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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제국의 흥망 조선시대

구름위 2013. 7. 14.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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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제국의 흥망 조선시대  
http://blog.naver.com/les130/80002455994
['淸史'의 저자] 任桂淳 교수가 말하는 만주족 帝國의 흥망  

무식한 30万명이 유식한 1억5000万명을 지배한 시스템의 비밀
●『전쟁의 勝敗를 결정짓는 것은 인구수나 경제력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다』
●淸太祖 누르하치는 조선태조 李成桂의 부하였던 몽거테무르의 6代孫.
●中原을 제압한 滿州八旗에는 병력 3000의 朝鮮營이 소속돼 있었다.
●한때 세계 GNP의 30%를 생산했던 大帝國은 왜 쇠퇴했나?
●「팍스 시니카」 시기를 거치면서도 산업혁명을 이룩하지 못하고 곧장 쇠퇴기로 접어든 까닭은 파우스트 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鄭 淳 台 月刊朝鮮 편집위원(社外)
30만명이 1억5000만명을 지배한 체제
滿洲八旗(만주팔기)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한양대학교 사학과 任桂淳 교수(56)는 저서 「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을 발간하자마자 중국을 다녀왔다. 그런 任교수를 서울 남대문에 있는 사단법인 동아시아 경제연구원의 원장실로 찾아가 8월27일과 28일의 이틀간 14시간에 걸쳐 인터뷰했다.


―중국에 개최된 학회에 다녀오셨다면서요.
『8월22일부터 25일까지 北京에서 제9차 國際淸史硏討會가 열렸습니다. 세계의 청사 연구 학자 80여 명이 모인 연구토론회인데, 저는 이 회의엔 매번 꼭 참석합니다』


―이번에 발표하신 논문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1899년 荊州(형주)에 주둔하고 있던 八旗兵(팔기병)이 知縣(지현) 등 한인 관료를 구타한 사건에 관한 연구 분석이었습니다. 논문 발표 이외에 발언의 기회를 한번 더 주어서 이번에 발간한 「淸史」의 내용도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팔기병이 제 아무리 淸朝의 핵심 무력이었다지만, 兵士인 주제에 군수나 현감에 해당하는 지방장관을 그렇게 욕보일 수 있었던 것입니까.
『八旗는 백련교도의 반란 등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능력을 드러내 18세기 중반 이 후 그 권위가 추락되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漢人관료들은 주눅이 들어 꼼짝 못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청조는 30만명의 만주족이 1억5000만명의 漢人을 지배한 정복 국가로 출발했습니다』


―무식한 소수가 유식한 다수를 지배한 셈이군요. 八旗를 전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로이드 이스트만 교수 밑에서 중국사를 공부할 때 중국인 친구들이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조공을 하지 않았느냐. 조공국이 바로 속국」이라면서 은근히 부아를 돋우었습니다. 그래서 「너희 漢族(한족)은 한족왕조들보다 북방 소수민족이 세운 정복왕조들에 의해 더 오랜 기간 지배를 받지 않았느냐」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는 대 표적인 정복왕조로서 北京으로 천도한 164 4년 이후 268년 동안 중원에 군림했는데, 그것을 무력으로 뒷받침한 것이 八旗였습니다』


―팔기라면 만주팔기뿐만 아니라 몽고팔기 , 漢人팔기도 조직되어 있었으니까 현대적 용어로는 多國籍軍(다국적군)이군요.
『淸朝의 창업기에 조직된 몽고팔기와 漢人 팔기는 병력 부족으로 고민했던 만주팔기의 날개 역할을 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이 흥기할 때의 페턴을 보면 먼저 주변 유목민족과 연합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中原 정복에 나섰습니다』


현대 중국의 모양을 결정한 淸朝
―淸朝가 대륙 25왕조 가운데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淸朝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168 0~1780)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이룩했습니다. 이러한 평화와 번영은 1670년대에 1억50000만이었던 인구를 1850년대에는 4 억3000만으로 증가시켰습니다. 또한 내몽골, 외몽골, 신장(투르키스탄), 서장(티베트 )을 정벌하고 효율적으로 통치하여 역대 어느 왕조보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多민족국가를 오늘날의 중국에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국토와 민족 구성 등의 면에서 현대 중국의 모양을 결정한 왕조가 바로 淸朝입니다』


―淸朝가 소수민족이 건립한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다수 漢人을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明朝의 정치제도와 사회질서를 계승하면 서 만주족 고유의 전통과 제도를 보완하는 뛰어난 컴플러마이즈(절충)의 능력입니다. 청조는 정치, 사회세력간에 견제와 균형 (check and balance)을 이룬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수립하여 유연성 있게 체제를 운영했습니다』


―만주족은 우리 삼국시대 때 고구려에 복 속된 민족으로서 말갈이라고 불렸습니다. 통일신라 시기에 말갈은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발해를 세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발해를 민족사에 포함시키고 있는 만큼 말갈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세운 淸을 우리 민족사에서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대목입니다.
『수렵민이었던 만주족은 오랜 옛날부터 백 두산과 흑룡강 사이에 생활터전을 잡고 살아왔는데, 先秦(선진) 때는 肅愼(숙신), 兩漢(양한) 때는 邑婁(읍루), 魏晉南北朝(위진 남북조) 때는 勿吉(물길), 수-당 때는 말갈, 宋代 이후에는 女眞(여진)이라고 했고, 17세기에는 스스로를 滿洲族이라고 불렀습니다. 퉁구스족 계열로서 우리 민족과 인종적 친연성도 깊습니다』


―일본의 사료에 따르면 발해의 지도층은 고구려 유민이었지만, 다수 민족은 말갈족입니다. 따라서 발해를 우리 민족사에 포함시키면서 淸을 민족사에서 배제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닙니까. 淸은 우리 민족사에서 外史로라도 다루어야 한다는 국내 일부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국 학계의 일부에서는 발해는 물론 고구려까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번 淸史연토회에서 제가 「청조는 정복국가」라고 말하자 어느 중국인 학자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 청조를 어떻게 정복국가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고 반론을 폅디다. 희안한 억지 논법이지만, 어떻든 中原을 침략해 들어온 온갖 민족을 모두 다 중국인이라고 포용한 결과가 오늘의 중국을 56개 민족의 多민족국가로 만들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여진족은 조선왕조의 창업 당시 李成桂( 이성계) 휘하에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지요. 이성계 자신은 全州李氏(전주이씨)라고 하지만, 그의 4대조가 동북면으로 이주 한 이후 오랜 세월이 흘렀던 만큼 그 家系에도 여진족의 피가 섞여 있었다고 해야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고려 말기 한반도의 동북지역, 즉 함경도에는 여진인과 고려인들이 혼거했으므로 그럴 개연성이 높습니다. 특히 이성계의 私兵 집단에는 여진족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지금의 함경북도 북청지역은 여진족 추장 퉁두란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가 함경남도 함흥 지역의 토호인 이성계에게 굴복하고 의동생이 되어 李之蘭 (이지란)이란 이름을 받았지요. 나중에 그는 조선왕조 개국공신이 되어 建州衛(건주위)를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이성계의 휘하에는 이밖에도 斡朶里族(오도리족)의 만호 猛哥帖木兒(몽거테무르), 火兒阿(할아) 의 만호 阿哈出(아하추) 등이 종군하고 있었습니다. 일개 지방군벌에 불과한 이성계가 중앙정계에서 강력한 실력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여진족이라는 배후세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淸太祖 누르하치의 家系
―누르하치의 선조는 누구입니까.
『建州左衛(건주좌위)의 開祖(개조) 몽거테무르가 바로 누르하치의 직계조상입니다. 아하추는 建州本衛(건주본위)의 개조가 되었지요.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 창업 후 여진족의 대소 추장들에게 만호, 천호의 직첩을 새로 주었습니다. 이리하여 창업 초기의 조선왕조는 두만강 하류 孔州(공주 )에서 상류 甲山에 이르기까지 통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태조는 여진족에 대한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습니다』


