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임진왜란당시 인물들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1594~1595)

구름위 2012. 10. 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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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1595년까지의 사관들의 인물논평입니다.

한참 조명일 삼국간 화친협상이 오고가던때죠

대체적으로 사관들은 화친에 지극히 부정적이었으며

전쟁을 통해 건너온 왜적을 마지막 하나까지 없에야하며

이전에 조선백성을 해친 사실이 있는 항왜들 역시 처단해야하며

그런일이 없는 항왜도 공을 세운다 하더라도 벼슬을 줘선 안된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던걸로 보입니다. 

 

 

 

1.김천일

 

사관은 논한다

김천일은 도량이 좁고 전략이 없었지만 그 마음과 뜻은 대단하고 고귀했다.

나주의 한미한 신분이던 김천일은 왜적이 쳐들어와 임금이 파천하자 눈물을 흘리며 의병을 일으켰고

전라순찰사 이광의 부대와 합류하여 북상하였으나 용인전투에서 패하여 수만군이 도망치기 바쁠때

김천일의 부대만은 전혀 동요되지않고 앞으로 나아갔으니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얻었는지 알 수 있겠다.

 

그후에도 왜적을 격파하며 공을 세웠으나 원래 병약한데다 왜적과 싸우며 근심과 피로로 병이 생겨

미음만 먹으며 밤에는 앉아서 졸았지만 나라를 위한 마음만은 게으른적이 없었고

임금의 어려운 형편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어린시절부터 정철과 친구였고 정철의 아들은 그의 사위가 되어 교분이 두터웠지만

그렇게 사이가 좋지는 못했는데 강화도시절 천일이 정철을 찾아가 왜적을 물리칠 방법을 자문받으러 갔을때

정철은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천일은 그걸 보고 목놓아 통곡하면서

"지금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어떻게 이럴수가 있는가?"라고 하니 정철이 불쾌해하며 그만두었는데

이후 정철은 남들과 이야기할때 반드시 김천일을 조롱하며

"내가 바보 일곱을 아는데 그중에 첫째가 김천일이다" 라고 하였다.

 

왜적이 진주로 쳐들어오자 심유경은 왜적과 교섭한후

"왜군의 대군이 몰려와 성을 지키기 어려우니 성을 비워주면 목숨을 부지할수 있을 것" 이라고 알려오자

권율,고언백등은 군대를 물려 물러났으나

김천일,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복수장 고종후등은 향을 피우며 진주성을 죽음으로서 지킬 것을 맹세했다.

 

이어 쳐들어온 왜의 10만대군에 맞서 8일밤 9일낮을 쉬지않고 싸우며 성을 지켜내었으나

불행히도 폭우로 성곽이 무너지고 뛰어난 장수이던 황진이 적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결국 성은 9일째되는 날 무너졌다.

김천일은 병사들에게

"이제 우리가 죽는건 피할수 없으니 한놈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죽어라.

이러한때 싸우다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고 구차스럽게 살려는 것은 치욕이 된다.

우리들은 지금 죽는 것도 사실 너무 늦은 것이다.

다만 나는 의리상 적의 손에 죽을순 없다"

라고 하고 그 아들 상건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살아서는 의로운 장수요 죽어서는 충신이니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라며 사후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그렇게 평생동안 변하지 않는 충의를 보인건 정말 대단하다 할 수 있다

 

 

2.유성룡

 

당시 사관들에게 유성룡은 평이 안좋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원익,최홍원,심수경같은 요즘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재상들이 사관들에게 호평을 받는군요

 

사관은 논한다

성룡은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선비로의 이름이 있었으나

조정에 선지 수십년동안 재상으로서의 업적이 특별히 볼만한게 없다

 

난을 당한 후로는 백성을 다독이고 교육하여 왜적을 물리치려하지않고 중국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만 일삼았으며

적을 쳐서 원수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회유책으로 적을 물리칠 계책을 삼았다.

과거의 이른바 회유책이라면 유리한 상황에서 적이 와서 요청할때 허락하는 것이지

지금은 한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적에게 불리한 상황에 몰린체 화친을 구걸하는 꼴이 아닌가?

 

조정에서는 화친이 그르다면서 화친을 주장하지 않는 것처럼 숨기고

나아가서는 임금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고 후세를 속이려 하였다.

그러나 임금을 속이더라도 어떻게 세상의 눈을 속일수 있을것이며

혹여 세상의 눈을 속이더라도 어찌 역사를 속일수 있을 것인가?

 

 

3.정철(2)

정철은 뭐...간신의 대부급으로 취급받는군요...

 

사관은 논한다.

정철은 성격이 음흉하고 독하여 남의 재앙을 좋아하고 착한 선비를 죽였으니 그 마음의 독함이 심하다하겠다.

그 죄는 엄청나게 크지만 벌은 귀양보내는데 그쳐 독사의 독만을 키웠을 뿐이다.

왜적이 쳐들어온후 그 잘못을 용서해주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떠들어대기만 하며 소인배들을 불러모아 관직을 보전하고 제집에서 늙어죽었다

 

이런 간신이 조정에 있기 때문에 비록 공공의 의견을 말하려는 이가 있어도 소인배들의 견제를 받았다.

요사스런말로 간신들을 옹호하고 잘못된 말을 고집해 사람들을 의혹에 빠뜨리고 여론의 신장을 막았다

이는 그를 제대로 벌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간신을 제거할때는 농부가 잡초제거하듯 해야한다"라는 옜말이 있듯이 잡초를 제거하고 곡식을 보호하려면

잡초의 뿌리를 뽑아야 선한자들이 나올수 있을것이니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경계해야 할것이다.

 

4.김성일

김성일은 안동사람으로 강직하고 절개가 있었다.

벼슬할때는 과감하게 직간하였고 통신사일행으로 일본에 갔을때 왜인의 우리나라로 보내는 편지에 교만한 말이 있자

꾸짓고 받지 않아서 왜인들이 두려워하여 편지의 내용을 고쳐서 줘서 보냈다.

귀국후에도 당시의 병폐들에 대해 지적하며 직간하였고 정철이 최영경을 억울하게 모함해서 죽이자

아무도 두려워 말을 못할때 혼자 나서서 최영경을 변명하여 복권되도록 했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의 병마절도사로 영남이 무너질때 웅천에서 왜적을 맞아 선봉장을 베어 공을 세웠는데

이때 이전 통신사로 다녀와 "왜적은 두려워할게 못된다"라고 했던 발언때문에 잡아다 국문하도록 했던걸 취소시켰다.

그리고 초유사로 임명하자 영남으로 돌아가 동지를 불러모으고 의병을 규합하여 16~17개 읍을 수복했다.

그가 쓴 격문은 매우 뛰어나 어리석은 남녀들도 들으면 눈물이 를릴만했다

우도 순찰사로 임명되고 얼마후 병으로 전장에서 죽으니 이 소식을 들은 자중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출처 : 한류열풍 사랑
글쓴이 : 꼬마니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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