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임진전란도

구름위 2013. 7. 2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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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부산전투 '한눈에 잡히게' 묘사

 

 

 임진왜란이 끝나고 240년이 지난 1834년에 화원 이시눌이 그린 '임진전란도'. 부산 다대포진과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을 담고 있다.

 

규장각에는 화폭의 형태로 제작된 대형 그림들이 몇 점 소장되어 있다. 주로 국가적 사업에 의해 제작된 기록화이다. 이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19세기에 제작된 '임진전란도'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240년이 지난 그때 왜 이런 그림을 만들었을까?


▲1592년 4월, 절박했던 부산진과 동래부의 전투 장면 묘사

 

'임진전란도'는 1834년(순조 34년)에 화사(畵師:화원을 높여 부르는 용어) 이시눌(李時訥)이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다대포진의 전투 장면과 주변의 지리적 환경을 묘사한 족자 그림이다. 1축의 족자이며, 비단에 그려져 있다. 그림 자체의 크기는 141(세로)×85.8(가로)cm 정도이며, 족자까지 합하면 172×99cm 크기이다. 그림의 우측 하단에는 '만력임진후이백사십삼년(萬曆壬辰後二百四十參年) 갑오육월일(甲午六月日) 화사(畵師) 본부 군기감관(本府 軍器監官) 李時訥'이라는 관지(款識;낙관 기록)가 적혀 있어서, 1834년 6월에 화원 이시눌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시눌에 대해서는 화원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조선시대 서화가에 대해 정리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나 '조선왕조실록' 등에 이시눌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에서 담고 있는 전투는 근경(近景)의 다대포진과 원경(遠景)의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장면이다. 이 중에서 화면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원경의 부산진 전투다. 임진왜란의 전투 상황을 다룬 그림으로는 동래부 소속의 화원 변박(卞璞)이 1760년에 역시 전대의 작품을 모사하여 그린 것으로 보이는 '부산진순절도'와 '동래부순절도'가 있는데, 구성 방식이나 색채의 선택 등을 볼 때 이시눌이 이 그림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본 그림은 두 성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전투 상황을 묘사했으며, 근경 근처의 해안지형을 많이 넣은 점에서는 변박의 모사본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임진전란도' 전체의 그림은 위에서 내려다 본 것처럼 부감법(俯瞰法)을 써서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하였으며, 조선군에 비해 왜군의 수를 훨씬 많이 그려 넣어 군사적으로 조선이 열세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또한 각 인물들은 계급과 역할에 따라 그 크기를 차등화하여 그리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림의 중심부는 부산진과 다대포진을 빽빽이 둘러싼 왜적의 모습과 엄청난 물량의 선박이 전투에 동원된 모습이 치열한 전투상황과 함께 묘사되어 있다. 둥그렇게 쌓은 성의 사방에는 각각 문루(門樓)가 있고 남문에는 '수(帥)' 깃발과 함께 조선의 병사가 밀집해 방어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해안과 연결된 산수의 모습도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그림의 곳곳에 설명을 부기(附記)하여 당시의 상황을 그림과 기록으로 전달해주는 기록화의 성격을 잘 띠고 있다.

 

▲순절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까지 기록

 

그림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근경 왼편에는 다대포진의 전투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성의 사방에는 문루가 있고 왜적과 대치한 남문의 안쪽에는 장수 깃발이 크게 그려져 있다. 조총과 창검을 무기로 몰려 들어오는 왜적에 아군이 힘겹게 대항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대포진의 남쪽에는 몰운대(沒雲臺), 고리도(古里島), 팔경대(八景臺) 등이 그림과 함께 표지되어 있으며, 몰운대가 그려진 아랫부분에는 설명이 부기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몰운대 위에 서 있는 장수는 이순신의 선봉장인 정운(鄭運:1543~1592년) 장군이며 그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정운의 부하임을 알 수 있다.

