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망국의 몇 가지 풍경 8 안중근, 일본 근대의 심장을 쏘다

구름위 2013. 6. 2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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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 지배받는 한국 내각 … 이토는 불가능을 꿈꿨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상반된 길을 걷던 두 나라의 근대사가 러시아령인 하얼빈에서 충돌한 것이었다. 근대화 성공의 여세로 이웃 국가를 강점하려던 가해자 일본에 던진 피해자 조선의 저항이었다. 의병으로 변신한 교육자 안중근이 제국주의로 변한 근대 일본에 동양 평화란 길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왔다.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가 의장대의 사열을 요청하자 이토는 예복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사양하다가 거듭 요청하자 받아들였다. 하얼빈 역사의 한 찻집에서 이토를 기다리던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安應七歷史)에서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찻집에 앉아서 차를 두서너 잔 마시며 기다렸다……동정을 살피다가 스스로 ‘어느 순간에 저격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십분 생각했으나 결정하지 못했다. 그 무렵 이토가 하차하자 각 군대가 경례하고 군악 연주 소리가 하늘을 울리고 귀를 때렸다. 그때 분한 기운이 터져 일어나고 3천 길 업화(業火)가 머릿속에서 치솟아 올랐다.

 

“무슨 까닭으로 세상일은 이렇게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 나라를 강탈하고, 인명을 잔인하게 해치는 자는 이처럼 기뻐 날뛰면서 아무런 꺼림도 없는데, 죄 없고 어질고 약한 인종은 거꾸로 이런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다시 더 말할 것 없이 곧 큰 걸음으로 용감하게 걸어나가서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까지 갔다. 러시아 일반 관리들이 호위하고 돌아오는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작은 노인이 이렇게 염치도 없이 감히 천지 사이를 돌아다니는가……하고 곧 단총을 뽑아 그 오른쪽을 향해서 4발을 쏘았다.(안응칠역사)

 

파란만장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예순여덟 인생은 러시아령 하얼빈에서 서른 살의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에게 이렇게 끝이 났다. 안중근은 자서전(안응칠역사)에서 “체포될 때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대한만세(大韓萬歲)’를 세 번 외친 후 정거장 헌병 분파소로 잡혀 들어갔다”고 썼다.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이토를 저격한 것이 한국에 손해였다는 견해도 있었다. 이토를 수행했던 일본 귀족원 의원 무로다 요시아야(室田義文)가 “범인은 한인이며 곧 체포했다고 고했더니 이토가 이를 이해하고 ‘바보 같은 놈’이라고 말했다”(室田義文 聽取書)는 목격담이 이런 견해를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토의 사위 스에마쓰 노리즈미(末松謙澄)는 강점 후의 식민지 통치구조에 대한 이토의 구상을 이렇게 전했다. “한국 8도에서 각 10명씩 의원을 선출해 중의원(衆議院)을 조직하고, 양반 중에서 50인의 원로를 호선(互選)해 상원을 조직하고, 한국 정부대신은 한국인으로 조직해 책임내각이 되게 하고, 정부는 부왕(副王)의 지배를 받는다”(末松子爵家所藏文書)는 것이다.

 

이토가 살아있었다면 이런 구상이 실현되었을지 여부는 차치(且置)하고라도 이 역시 명분과 실상이 달랐던 이토의 모순을 보여준다. 부왕(副王)이란 군주를 대신해 식민지와 속주(屬州)를 통치하는 총독(viceroy)을 뜻한다. 일왕이 파견한 총독의 지배를 받는 한인 내각으로 원활한 통치는 불가능했다. 대국 중국과 국경을 맞대면서도 한 번도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지 않았던 민족이었다. 고종 아래 있었던 이완용 친일내각도 용납받지 못했는데 일본 총독 아래 있는 내각이야 말할 나위가 없었다.


