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orldtown.naver.com/worldtalk/read/1000001517/10000000000000045073
댓글 중에 임진왜란 초반 조선군의 연패를 조총 등 신무기의 부재에서 찾는 통설이 나왔길래 한 꼭지 적어 봅니다. 원래 댓글로 썼었는데 길어져서 다시 모아 올려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이 조선의 각궁보다 전장에서 우수한 무기였는지, 그래서 과연 조선군이 왜군의 조총에 무너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우선
사거리
기본적으로 조총으로 어느정도 조준사격이 가능한 유효사거리는 50보 내외입니다.
당시 총열은 탄환 구경보다 커서 탄환이 총열 안을 이리저리 부딪치며 튀어나가기 때문에
혼란스런 전장 상황에서 "겨누어 맞춘다"는 상황은 벌어지기 힘들었습니다.
그에 반해 각궁은 100보 정도, 사수의 숙련도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단기간에 육성 가능한 중간 숙련도 이하의 병사들로 화망을 구성해서
밀집 대형에 대한 공격을 할 경우엔 조총이 위력을 발휘하지만,
중간 숙련도 이상의 병사들로 구성할 수 있다면 겨누어 맞추는 데는 활이 위력적이라는 말도 됩니다.
더우기 조선엔 편전이 있었죠.
편전을 사용하면 사거리와 관통력이 일반 화살을 사용할 때보다 비약적으로 증대됩니다.
하지만 이 또한 상당한 사수의 숙련도를 전제로 합니다.
당시 활의 사거리와 관통력이 편전이 아닌 일반 화살을 사용하는 조선 활에도 훨씬 못 미쳤던
일본의 경우엔 비용만 받쳐 준다면 같은 수의 궁병보다는 조총병을 운용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왼쪽의 짧은 살이 편전입니다. 가는 대나무통에 넣어 길게 시위를 당긴 뒤 쏘아보내고 다시 그 통에 편전을 장전... 이런 식으로 운용했습니다. 수십보 밖에서 단단한 철제 투구를 가볍게 뚫는 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연사속도
아시다시피 전근대 총기는 모두 전장식(총구로 탄환과 화약을 집어넣는 방식)입니다.
조총을 발사하는 과정은,
총구로 적당량의 화약을 넣고,
그 다음 탄환을 집어넣은 뒤 잘 쑤셔주고,
심지를 잘라 불을 붙여준 뒤 격발하면
불붙은 심지가 화약에 닿으며 격발되는 식입니다.
글로 써 놔도 상당히 번거로와 보이지만,
현대의 반자동 소총 방식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직접 해 보면 속 터질 겁니다.
더군다나 전장에서...
반면 활은, 살을 뽑아서 시위에 매겨 당긴 뒤, 조준하고, 놓으면 됩니다.
왜란이나 전국시대 당시 조총의 연사 속도는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릅니다만
기껏해야 2분에 1발 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최고로 숙련된 사수의 경우 30초에 한 발을 쏠 수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제 생각엔 아무리 잘 해 봐야 1분에 한 발이지 싶습니다.
반면 활은 5초~10초에 한 발은 충분히 쏠 수 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조총보다 6배~12배 이상 빠른 연사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불붙은 심지 끝을 물고 있는 8번이 화약에 불을 당기는 구조입니다.
다음으로
운용비율(숫자)
조총의 대량(?) 운용은 당시 조선군의 입장에서 볼 땐 충격적인 모습이라
사서에 크게 부각되어 있지만,
실제 모든 전장에서 조총 든 일본 병사를 볼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조총은 당시에 꽤 비싼 무기였습니다).
조선 전역에 투입된 연인원 15만~20만의 일본 병사 가운데 조총병은 수천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매 전투에서 승패를 가로지은 무기가 조총은 아니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요컨대 조선의 복합궁
(물론 값비싼 복합궁보다는 단일재질의 활이 주종을 이루었음)
에 비해
조총은 절반 정도의 사거리와 1/6~1/12정도의 연사속도밖에 지니고 있지 않은,
객관적으로는 도저히 우수하다고 할 수 없는 화기였습니다.
사거리와 연사력의 스펙으로만 보자면
M1반자동 소총과 MG34 기관총의 차이 정도는 되겠습니다.