 

원경의 그림은 부산진 전투로 이 그림의 중심을 이룬다.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는 병선 700여 척을 앞세우고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갑작스러운 왜군의 침공에 부산진에서는 첨사 정발을 중심으로 결사항전하였다. 그림은 이곳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압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문을 사이에 두고 왜적과 아군이 팽팽히 맞선 모습 하며, 성 주변을 빼곡이 둘러싼 왜군들, 지원을 위해 대량의 선박까지 출동시킨 상황 등이 나타나 있다. 남문 밖에는 왜병의 시체가 쌓여 있는 것도 기록하였으며, '帥' 깃발 뒤쪽에는 한 여인이 자결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부기된 설명에 의하면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1553~1592년)의 첩인 애향(愛香)이 패배를 앞두고 자결하는 장면이다. 애향의 자결 모습을 그려넣어 긴박한 상황을 보다 생생히 묘사하는 한편 여인의 정절을 강조하고 있다.

 

'임진전란도'는 주요 상황 그림과 함께 전투에서 순절한 인물들이 후대에 추숭된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을 곳곳의 여백에 배치하고 있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부산진의 함락과 함께 순절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과 그의 첩 애향, 노비 용월 및 함께 순직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을 넣었으며 좌측 상단에는 다대포 첨절제사 윤흥신(?~1592년)과 함께 순절한 사람들의 비석과 제단을 그려넣고 설명을 가하고 있다. 이에 의거하면 '정공단(鄭公壇)'은 1766년에 부산진첨사 이광국(李光國)이 정발이 순절한 곳에 세웠다는 것과 매년 4월 14일에 첨사가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윤공단(尹公壇)'은 첨사 이해문(李海文)이 1765년에 세운 것으로, 윤흥신이 전사한 장소가 다대포진의 연못 터였음이 나타난다.

 

▲19세기까지 이어지는 임진왜란의 기억

 

'임진왜란도'는 기록화 전문 화가인 이시눌의 정밀한 묘사로 인하여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생생한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성의 구조와 군사 배치를 비롯하여 전투에 사용된 무기와 복장, 전함의 구조, 일대의 지리적 정보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전투에 관계된 구체적인 지명, 전투 후에 제단과 비석이 들어선 상황까지 기록하여 전쟁 이후 이 지역이 성역화되어가는 모습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겪은 지 240년이 지난 시점에 이와 같은 그림이 그려진 것에서 19세기에도 임진왜란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기록화의 주요한 소재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전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의 시기가 언제 닥칠지 모름을 항상 경계하게 하고, 위기의 시기에 철저하게 항전했던 충절의 신하를 포상하는 조치를 계속적으로 취한 국가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충의 이념을 기록화를 통해 집약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 자신의 장수를 따라 자결하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여 여성의 정절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는 모습도 주목된다. 이 작품은 유교이념에서 특히 중시했던 충과 정절의 이념을 '임진전란도'라는 기록화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신하와 백성들의 교화에 큰 몫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회화사적인 측면에서는 정밀하게 전투 장면과 인물을 묘사한 것이라든가, 뛰어난 색채 감각 등을 통하여 19세기 화원들에 의해 그려진 기록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진과 동래부에서 최선을 다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을 국가적 차원에서 계속 그리게 한 것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게 하는 한편, 위기의 시기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 전쟁 영웅 행적정리· 홍보 활발

- 정조시대 간행 '이충무공 전서'

    
후기에는 전쟁 영웅에 대한 추숭 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왜란을 승리로 이끈 장군 이순신의 행적을 국가적 차원에서 정리하고 홍보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 정조는 1795년(정조 19년) 왕명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 문헌에 나오는 이순신에 관한 각종 기록과 전쟁 중에 올린 장계(狀啓), 진중(陣中)에서 쓴 일기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책에 수록된 2건의 거북선 그림은 거북선의 크기와 모습을 알려주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규장각 신하 유득공, 이만수가 편찬을 총지휘했으며, 정성을 들인 활자(정유자)와 화려한 표지디자인은 이 책의 품위를 높여주고 있다. 편찬이 완성된 후에는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직접 보관하였다. '이충무공 전서(사진)'의 간행은 이순신이라는 구국 영웅의 행적을 널리 알림으로써,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한편, 혹시라도 생길 전란에도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재탄생하기를 염원한 시대 분위기와도 맞물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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