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요계관방지도

구름위 2013. 7. 2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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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보영화' 뺨친 조선의 국방지도


국제신문2006-09-10 20:25덧글 (0)좋아요 (138)  1706년(숙종 32) 이이명(李命:1658~1722)은 왕명을 받아 착수한 대형지도(가로 600cm, 세로 135cm) 제작을 완성하고 이를 국왕 숙종에게 바친다. 지도의 이름은 '요계관방지도(遼關防地圖)'. 요동지방에서 북경 근처의 계() 지역에 이르는 성책(城柵)과 장성(長城) 등을 세밀히 그린 관방지도로, 당시 청나라에서 해외로의 유출이 금지되었던 각종 지도들을 비밀리에 입수하여 만든 것이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이 지도는 작자와 제작시기가 분명하다는 점에서도 큰 가치가 있다.

 

 

 조선 숙종 32년(1706년) 이이명이 제작한 대형지도인 '요계관방지도'. 요동에서 북경 인근인 계 지역에 이르는 성책과 장성을 상세하게 기록한 관방지도다.


▲만주지역을 둘러싼 국경분쟁

 

숙종 후반 조선은 청나라와 국경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제 청나라는 조선을 침공한 오랑캐가 아니라 현실적인 군사력으로 조선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대국으로 인식되고 있던 시대였다. 국경을 사이에 둔 청나라와의 전면전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은 직접적으로 서북 지역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군사적 관심에서만 주목되던 서북지역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백두산은 분쟁의 주요 대상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인식하여 신성시 여긴 만큼, 청나라 또한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며 그들 건국의 발상지로 여겨 성역화시켰기 때문에 종종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양국민들이 서로의 국경을 침범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어나면서 17세기 후반부터는 조선과 청의 주요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679년 청나라 사신이 백두산을 측량하고 돌아갔는데, 당시 청나에서 가져온 지도에는 백두산을 비롯한 조선의 산천에 대한 내용이 매우 자세하여 조정에서는 조선 측의 지도가 유출된 것으로 판단하여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게 하였다. 1692년 청나라에서는 다시 사신을 보내 국경선 조사를 요구했으나 조선 측의 강력한 반발로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청나라가 조선과의 국경선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자, 1697년 숙종은 국방에 해박하였던 남구만 등에게 대책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고, 남구만은 백두산에 대한 청나라에 대한 대비책을 세울 것과 두만강 이북은 목조, 익조 등 태조 이성계의 선조들의 활동 지역이었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이곳을 확실히 확보하는 방안 등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계속해서 천문지리에 익숙한 서양인을 활용하여 백두산 일대의 지형을 살피면서 영토 분쟁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여건들을 만들어 나갔다.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만주지역 역시 매력으로 다가왔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영토였다는 역사의식도 이곳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이주민들이 차츰 늘어났고 청과의 국경 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요계관방지도'를 제작하다

 

청과의 위기의식 속에서 조선은 청나라의 탄생지인 만주지역에 대한 지리정보를 입수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청나라 사신으로 간 이이명은 외교 활동 틈틈이 청나라에서 제작된 지도 입수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귀국 후 마침내 '요계관방지도'를 완성하였다. '숙종실록' 숙종 32년(1706년) 1월 12일에는 그 때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우참찬 이이명이 요·계 관방도(遼關防圖)를 드리고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요계관방도'는 신이 연경에 사신으로 나갔을 때에 사서 가져온 것인데, 명나라의 직방랑(職方郞) 선극근(仙克謹)이 제작한 것으로, 승산(勝算)을 계획할 때엔 반드시 보아야 할 책입니다. 신이 이미 옮겨써서 올리라는 명을 받들고, 또 청인(淸人)이 편찬한 성경지(盛京志)에 기재되어 있는 오라지방도(烏喇地方圖) 및 우리나라의 지난날 항해로 조공을 바치던 길과, 서북의 강과 바닷가가 경계를 취하여 합쳐 하나의 지도를 이루었습니다. 효종 임금이 못다 이룬 큰 뜻을 이으시고 명나라 말년의 일을 교훈으로 삼으신다면 국가에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1705년 청나라에 건너간 이이명은 이곳에서 입수한 명대의 지도인 '주승필람(籌勝必覽)'과 청나라의 '산동해방지도(山東海防地圖)', 청대의 '성경지(盛京志)', 조선의 '서북강해변계도(西北江海邊界圖)' 등을 참고하여 지도 제작에 들어갔다. '주승필람'을 구입하는데 성공한 이이명은 곧 '산동해방지도'를 입수하는 일에 착수하였지만 이 일은 쉽지가 않았다. 청나라에서 이 지도를 대외 유출 금지 도서목록에 올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이이명은 수행한 화원을 시켜 현지에서 급히 이 지도를 베껴 그리도록 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곧 자신이 입수한 지도를 숙종에게 올렸고, 숙종의 명을 받아 1706년 1월 만주 지역과 조선의 서북지역까지를 함께 그려 넣은 '요계관방지도'를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요계관방도'는 숙종에게 바치는 어람용으로 비단에 그려 10폭의 병풍으로 제작되었다. 국왕 곁에 늘 이 병풍을 두고 북벌에 대한 의지를 다잡은 것이리라.