―그러던 여진족이 조선왕조와 등을 돌리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왕자의 난을 거쳐 태조 이성계의 제5자 方遠(방원: 태종)이 등극하자 안변부사 趙思義(조사의)가 태조의 계비 康(강)씨와 그 소생인 태자 方碩(방석)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에 여진족이 가담함으로써 조선조와 여진족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오늘날의 회령에 자리잡고 있었던 몽거테무르를 회유하여 만호의 지위를 보장하고 입조를 시켰습니다. 그러다 태종 5년( 1405) 몽거테무르가 明朝에 입조하자 조선조는 이에 대한 보복조처로 慶源(경원)에 설치되어 있던 무역소를 폐쇄했습니다. 태종 10년(1450)에 몽거테무르는 오도리 부족을 이끌고 압록강 북쪽 鳳州(봉주)로 이주했으며 건주좌위를 개설했습니다. 그후 그는 세종의 허가를 얻어 6500명의 오도리 부족을 이끌고 다시 회령으로 돌아왔는데, 세종 15년(1433)에 楊木答兀(양목답월)과 嫌眞兀狄哈(우디케)의 습격을 받아 피살되고 그를 따르던 오도리족은 건주본위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후 건주본위도 조선과 明의 협공을 받아 풍비박산이 되지요.
『세조 13년(1467)에 건주본위의 제3대 지도자 李滿住(이만주)가 康順(강순)과 南怡 (남이) 장군의 조선군와 싸우다가 패사했습니다. 李滿住가 바로 아하추의 손자입니다』


―그러면 건주본위로 도망쳤던 몽거테무르의 잔당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몽거테무르의 死後에 明朝는 그의 동생 凡察(범찰)을 건주위의 지휘사로, 그의 차남 董山(동산)을 건주좌위의 지휘사로 삼았습니다. 董山의 5대손이 바로 누르하치입니다』


―누르하치의 흥기 과정은 어떠합니까.
『누르하치는 청년시절 明의 요동총병 李成梁(이성량)의 공격으로 조부와 부친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후일을 기약하며 이성량에게 온갖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는 25세가 되던 1583년 5월에 琿河(혼하 ) 상류 허투알라(興京: 요녕성 신빈)를 거점으로 삼고 起兵(기병)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교적 멀리 있는 부족과는 선물과 결혼을 통해 화친을 맺고, 가까운 부족은 무력으로 정복하는 遠交近攻(원교근공)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또한 明朝에는 친히 여러 차례 조공을 하는 등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明 조정이 그의 세 력확장을 경계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특히 明의 요동총병 이성량에게는 뇌물을 많이 먹였다고 합니다. 1588년에 明 조정은 누르하치에게 건주좌위 도독첨사의 지위를 내렸습니다』


―이성량은 평안도 위원(渭原) 사람으로 살인죄를 범하고 압록강을 넘어 요동으로 도망쳐 군에 입대, 공을 쌓아 明의 장군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만주 전역의 군사권을 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교역과 상권에 개입하여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습니다. 지금도 요녕성 錦州(금주) 인근의 廣寧城(광녕성)에 가보면 이성량의 공적을 기리는 牌樓(패루)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신흥세력인 누르하치와도 그 이익을 나누어 먹었는데, 그러는 동안 누르하치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진 겁니다. 결국 1591년 11월, 이성량은 누르하치의 팽창을 막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요동총병직에서 해임당했습니다. 다만 寧遠伯(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유지하고 나이가 많아 퇴임한다는 형식이 취해졌습니다.


임진왜란 틈타 建州여진을 통합
『明 조정에서 이제는 누르하치의 세력을 꺾어버려야 하겠다고 작심했을 때 공교롭게도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여 明이 조선에 원군을 파견하자 누르하치도 출병을 자청했습니다. 당시 4만여 명의 明軍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온 제독 李如松(이여송)이 바로 이성량의 아들입니다. 누르하치의 요청은 朝-明 양국 모두에 의해 거절당했지만, 그 무렵엔 그가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르하치는 明 조정의 견제가 소홀해진 임진왜란 기간 중에 그 권력을 굳히기 위한 정복전쟁을 감행하여 海西(해서)여진과 조선의 6진에까지 세력을 확장했지요.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明 조정에 조공사를 파견하여 공물을 바쳤고, 1595년에는 明 조정에서 여진 수령에게 부여하는 최고의 명예직인 龍虎將軍(용호장군)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 조선 조정에서는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허실을 탐색하게 했던 일이 있었지요.
『1595년 선조 임금의 命을 받은 申忠一(신 충일)이란 무관이 누르하치가 거주하던 허투알라성을 방문하고 귀국하여 「建州紀程圖記」(건주기정도기)라는 보고서를 썼지요. 이 보고서에는 여진의 산천, 군사, 풍속과 관련한 97개 조의 기사와 정밀한 지도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첩보활동을 했던 신충일이 귀국해서는 곧 파직을 당하고 말았지요. 건주에 가서 누르하치가 준 호복을 입고 그에게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함으로써 조선국왕의 사신으로서 국위를 손상시켰다고 탄핵되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조선왕조에서는 그때까지도 여진을 한 단계 아래의 나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야 어떻든 세력을 확장한 누르하치는 1599년 몽고문자를 차용한 만주문자를 제정함으로써 만주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이어 1601년에는 일사불란한 전투집단 八旗를 확보하였고, 1610년에는 寧古塔(영고탑: 길림성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건주위 관할을 넘어 장거리 원정까지 수행할 수 있는 군사력과 노동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1583년 起兵 당시 10만에 불과했던 만주족은 이 시점에 이르러 40만~50만의 인력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1616년 정월 초하루 누르하치는 汗(한)에 올라 국호를 金(금), 연호를 天命이라고 일컫습니다. 누르하치의 金은 12세기에 阿骨打(아골타)가 세워 중국의 화북지방을 차지한 金과 구별하기 위해 역사에서 後金(후금)이라고 서술하고 있지요』


―누르하치와 新羅金氏(신라김씨)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누르하치의 姓이 愛新覺羅(애신각라)인데, 만주어에서 애신은 「金」, 각라는 「族」을 뜻하지요.
『황해도에 살던 新羅 金氏가 여진 지역으로 넘어가 아골타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후 만주황족의 다수가 자신들의 성을 金씨로 삼았던 일입니다. 저는 金씨 성을 가진 중국사람을 만나면 으레 「만주족이냐」는 질문을 하는데, 「그렇다 」고 말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디다』

光海임금의 이중외교
―1618년 누르하치는 開戰문서인 이른바 七大恨(7대한)을 발표하고 요동의 군사거점 撫順(무순)에 선제공격을 가한 다음 약탈을 감행합니다. 요동군의 대패에 놀란 明朝는 10여만명의 원정군을 보냈으나 다음해인 1619년 3월, 무순 부근의 사르후에서 궤멸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조선은 1만5000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명군을 돕습니다만, 전세가 불리하자 재빨리 후금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조선군을 지휘한 姜弘立(강홍립)이 출병 전에 광해군을 독대하여 「대세를 관망하여 대처하라」는 밀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르후 싸움은 후금과 명조에게 있어서는 요동 통치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 결전에서 압승한 누르하치는 이후 開原(개원)과 鐵嶺(철령)을 점령하여 명군의 방위선을 돌파하는 한편 여진의 葉赫(예허)부족을 정복하여 요하 동부 전역을 수중에 넣게 되었습니다』