고종·순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을 강점하는 대신 입헌군주제를 설립해 의회에 입법권과 내각 조각권을 주는 정치개혁이라면 모를까 한국을 강점하는 순간 일제가 구상한 어떤 통치조직도 한국민의 격렬한 반발을 사게 되어 있었다. 이토의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매국 친일파들은 조금 더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에 대한 일반 민중들의 반발은 그만큼 더 거셌을 것이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이토를 사살한 15가지 이유를 기술했는데 ‘한국 민 황후를 시해한 죄, 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5조약(을사늑약)과 7조약(정미늑약)을 체결한 죄,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한 죄,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군대를 해산시킨 죄, 교육을 방해한 죄,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등이다. 이 중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에 이토가 직접 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나머지는 모두 직접 책임이 있었다. 을사늑약과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은 모두 이토가 주도한 것이다.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기 원한다고 선전한 것도 이토였다. 안중근 수사 기록인 공판시말서(公判始末書)에 따르면 안중근은 “‘의병’ 참모중장(參謀中將)으로서 결행한 것”이라고 말하고, 또 “이번 거사는 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의병’과 ‘동양 평화’가 거사의 핵심 이유였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은 의병전쟁의 연장선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 계봉우(桂奉瑀)는 안중근전에서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하얼빈 정거장에서 독립전쟁을 시작하여 적장 이등박문을 쏘아 죽이고 대승리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이 자서전에서 “1907년 이토가 한국에 와서 7조약을 강제로 맺고, 광무 황제를 폐하고 군사를 해산시켰다……나는 급급히 행장을 차려 가지고 가족들과 이별하고……러시아 영토로 들어가……”라고 회고했듯이 고향 진남포에서 삼흥(三興) 학교와 돈의(敦義) 학교를 운영하던 교육자 안중근을 의병 중장으로 만든 인물은 이토 자신이었다.

 

의병에 가담한 안중근은 1908년 6월께 러시아령 연해주 연추(煙秋·클라스키노)의 의병창의소를 떠나 두만강 하구의 수도(首塗)를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안중근은 함경도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접전했는데, 박은식은 안중근전에서 이때 세 차례 전투에서 50여 명을 사살하고 1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전하고 있다. 안중근은 이때 생포했던 포로를 풀어주었다가 의병 장교들로부터 항의를 받는데, 그 직후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숱한 고초를 겪는다.

숱한 고초 끝에 러시아령으로 돌아온 안중근은 1909년 3월 5일 연추의 하리(下里) 마을에서 김기룡(金起龍)·황병길(黃炳吉)·백규삼(白奎三) 등 11명의 동지들과 왼손 무명지 한 마디를 자르는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했다. 동지들은 붉은 선혈로 태극기에 ‘大韓獨立(대한독립)’이란 네 글자를 썼는데, 안중근은 재판에서 동의단지회가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결성한 단체라고 진술하고 있듯이(공판시말서) 이토 저격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 손가락을 끊은 이유도, 이토를 저격한 이유도 한국 독립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해서였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동양에서 일본의 위치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머리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고 시인했을 정도로 일본 근대사의 성취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정책은) 과거 외국에서 써오던 수법을 흉내 내는 것으로 약한 나라를 병탄하는 수법”이라고 비판한 대로 일본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길은 동양 평화주의자 안중근의 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는데, 그 핵심은 한·중·일 세 나라가 각기 독립국을 유지하는 대등한 상태에서 서로 협력하면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고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를 성취하자는 것이었다. 여순항을 개방해 일본·청국·한국의 3국 대표가 공동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고, 여순항에 3국 대표를 파견해 세계평화회의를 조직하자고도 주장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안중근은 재판장 마나베(眞鍋十藏)와 고등법원장 히라이시(平石)에게 “동양평화론을 완성하고 싶으니 사형 집행 날짜를 한 달 정도 늦춰 달라”고 요구했고 히라이시는 “설사 몇 달이 걸리더라도 특별히 허가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이를 사실로 믿은 안중근은 공소권 청구를 포기하고 ‘①서문(序文) ②전감(前鑑) ③현상 ④복선(伏線) ⑤문답’ 순서로 구성된 동양평화론 집필에 전념했으나 일제는 전감 집필 와중인 1910년 3월 26일 약속을 어기고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안중근은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일본이 러일전쟁 때 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약속해 놓고도 한국의 국권을 빼앗고 만주 장춘 이남을 점거했다”고 일본의 위약을 비판했다.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동양 평화가 이렇게 깨어지니 백 년 풍운이 어느 때에 그치리오”라고 탄식했다. 일제의 식민지 팽창 정책과 그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될 아시아의 고통스러운 미래를 정확히 예견했다. 그래서 안중근의 총성은 동양 평화란 높은 사상으로 제국주의라는 뒤틀린 길로 매진하던 일본 근대사에 던진 피압박 민족의 외침이었다.

