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임진왜란

[스크랩] 왜란 당시 조총의 유용성

구름위 2012. 10. 6.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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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orldtown.naver.com/worldtalk/read/1000001517/10000000000000045073

 

 

댓글 중에 임진왜란 초반 조선군의 연패를 조총 등 신무기의 부재에서 찾는 통설이 나왔길래 한 꼭지 적어 봅니다. 원래 댓글로 썼었는데 길어져서 다시 모아 올려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이 조선의 각궁보다 전장에서 우수한 무기였는지, 그래서 과연 조선군이 왜군의 조총에 무너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우선

사거리

 

기본적으로 조총으로 어느정도 조준사격이 가능한 유효사거리는 50보 내외입니다.

당시 총열은 탄환 구경보다 커서 탄환이 총열 안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튀어나가기 때문에

혼란스런 전장 상황에서 "겨누어 맞춘다"는 상황은 벌어지기 힘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각궁은 100보 정도, 사수의 숙련도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기간에 육성 가능한 중간 숙련도 이하의 병사들로 화망을 구성해서

밀집 대형에 대한 공격을 할 경우엔 조총이 위력을 발휘하지만,

중간 숙련도 이상의 병사들로 구성할 수 있다면 겨누어 맞추는 데는 활이 위력적이라는 말도 됩니다.

 

더우기 조선엔 편전이 있었죠.

편전을 사용하면 사거리와 관통력이 일반 화살을 사용할 때보다 비약적으로 증대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당한 사수의 숙련도를 전제로 합니다.

당시 활의 사거리와 관통력이 편전이 아닌 일반 화살을 사용하는 조선 활에도 훨씬 못 미쳤던

일본의 경우엔 비용만 받쳐 준다면 같은 수의 궁병보다는 조총병을 운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왼쪽의 짧은 살이 편전입니다. 가는 대나무통에 넣어 길게 시위를 당긴 뒤 쏘아보내고 다시 그 통에 편전을 장전... 이런 식으로 운용했습니다. 수십보 밖에서 단단한 철제 투구를 가볍게 뚫는 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연사속도

 

아시다시피 전근대 총기는 모두 전장식(총구로 탄환과 화약을 집어넣는 방식)입니다.

조총을 발사하는 과정은,

총구로 적당량의 화약을 넣고,

그 다음 탄환을 집어넣은 뒤 잘 쑤셔주고,

심지를 잘라 불을 붙여준 뒤 격발하면

불붙은 심지가 화약에 닿으며 격발되는 식입니다.

 

글로 써 놔도 상당히 번거로와 보이지만,

현대의 반자동 소총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직접 해 보면 속 터질 겁니다.

더군다나 전장에서...

 

반면 활은, 살을 뽑아서 시위에 매겨 당긴 뒤, 조준하고, 놓으면 됩니다.

왜란이나 전국시대 당시 조총의 연사 속도는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만

기껏해야 2분에 1발 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최고로 숙련된 사수의 경우 30초에 한 발을 쏠 수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제 생각엔 아무리 잘 해 봐야 1분에 한 발이지 싶습니다.

 

반면 활은 5초~10초에 한 발은 충분히 쏠 수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조총보다 6배~12배 이상 빠른 연사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불붙은 심지 끝을 물고 있는 8번이 화약에 불을 당기는 구조입니다.
 

 

 

다음으로

운용비율(숫자)

 

조총의 대량(?) 운용은 당시 조선군의 입장에서 볼 땐 충격적인 모습이라

사서에 크게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 모든 전장에서 조총 든 일본 병사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조총은 당시에 꽤 비싼 무기였습니다).

조선 전역에 투입된 연인원 15만~20만의 일본 병사 가운데 조총병은 수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매 전투에서 승패를 가로지은 무기가 조총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요컨대 조선의 복합궁

(물론 값비싼 복합궁보다는 단일재질의 활이 주종을 이루었음)

에 비해

조총은 절반 정도의 사거리와 1/6~1/12정도의 연사속도밖에 지니고 있지 않은,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화기였습니다.