―사르후 전투의 명군 최고지휘관인 요동경략 楊鎬(양호)와 요양총병 劉綎(유정) 등은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쟁쟁한 장수들입니다. 하지만 유정은 전사했고, 양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습니다. 어떻든 임진왜란 때 明의 도움을 받은 조선으로선 明 조정의 원병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불같이 일어나는 후금과 등을 돌릴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강홍립의 항복은 국가이익 추구를 위한 광해군의 2중 외교였던 것입니다. 항복 후 강홍립은 곧 누르하치를 만났는데, 조선의 입장을 설명하여 양해를 얻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누르하치는 항복한 조선군을 모두 조선으로 귀환시켰습니다. 다만 강홍립 등 지휘부만 억류시켰는데, 이는 조선이 明 조정의 의심을 받지 않게 하려는 누르하치의 배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2중 외교는 1623년 仁祖反正(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퇴위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사르후 전투 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明 조정은 명장 熊廷弼(웅정필)을 요동 전선에 파견하여 패잔부대를 재편하고 방어를 강화, 누르하치의 공세에 일단 성공적으로 대처합니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웅정필은 환관으로서 세력가인 魏忠賢(위충현)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형당함으로써 요동의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고 맙니다. 누르하치는 파죽지세로 심양과 요양을 점령하고 1625년에는 심양으로 천도하여 盛京 (성경)이라고 개칭했습니다』


―누르하치가 요동에서 明 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滿洲八旗(만주팔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任교수께서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만주팔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으셨고, 1993년에는 중국의 세계적 출판사인 三聯書店(삼련서점)에서 「淸朝八旗駐防興衰史」(청조팔기주방흥쇠사)라는 연구서를 중국어로 출판한 이래 만주팔기에 관한 한 세계적 권위자가 되셨습니다. 만주팔기를 쉽게 설명해 주십시오.
『팔기제도는 1601년 누르하치가 창설한 만주족의 독자적인 행정제도인 동시에 국민개병제적인 군사제도로서 중국 정복과 통치과정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누르하치는 처음에 자기 휘하의 부족을 4개의 니루로 재편했습니다. 300명으로 구성되는 니루는 여진 사회에서 전투나 수렵을 할 때 조직되는 전통적인 기본단위였지요. 니루의 총령은 니루어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시가 되면 니루의 구성원들은 스스로 식량, 갑옷, 투구, 병기, 군마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5개의 니루는 하나의 잘란으로 조직되어 잘란어전이 지휘하고, 5개의 잘란은 다시 하나의 구사로 조직되어 1명의 구사어전이 통솔했습니다. 구사는 8가지 깃발 색깔에 따라 정황기, 정백기 등의 8旗로 조직되었습니다. 구사어전은 7500명을 지휘했으므로 八旗는 이론상 6만의 장정으로 조직되었던 것입니다』


―만주팔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주팔기에는 병력 3000의 朝鮮營(조선영)이 소속되어 있었는데,「滿洲八旗氏族通譜」(만주팔기씨족통보)에 의하면 팔기에 편입된 조선의 성씨가 72姓에 달했습니다』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운 후 정복사업을 계속 추진하던 과정에서 귀순한 漢人과 몽골인의 숫자가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군사력의 규모가 더욱 확대되지 않았습니까. 팔기는 초창기에 어떤 지도체제로 운영되었습니까.
『누르하치는 1615년 아들과 조카들 가운데 4명을 호소이버얼러(和碩貝勒)로 삼아 1旗씩 지휘하게 한 뒤 각기 휘하 旗의 군사와 민사를 맡겼고, 얼마 뒤에 4명의 버얼러를 추가로 지명하여 군정을 논의하는 의정회의에 참석토록 했습니다』


―누르하치가 거느린 만주팔기는 승승장구하여 요하를 건너 遼西(요서) 지방을 공격합니다. 외가닥 통로인 遼西走廊(요서주랑 )을 달려 山海關(산해관)만 돌파하면 바로 명나라의 수도 北京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산해관은 北京의 최후 보루로서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뿐만 아니라 그 100km 전방에는 名將(명장) 袁崇煥(원숭환)이 지키는 寧遠城(영원성: 요녕성 금현)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영원성 공성전에서 누르하치는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의 파편을 맞아 중상을 입고 말가죽에 싸여 후송되던 중 1626년 9월30일 만 67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
―누르하치의 아들 15명 가운데 하필이면 제8자인 홍타이지(皇太極: 태종)가 후계자가 되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르하치는 8명의 버일러(패륵: 王) 중 누구도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8王이 다함께 국정을 논의하여 처리하라는 유지를 남겼습니다.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여러 버일러들이 홍타이지를 汗으로 추천했는데, 즉위 초 홍타이지는 大버일러에게 소속된 旗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명목상의 汗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누르하치 못지않은 영웅의 풍모를 갖춘 지도자로서 요동 지배를 굳히는 동시에 국가조직을 군정과 민정으로 분리하여 버일러들의 권한을 축소 제한함으로써 전제군주 관료국가체제를 확립해 갑니다. 홍타이지는 버일러로부터 旗의 행정권을 박탈하는 과정에서 중국식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明朝의 유능한 관리들을 대거 흡수했습니다. 이 무렵 그 수가 부단히 증가한 漢人 투항자들은 노복이 아닌 자유민으로 편입되었는데, 이는 중국본토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자 하는 그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홍타이지는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수모를 준 인물입니다. 그는 즉위 다음해인 162 7년 丁卯胡亂(정묘호란)을 도발합니다. 도발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홍타이지는 조선으로 출정하는 阿敏(아민 : 누르하치의 조카) 등 장수들에게 東征(동정) 목적의 하나는 조선을 항복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조선령 假島(가도)에 조선의 지원을 받으면서 군영을 개설한 明의 장수 毛文龍(모문룡)을 토벌하는 것임을 상기시켰지요. 아민은 만주팔기 가운데 양남기를 중심으로 편성된 3만병을 이끌고 의주를 공략했고, 동시에 일부 병력은 모문룡의 근거지인 鐵山(철산)을 공격하여 그를 가도에 고립시켰습니다. 조선에서는 광해군이 1623년의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고 인조가 집권하고 있었는데, 인조 조정은 親明排金(친명배금) 정책을 명확히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淸史」에는 『아민이 평양을 함락시키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조선의 국왕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제의했고, 이에 아민은 부장을 파견하여 정묘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의 내용은 明朝와 국교를 단절하고 후금과 동맹을 체결하며, 조선왕의 동생 原昌君을 후금에 인질로 보내고, 매 년 공물과 재물을 바친 것이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료를 근거로 한 것입니까.
『淸史稿(청사고) 太宗本紀(태종본기)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과 練藜室記述(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화친 조건의 골자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즉,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국이 되고, 금나라와 화친하는 동시에 명나라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明과 패권을 다투는 상황에서 후금 軍이 조선 깊숙이 침략하기 어려웠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저는 우리쪽 사료가 史實에 부합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민은 압록강을 도강하고부터 줄곧 인조 조정에 화의를 먼저 제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정묘호란을 일으켰겠습니까. 당시 후금은 경제사정도 비교적 양호하여 약탈 등의 경제전을 감행해야 할 필요성도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청사고의 기록을 조금 더 취신합니다』


―조선이 중립 정도만 지켜주어도 좋다는 것이 후금의 희망사항이 아니었겠습니까, 고려의 경우 송나라-금나라 양국과 동시에 조공책봉 관계를 갖기도 했습니다.
『조선과 후금 양측 모두가 화의 내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했던 측면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런 부분은 앞으로 관계사 연구를 통해 해명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의 위협을 제거한 후금은 한동안 수비가 철저한 산해관을 공격하지 않고 遵和(준화)와 通州(통주) 등 화북 북방지역을 수차 약탈하다가 서쪽 내몽골 방면으로 진격했다. 내몽골 차하르部의 추장 林丹汗(임단한 )이 명조에 의존하여 후금의 서쪽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9년 후금은 차하르部를 공격하여 1만여 명의 포로를 획득했다. 홍타이지는 동서로 양 날개를 이루고 있던 조선과 몽골을 정벌함으로써 북방으로부터 명조를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朝鮮 정복은 가능해도 통치는 불가능
―1633년, 싸우지는 않고 私利(사리)만 도모하던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주살당한 후 그 부장인 孔有德(공유덕)과 炅仲明(경중명 )이 명군 1만4000명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여 도원수와 총병관으로 중용되었습니다. 이때 조선측에서 공유덕과 경중명의 투항을 방해했다고 홍타이지에게 트집을 잡히고, 이것이 또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의 도발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연전연승을 한 홍타이지는 1635년 자기 민족의 칭호였던 여진을 폐지하고 대신 만주를 사용할 것임을 선포했습니다. 이어 1636년 5월15일, 그는 나라 이름을 大淸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


