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망국의 몇 가지 풍경 7 평민 이토, 수상이 되다

구름위 2013. 6. 2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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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군란 겪던 임오년, 이토는 유럽서 헌법을 배웠다

 

조선이 일본과 한·일수호조규라는 새 조약을 체결한 1876년까지만 해도 조선 역시 많은 기회가 있었다. 일본은 평민 출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내각 수상에 오를 정도로 일관되게 근대화의 길로 매진했다. 반면 조선은 근대적인 정치·사회체제 수립에 실패한 채 극도의 혼란에 시달렸다. 

 

 

하급무사 아시가루(足輕)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필적할 만한 입지전적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요인이 몇 가지 있다. 그 몇 가지 요인은 일본 근대사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설명해 준다. 첫째는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松下村塾) 출신에다 영국 유학 경험이란 교육과정이었다. 둘째는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란 점이었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것이 이토 인생의 전기가 되었지만 막상 요시다 쇼인은 구마모토(熊本)의 도도로키 부베(轟武兵衛)에게 써 준 소개장에서 이토를 “제 수하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낮은 자…다른 이보다 재능이 떨어지며 학문도 미흡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토는 송하촌숙 출신이란 게 자기 인생의 전기가 되었지만 훗날 요시다를 칭송하는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신분이 낮았던 이토로선 무사 중심의 봉건 지배질서가 유지되는 한 미래가 없었다. 이토가 요시다 쇼인의 존왕(尊王)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양이(攘夷) 사상을 저버리고 영국 유학 후 적극적인 개화론자로 변모한 이유다. 이토 같은 평민 출신에게는 무사 중심의 봉건제가 무너져야 미래가 있었다. 국가 제사장에 지나지 않던 천황 역시 존왕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정권을 장악해야 실질적으로 전국적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존왕을 내세운 조슈번과 사쓰마(薩摩)번 연합세력이 천황을 명분 삼아 전국적 복종을 강요한 정치체제였다. 조슈번 출신인 데다 영국 유학 경험이 있던 이토는 출세가도를 달려 1875년에는 내무경(內務卿)의 지위까지 오른다. 이때 이토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상의해 조선과 새 조약을 맺기로 하고 그 적임자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를 점찍었다.


 

일본은 3년 전인 1873년 이미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만 아직 조선을 상대로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감행할 상황은 아니었다. 구로다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에게 조선에 가자고 했을 때 이노우에가 거절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일본 내에서도 새 조약 체결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았다. 일본도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다. 이토와 함께 영국 유학을 했던 이노우에는 이토의 설득을 받고서야 구로다와 함께 조선으로 향했다.

 

고종 13년(1876년) 1월 격렬한 반발에 부딪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고종은 개방에 적극적이었다. 이때 구로다는 조선 대표 신헌(申櫶)에게 ‘재작년에 정한론이 일어 수만 명이 출병하려 했었다’고 위협하면서 미리 준비한 13개 조의 조약안을 내놓았다. 고종이나 핵심 관료들이 신조약의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응했다면 이후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대원군의 모든 정책을 뒤집는 것을 정책의 대강으로 삼았고, 13개 조 조약문에 대한 세밀한 검토도 없이 무관 출신인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신헌은 전권을 사양하면서 세부 지침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나는 경을 장성(長城)같이 믿고 있다”며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신조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숙지되지 못한 상태에서 1876년 2월 12개 조관(條款)으로 이루어진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가 체결되었다. 대부분 일본이 작성한 원안 그대로였다.

 

“조선국은 자주국으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1관은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려는 일본의 속셈에 지나지 않았다. “백성들이 각자 임의로 무역할 때 양국 관리들은 간섭·제한·금지할 수 없다”는 9관은 자주관세권을 포기한 것이고, 개항장에서 일본인들의 치외법권을 인정한 10관도 불평등조항이었다. 500여 년간 왜관을 통해 시종 우월적인 위치에서 일본과 통상했던 조선이 이때 굳이 불평등조약을 새로 맺을 이유는 없었다. 미국의 공격을 물리친 신미양요가 발생한 지 불과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개방이란 방향은 옳았지만 그 방식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이었다.