 

사거리와 연사력의 스펙으로만 보자면

M1반자동 소총과 MG34 기관총의 차이 정도는 되겠습니다.

 

더군다나 조달 단가가 너무 높아 대량으로 장비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조선군은 그리 힘없이 무너졌는가?

 

 

사진은 부산진 순절도입니다
 

 

 

간단합니다.

일단 일본의 전면전 도발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각지에 흩어진 병사들을 전쟁이 터지고 난 뒤에야 한 곳에 일단 모은 뒤에 군대를 결성하는

제승방략체제가

이미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으므로

조총이고 활이고 뭐 제대로 대응할 만 한 군사력 자체가 형성되질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천 수만씩 대오를 이룬 왜군에 힘 한 번 못 쓰고 밀리면서

안 그래도 패닉 상태인데

전투 초기에 천둥소리같은 조총 소리가 뻐벙거리니 넋이 나가지 않을 수 없고,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초기의 참담한 패배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조총의 대량 운용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임진왜란 후기, 정유재란을 거치며 조선 병사들과 백성들이

뻥뻥거리는 조총의 총성에 익숙해지고 난 뒤엔

조총이 거의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양과 평양을 초기에 파죽지세로 쓸었지만 거기까지였죠.

엄청나게 길어진 육지의 보급로는 의병들 때문에 점점 운용하기 곤란해졌고,

바다를 이용하면 좋은데 도요토미조차 "조선 수군을 만나면 도망쳐라"고 명령을 내릴 지경이고...

실제로 후반으로 갈 수록 왜군이 조선에서 운용한 조총병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총 대신 활"이라는 판단이 틀렸다기보다는,

일본의 전면전 도발 가능성에 대한 대비가 미비했고

제승방략체제가 약점을 드러낸 것이 초반 연전연패의 결정적 원인이라 할 것입니다.

 

 

 



 

아시죠? 한산대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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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asm70

 
좋은글이네요 ~ 사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조총이 파괴력이 좋다는 것 외에는 연사력,사정거리 어느면에서 각궁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노부나가가 사용한 3조 시차사격전술만 잘 이용한다면야 평지에서는 훌륭한 전과를 올렸겠지만, 조선의 산성을 돌파하는 왜군에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은... 무기는 아니였지 싶습니다.
 
 
 
hasooksinkum
 
조총의 연사속도는 일본측의 연구로는 -(이미 왜군의 조총수는 대부분 숙련된 상태 였을 겁니다)- 10초 정도 라고 하더군요. 초기 조총은 심지에 불을 붙여놓고 기다리는 방식 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조총은 위의 그림처럼 직접 화약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라 연사속도가 획기적으로 줄어든 상태였지요. 뭐 그렇다고 조총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몇가지 이의만 제기하자면.. 오다 노부나가부터 2,3중의 횡렬 조총운용(철포 3단으로도 부르는걸로 압니다;)이 일본에서 자주 쓰이게 됬습니다;
 
즉 1렬 사격 2렬 일본활 발사 3렬 장전의 식이죠;[<-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냥 이런식이었단 말입니다] 그런식으로 연사력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듯 하네요. 물론 조총때문에 일본군이 파죽지세로몰려든거라 보기는 어렵다는점에는 동의 합니다.

한국군이 워낙 미비한 상태에다가 (어쩌면 더 효율적일수 있는)궁수들도 당시에 숫자가 지극히 적었기때문에(활을 익히는데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죠; 반면 일본 군사들은 내전을 통해 조총사격실력도 엄청났을뿐만아니라 조총은 익히기가 쉬운걸로 압니다.) 그에대한 대응이 부족해서 진걸로 보면 되겠군요..
 