―황제 즉위식에는 각국의 朝賀(조하)사절단이 참석하여 예물을 바치고 배례를 올렸으나 조선 사신 羅德憲(나덕헌)과 李廓(이곽)은 藩臣(번신)으로서의 배례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조선 사신이 홍타이지에게 배례를 올린다는 것은 明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폐기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홍타이지의 측근들은 조선 사신들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지만, 홍타이지는 「원망을 사는 구실이 되는 것을 짐은 바라지 않는다」면서 조선 사신을 석방하여 귀국시킬 것을 명했습니다. 그 대신 귀국하는 사신 편에 조선국왕을 책망하고 아울러 조선왕 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내용의 국서를 부쳤습니다. 나덕헌과 이곽은 이런 국서를 가지고 가면 문책을 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귀국길에 통원보의 여관에 묵으면서 국서를 슬쩍 내버리고 내용만 베껴 쓴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요구에 대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갑론을박을 거듭한 끝에 묵살하기로 하고 회답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해 12월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親征(친정)에 나섰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좀 융통성을 보였다면 병자호란은 예방할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습니다』
<청군의 선봉장인 馬夫大(마부대)는 기병 6000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속도전을 감행했다. 마부대 軍은 산성 중심으로 방어진을 친 조선군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의주-안주-평양-황주-평산-개성을 잇는 당시의 제1대로를 질풍같이 달려 불과 1주일만에 한성을 바로 찔러왔다. 仁祖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마부대 軍에 의해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했다. 남한산성은 청군의 주력부대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근왕병들은 청군에 의해 모두 격퇴되었고, 고립무원의 농성군은 식량 부족과 추위 때문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신하들은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누어져서 치열하게 대립했다. 항전을 계속할 경우 내부 반란이 벌어질 상황에 빠졌다. 결국 주화파 崔鳴吉(최명길)의 제의에 따라 인조는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을 출성하여 삼전도(송파나루)에서 홍타이지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예를 올리고 말았다>

―(仁祖조정의 남한산성 농성시기의 행적을 기록한) 南漢日記(남한일기)를 보면 仁祖로부터 항복을 받은 직후 홍타이지는 受降壇(수항단) 아래로 내려가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찍 갈깁니다. 그것은 禮(예)나 숭상하는 조선조에 대해 모욕을 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을 직할 식민지로 삼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타이지도 조선은 정복할 수는 있어도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의 大義名分論(대의명분론)과 자존심이 그만큼 치열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한반도가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 中國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조선을 굴복시킨 홍타이지는 본격적으로 明朝를 공략하게 되지요.
『1638년 홍타이지의 동생 도르곤이 北京 북방 密雲城(밀운성)을 돌파, 계속 남하하여 山東까지 진격했습니다. 이 침공 작전에서 청군은 50城을 공략하고 8城을 항복시켰으며 46만명의 포로를 획득하는 대전과를 올렸습니다. 청군이 만리장성 이남 화북지역에서 연전연승을 하면서도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명나라에 산해관이라는 철옹성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설사 산해관 이남의 땅을 점령하더라도 산해관의 명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할 우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청군이 산해관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산해관의 外城에 해당하는 錦州(금주), 松山(송산), 杏山(행산), 塔山(탑산)의 4 개 城을 먼저 제압해야 했다. 1640년 淸의 대군은 금주성을 포위했다. 明의 구원군이 금주성으로 달려오다 청군에 의해 진로가 막히자 송산성에 집결했다. 明 조정은 송산성을 사수하기 위해 洪承疇 (홍승주)를 총독으로 임명하고 오삼계 등 8인의 총병을 비롯한 13만명의 병력을 지휘하도록 했다. 홍타이지는 명군이 송산성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자 심양에서 급히 송산성으로 달려왔다. 송산성은 청, 명 두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대 격전장이 되고 말았다. 홍승주는 우선 굳게 지키며 청군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北京 조정의 병부상서 陳新甲(진신갑)은 지구전에 따른 군사비의 가중을 염려하여 속전속결을 재촉했다. 결국 홍승주는 본의 아니게 청군에 대한 정면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송산성 전투는 명군의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송산성뿐만 아니고 산해관의 외성 모두가 청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전투에서 명군 5만3000여 명이 섬멸되고 홍승주는 포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北京 진입의 관문인 산해관만은 건재했다. 홍타이지도 산해관을 정면 공격으로 돌파할 수 없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홍타이지는 1643년 9월 盛京에서 급사했다. 왕족회의에서는 여섯 살 난 아홉째 황자 福臨(복림)을 황제로 추대했고, 누르하치의 열네 번째 아들 도르곤을 섭정왕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무너졌다. 1643년 3월 李自成(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大順이란 이름의 나라를 세워 스스로 王이라 칭했다. 이어 1644년 4월25일에 그가 北京을 함락시키자 明의 마지막 황제인 崇禎帝(숭정제)가 황궁 뒤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함으로써 明朝는 294년만에 멸망했다>

모택동의 李自成 평가
―재미있는 것은 모택동이 중국의 전통적 영웅들인 한무제, 당태종, 송태조 등을 평가절하한 반면 이자성을 크게 평가했다는 점입니다. 산해관 서쪽 角山(각산)의 만리 장성에 올라가 보니까 이자성의 石像(석상 )까지 세워 놓았습디다. 이자성의 평균주의가 마오이즘과 통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공산 중국의 역사가들은 「이자성의 반란이 성공했다면 1789년 프랑스혁명과 마찬가지로 새로 출현한 부르주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권력을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거나 「오삼계 등 봉건세력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주 오랑캐와 손잡고 이자성 밑에 모인 진보적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자본주의 맹아의 성장이 반세기 이상 지연되었다」는 등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任교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자성의 군대는 北京을 점령하면서 약탈 , 살인, 강간 등으로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자성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비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그의 무리는 流賊(유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1644년 봄, 明의 대군 중 망국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장수는 산해관 총병 오삼계 뿐이었다. 오삼계는 李自成의 北京입성을 저지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北京으로 올라가던 중 숭정제가 자살하고 北京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산해관으로 철수했다. 이런 오삼계에게 北京에 있던 그의 아버지로부터 한장의 편지가 당도했다.
「나는 闖王(틈왕:이자성)에게 항복했다. 너도 항복하는 것이 좋겠다」 이자성은 오삼계와 손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부장이 그의 애첩 陳圓圓(진원원)을 납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淸의 섭정왕 도르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항복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도르곤은 1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산해관으로 진군하던 중이었다. 이자성 또한 오삼계가 항 복할 의사가 없음을 간파하고 산해관으로 진격해 왔다. 오삼계는 내부의 적부터 토벌한다는 구실로 도르곤에게 항복하고 청군을 산해관 안으로 끌어들였다. 도르곤은 오삼계의 정병 4만을 포함한 18만 명의 대군을 휘몰아 이자성 軍을 격파하고 北京으로 진군했다. 이자성 軍이 6월4일 北京을 포기하고 섬서 방면으로 도주하자 6월6일 청군은 北京에 입성했다>


漢人으로써 漢人 제압
―北京에 입성한 淸 지도부는 통치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漢人들을 어떻게 회유했습니까.
『淸 지도부는 「明과 천하를 놓고 싸운 것이 아니라 流賊 이자성과 싸웠다」는 점을 강조했지요. 특히 도르곤은 天命을 잃어 멸망한 명조 대신 청조가 천명을 받아 내란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명조를 타도한 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명조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죽음을 애도하게 하여 민심을 수습했던 것입니다』


