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⑥ 고종 퇴위

구름위 2013. 6. 21.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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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앞에서 칼 빼든 이완용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통감 이토는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헤이그 밀사)는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했다. 주인의 질책을 들은 이완용과 내각 대신들은 곧바로 고종에게 달려가 따졌다. 일본외교문서 1907년 7월 7일자 등에 따르면 고종은 ‘짐은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고 모두 헤이그에 있는 자들이 밀서를 위조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대신들에게 사태 수습책을 강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유의 이중 처신이 통할 때는 이미 아니었다. 1907년 5월 차악(次惡)이었던 박제순 내각이 최악인 이완용 내각으로 교체된 터였다.

 

일진회의 송병준이 혹시라도 친일 경쟁에서 이완용에게 밀릴세라 적극적으로 나섰다. 흑룡회에서 편찬한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는 송병준이 일진회 고문 우치다(內田),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입을 맞추고 어전회의에 나갔다고 전한다. 송병준은 고종의 면전에다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 고종을 도울 열강은 한 나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44년의 왕 노릇이 끝나게 되는 7월 18일.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중추원 고문 박제순을 임시 궁내부 대신 서리로 삼았다가 곧바로 해임하고 총리 이완용에게 겸임시켰다.

 

 

일본외교문서 대한매일신보 매천야록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고종실록 등을 토대로 재구성해 본 7월 18일 오후는 급박했다.


이날 오후 3시 이완용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입궐해 고종에게 사태 수습책을 건의했다. 수습책이란 다름 아닌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였다. 다급해진 고종은 통감의 의견을 듣겠다며 시간을 끌었다. 5시에 이토를 만나 밀사 사건을 변명하면서 양위(讓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이토는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고 천연덕스레 답하고 떠났다. 7시에는 서울에 온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매달렸으나 소용 없었다.

 

내각 대신들은 8시쯤 다시 고종을 찾아가 양위를 요구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협박하자 폐하를 모시는 무감(武監), 액례(掖隷)들이 흥분해 고종의 말 한마디만 있으면 갈기갈기 찢어버리려 하고 있었으나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고 전한다.

 

밤 11시 고종은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면서 신기선(申箕善)·민영휘(閔泳徽)·민영소(閔泳韶)를 불렀다. 이듬해(1908) 사망하는 신기선은 논외로 치더라도 민영휘·민영소는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챙기는 인물들이니 이완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사면초가에 몰린 고종은 새벽 1시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고 물러섰다. 양위가 아니라 황태자 대리청정을 시킨 다음 기회를 봐서 복귀하려는 의도였다. 황태자는 두 번이나 대리청정을 사양하는 상소를 올리고, 고종은 ‘부모의 뜻을 따르는 것이 효도’라고 타일렀지만 대리청정은 이토나 이완용 내각이 바라는 답이 아니었다.

 

순종실록 즉위년 7월 19일자는 “(순종이) 명을 받아 대리청정하고 이어서 선위(禪位)받았다”고 모호하게 기술하고 있다. 통감부문서 7월 19일자는 이완용이 이토에게 보낸 ‘황태자 집무대리 조칙 통고건’인데, 19일에도 고종의 뜻이 양위가 아니라 대리청정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7시15분의 통감부문서 ‘황제 양위건’은 다르다. 법부대신 조중응이 통감 이토에게 와서 ‘양위의 건은 짐의 충심에서 나온 것으로 결코 남의 권고 또는 협박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종이 ‘본뜻을 오해하여 함부로 분개하거나 폭동을 일삼는 자는 통감에게 의뢰하여 제지하고 기회를 봐서 적절히 진압할 것을 위임한다’라는 칙명까지 내렸다고 전하고 있다. 고종이 자발적으로 양위를 결심했으며, 반대 봉기가 일어나면 이토에게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인데, 물론 조중응의 조작일 것이다.

 

일본외교문서 명치(明治) 40년(1907) 7월 20일조는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을 거행했다’고 적고 있어서 고종은 여전히 황태자 대리청정을 고집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와 친일 내각이 억지로 양위식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고종과 황태자가 모두 불참한 가운데 이완용·임선준·고영희·이병무·이재곤·조중응·송병준 등 이른바 ‘정미(丁未:1907) 칠적(七賊)’과 여타 친일파 등이 참석한 식이 열려 고종의 44년 치세가 강제로 막을 내렸다.