(물론 신립장군의 경우에는 승률이 0%라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기마병으로 덮어버릴수있다는 오판으로 뒈진걸로도 생각되긴 하지만 말이죠;)
 
 
minor75
 
글이 길어져서 3렬 철포대에 대한 논란은 따로 쓰지 않았는데, 이걸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평균적인 발사 속도를 1분당 1발로 가정(가정입니다)했을 때, 90명으로 이루어진 철포대가 굳이 3렬로 나누지 않고 그냥 사격한다면, 일제사 후 다시 장전, 다시 일제사... 이런 식으로 당연히 단위 철포대에서 분당 90발 발사가 가능합니다.

다음, 3렬 철포대의 경우. 같은 조건에서 30명씩 3렬로 나뉘어 1렬이 30발을 발사합니다. 다음 2열 30발, 3열 30발... 그 다음 다시 1렬이 최초발사 후 재장전, 발사준비를 마치고 3렬의 뒤를 이어 발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요? 역시 1분입니다. 결과적으로 1분동안 90발이 발포되는 건 똑같습니다. 다른 건 3렬로 나누지 않았을 때는 발사와 발사 사이에 1분이 걸리지만 3렬로 나뉘었을 때는 20초가 걸린다는 것. 대신 1회 발사시의 화력은 1/3로 줄어듭니다.

3렬 철포대 전술은 연사속도를 3배로 늘리는 요술이 아니라 화력을 1/3로 줄이는 대신 발사와 발사 사이 시간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허점을 줄이고자 하는 운용방식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일정 시간 내에 단위 철포대에서 발사 가능한 탄환의 숫자는 어차피 같습니다. 비록 탄환의 숫자가 줄어도 그걸 나눠서 짧게 짧게 몰아침으로써 적의 진격을 늦추고 그렇게 번 시간으로 접근전이 벌어지기 전에 1회라도 더 사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조총의 번거로움과 긴 발사준비시간은 화승이 타들어가는 시간과 상관이 있는 건 물론 아니고 총구로 탄환과 장약을 쑤셔넣어 발사준비를 해야 하는 전장식 화기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만약 정말 10초 안에 재장전과 발사가 가능했다면 굳이 3렬 철포대 같은 게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18세기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머스킷소총도 일반적인 숙련도의 사수가 전장에서 1회 발사 후 다음 발사준비를 마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분 내외였고 최고로 숙련된 경우 30초 내외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200여년 이후에 서양에서 사용됐던 총기가 그렇습니다.
 
 
molotove
 
임진왜린때 일본에게 개작살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군기가 빠졌나 안빠졌나의 차이입니다.일본은 전국시대가 막 끝나서 단련될때로 단련된 병사들이었던 반면에 조선은 오랜 태평성대에 병사들의 군기가 빠질대로 빠졌습니다.마치 해병대(일본)VS신병(조선)이었을 정도였습니다.그리고 일본은 근접전의 대가였습니다.오죽했으면 이순신장군도 일본과의 근접전은 피할려고 했을정도였겠습니까..의병도 게릴라전을 주로 했지 일본군과의 근접전은 피했을 정도입니다.
 
 
lionhq
 
minor75님의 글을 읽고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
다만 노부나가의 3단 철포 운용에 대한 조금 다른 의견이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minor75님의 말씀대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3단 철포는 당연히 연사속도가 늘고 화력이 줄어들어서 크게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상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옛날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전투 방식을 문헌등을 통해서 찾아보면... "먼저 철포대와 궁병들이 원거리에서 활과 총을 쏘고 물러난다. 그 이후에 기병대나 창병들이 서로 접근 해서 공격을 가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철포나 활은 전투가 시작 될 때 상대에게 치명적이진 못하지만 일정 량의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연사 속도가 느린 철포대는 당연히 한 두 발 발사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죠. 다만 활은 연사속도가 빠르므로 철포대가 물러나고 상대의 기마대가 들이닥칠 때도 계속 발사를 했었죠.

