재란 최초의 의병장이 되었으며

불우치,활개미고개,금산과 함양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며 승승장구하여

이후 대규모의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후 벼슬을 재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은거생활하며 자신의 일기를 모은 "난중잡록"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남원성 함락 약 3개월 후

도망친 명나라 부총병 양호는 이후 1차 울산성전투에 참가했다 대패한 후 승리로 보고했다가 발각되어 파면됩니다.

이후 1619년 명나라에 후금이 쳐들어오자 다시 등용되었으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후 처형당했습니다.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소재 사적 272호 만인의총

 

전쟁이 끝난 직후 조선군,명군,남원백성 1만여명의 시신을 수습해 합장했으며 이곳을 만인의총 이라고 불렀고

광해군 4년(1612년) 충렬사를 지어 이들을 기렸습니다.

이후 일제는 제단을 파괴하고 제사를 금지하며 사원의 재산을 압류하는등 탄압했으나

광복후 제사를 다시 지내고 정화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원성 함락에서 385년이 지난 후인 1982년

 

1982년 7월 28일 경향신문 기사

 

자신의 성씨가 리노이에(李家)라는 이상한 성씨인데 의문을 가진

전 아사히신문 국장이자 역사학자 겸 문학가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씨는 자신의 가계를 추적한 끝에

자신의 조상이 정유재란 당시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로

남원에서 잡혀 일본에 끌려온 이경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조사결과 이경복은 일본에 끌려가 리노이에(李家)라는 성으로 살았는데

모리 히데모토의 가신으로 사랑받아 모리 히데모토가 자신의 이름의 모토(元)와 500석의 봉록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경복은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 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가계를 알게된 마사후미씨는 가족을 대동하고 우계 이씨 사당과 만인총을 참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리노이에(李家)씨는 경주 이씨(우계 이씨)의 해외분파인 장주 이씨로 인정 받고 뿌리를 되찾게 되었습니다

 

 

 

자료출처 :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그리고 특히 난중잡록

                거기에 약간의 양념같은 극화가 섞여 있습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꼬마니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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