―北京 등 화북의 漢人들의 다수가 청군의 점령정책에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백성들을 구휼하고 원수를 갚아주고 질서를 확립해 주는데 왜 반대하겠습니까. 명조의 관리들이 거의 대부분 청조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청조로선 漢人 관료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이에 따라 관리의 임용에 있어서 (1개 직책에 만주족 1인과 한인 1인씩을 복수로 보직하는) 滿漢倂用制(만한병용제)라는 절묘한 회유책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1644년 10월1일, 北京에 입성한 홍타이지의 후계자 福臨(복림)은 천지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태조, 태종의 유지를 받들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음을 천하에 선포했다. 국호는 종전대로 大淸으로 하고, 수도를 燕京 (연경:북경), 연호를 順治(순치)로 정함으로써 명조에 이은 새로운 왕조가 中原 무대에 등장했다.
北京 천도 이후 淸 조정은 이자성 軍에 대한 추격전을 감행했다. 이자성은 섬서 지방 등지를 전전하다 다음해인 1645년 호북성과 강서성의 경계 지점에서 촌민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이자성과 함께 위세를 떨치던 사천 지방 농민군의 지도자 張獻忠(장헌충)도 청군의 공격을 받고 1646년 12월 전사했다.
화북지방과는 달리 강남 지역의 한인들은 청조에 적대적이었다. 청조에 저항한 것은 농민군 뿐만이 아니었다. 北京에서 쫓겨난 명조의 유신들은 명조의 후예들을 옹립하여 남경, 운남, 복건 등지에 南明(남명)정 권들을 세워 청조에 저항했다>


―청조는 항복한 한인부대를 앞세워 남명정권을 정벌하지 않았습니까.
『1644년 당시 팔기병의 총수는 16만9000명에 불과했고, 이 가운데 만주팔기병의 수는 전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는 몽고팔기와 한인팔기였습니다. 게다가 북방 출신인 만주팔기와 몽고팔기는 습도가 높은 남방의 아열대성 기후에 익숙하지 않아 자주 질병에 시달렸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데 능한 기마병이었지만, 산과 물이 많은 중국 남방 전선에 적응할 수 없었지요. 이에 비해 항복한 명군들은 소총과 홍이포 등을 사용하여 요새와 성을 공격하는데 능했기 때문에 그들로 綠營兵(녹영병)을 조직하여 토벌전의 선봉에 세웠습니다. 즉, 한인들로 편성된 군대를 오삼계, 경중명, 공유덕, 尙可喜(상가희) 등 한인 장수에게 맡겨 남중국을 정벌하게 하고, 만주족 장군들은 그들의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한인으로써 한인을 제압했군요. 청조가 남명정권을 토벌하던 무렵이 바로 北伐(북벌)을 국책으로 정했던 조선 효종의 재위시기(1649~1659)였습니다. 만주팔기가 농민군과 남명정권을 토벌하기 위해 남하한 시점에서 북벌을 감행했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겠습니까. 만약 조선이 남명정권과 동맹을 맺었다면 남북에서 협공하는 형세를 이룰 수도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청조의 중추 군사력인 팔기가 농민군이나 남명정권과 직접 전투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반란군과의 전투는 한인 장군들의 부대(綠營兵)가 수행했습니다. 팔기는 북경 -서안, 북경-진강 계선의 주요 도시에 집중 배치되어 돌발사태에 대비한 기동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과 물자가 집중되던 요소요소에 駐防(주방)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심양과 寧古塔(영고탑)에는 奉天將軍(봉천장군)과 영고탑장군이 지휘하는 팔기를 배치했던 만큼 설사 효종조의 조선군이 북벌을 감행했다고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효종조의 북벌 계획은 국내정치용이었지 현실성은 전혀 없었던 탁상공론이었습니다』


―청조가 중원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대표적 한인 장수는 오삼계, 경중명, 상가희 등 3인이었습니다. 1662년 康熙(강희) 원년에 이르면 이들 3인이 행정, 군사, 치안을 담당하는 지역이 三藩 (삼번)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남명정권들의 멸망 후 삼번의 왕들은 「사냥철이 지난 사냥개」의 신세가 되고 맙니다. 배신자 들의 말로라고 할까요.
『삼번의 왕들은 그 세력이 매우 강대해져 명목상으로는 淸에 예속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藩內(번내)의 모든 인사와 재정을 독단적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들은 팔기병 수의 절반에 해당하는 10만의 병력을 보유했지요. 삼번을 한꺼번에 진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강희제는 우선 平西王 오삼계를 겨냥하여 대장군의 印章(인장)을 회수하는 등 세력을 삭감시킵니다. 청조의 속셈을 간파한 오삼계는 1673년 興明討胡(흥명토호)라는 反淸의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강희제는 삼번왕에 대해 교묘한 이간책을 구사하여 연합전선의 형성을 견제하면서 1683년까지 하나하나 토벌해 버립니다』

무식한 소수로 유식한 다수를 통치
―오삼계가 흥명토호의 기치를 높이 들었는데도 한인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삼계는 운남지역 남명정권의 永曆帝(영력제)를 체포하여 죽인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復明(복명)을 주장할 대의명분이 없었지요. 더욱이 삼번왕들은 자신의 통치구 내에서 터무니없이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에 청군이 진압에 들어가자 백성들은 오히려 淸의 진압군에 가담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삼번의 난 때문에 적지않은 한인들이 청조에 충성을 바치게 되어 청조의 통치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청조의 對 한인 정책은 협조하면 유화책을 구사하지만, 반항하면 철저하게 도살하는 유혈강경책이었지요,

예컨대 화남과 화북을 잇는 군사적 경제적 거점이었던 揚州城(양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청군은 끝까지 저항한 한인 80만명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팔기는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군대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만주족은 중국인구의 0.03%에 불과했습니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본때를 보인 것입니다』


―무식하고 가난한 소수의 만주족이 유식하고 부유한 다수의 한인을 정복하고 중원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명 정권의 부패와 통치력의 약화 때문이었습니다. 기근과 농민폭동 등으로 명조 스스로가 국가로서 존속할 요건을 상실한 것입니다.
둘째, 만주족이 초원이나 깊숙한 산림지대가 아니라 중국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은 전략지역인 요동과 인접한 지역에 거주함으로써 그들 고유의 전통과 특성을 유지하면서 중국식 생활양식과 정치제도를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 누르하치가 그의 부족을 일사불란하게 통치하기 위해 全 부족민을 팔기로 조직한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기 때문입니다. 넷째, 팔기와 중앙행정기구를 조직하는 데 있어 중국의 관료제도와 사상을 받아 들였고, 한인 관료와 지식인을 적극 수용하여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팔기군은 강남지역을 정벌할 때 반청세력에 대하여는 잔인하게 학살하기는 했지만, 北京에 진입했을 때는 이자성 軍과는 달리 약탈, 살인, 강간을 삼가하고 민간인들을 구휼하여 한인들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중국 화북지역의 한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북방민족과 혼혈되었던 만큼 강남의 漢人들과는 달리 이민족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측면도 있었습니다』