이런 전투방식이 상식인 시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철포대는 굳이 많은 수를 운용하지 않았을 거란 결론이 나옵니다. 전쟁을 하는 곳이 항상 평야지대도 아닐것이고 갖가지 장애물이 많은 지역에서는 곡선운동으로 적을 노리는 활이 직선운동밖에 할 수 없는 철포에 비해 쓸모가 많았죠. 전국의 다이묘들 입장에서 보면 철포를 대량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 상식이겠죠. 실제로 3만의 기병, 보병을 운용하는 부대에 배속된 철포대는 약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300명 이상이어 봐야 그 인원을 늘여 세울 만한 넓은 장소도 없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겠죠.

그러니 그 당시에는 '철포의 재장전'이라는 것은 몇만 단위의 부대가 싸울 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직선공격밖에 할 수 없는 철포를 포기하고 활을 선택한 것은 철포대를 300명 운용할 생각을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노부나가는 깬 것입니다. 그가 깬 근본적인 고정관념이란 "철포대를 1렬로 운용한다."가 아니라 "사실상 전장에서는 300명 이상의 철포대는 운용할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철포대를 운용할 생각을 못한 것을 노부나가는 3단으로 배열된 철포대를 이용해서 깨뜨린 것이죠.

노부나가는 3만의 다케다 가문 기마병을 상대할 때 (물론 3만은 기병+보병의 숫자였겠죠)
철포대를 1000명을 운용해서 전멸시켰다고 합니다.
 
전투가 시작되면서 서로 철포를 쏴대고 다케다군은 훈련받았던 그대로
노부나가의 부대를 향해 말을 달렸죠.
 
상대가 쏴대는 얼마 되지 않는 철포는 무시하고 곡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가면서
언제나처럼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렸습니다.
 
그러나 달려가는 중에도 이상하게 철포가 계속 발사되었고
같이 달리던 전우들이 점점 쓰러져나갔습니다.
 
그 때 다케다 군의 머리 속에는 "이상하다... 이 정도 타이밍이면 철포가 날아오지 않아야 하는데...."
라고 생각했겠죠.
 
그게 전국 무장들의 상식이었을테니까요....
그렇게 불과 수십여초만에 전국 최강을 자랑하던 풍림화산의 다케다 기병은 무너져 갔습니다.

노부나가의 3단 철포대는 단순히 철포 발사간의 틈을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3줄로 세우면 평소 보다 많은 철포대를 운용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당시로서는) 발상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철이 풍부한 오와리 지역이 노부나가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말이죠....
 
 
 
 redrak8181
 
//molotove
이순신 장군이 접근전을 피하라고 했던 이유는 부속한 병력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배에는 화포가 거의 없었고 있다해도 조선수군의 화포가 사정거리 가 2배정도 였기
때문에 굳이 접근전을 할 필요 없이
 
차륜전략 (일명 무빙샷) 으로 충분히 싸울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장군이 화약을 만들어 내는 기술을 만들어 화약은 충분했고 종이에 화약을 싸서 쓰는 현대의 장약같은 체제를 만들어 사정거리도 다소 정확히 잴수 있었기 때문에 접근전은 할필요가 없었죠
 
 
 
 happytoone
 
전쟁은 게임같은게 아님니다. 뭐 게임이라면 전멸시켜야 끝나겠지만

실제 전쟁에선 1만 vs 1만 정도의 비교적 큰전투어서도 한쪽이 1000명정도 전사하는 정도에서 일단 끝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유라면 사기가 유지가 안되거든요 자신앞에 시체가 계속 싸여가는데 이떤사람인들 계속싸우고 싶겠습니까 공포감에 사로잡혀 진형이 무너지게되고 지리멸렬하게 퇴각하는거죠
뭐 중세까지의 전투기록에 전사자 비가 1:50 내지는 1:500 까지 나는 경우는 회전에서 맏붇어서 나온피해가 아니라
진형이 깨저서 지휘계통이 무너진채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서 나온피해입니다.
한쪽은 무슨 슈퍼맨도 아닌데 맏붙어서 싸우는거론 저런결과가 안나오죠
물론 1/10이 전사할때까지 버틸수 있는 것도 충분히 훈련된 정규군 수준일때 이야기구요 부랴부랴 농사짖던사람들 무작정 끌어모아서 전장에 세운경우엔 뭐 대략난감이죠
(정규군수준일경우 전장에서 피해가 좀더많은경우도 있는데 이건 하나의 회전에서 그렇게 된다기보단지리하게 소모적인 탐섹전을 계속하다 회전에 들어간 경우정도입니다.)
 