 

이토에게 쫓겨난 고종, 이토 빈소 찾아가 조문 ‘굴욕’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강제 합병으로 달려가던 정국에 여러 충격파를 던졌다. 매국친일파들은 공포심에 휩싸여 더욱 적극적인 합방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일제가 외교권을 강탈하면서 간도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10만 명 이상 조선 주민들의 처지도 극히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안중근의 이토 사살에 매국친일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통감부문서'의 헌병대 기밀문서[憲機]는 ‘이완용이 이토 공(公) 피해 이후에 눈에 띄게 공포심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안중근이 일제 검찰의 신문에서 “이완용은 망국적 거괴(巨魁)로서 이토에게 자신의 직무를 팔아넘겼다”('안응칠 제5차 진술내용')라고 비판한 것처럼 다음 표적은 이완용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마냥 위축되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이토에 대한 내각 차원의 성대한 추도식과 장례식을 준비했다. 헌병대 기밀문서[憲機: 2128호]에 따르면 11월 4일 오후 2시부터 3시45분까지 서울 장충단에서 이토에 대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전·현 내각 대신과 황족 원로, 궁내부를 비롯해 각 부의 고등관과 육군 장교, 황후와 엄비(嚴妃)가 보낸 사신이 참석했다. 같은 문서에선 “그 성대함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성회(盛會)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관·공립을 불문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참석시켜 추도회장을 채웠던 ‘조작된 성황’에 불과했다. 그뿐만 아니라 친위부(親衛府)의 보병 2개 중대를 참석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정도로 팽팽한 긴장 속에서 치러졌다.


 
추도식 직전 매국친일파들은 태황제 고종으로 하여금 통감관저에 마련된 이토 히로부미의 빈소에 가서 직접 조문하게 하려고 계획했다. '통감부문서' 1909년 11월 1일의 '태황제가 통감관저에 행림하신 내부 사정(太皇帝統監邸へ臨幸の內情)'이란 문서가 그 시말을 전해준다. 고종은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하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내가 직접 통감관저로 가서 조문한다면 국민들이 어떤 감정을 갖겠느냐. 칙사를 보내는 것이 적당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국왕의 물품 등을 조달하는 승녕부(承寧府) 총관(摠管) 조민희(趙民熙)와 농상부장관 조중응(趙重應)이 짠 후 조민희가 ‘직접 조문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자 11월 2일 직접 조문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고종은 황후 민씨 사후 부인 역할을 하던 엄비(嚴妃)가 추도식에 직접 가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면서 상궁 김석원(金錫源)과 황태자 유모 2명을 보내는 것으로 조정했다. 고종은 11월 2일 통감관저로 가서 자신의 외교권과 왕위를 빼앗은 이토의 죽음을 애도했다.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경시총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소네(曾荒助) 통감에게 전한 경찰 비밀문서[警秘: 301호]는 11월 5일의 이토 국장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일본인은 물론 한인도 조기를 게양했지만 한인들은 경찰의 경고 및 한성부윤의 명령에 따른 조치였다는 내용이다. 오후 2시 장례식에는 1만여 명이 참석했지만 강제 동원된 84개 교의 학생 5000여 명이 포함되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비롯해 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李載冕)·준용(埈鎔) 부자,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탁지부 대신 고영희(高永喜), 이하영(李夏榮)·민영기(閔泳綺)·권중현(權重顯)·이지용(李址鎔)·윤웅렬(尹雄烈)·임선준(任善準) 등 대한제국 강점 후 훈작을 받는 매국친일파들이 대거 참석했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조문(弔文)과 순종 비의 삼촌인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尹德榮) 명의의 조사가 낭독되었다.

 

