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대원군 지시로 제작된 459장의 지방지도

구름위 2013. 7. 21. 19:22
728x90

 

조선말 팔도 고을 모습 산수화처럼 그려

 

 

 채색필사본 동래부지도. 121.9×72.5㎝.


전남 해남과 진도 지도의 거북선 모습, 충남 천안의 관아건물에 표시된 태극무늬, 강원도 양양의 설악산 아래 오색리 약수, 경북 선산의 의구총, 전북 남원의 방풍림, 주요 지역마다 표시된 사고(史庫), 태실, 척화비와 사창(社倉).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표시된 자료가 있다. 바로 대원군대인 1872년에 그려진 459장의 지방지도들로서 현재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들 지도는 1876년 개항을 맞이하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기록 필름처럼 느껴진다.

 

◇1872년 지방정보 한눈에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 등 서양 열강과의 잇따른 전투에서 승리한 대원군은 국방 강화의 필요성을 다시금 인식하였다. 전국에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을 하는데 전쟁을 하지 않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척화비를 전국에 세우면서 항전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진 것도 이러한 인식의 발로였다.

 

대원군은 서양의 동점(東漸)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응책을 구상하였다. 관제와 군제의 개편, 군사시설의 확충과 함께 전국 각 지역, 특히 군사시설에 대한 상세하고 정확한 파악을 위하여 각 지방의 읍지 편찬을 명하는가 하면 전국의 지도 제작을 지시하였다. 1871년 전국에 읍지 편찬 작성을 명령한 대원군은 이듬해인 1872년 3월에서 6월에 걸쳐 전국 지방의 지도를 그려 올리게 했는데, 이들 지도 전체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가로 70㎝, 세로 1m 안팎의 대형지도로 제작된 459장의 지도에는 섬, 진 등 국방에 관한 내용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각 군현 마다 특징적인 정보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30여 년 전 조선사회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1872년의 지방지도는 오늘날 지도와는 달리 산수화풍의 회화식으로 그려져 있어 한눈에 아름다운 느낌이 들며 고을 전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지도 제작에는 사물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전문직 화원들의 역할이 컸다. 조선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달리 개인적인 작품보다 지도와 기록화 제작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화원들은 기록을 담는 사진사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지도는 도별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독특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중 가장 회화적으로 그려진 전라도의 지도들은 음양오행 사상에 입각하여 청, 백, 홍, 흑, 황의 색채를 적절하게 조화시켰으며, 예술적 가치도 가장 뛰어나다. 그러나 경기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등의 일부 지도는 체제의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면모를 읽을 수 있다. 물론 각 지방의 정서와 개성이 지도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몇 차례의 수정과 보완을 거쳐 체제를 통일한 전라도 지도와는 달리 지방의 수령들이 중앙 정부의 명령에 의거하여 급하게 지도를 제작한 흔적이 역력하다.

    

◇대원군의 정책 반영 대축적 지도


 1872년에 제작된 군현지도 중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남원부지도. 아름다운 색상과 정교한 필체, 상세한 내용을 바탕으로 당시 고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위쪽이 동쪽. 채색필사본, 103×83㎝.


1872년 지방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지도책이 아닌 낱장 지도로서, 전국 대부분의 지방을 포함하고 있는 대축척 대형지도라는 점이다. 각 지도의 크기는 가로 70~90㎝, 세로 100~120㎝ 정도로, 지역 마다 크기가 조금씩 다르다. 일정한 축적이 적용된 오늘날의 측량지도와 같이 정확한 지도는 아니지만, 지도의 내용은 매우 상세하고 정밀하며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산과 하천, 도로, 고개, 성곽, 포구, 능원(陵園), 사찰, 서원, 향교, 누정(樓亭), 면리, 역, 점(店), 시장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의 모습을 다른 어느 지방지도보다도 상세하게 담았다. 대원군대의 국가정책을 반영하듯 사창이 전국에 그려진 것도 흥미롭다. 대원군은 고리대금업으로 전락한 환곡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전국에 사창을 설립할 것을 지시하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를 지도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1872년 지도에는 대원군대 강력하게 추진된 해방(海防)정책이 특히나 강조되어 있다.