 
 
아 그리고 당시 조선에도 정규군이 있었습니다.
 
숫자가 제대로 기록돼있는걸 본적이 없지만 탄현에 모을수 있었던 8000명이 경기 충정 2도에서 모을수 있는 정규병력이었던 걸로 보이구요
 
전국을 보자면 2만정도의 훈련된 군대는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북쪽에는 국경쪽에는 병력비율이 더 높았을태니까요
 
물론 월급받는 상비군이라기보단 군역을 지고 농업에 지장이 없는 일정기간 동안 훈련을 받는 식이었겠만요 전쟁을 예상하지 않은 평시인데다 조선국력정도를 생각해볼때 적은숫자가 아니죠 10만 양병 뭐 이건 솔직히 무리구요
 
(장기간 그정도 훈련된병력을 유지하는건 조선국력으론 불가능한 일이죠 하다못해 왜란을 몇년전에 예상할수 있었단 전재하에 한정된기간만 집중적으로 인력물자를 소모한 경우에나 가능한일입니다. 여러재도들이 있었지만 글로 쓰는거랑 실제로 인력물자를 소모해가면 실행하는거랑은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이건 도요토미가 전쟁을 결정한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당시 노부나가가 준상비군정도로 만든 군대를 주력으로 일본을 통일했는데 전쟁이 끝이질 안던 전국 시대라면 모를까 통일이 된 평시에 그정도 병력을 유지하는게 불가능한일이었고 줄이는것도 별로 용이하질 않았습니다.)
 
 
happytoone
 
당시 조총 전술이란게 전면에 나서 몇발 쏘고 물러나거나 혹은 3단으로 나눠서 연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숫자가 적어서 효과적이질 못합니다.나폴레옹 시대처럼 보병거이 전부가 머스켓터어라면 몰라도 - 물론 이때도 쭉늘어서서 줄창 쏘는 방식이 아니라 몇발쏘고 돌격하는게 주류였습니다.)
 
측면에 사선으로 배치되서 따로 사격을 가하는 방식이었니다.

나가시노 전투 3단철포예기도 나오는데 실제로 3단으로 사격을 했는지 목책뒤에 철포를 그냥 3구룹으로 나눴는지는 불명입니다.
 
(연사를 하기위해서 3구룹으로 나눈건지 배치상 3구룹인 된건지 모른다는 예기입니다.)

다케다 기마병은 기마위에서 마상돌격을 하는 식의 군대가 아닙니다. 기마로 빠른 이동을 하고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형식입니다.
신겐시절 부터의 다케다가의 주전술은 기마로 빠르게 적측면으로 부대를 이동시키고 적을 전면과 측면에서 동시에 공격해서 반포위 내지는 포위를 하는 전술입니다.
 

(고대 카네이후로 중세는 물론 지금까지도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죠 - 2차대전때을 독일전술도 전자전면에 배치하고 정면돌격하는 식이 아니라 보병과 전차를 유기적으로 활용해
반포위 하는 전술이었습니다. 독소전 독일이 거둔 4대 포위전 또한 이런형식이었죠)
 
 
happytoone
 
나가시노 전투또한 마찬가지로 진행을 했는데( 솔직히 다케다가로선 개전시기를 한참 넘긴시기였습니다. 이미 양국의 국력차가 심각해서 - 오다 도쿠가와 연합 3만5천 vs 다케다 1만 3천 또는 오다 2만 도쿠가와 4천 도합 2만4천 vs 다케다 6천 이었습니다.-저는 후자쪽이 좀더 신빙성있는 숫자라고 봅니다만 ) 물론 다케다 군도 선전을해서 도쿠가와 오다군모두와 서전에선 승리를 했고
다케다 전술 그대로 나가시노에서 또한 반포위를 시도 했지만 심각한 전력차를 극복못하고 전면진형 무너저서 패배 한 전투 입니다.
 