 

영국인 베델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호외는 내각 대신들이 고종에게 ‘직접 일본에 가서 일본 황제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지만 고종이 거부했다는 궁중 소식 등을 전하면서 밀사 이준이 ‘흥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서 자결해 만국 사신들 앞에서 피를 뿌려 만국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헤이그에서 병사한 이준이 국내엔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게 된 유래다.

 

황태자 대리청정 소식이 전해지자 종로 각지에 시민들이 모여 통곡하거나 친일 내각을 성토하고, 친일파들에게 훈장을 준 표훈원(表勳院)에 투석했으며, 한국군 일부가 경무청(警務廳)에 발포하고 시민들이 밤 11시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했다고 각종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법부대신 조중응이 항의하는 군중에 대한 진압권을 이토에게 넘긴 것처럼 총리대신 이완용도 이토에게 “각 조약국에도 일체를 성명하라”면서 열강들에게 황태자 대리청정 사실을 통보하라고 권유했다.

 

통감부는 각국 공사관에 ‘한국인 폭도들’이 난입하면 보호해 주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러시아 총영사(Georger de Plan<00E7>on)는 7월 20일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鶴原定吉)에게 ‘러시아 공사관은 어떤 위험은 느끼지 않지만 만일 폭도들이 침입하려는 징후가 보이면 방지하는 적절한 대책을 취해주면 고맙겠다’고 회보했다. 미국 총영사(Thomas Sammons)도 “한국 황제 폐하께서…진압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통감에게 위임했음을 알리는 귀하의 통첩을 접수했다”고 회보했으며, 청국 총영사는 ‘필요하다면 우리 총영사관에 군 경비대를 보내주기 바란다’고까지 통보했다.

 

이런 여세를 몰아 7월 24일 통감 이토, 하세가와 주차군 사령관, 하야시 외무대신은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른바 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제1조는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한국 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2조)”고 규정해 통감을 사실상의 총독으로 격상시켰다. 또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명한다(5조)”고 규정했다.

 

이완용은 이토와 ‘협약 실행에 관한 각서’도 작성했는데 크게 재판권과 군대 해산에 관한 두 가지 사항이었다. 최고법원인 ‘대심원(大審院) 원장 및 검사총장과 전옥(典獄:형무소장)은 일본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육군 1대대를 존치시켜 황궁 수비를 맡게 하고 기타는 해산한다”라고 경호대대를 제외한 군대 해산을 명문화했다. 이완용 친일 내각은 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炳武:합방 후 자작 수여)가 군대 해산을 주도했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군대 해산 D데이는 8월 1일이었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이병무는 아침 8시까지 일본군 사령관 관저인 대관정(大觀亭)으로 시위대 각 대장들을 불러 10시에 훈련원에서 해산식을 한다고 통보했다. 서소문에 주둔했던 시위대 제1연대 1대대는 교관인 구리하라(栗原) 대위가 인솔해 해산식에 인솔하려 하자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해 자결했다.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했다. 남대문 안에 있던 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기관총 등의 중화기로 진압에 나섰고 결국 시위대 병사들은 진압당하고 말았다. 해산식에 참여한 병사들에게는 군모와 견장을 회수하고 계급에 따라 80~25원의 소위 은사금을 지급했다.

 

군대까지 강제 해산을 당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에 저항할 마지막 수단을 상실했다. 500년 제국은 그렇게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극렬 외세배척론자 이토, 영국 유학 뒤 개화파로 변신

 

조선과 일본은 모두 개항 과정에서 격렬한 진통을 겪었다. 일본은 많은 진통 속에서도 개화의 방향성은 잃지 않았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개화파 인물들을 길러냈다. 조선은 거꾸로 대부분의 개화파 인재가 살해되거나 망명해야 했다. 이토는 ‘개화 일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조선에 1870년대 초에 개화파를 양성하던 박규수의 사랑방이 있었다면, 일본에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의 송하촌숙(松下村塾:서당)이 있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급진개화파 김옥균과 온건개화파 김홍집이 나왔다면,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에서는 개항 후 일본의 문치파를 대표하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와 무단파(武斷派)를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나왔다.