 

각 지방에 소속된 영(營), 진보(鎭堡), 목장, 산성 등 군사 관련 시설을 별도로 그린 지도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국경 방어와 관련된 진보 지도의 경우 경기도 2장, 전라도 28장, 경상도 41장, 황해도 19장, 평안도 45장, 강원도 2장 등 총 139장에 달한다. 전체 지도의 30% 정도가 국방지도라는 점은, 전국에 그려진 척화비와 함께 대원군대의 대외정책 방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에 담겨진 것들

 

오늘날 부산광역시를 포괄하는 동래부 지도에는 국방을 중시했던 당대의 분위기가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읍치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축조된 읍성이 그려져 있는데 익성(翼城), 옹성(甕城)으로 이루어진 모습과 성을 둘러가면서 세워진 망루의 모습이 성내의 관아건물과 함께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조선시대 동래부는 왜적 방어의 최전방 기지였다. 읍성을 중심으로 하여 해안지역에 좌수영, 부산진, 다대진 등의 진영을 그렸으며, 북쪽에는 금정산성의 모습도 나타난다. 남쪽의 절영도 근처에는 왜인들과 교역을 했던 왜관이 그려져 있다. 동래부 전체가 동남해안 방어의 중심지임이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도 각 지방의 지도에 담긴 내용은 다양하다. 우선 읍성 안의 관아 배치, 산과 하천, 도로, 시장, 고적, 봉수, 조선시대 농협의 기능을 했던 사창 등은 거의 모든 고을에 표시되었다. 왕이나 왕자, 공주의 태를 봉안한 태실, 실록과 의궤 등 기록물을 보관한 사고, 의로운 소와 개의 무덤인 의우총과 의구총 등은 연고 지역에 나타나 있다. 왕실, 기록물, 의리 등을 중시했던 선조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관아 건물 뒤편에 각기 다른 모습을 한 감옥이 그려진 것도 흥미롭다. 전라도 해남과 진도, 순천 지도에 표시된 귀선(龜船)은 당시에도 거북선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고지도의 색채 또한 아름답다. 사용된 색채는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한 물감으로 그려진 것이어서 색채가 선명하고 변색이 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459곳 조선시대 군현의 모습이 담긴 1872년 지방지도는 각 지역의 130여 년 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도시로 발전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잃어버린 전통사회의 모습을 찾아보는 데 있어서, 1872년 지방지도와 같은 귀중한 시각자료 유산이 적극 활용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 지방 지도의 백미 '춘향의 고을' 남원지도

 

전라도 남원 지도는 459장 중에 가장 아름다운 지도로 꼽힌다. 지도에 표시된 건물들을 빼면 산수화가 되고 다시 건물 표시를 넣으면 지도가 될 정도로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상세하고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중앙에 크게 그려 놓은 남원 읍성은 산수화와 그림지도를 구별해주는 부분으로, 마치 활짝 핀 꽃의 꽃술 같다. 광한루와 오작교는 춘향의 정절과 함께 남원의 상징이다. 당시 이곳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던가는 지도에도 한눈에 알아볼 만큼 큼직하게 그려진 것에서 확인된다. '춘향전'의 영향으로 19세기 후반 조선시대인의 가슴에도 남원은 춘향이의 고을로 인식되었고, 춘향전의 무대인 오작교는 명소로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광한루 옆에는 울창한 숲도 보인다. '동림(東林)'이라 씌여 있는데, 나무들의 줄기와 가지까지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들 숲은 풍수지리에 따라 허한 기를 보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된 비보림(裨輔林)이었다고 한다. 현재 동림은 사라지고 없지만 동림교라는 다리를 통해 옛 자취를 느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