목책을 쌓은것도 맞고 뒤에 철포부대를 집중배치 한것도 맞지만 목책에 기병돌격을 하다 전멸한 말도 안되는 전투는 아니었습니다.(이건 후에 영화나 소설등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이지 실제 역사랑을 별 관련이 없는 소리입니다. 이정도로 집중적인 사격의 화력만으로 적의 돌격을 분쇄하는식의 전쟁은 1차세계대전때 기관총을 사용하면서 가능해진 일입니다.

- 이것도 일렬로 쭉늘어트려 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호를 이용해서 사선방향으로 기관총을 교차배치하는 전술하에서 가능한 방식이죠)

물론 목책을 쌓고 철포를 배치하는건 참신하고 또한 효과적이었지만 그렇다곤해도 나가시노전투 주는 백병전이었고 승리에 가장큰 요인은 다케다군 2배가 넘는 물량이었습니다
 
 
 
happytoone
 
한니발이 카네에서 2배에 달하는 전력차를 포위 전술로 극복하고 세계전쟁사에 있어 지금까지도 가장큰이름중에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데(전쟁역사상 가장완벽한 포위전술이다 부터 시작해서 온갖미사여구를 독차지 하고 있죠) 가쓰요리가 거의 3배에 달하는 전력차를 극복할수 있었다면 정말이지 일본지방영주끼리의 전쟁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중에 하나로 기록될수도 있었겠죠 아마도

그리고 쓰다보니 빼먹었는데 다케다군 기마병이 마상돌격식의 군대가 될수 없었던 이유는 일본말 자체가 체구가 작어서 돌격 형식으로 사용하는게 불가능 했습니다.
그리고 마상돌격식의 기마병은 유지비자체가 엄청나서 지방영주수준의 경재력으론 조달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물론 훈련양 때문에라도 완전한 상비군형태여야 하는건 기본이구요

마상돌격기병을 기마위에서 중장비를 갖추고 평지 전장에서 적을 전면을 공격할 능력을 보유한 집단으라고 정의 하면 이렇구요 기병 형태는 괭장히 다양합니다.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도 어떤 씨스템이냐에 따라 천차 만별이구요
전쟁이라는 프로젝트 자체가 괭장히 복잡한 일입니다.
인간집단끼리 목숨과 이권이 걸고 하는 하는일이 어떤전쟁은 어떻게 해서 어떻게 됬다더라 하는정도의 한줄문장으로 요약하는 것도 꽤웃기는일이구요
그러다 보면 소설이나 게임에나 있던 이미지가 갑자기 사실인것 처럼 등장하기도 하죠 조총때문에 전쟁에서 젔다 혹은 기병으로 돌격하다 다 죽어대더라 하는식의 상식이하의 이상한 예기가 떠돌기도 합니다만 .... 뭐 어찌됐건

임진왜란의 경우도 예기하다보면
무슨 일부 이상한 예기처럼 탱자탱자 놀다가 갑자기 전쟁나서 저버린 또는 조총이 너무 뛰어나서 전쟁에서 젔다 뭐 이런 이상한이야기들이 왜 떠도는지를 모르겠지만

조선의 꽤발달한 수준의 중세국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국가라 하더라도
국가가 전쟁을 결정하고 준비하고 실행에 옴기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정치적 경재적 논리하에서 치밀하게 준비해야하는 일입니다. 떼떼론 잘못된 시기의 선택은 국가의 존망 가르기도 하구요
( 전쟁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국력소모만으로도 국가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에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전쟁전의 상황이 왜 그렇게 됀거진 부터 꼼꼼하게 알아보면서 시작하셔야 제대로된 사실을 아실수 있습니다.
역사학자수준으로 탐구할필요까진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전후사정과 상식적인 이야기들을 분류하는 정도는 하시는게 좋겠죠
출처 :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글쓴이 : 마인부우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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