 

▲북벌 이념이 반영된 지도

 

'요계관방지도'에서 우리나라는 관북지방과 관서지방만을 그렸다. 이것은 이 지도가 국방지도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의 경우 동쪽은 흑룡강으로부터 서쪽은 산해관을 지나 남당아안(南塘雅安)에 이르고 있으며, 그 사이의 성책과 만리장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육로는 통과지점만을 표시해두고 있는데 비하여, 조선에서 산동반도와 산해관에 이르는 해로는 뚜렷하게 그려져 있다. 성의 망루에는 적색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담아 군사적으로 주요 거점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산의 경계의 표현, 바다의 파도 무늬, 군사 기지의 표현 등은 전형적인 중국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민족의 영산으로 인식되었던 백두산은 '백두(白頭)'라는 단어의 뜻처럼 흰색을 써서 강조한 것도 주목된다.

    
그러나 실제로 '요계관방지도'에서 표시된 군사시설은 청나라 것이 아니고 명나라 말기의 것이었다. 명나라가 멸망한 지 80년이 지난 시점에서 청나라의 군사 시설은 달라져 있었다. 따라서 이 지도는 실제로 북벌을 해서 청나라를 치자는 의사보다는 국경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어처구니없이 침략을 당하는 일을 막아보자는 취지에서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요계관방지도'는 효종대 추진되었던 북벌 정책이 좌절된 이후에도 청나라에 대한 위기의식이 가시지 않았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이명이 공식적인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행한 화원들을 시켜 중국 측의 자료를 비밀리에 입수한 것은 한 편의 첩보 영화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청나라와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려는 노력이 '요계관방지도'라는 결실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과의 국경에 대한 긴장은 영조대 이후 지도 제작에도 반영되었다.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나 '서북강계도' 등은 이러한 흐름을 계승한 지도로 평가를 받고 있다.

 

# 백두산 정계비 사건

- 토문강 해석 놓고 영토분쟁

 

'요계관방지도' 제작에서 읽을 수 있는 청과의 영토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11년(숙종 37) 청과 조선 양국민 사이에 서로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양국 간의 국경선을 확정하는 백두산 정계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서로 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었다. 청나라 황제 강희제는 청나라 왕조의 발상지였던 만주와 백두산 일대를 성지로 만들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관리를 파견하고 이들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확정하려 하였다.

 

조선에서도 함경도 북방으로 진출한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 이 지역에 대한 영토 조사를 하였다. 1712년(숙종 38) 마침내 양국이 백두산 마루의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워 서로의 영토 확정을 명문화하였다. 양측이 합의한 비문의 내용은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서쪽은 압록강으로 경계로 하며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이었다.

 

그러나 정계비에 쓰여진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19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청과의 영토 분쟁이 일어났다. 바로 백두산정계비 사건이다. 서쪽을 압록강으로 정한 것에는 양측의 불만이 없었지만, 동쪽의 경계인 토문강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양측은 의견을 달리 했다. 청나라 측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한 반면, 조선 측은 토문강을 만주의 쏭화강의 지류로 해석하였다. 토문강을 쏭화강의 지류로 해석하면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가 조선의 영토가 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