 

일본은 페리의 흑선에 의해 강제 개항된 지 20년 만에 거둔 뜻밖의 성과에 고무되어 구로다에게 2000엔, 이노우에에게 1500엔의 상금을 주었다. 조선은 개국 초부터 전국적 규모의 호적이 있었지만 일본은 1872년에야 전국적 규모의 호적을 작성할 수 있었다. 이때 황족(皇族:28명), 화족(華族:2900여 명), 사족(士族:무사:154만여 명), 평민(3100여만 명)으로 나뉘는데, 지배층의 신분적 특권은 어느 정도 잔존시켰지만 사농공상의 구분이 없어지고 직업 선택과 다른 신분 간 혼인이 허용되면서 지배층은 크게 반발했다.

 

한·일수호조규를 체결한 1876년에 칼 착용을 금지하는 폐도령(廢刀令)이 내려지자 ‘게이신토(敬神黨)의 난’이 발생한 것을 비롯해 그해에만 하기(萩)의 난, 아키즈키(秋月)의 난 등이 잇따랐다. 이듬해에는 정한론을 주창했던 메이지 정부의 참의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서남전쟁(西南戰爭)을 일으켜 서해도(西海道) 전체가 전란에 휩싸였다. 오쿠보 도시미치 계열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이끄는 정부군 6만 명과 사이고군 4만 명이 맞붙은 커다란 내전이었다. 그해 9월 시로야마(城山)에서 사이고가 전사하면서 내전은 끝나지만 사이고군은 6200여 명, 메이지 정부군은 4600여 명이 각각 전사했다.

 

암살사건도 잇따랐다. 서남전쟁 때 정부군을 지휘했던 오쿠보는 1878년 5월 시마다 이치로(島田一郞) 등 여섯 명의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시마다 등은 ‘참간장(斬奸狀:간신의 목을 베다)’을 작성해 메이지 정부 실세들을 극렬하게 성토했는데, 이토와 구로다 기요타카도 간리(奸吏)로 규정지었다. 6인의 무사는 참수형을 당했지만 사이고가 영웅시되면서 이들도 영웅으로 추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해 8월에는 이와모토 도라키(岩本寅喜) 등이, 이듬해 5월에는 고바야시 마키타(小林牧太) 등이 이토 암살을 획책하는 등 암살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신정부 내의 스캔들도 적지 않았다. 강화도조약 체결의 주역 구로다는 1878년 3월 만취 상태에서 귀가하다 자신을 정중하게 맞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인을 칼로 베어 죽였다. 이 사건을 게재한 단단진문(團團珍聞)은 판매 금지를 당했지만 소문은 급속히 번져 나갔다.

 

이런 내우외환 속에서도 메이지 정부는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방향만은 잃지 않았다. 그 요체는 헌법 제정과 의회 설립이었는데, 의회를 설립하려면 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국민 참정권이란 개념조차 미미하던 시절이었지만 1876년 9월 메이지 천황은 원로원에 헌법 초안 작성을 명령했고, 1881년에는 10년 후인 1890년 의회를 개설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그러자 민권 사상이 확산되면서 정한론자였던 이타가키(坂垣退助)가 ‘사민(사농공상) 평등’을 주창하는 자유민권론자로 부각돼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고종 19년) 이토는 훗날 총리가 되는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등을 대동하고 다시 유럽으로 가서 헌법을 연구했다. 이토가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예방해 “프러시아 헌법이 일본에 모범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의회 권한이 강한 영국식보다 황제 권한이 강한 독일식 헌법을 모델로 삼았다.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독일 헌법학계의 권위자인 베를린대학의 루돌프 폰 그나이스트(Rudolph Gneist) 교수를 소개했다. 이토는 또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 교수에게도 헌법에 대해 배웠다.

 

1883년 8월 귀국한 이토가 헌법 제정에 박차를 가하던 1884년 12월,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의 예상과 달리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청군이 진압에 나섰고 일본 측에선 이소바야시 신조(磯林眞三) 대위 등 30여 명이 전사했다. 이토는 천진(天津)으로 가서 1885년 3월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갑신정변 매듭을 위한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그중 제3항이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 문서로 알려야 한다(行文知照)’는 상호파병 통보조항이었다. 바로 이 조항이 고종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의 출병을 요청했을 때 일본군이 자동 출병하는 근거로 악용된다. 일본으로 귀국한 이토는 그해 12월 관제 개혁으로 신설된 초대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

 

평민 출신이 당대에 내각 총리대신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압축해 말해 준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조선 정벌에 나섰다가 몰락했던 것처럼 이토도 조선 침략에 나섰다가 대한국인(大韓國人) 안중근을 만나게 된다.