유화책과 강압책을 조화시켜
―任교수께서는 천하쟁패전에서 승자를 결정짓는 것은 인구수나 경제력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라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오늘의 한반도 상황에서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청조는 중국을 정복하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강압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한 문화의 대부분을 받아들이는 유화정책을 채택하고 만주족의 특성과 지도력을 보존하는 독특한 통치정책을 구사함으로써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통치한 1680년부터 1780년까지의 100년간에 사상 유례없는 평화 와 번영을 누리는 팍스 시니카(Pax Sinica )를 실현했습니다. 팍스 시니카의 실행 프로그램은 무엇이었습니까.
『청조는 절대다수이며 문화수준이 높은 漢族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유화책과 강압책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실시하여 사회통합을 이루었습니다. 원래 만주족은 武를 숭상하고 힘센 젊은이를 우대하는 수렵사회의 가치관과 天은 大國이나 大君을 돕는다는 天命觀을 가졌습니다. 반면 한족은 孝를 존중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유교 가치관과 天은 중국문화를 수호하고 聖人을 돕는다는 天命觀을 가졌습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淸의 지도자들은 정치적 지도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하고, 백성들에게 유교사상을 주입했습니다. 그리고 明의 관 료와 지식인들을 적극 등용했으며, 과거제를 실시하고, 방대한 편찬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전쟁과 재해에 의해 파괴된 농촌경제를 신속히 회복시키는데 정책의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청조가 한족을 회유하기 위한 유화책으로 일관한 것은 아닙니다. 청조는 全國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귀순한 한인에게는 관대했으나 저항하는 명군과 유민은 철저히 도살해 버렸고, 그들의 복종을 확인하고자 변발과 만주복 착용을 강요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복자인 팔기 관병을 위하여 3차에 걸쳐 한인의 토지를 강점하고 많은 한인을 노예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속박하여 조금이라도 反淸의 기미가 보일 경우 즉시 처 벌했습니다』

과거 실시로 체제 불만 제거
―청조가 과거제도를 유별나게 중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장래성이 있는 漢人을 관료로 발탁하겠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이를 통해 사대부와 지방의 紳士(신사) 계급을 통제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과거 합격자가 관직에 바로 등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生員, 監生, 貢生, 擧人 등의 학위소지자로서 사회적 특권을 누릴 수 있었고, 상급 시험인 進士試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습니다. 청조는 이들이 관계에 진출하기 위해 지옥과 같은 多단계의 과거준비에 얽매이게 유도함으로써 체제에 불만을 가질 겨를이 없도록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청대의 과거합격자 110만명 중 관료가 되었던 사람은 2만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만주족에 대해선 그 강건한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가능한 한 억제했고, 최우수 득점자 3명을 선발하는 최종시험인 殿試(전시)의 경우, 장원, 방원, 탐화에는 한인만을 뽑았습니다』


―청조가 만주에다 버드나무 울타리를 치고 다른 민족의 출입을 금지하는 封禁(봉금)정책을 강행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주족의 土風(토풍)을 지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청조는 발상지(본거지)에 사는 만주족이 한족식 집을 짓거나 한족교사를 초빙해 글을 배우는 것조차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中原에 들어간 만주족들은 元을 세운 몽골족처럼 한족에게 몰리면 언제라도 말을 타고 바람처럼 달려 고토로 되돌아간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중의 얘기입니다만 청조는 대만이나 산동반도 같은 곳은 쉽게 할양했지만, 조선에 대한 종주권은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아 청일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이 그들의 본거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지요』


―청조는 명조가 왜 망했나를 철저히 분석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해 나갔다고 합디다.
『명나라의 멸망 원인은 관료의 부패와 환관의 발호였습니다. 명조의 황궁에는 10만 명의 환관과 궁녀들이 있었고, 이들이 정치에 개입하여 국정이 문란해졌습니다. 청조는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500명으로 대폭 줄여 부패를 방지하고 황실의 비용도 크게 절감했습니다』


―그렇게 청신한 기풍의 진작을 강조했던 청조가 한족 여성의 纏足(전족)을 금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족은 後唐(후당) 시절 이후 차츰 번져 온 한족 여성의 폐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북방 기마민족이 만리장성 이남 지역으로 쳐들어와서 한족 여성들을 납치해 가는 짓 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전족을 했던 것입니 다. 젖먹이 때 전족을 하여 발의 성장을 억제시켜 놓은 여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뒤뚱거려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전족을 한 여성은 북방민족의 약탈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런데 명-청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족한 여성이 남성들의 성적 취향을 만족시킨다는 이유로 유한계층에서 크게 유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만주족 여성들의 전족만은 엄금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청조는 한족의 약화를 은근 히 조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經世致用學派의 몰락 원인
―청조 초기에는 黃宗羲(황종희), 顧炎武( 고염무) 王夫之(왕부지) 등 經世致用學派( 경제치용학파)가 일어나 사상의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특히 황종희가 지은 明夷待訪錄(명의대방록)에서는 천하를 사유재산으로 인식하는 家天下的인 관념의 전제군주제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重農抑商(중농억상 ) 정책에 반대하면서 상공업은 민생의 근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고염무는 명조의 멸망 원인을 新儒學(신유학) 때문이라고 보고 관념적인 宋性理學과 형이상학적인 陽明學을 비판했습니다. 또한 科擧(과거) 위주의 경직된 경전의 해석이 결국 중국인의 사고를 고정적인 틀에 묶어버려 정치적 현실을 직시할 능력과 이민족의 침략을 막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세치용학파가 건륭제 이후 갑자기 몰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청초의 경세치용학파는 어지러운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잘못된 현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明淸교체기에는 그와 같은 비판이나 저항이 가능했지만, 이후 사상통제가 강화되고 文字獄(문자옥)을 통한 탄압이 계속되자 학자들 사이에는 자신의 안전만을 위해 전전긍긍하는 풍조가 번져갑니다. 그리고 경세의 학문을 한다고 해도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면 당장 현실에 적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섣불리 當代史나 國事를 논하다가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주로 고대의 史籍과 고전의 내용을 조사하고 해석하는 考證學(고증학)만 발달합니다. 그러나 고증학의 전성은 사상의 빈곤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고증학이 본질적으로 정치와 현실에서 도피하다 보니 학문을 위한 고증이 아니라 고증을 위한 학문으로 本末이 전도되는 경향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문자옥은 진시황의 焚書坑儒(분서갱유) 이상의 사상탄압이었죠.
『청조는 변경이나 군사문제를 연구한 책, 夷狄(이적)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책, 명조를 칭송한 모든 논평서 등 모두 2320종의 서적을 禁書(금서)로 정하고, 이런 금서를 보관하거나 편찬한 수천 명의 사대부와 관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습니다. 王錫侯 (왕석후)라는 학자는 康熙字典(강희자전)을 비판하고 避諱(피휘)해야 할 청조 황제의 廟號(묘호)를 무엄하게 수록한 字典을 만 들었다고 해서 처형되었으며, 그 가족 21명은 노비가 되었고, 편찬을 후원한 江西巡撫(강서순무) 역시 처형되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였군요.
『그래도 明 태조 朱元璋(주원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명 태조는 朱氏 천하의 안전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그의 생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속셈 때문에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개국공신과 그 일족, 장령, 관료 등 수십만 명을 주살했습니다』