 

박규수의 사랑방을 일종의 개화파 정치학교로 만든 인물은 중인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었다.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黑船)이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던 1853년(철종 4년), 오경석도 베이징에 1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중국의 실상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오경석은 철종 11년(1860) 8월 영·불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고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운 충격적인 현장까지 목격한 후 능동적으로 문호를 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반면 조슈(長州: 지금의 야마구치) 하급 번사의 아들로 태어난 요시다는 일왕을 받들고 서양세력을 물리쳐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굳혔다. 존왕은 반막부(反幕府)를 뜻했고, 양이도 개항을 결단한 막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막부는 조슈번에 명을 내려 요시다 쇼인을 에도로 보내도록 해 사형시켰다. 이것이 안세이 대옥(安政大獄)으로서 미·일 수호통상조약(1858)과 도쿠가와 이에모치(<5FB3>川家茂)의 쇼군(將軍) 승계를 반대한 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는데 14명이 사형을 당하거나 옥사했다. 요시다는 사형당했지만 이토를 비롯한 그의 사숙(私塾) 출신들이 일본 근대화를 주도하게 된다. 요시다는 번(藩)과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일본 봉건체제를 신분에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는 통일적인 정치체제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에는 허수아비였던 천황이 중요해져서 존왕(尊王)사상이 싹텄다.

 

 

이토 등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존왕양이 운동에 나서는데, 존왕사상은 계속 유지하지만 외세를 배격하자는 양이는 버리게 된다. 스승의 사상을 절반만 계승한 것이다. 14세 때 요시다 쇼인 문하로 들어간 이토는 동문들과 막부 타도와 양이 운동에 나서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이토가 정치무대에 첫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극렬 양이론자로서였다. 1862년 이토는 천황가와 막부의 융합론인 공무합체론(公武合<4F53>論)을 주장하는 나가이 우다(長井雅樂)의 암살을 모의하고, 시나가와 고텐야마(御殿山)의 영국 공사관에 불을 질렀으며, 야마오 요조(山尾庸三)와 함께 외국인을 우대하는 식전(式典)을 연구하던 하나와 다다토미(<5859>次<90CE>)를 암살했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863년(고종 즉위년)에는 느닷없이 영국을 배우겠다면서 이노우에(井上聞多)와 영국으로 향했다. 뱃삯을 지불했지만 선장의 강요로 수부(水夫)일까지 했는데, 상해에서 런던까지 가는 약 4개월 동안 호리 다쓰노스케(堀辰之助)가 편찬한 영일소사전(英和<5BFE><8A33>袖珍<8F9E>書:1862)을 가지고 선원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그러나 영국 유학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 조슈번이 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소식을 듣고 1864년 귀국해 포르투갈인 행세를 했다. 1867년 막부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는 대정봉환(大政奉還)으로 조슈와 사쓰마번 중심의 신정부가 수립되면서 이토는 영국 유학 경험 덕분에 외국사무계에 배치되었다. 평민 출신 이토가 일본 근대정치사의 주역으로 등장하는 첫발이 시작된 것이다.

이토 추종자였던 가네코 겐타로(金子堅太<90CE>)가 지은 이토 히로부미 전(伊藤博文傳:1940)은 이토의 선조가 13세기 여몽(麗蒙)연합군의 침략 때 몽골 군함을 습격한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라고 서술했다. 고노의 혈통은 7대 고레이(孝靈) 천황의 아들인 이요(伊豫) 왕자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인들 스스로가 제15대 응신(應神) 천황 이전의 천황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는 점은 별개로 치더라도 이토 히로부미가 고노 미치아리와 연결되는 어떠한 중간 고리도 없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족보 위조에 해당한다. 부친 이토 주조(伊藤十藏)는 날품 팔던 하층민으로서 하급무사 아시가루(足輕)보다도 낮은 신분이었다. 부친이 지어준 이토의 첫 이름 리스케(利助)는 미천한 가문의 자식이 갖는 흔한 이름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가졌던 이토는 리스케(利介)로 바꿨다가 도시스케(利輔), 슌스케(春輔)를 거쳐 최종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된다. 그만큼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컸다. 같은 송하촌숙 동문이었던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晋作)는 이토를 ‘리스케’라고 불러도 이토는 ‘다카스기 님’이라고 존칭을 붙여야 했다.