이토가 日헌법 완성한 순간, 아시아의 고통은 시작됐다

 

이토 히로부미는 명분과 실리를 다 가지려던 정치가였다. 근대 헌법을 만들면서 의회 중심이 아니라 천황 중심의 헌법을 만들었고, 대한제국의 즉각 병합에는 반대한다면서도 일본의 한반도 강점 논리를 만들었다. 그런 모순된 정치행위의 종말이 대한국인 안중근을 만나는 것이었다.

 

 

일본은 1873년(메이지 6년) 2월 11일을 초대 신무천황(神武天皇)의 즉위일이라고 선포했다. 현재 신무천황은 실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천황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메이지 천황의 권위를 초대 천황에게서 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즉위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해 이른바 기원절(紀元節)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1889년 2월 11일 헌법 발포식을 했다. 메이지 천황은 궁중 삼전(三殿)에서 하늘과 역대 천황들에게 헌법을 고하는 것으로 의식을 시작해 이세(伊勢)신궁과 야스쿠니(靖國)신사 등으로 사신들을 보내고,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인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의 무덤에도 이 사실을 고했다.

 

헌법 발포식의 하이라이트는 메이지가 새 정전(正殿)에서 전통 복장을 벗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후 내각 총리대신에게 헌법을 하사하는 의식이었다. 헌법이 천황이 국민에게 내리는 선물이란 의미였다.

 

 
이 행사로 메이지는 허수아비 제사장에서 명실상부한 국가원수로 발돋움했다. 이날 메이지 헌법을 하사받은 총리대신은 1876년 한·일 수호조규를 체결했던 구로다 기요타카(<9ED2>田<6E05>隆)였다. 그러나 사실상의 주역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1889년 1월 헌법 제정에 관한 공으로 최고훈장인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헌법도 이토가 만든 것이었고, 헌법 발포 의식도 이토가 주도한 것이었다. 이토는 헌법 연구에 전념할 시간을 갖기 위해 내각 총리대신에서 보다 한가한 추밀원(樞密院) 의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었다.

 

이토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의회의 권한이 강한 영국식 헌법을 구상했던 민권론자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를 일축하고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萬世一系) 천황이 통치한다(제1조)”고 규정한 전제 군주헌법을 만들었다. 메이지 헌법 제3조는 “천황은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고, 제4조는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괄한다…”는 조항이다. 훗날 아시아의 많은 민중은 물론 일본 민중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는 단초가 12조의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編制) 및 상비군의 숫자를 결정한다”는 조항이다. 원래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육해군의 편제는 칙령(勅令)으로 정한다”고 돼 있었다. 이 경우 칙령을 심의하는 추밀원에 군부 통제권이 있게 되지만 이토가 천황에게 ‘육·해군의 편제와 상비군 숫자’ 결정권까지 넘기면서 군은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것이 쇼와(昭和·1926~89년)시대에 군부가 내각의 통제권을 벗어나 천황에게만 소속된다는 통수권(統帥權) 개념으로 각종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된다.

 

역으로 일본군이 벌인 모든 침략전쟁은 천황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가 자동적으로 성립한다. 1890년 7월 1일 총선거가 실시되면서 만 스물다섯 살 이상으로 국세 15엔 이상을 납부한 남자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는데, 전체 인구의 약 1%에 불과했다. 그해 11월 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첫 의회가 열렸다. 귀족원 의장은 평민 출신의 백작 이토 히로부미였고, 중의원 의장은 향사(鄕士·지방토착무사) 출신의 나카지마 노부유키(中島信行)였다. 이처럼 일본은 헌법 공포와 총선거를 통해 근대국가에 한발 더 다가갔는데 이토가 이 모든 작업을 총괄했다.

 

이토는 평민 출신이면서 전제 군주헌법을 제정하고 귀족원 의장이 된 것처럼 상호 모순된 정치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에 대해서도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쓰라 다로(桂太<90CE>) 등의 개전론에 맞서 외교협상론을 주장해 ‘공러병(恐露病)’에 걸렸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토의 대러시아 협상론의 요체는 만주와 한반도를 교환하자는 ‘만한교환론(滿韓交換論)’이었다. 만주는 러시아가, 한반도는 일본이 차지하자는 것으로서 야마가타의 군사 해결 노선과 방법만 달랐다. 1903년(고종 40년, 메이지 36년) 4월 이토는 야마가타의 저택에서 가쓰라,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90CE>)와 회담을 하고 4개 항을 합의하는데, 3항이 ‘대한제국에 대한 우선권을 러시아가 인정하게 한다’이고, 4항이 ‘일본은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우선권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대한제국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이었다.