 
帝王學의 달인, 康熙帝와 擁正帝
―청조의 황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군주 는 누구였습니까.
『팍스시니카 시기의 康熙帝(강희제), 擁正帝(옹정제), 乾隆帝(건륭제)가 발군이었지요. 강희제의 재위기간은 60년간이지만 여덟 살에 등극했으므로 실제 그의 통치기간은 50년간입니다. 결단의 군주였던 그는 삼번의 난과 南明 정권을 평정하고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경감시켜 청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무인 기질의 그는 帝王學에 뛰어나 청조의 틀을 짰을 뿐만 아니라 朱子學과 數學, 자연과학 등에 정통한 好學人(호학인)으로서 중국 최대의 자전인 康熙字典(강희자전) 등의 편찬사업을 주도했습니다. 옹정제는 재위기간이 12년간으로 비교적 짧았지만, 親王들의 영향력이 잔존해 있던 팔기를 황제의 군대로 완전 장악했고, 巡撫( 순무) 이상의 지방장관이 중앙행정기관을 거치지 않고 황제에게 각종 정보를 직보하는 奏摺制度(주접제도)를 정착시켰으며, 太子密建法(태자밀건법)을 제도화하여 후계다툼을 원천봉쇄했습니다(태자밀건법은 후계자를 공표하지 않은 채 그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밀봉하여 황제 집무실 내의 「正大光明」이라 쓴 현판 뒤에 두었다가 황제의 붕어 후 대신들의 입회하에 개봉하여 후계자를 공표하는 제도). 또한 변방 소수민 족에게까지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사상을 전파하고 鄕約(향약)을 시행케 함으로써 체제를 강화시켰습니다.
옹정제의 용이주도한 개혁이 없었다면 건륭제의 治世 60년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옹정제가 등소평이라면 건륭제는 江澤民(강택 민)인 셈입니다. 건륭제의 문화사업 중 가장 빛나는 업적은 四庫全書(사고전서)의 편찬이었습니다. 사고전서는 經, 史, 子, 集 4부로 분류되어 있는데, 여기에 채록된 서적의 수가 무려 3500종, 8만 권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건륭제 치세의 화려함 속에는 퇴영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징후가 만주팔기 출신으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은 군기대신 和王申(화신)의 엄청난 부정부패사건으로 나타났지요. 건 륭제의 붕어 직후에 사사된 화신의 재산은 당시 청나라의 20년분 세수와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명말 관료정치의 부패가 재현된 것이군요. 창업기의 청신한 기풍이 사라지고 사치풍조가 만연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건륭제가 번영에 도취되어 집권 마지막 20년 동안에 개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건륭제의 집권 후기는 세제를 비롯한 경제개혁, 官紀(관기) 숙정 작업이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런데도 군주로서 총명이 흐려진 건륭제는 개혁의 시기를 놓친 것입니다. 건국 초기에 훌륭하게 작동했던 滿漢倂用制(만한병용제) 같은 것도 이 무렵엔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이루는 절묘한 메커니즘이 아니라 양측 모두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비현실적인 법과 제도를 고치지 않으면 어떤 체제든 망하게 되어 있지요. 최근의 우리도 금융법과 노동법을 고치지 않아 IMF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산업혁명을 이루지 못한 까닭
―중국은 인쇄술(종이), 화약, 나침반(자석 )을 발명한 전통적인 기술 선진국이었습니다. 프란시스 베이콘은 위의 3대 발명품에 대해 저술방식, 전쟁방식, 항해방식을 바꾸었다고 지적하고 어떤 황제나 종파나 천재도 그것들만큼 인간에게 더 큰 힘과 영향을 미친 것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더욱 이 팍스시니카 시기의 청조에서는 도시가 번성하고 상업이 발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하버드 대학의 석학 존 킹 페어뱅크 교수는 청조의 이런 현상을 「발전이 없는 성장」이라는 말로 집약시킨 바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상업자본이 중심이 되어 산업 혁명을 일으켰는데, 중국에서는 상인이나 수공업자를 천시했습니다. 관리가 되면 자손 몇 대까지 잘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상공업을 하겠습니까. 官 본위사회에서 과학자를 어디 우대합니까. 발명권 같은 것은 그냥 빼앗아버렸습니다. 이런 사회구조와 가치관 때문에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로의 발전에 실패했습니다. 또한 淸朝는 너무 오랫동안 무사태평의 시대를 누렸습니다. 그 시기에 유럽 제국들은 서로 피 터지게 전쟁을 했습니다. 산업혁명도 군사문화가 발달해야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은사인 로이드 이스트만 교수는 중국의 산업혁명을 가로막은 네 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매우 인상적입디다.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찬미했을 뿐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이 없었다. 서구 문명을 일으킨 파우스트 정신이 부족했다.
둘째, 상업을 천시하는 사회구조 때문에 유능한 인재가 文에 집중되었다. 상인도 돈을 모으면 文人의 지위를 얻으려 했다.
셋째, 사업에 대한 투자가 정부의 수탈 때문에 불안정했다. 公行이라고 불리는 길드 조직은 정부관료로부터 기부와 선물을 요구받았다.
넷째, 비교적 안정된 시장의 수요로 해서 자본집약적인 생산방법의 개발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이스트만 교수는 청조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동시대의 조선왕조는 그보다 더욱 심하지 않았습니까. 유교 유일사상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창조성과 독창성은 나오기 어려운 것입니다.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 국가의 경제 성공에 감명을 받은 서구 학자들 중에는 유교를 강력한 개발 이데올로기로 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허만 칸 같은 이는 산업화, 근대화를 추진할 때 유교 윤리가 서구의 프로테스탄티즘보다 낫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유교가 근대적 발전에 대립하는 요소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양성을 거부하는 유일사상 체계를 강요하는 데 있었던 것이지요』


―조선조는 왜 팍스 시니카 시대의 淸朝의 문물을 배우지 않고 외면했을까요.
『조선조는 淸朝와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지만, 내면적으론 淸을 괄시했지요. 그런 모습은 中國을 다녀온 正祖代의 실학자 박지원이 지은 「熱河日記」(열하일기)에 재미있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淸朝의 급작스런 몰락은 조선조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아시아의 질서가 급격히 붕괴되고 말았지요. 그런데 만약 19세기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에도 청조가 국체를 보전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면 열강에 노출된 조선왕조의 「티베트化」를 시도했을지도 모릅니다. 청조는 그들의 본거지이자 인접한 조선에 어떠한 형태로든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인터뷰에서는 청조의 쇠퇴 과정, 서구 열강의 침략, 태평천국 등의 반란, 自强을 위한 개혁, 청조의 멸망 등에 관한 부문까지 문답이 이뤄졌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그러나 그 대체적 줄거리와 任교수의 견해는 별항 기사「청사의 주요 내용과 평가 」에서 일부 소개되어 있다>●


「淸史」의 주요 내용과 평가
『淸朝의 모든 현상을 유기적으로 분석한 연구서 같은 개설서』
사회경제사 중시
淸朝는 중국 25왕조 중 근대사가 시작하는 중요한 시기에 중국대륙을 통치한 왕조이다. 청조의 통치시기에 중국은 세계 GNP의 30%를 차지할 만큼 전성기를 누렸으나 1842년 아편전쟁의 패전 이후 고통스런 체제 해체의 과정을 거쳤던 만큼 東아시아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부문에서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오늘날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소수민족인 만주족이 세운 정복왕조 淸을 일단 부정하고 출발했지만, 현대 중국을 꿰뚫어보려면 淸史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또한 淸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모양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임계순 교수의 「淸史」는 국내에서 처음 발간된 중국왕조의 單代史로서 크게 5부로 나뉘어 저술되었는데, 정치사 중심의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사회사와 경제사도 중시했으며, 중국사의 大家(대가) 로이드 이스트만(미국 일리노이 대학 교수:1993년 작고)의 제자답게 매우 분석적으로 저술되었다. 750페이지, 도서출판 신서원 발행.


제1부 청조의 흥기와 중국 정복
누르하치가 조직한 팔기제도, 後金(淸의 전신)의 사회구조와 경제발전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누르하치를 계승한 홍타이지가 어떻게 후금국을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개혁해 가며 王權을 강화하여 청조를 확장해 나가는가를 분석했다. 또한 明朝(명조)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만주족이 승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을 검토했다.


제2부 중앙집권적 유교관료국가 수립
만주족이 다수의 漢人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유화정책과 강압책, 전제군주권과 관료체제 확립, 사회경제 질서 및 구조의 개혁, 사상과 문화의 통제, 그리고 성공적인 대외관계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청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대외관계의 골격을 제시한 제2부는 청조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 부분이다. 특히 뛰어난 통치력을 지닌 康熙帝(강희제), 擁正帝(옹정제), 乾隆帝(건륭제) 등 초기의 황제들이 정복왕조로서 새로운 국면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면서 팍스 시니카를 이룩했는지에 대한 분석은 압권이다.