 

이토가 외국사무계에서 처리한 첫 번째 사건은 히젠(備前)번의 양이파 병사가 외국 군인에게 상해를 입힌 고베(神戶)사건이었다. 대장(隊長) 다키 젠사부로(瀧善三郞)에게 할복령이 내렸는데, 이토는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을 감시하는 입회 역할을 맡았다. 영국공사관에 불을 질렀던 이토가 외국의 앞잡이가 돼 양이파 장교의 할복을 감시했던 것이다. 1871년 11월 이토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과 함께 구미로 향하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사절단의 일행으로 선발돼 두 번째로 해외에 나갔다. 일본을 개국시켰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와쿠라 사절단을 크게 환대했고, 1872년 1월에는 그랜트 미국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구미 문물시찰과 불평등조약 개정 등의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치외법권 등의 조항이 담긴 불평등조약 개정에는 실패했다. 일본에는 아직 헌법이 없고 재판 또한 구미 각국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미국이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쿠라 사절단이 독일로 가서 빌헬름 1세와 재상 비스마르크와 회견하는 1873년께 일본 본토는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으로 시끄러웠다. 신정부 수립 다음 해인 1868년 12월 일본은 대마도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를 통해 대수대차사(大修大差使) 히구치 데쓰시로(<6A0B>口鐵四郞)를 동래에 보내 왜학훈도 안동준(安東晙)에게 서계와 국서를 전했다. 그런데 이 문서에 ‘우리나라(일본)의 정권이 황실에 돌아갔습니다…조정으로부터 칙명을 받아(일본외교문서 1권)’라는 내용 등이 있었다. 황실·봉칙(奉勅) 등의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접수를 거부한 것이 갈등의 시작이었다. 1870년 7월 외무대승(外務大丞) 야나기하라(柳原前光)는 “북쪽은 만주에 연하고, 서쪽은 청과 접해 있는 조선을 우리의 영역으로 만들면 황국보전(皇國保全)의 기초로서 장차 만국경략진취(萬國經略進取)의 기본이 되지만 만약 다른 나라에 선수를 빼앗기면 국사는 끝난다”면서 조선 강점을 주장했다.

 

일본 대외 전략의 기본 이념인 ‘주권선(主權線)’과 ‘이익선(利益線)’ 개념이 이때 벌써 등장한다. 주권선인 국경선을 지키려면 그 바깥쪽에 설정한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는 전략인데, 이때 이미 조선이 이익선이었다. 1870년 12월 외무대승(大丞)인 마루야마(丸山作樂)는 “조선국은 황국을 위해 중요한 지역으로 지금 손쓰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나라가 정복할 것”이고, “조선이 문명개화한 뒤에는 도저히 정벌할 수 없다”라면서 조선 침공을 위한 결사대를 모집한 적도 있었다. 1873년 일본이 부산 왜관을 일본공관으로 바꾸면서 쓰시마 상인뿐만 아니라 도쿄 상인도 무역행위에 나서자 조선이 단속하겠다고 통보했다. 이때 동래부에서 왜관에 게시한 문서에 일본을 ‘무법지국(無法之國)’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본 내에 정한론이 불거졌다(일본외교문서 6권). 이 내용은 조선 측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등이 정한론자로서 즉각 정벌을 주장했다.

 

메이지 정부에 대한 사족과 농민들의 반발을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점도 정한론의 배경이었다. 정한론은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후에 결정하기로 미뤄 놓았는데, 1873년 8월 이와쿠라 사절단이 1년10개월 만에 귀국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는 모두 일본은 외정(外征)에 나설 때가 아니라 국력을 더 기를 때라며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 이와쿠라 등은 10월 23일 메이지 천황의 동의를 얻어 정한론을 폐기시켰고 사이고와 이타카기 등 정한론자들은 일제히 사직했다.

 

이때 이토도 ‘내치우선론’에 동조해 정한론을 반대하면서 오쿠보 등의 신임을 획득했다. 어쨌든 이토와 조선의 첫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게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