전쟁이든 외교든 수단이 문제일 뿐 대한제국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일본의 강점이란 것이므로 이토는 한국과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 내각은 1905년 10월 2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하야시 주한 공사만으로 외교권을 뺏는 대과제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칙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만한교환론’의 구상자 이토가 칙사가 되면서 한국과의 악연이 본격화된다.

 

이토는 1905년 11월 고종을 알현해 외교권 박탈을 통보하는데, 이토가 귀국해서 천황에게 보고한 대한제국봉사기사적요(大韓帝國奉使記事摘要)는 ‘위장된 온건론자’ 이토의 진면목을 잘 보여준다. 을사늑약에 고종 황제가 불만을 표시하자 이토는 “폐하는 불만을 말씀하시지만 제가 한번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대한제국은 어떻게 오늘날까지 생존할 수 있었습니까? 또 대한제국의 독립은 어떻게 보장되었습니까? 폐하는 그러한 사정을 알면서도 불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은 “대외관계 위임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지만 일본이 그 내용의 실제를 취하는 대신 한국에도 형식적인 명목은 남겨 달라”며 “예를 들면 사신의 왕래”라고 말했다. 형식상의 외교권만이라도 달라는 고종에게 이토는 “외교란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거절했다. 이토는 이 조약을 거부할 경우 “한층 불리한 결과를 각오해야 한다”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이토는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자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이토는 다시 한국민의 국적(國賊)이 되었다.

 

이토의 통감정치는 모순의 극치였다. 이토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초대 조선 총독이 되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등이 주장하는 즉각 병합론(倂合論)에 반대하고 점진 병합론을 주장했다. 한국을 강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국 병합을 원치 않는 것처럼 위장했다. 이토는 1907년 10월 16일 황태자 요시히토 친왕(嘉仁親王·훗날의 다이쇼 천황)을 방한시켰다. 이때 순종(純宗)은 황태자 영친왕과 인천까지 가서 영접하고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데, 이런 행사를 통해 이토는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지 않을 것처럼 위장했다.

 

그러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2대 총독) 조선주차군 사령관에게 전국 각지의 의병을 잔혹하게 진압하게 한 데서 그 본질이 드러난다. 이토는 또 풍류통감이라고 부를 정도로 주색(酒色)에도 심취했는데,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그의 한시(漢詩)가 이런 성향을 잘 말해준다. 그래서 통감부 시절 서울 묵정동 일대에 신마치 유곽(新町 遊廓),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일대에 모모야마 유곽(挑山 遊廓) 같은 기생촌이 번성하면서 일종의 예인(藝人) 문화였던 조선의 밤문화가 창녀 문화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이토의 점진 병합론은 일본과 한국의 매국친일파들의 비판을 받았다. 1909년 1월 순종이 남쪽의 대구·부산·마산과 북쪽의 개성·평양·신의주 등을 순행(巡幸)할 때 이토는 직접 호종하기도 했는데, 도야마 미쓰루·우치다 료헤이 등의 흑룡회와 이용구·송병준 등의 일진회는 한국인들의 존황심(尊皇心)만 높였다면서 이토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小松綠)의 조선병합의 이면(朝鮮倂合之裏面)에 따르면 이토는 1909년 4월 총리대신 가쓰라, 외무대신 고무라와 3자 회합에서 병합에 이의가 없다고 동의했다.

 

이토는 1909년 6월 14일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曾<79B0>荒助)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주었고, 일본 각의는 7월 6일 ‘한국 병합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다. 이토는 그해 10월 러시아 방문길에 올라 러일전쟁 격전지였던 뤼순(旅順)의 203고지를 둘러보고 ‘1만8000명의 뼈를 묻고 있는 산’ 운운하는 시로써 일본 근대사의 감회를 토로했다. 그리고 창춘(長春)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하얼빈 역사(驛舍)의 찻집에서 대한국의용군참모중장 겸 독립특파대장 안중근(安重根)이 이웃 국가에는 큰 고통이었던 일본 근대사의 성취와 이토의 모순된 정치행각을 끝장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