제3부 번영과 쇠퇴
청조의 영토 팽창정책과 邊方(변방)통치, 경제성장으로 인한 상공업과 도시의 발달, 전성기의 화려한 번영 속에 내재된 모순으로 인한 청조 통치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완현상 등을 분석하고, 서양 열강의 東進(동진)과 이로 인해 발생한 전쟁들과 太平天國(태평천국)의 봉기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내륙 아시아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중국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가진 多민족국가를 형성하게 된 과정 및 변방 민족에 대한 정책을 검토했다. 아울러 일부 지역의 경제가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혁명을 이룩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경제로의 발전도 실현하지 못했던 이유를 분석했다.


제4부 구질서 회복을 위한 自强운동
서양 열강의 침략과 태평천국의 출현으로 위기에 직면한 淸朝가 난국 극복을 위해 실시한 중흥정책과 洋務(양무)운동, 그리고 서구 열강과의 새로운 외교관계를 살펴보았다. 특히 열강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중국인이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포기하고 국제질서를 서서히 받아들이는 고통스런 과정이 소개되었다.


제5부 미완성의 개혁
청일전쟁 패전 이후 기존의 양무운동으로는 일본을 포함한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응할 수 없고 산적한 국내문제 역시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어 정치, 경제, 교육, 군사, 가치관까지 개혁하려는 變法維新(변법유신) 운동, 제국주의 열강에 저항하는 군중들의 義和團(의화단)운동, 그리고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개혁하여 국가위기를 타개하려 했던 新政(신정)운동 등에 대해 서술했다. 여기서는 변법운동의 실패 원인, 열강의 제국주의 침략과 그로 인한 反외세운동의 성격, 新政 개혁의 내용과 그 실패 원인, 그리고 새로운 지식계급의 대두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학계의 평가
임계순 교수의 「淸史」에 대해 서울여대 金澤中(김택중) 교수는 『청왕조 296년간을 일목요연하게 한 권의 單代史로 저술한 것은 국내 최초의 학문적 업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 민족과 만주족은 親緣性(친연성 )이 깊을 뿐만 아니라 조선-청의 관계사 부분은 아직도 논란이 많은 학문적 분야인만큼 淸史의 저술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과 淸史稿(청사고) 등 양국 의 사료를 엄밀하게 비교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이 부분은 앞으로 보완되어야 할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건국대 梁必承(양필승) 교수는 任교수의 「淸史」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국내의 역사 개론서가 거의 대부분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어 독창성이 미흡했는데, 淸史는 저자의 시각과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부문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淸朝를 분석하고 있다. 중국, 일본의 사료와 자료뿐만 아니라 서구 학계의 연구성과를 충분히 반영한 만큼 연구서와 같은 개설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기 좋은 책으로 만든 것은 저자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만「淸史」란 제목에서 느껴지는 인상처럼 정치사 중심의 구성에 다소 불만이 있는데,「위로부터 밑으로」가 아니라 「밑에서 위로」 보는 사회사적 접근이 아쉽다』


「淸史」의 저자 任桂淳은 누구인가
임계순 교수는 淸史 전공의 학자로서도, 맹인을 돕는 사회사업가로서도, 세 아들을 잘 키운 어머니로서도 성공한 인물이다. 任박사는 현재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사단법인 동아시아경제연구원 원장직도 맡고 있다. 인터뷰 직전, 조선일보 데이터 베이스의 인물란을 검색해 보니까 任교수와 관련한 기사가 의외로 많고 그 내용도 대단히 「모범적」이었다. 상당히 빡빡한 인터뷰가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 처음 만난 금년 56세의 任교수는 수수한 옷차림 때문인지는 몰라도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는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우선 任교수가 왜 매스컴에 각광을 받았는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1999년 12월29일자 일간신문들을 보면 任교수는 생활개혁실천협의회(의장 李世中 변호사)가 「건전한 가정의례를 치른 사회지도층 인사」로 선정한 7인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그 까닭은 알아보니 「그런 방법도 있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결코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아들의 결혼식 때 청첩장 같은 것은 아예 돌리지 않고 신랑과 신부 양가를 합쳐 75명의 친지만 초청해서 조촐하게 예식을 올림으로써 허례허식에 물든 우리 사회에 모범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任교수와 함께 이름이 공개된 인사는 고건 서울시장, 손길승 SK회장, 황규환 아리랑TV 사장, 주성호 목사 등이었다.
任교수의 부군은 현재 명지대학교 부총장직을 맡고 있는 趙伯濟(조백제) 박사이다. 趙교수는 미국 일리노이 대학의 회계학 박사로서 1993년 한국통신의 사장으로 영입되어 1기 임기 동안 경영개혁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다음 미련없이 학계로 되돌아온 인물이기도 하다.
2000년 5월11일자 조선일보에는 『미국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과학자」로 뽑힌 한국인 젊은이가 「합법적으로」 군대를 빠질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한국 육군에서 2년간 복무, 현재 만기제대를 10여 일 앞두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조백제 부총장과 임계순 교수의 장남 趙상준 박사로서 그는 1998년 5월 미국 아이오와 대학에서 신경과학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귀국, 육군에 입대하여 백골부대의 兵으로 복무했다. 趙상준 박사는 1970년 미국에 유학중이던 趙교수와 任교수 사이에서 태어나 언제라도 미국 국적을 선택하기만 하면 屬地主義(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미국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주위에서는 『첨단 과학을 하는 젊은 연구자로서 2년의 공백은 치명적』이라면서 그의 입대를 만류했지만, 그는 『스스로 떳떳하고 싶다』며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군복무 중이던 1999년 5월, 그가 「미국과학자연구명예학회」(Sigma-X)에 의해 「차세대 과학자」로 선정돼 그 학회의 회원이 되자, 백골부대 장병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또 영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는 제대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분자생물학 분야의 권위자인 예일대학 제나 바우나 교수가 진행중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任교수는 남을 돕는 데도 헌신적이다. 그녀가 장애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하게 장애자 학생들과 함께 대학기숙사 1층에 입주하여 그들과 가까이에서 생활했던 것이 남을 돕는다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그녀는 외국인으로서 영어문장의 한계 때문에 대단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데, 아무런 대가가 없는데도 논문작성에 도움을 주던 옆방 학생의 봉사정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귀국 후 任교수는 우리 사회의 저소득 맹인들을 돕기 위해 「사랑의 빛」이란 책을 써서 가톨릭 출판사에서 3판까지 발간하여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는가 하면 동창생인 이화여대 음대 교수로 구성된 자선음악회의 정기적 개최를 지난 7년 동안 주도해 왔다. 그 수익금은 수억원에 이르렀는데, 모두 맹인의 재활 교육과 自立기금으로 사용되었다.
任교수는 1967년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同대학원에서 중국사 전공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에는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중국사의 세계적 권위자 로이드 이스트만 교수의 지도 아래 「淸朝八旗駐防의 興衰(1644~1911)」란 독특한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기 전인 1991년 8월부터 1992년 8월까지 북경대학 역사학과에서 한국 교육부의 파견교수로서 연구활동을 하면서 河南省(하남성) 洛陽大學(낙양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특히 중국 체류중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하여 저술한 「청조팔기주방성쇠사」는 중국의 세계적인 출판사인 三聯書店(삼련서점)에서 1993년 중국어로 출판되었다. 이 저서는 전문서적임에도 재판되었으며, 편집인은 중국정부로부터 편집인상을 받았다. 任교수는 전문적인 논문과 저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중국관계 서적의 저술로도 명성을 얻었다. 1994년 김영사에서 출판되었던 「한국인의 짝사랑 中國」은 베스트셀러 제4위에 오르기도 했다. 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기 직전인 1997년에는 저서 「중국의 如意珠 홍콩」을 한국경제 신문사에서 출판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저서는 1994년 6월, 미국의 잭 켐프 상원의원을 수행하여 북경, 상해, 광주, 홍콩 등지를 방문하면서 만난 중국 고위관료와 학자들의 발언과 그 동안 수집된 자료를 종합하여 집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