이완용 내각과 친일 경쟁을 벌이던 일진회는 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인 오후 2시 서대문 밖 연설당(演說堂)에서 회장 이용구가 회원 300여 명을 이끌고 참배하고 한석진(韓錫振)이 제문을 낭독하는 등 따로 행사를 치렀다. 일진회는 이토와 이노우에(井上馨) 등 문치파의 점진합방론에 반대하면서 야마가타(山縣有朋)·가쓰라(桂太郞)·데라우치(寺內正毅) 등 무단파(武斷派)의 즉각합방론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일진회는 도야마 미쓰루(頭山<6E80>)와 일진회 고문이었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같은 낭인들이 조직한 흑룡회(黑龍會)와 손잡고, 점진합방론을 주장하는 이토의 통감 사직 운동도 전개했던 터였다. 일진회는 이토 사망을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할 호기로 여겼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이후 간도(間島)지역 조선인들이 큰 곤란에 처했다. 간도는 현재의 중국 지린(吉林)·랴오닝(遼寧)성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 북간도의 통칭이다. '통리교섭 통상사무아문 일기(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日記)'> 등에 따르면 고종 20년(1883) 청나라의 길림·훈춘 초간국(吉林琿春招懇局) 진영(秦煐)과 청나라 돈화(敦化)현 지현(知縣) 조돈성(趙敦誠)이 함경도 경원부와 회령·종성부에 공문을 보내면서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두 청국 관원은 “올해 추수를 마친 후 9월 안으로 ‘토문(土門) 이북과 이서(以西) 지방의 조선 사람들을 모두 쇄환(刷還: 외국 등지에 있는 사람을 데려감)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간한 토지가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에 명시된 토문강과 두만강 사이의 조선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숙종 38년(1712: 강희 51년) 두 나라가 백두산 분수령에 “(양국 경계는)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라고 세운 '백두산정계비'해석 문제가 불거졌다. 청나라는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지만 토문(土門)과 두만(豆滿)은 음과 뜻이 모두 달랐다.'청사고(淸史稿)'길림(吉林)지리지' ‘영안부(寧安府)’조에도 “훈춘강에서 동북으로 토문령이 나온다(琿春河, 出東北土門嶺)”며 토문을 만주 지역의 지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주민들은 직접 백두산정계비를 찾아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한 뒤 종성부사 이정래(李正來)에게 청국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호소했다. 이때 경원부에 있던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이 종성 사람 김우식(金禹軾)을 백두산으로 보내 정계비와 토문의 원류(源流)를 조사하라고 명했다. 김우식은 백두산정계비와 토문의 발원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백성들의 주장이 맞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어윤중은 고종 20년(1883) 7월 종성부사 이정래에게 돈화현에 공문과 함께 '토문강과 그 이남 강토에 대한 옛 지도 모사본과 새 지도(土門江·分界江以南 舊圖移摸·新圖)'백두산정계비 탑본(榻本: 탁본)'을 보내게 했다. 어윤중은 양국에서 각자 관리를 파견해 '백두산정계비'와 강의 발원지를 답사하고 그 내용에 따라 국경을 분별하자고 요구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1903년 의정부 참정 김규홍(金奎弘)은 고종에게 간도시찰관 이범윤(李範允)을 북간도(北間島) 관리(管理)에 임명하자고 요청했다. 그러면서 “북간도는 바로 우리나라와 청나라의 경계로…수십 년 전부터 함경북도 연변의 각 고을 백성들이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 수만 호에 10만여 명이나 되는데, 청나라 사람들에게 혹독한 침탈을 받고 있다('고종실록' 40년 8월 11일)”고 말했다. “백두산정계비 이후 토문강 이남 구역은 우리나라 경계로 확정되었다”는 설명을 덧붙여서다. 조선은 서간도를 평안북도에, 동간도(북간도)를 함경도에 편입시키고 이범윤을 북간도 관리로 임명해 간도에 상주시켰다. 이후 간도 백성들은 대한제국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일제는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어 남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도문강(圖們江)을 청·한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의 발원지역은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되 석을수(石乙水)를 양국의 경계로 할 것”(제1조)이라고 정해 토문(土門)을 도문(圖們)으로 둔갑시켰다. 1907년 12월 28일 하야시(林) 외무대신은 소네부통감에게 보낸 '한·청(韓淸) 국경 논쟁의 사적(史的) 배경 설명과 앞으로의 해결과제 지시'에서 청나라 진영(秦煐)이 석을수를 국경으로 주장한다고 말했는데, 일본 측은 이를 그대로 인정해준 것이다.

 

1909년 9월 2일 일본의 고무라(小村) 외상은 소네통감에게 '청일간 간도 문제 해결에 따른 간도파출소 철퇴 대비 건'이란 문서를 보내 “간도 문제에 관해서는 청국의 영토권을 승인하는 것 외에 또 잡거 한국인에 대한 재판권을 청국에 주고…간도 주재 파출소는 머지않아서 철퇴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09년 10월 19일 통감부 총무장관 이시즈카(石塚)는 고다마(兒玉) 서기관(書記官)에게 '간도파출소 철퇴의 건'을 보내 “간도파출소는 이달 27일경 철퇴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렇게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한국의 영토 간도를 불법적으로 팔아먹음으로써 현대 한국사의 지형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