더군다나 조달 단가가 너무 높아 대량으로 장비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조선군은 그리 힘없이 무너졌는가?
사진은 부산진 순절도입니다
간단합니다.
일단 일본의 전면전 도발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데다,
결정적으로 각지에 흩어진 병사들을 전쟁이 터지고 난 뒤에야 한 곳에 일단 모은 뒤에 군대를 결성하는
제승방략체제가
이미 전쟁이 발발한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할 리 만무했으므로
조총이고 활이고 뭐 제대로 대응할 만 한 군사력 자체가 형성되질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천 수만씩 대오를 이룬 왜군에 힘 한 번 못 쓰고 밀리면서
안 그래도 패닉 상태인데
전투 초기에 천둥소리같은 조총 소리가 뻐벙거리니 넋이 나가지 않을 수 없고,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초기의 참담한 패배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조총의 대량 운용을 묘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임진왜란 후기, 정유재란을 거치며 조선 병사들과 백성들이
뻥뻥거리는 조총의 총성에 익숙해지고 난 뒤엔
조총이 거의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양과 평양을 초기에 파죽지세로 쓸었지만 거기까지였죠.
엄청나게 길어진 육지의 보급로는 의병들 때문에 점점 운용하기 곤란해졌고,
바다를 이용하면 좋은데 도요토미조차 "조선 수군을 만나면 도망쳐라"고 명령을 내릴 지경이고...
실제로 후반으로 갈 수록 왜군이 조선에서 운용한 조총병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총 대신 활"이라는 판단이 틀렸다기보다는,
일본의 전면전 도발 가능성에 대한 대비가 미비했고
제승방략체제가 약점을 드러낸 것이 초반 연전연패의 결정적 원인이라 할 것입니다.
아시죠? 한산대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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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워낙 미비한 상태에다가 (어쩌면 더 효율적일수 있는)궁수들도 당시에 숫자가 지극히 적었기때문에(활을 익히는데는 상당한 시간을 요하죠; 반면 일본 군사들은 내전을 통해 조총사격실력도 엄청났을뿐만아니라 조총은 익히기가 쉬운걸로 압니다.) 그에대한 대응이 부족해서 진걸로 보면 되겠군요..
다음, 3렬 철포대의 경우. 같은 조건에서 30명씩 3렬로 나뉘어 1렬이 30발을 발사합니다. 다음 2열 30발, 3열 30발... 그 다음 다시 1렬이 최초발사 후 재장전, 발사준비를 마치고 3렬의 뒤를 이어 발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얼마일까요? 역시 1분입니다. 결과적으로 1분동안 90발이 발포되는 건 똑같습니다. 다른 건 3렬로 나누지 않았을 때는 발사와 발사 사이에 1분이 걸리지만 3렬로 나뉘었을 때는 20초가 걸린다는 것. 대신 1회 발사시의 화력은 1/3로 줄어듭니다.
3렬 철포대 전술은 연사속도를 3배로 늘리는 요술이 아니라 화력을 1/3로 줄이는 대신 발사와 발사 사이 시간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되는 허점을 줄이고자 하는 운용방식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일정 시간 내에 단위 철포대에서 발사 가능한 탄환의 숫자는 어차피 같습니다. 비록 탄환의 숫자가 줄어도 그걸 나눠서 짧게 짧게 몰아침으로써 적의 진격을 늦추고 그렇게 번 시간으로 접근전이 벌어지기 전에 1회라도 더 사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또한 조총의 번거로움과 긴 발사준비시간은 화승이 타들어가는 시간과 상관이 있는 건 물론 아니고 총구로 탄환과 장약을 쑤셔넣어 발사준비를 해야 하는 전장식 화기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만약 정말 10초 안에 재장전과 발사가 가능했다면 굳이 3렬 철포대 같은 게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4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18세기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머스킷소총도 일반적인 숙련도의 사수가 전장에서 1회 발사 후 다음 발사준비를 마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1분 내외였고 최고로 숙련된 경우 30초 내외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으로부터 200여년 이후에 서양에서 사용됐던 총기가 그렇습니다.
그 당시 전투 방식을 문헌등을 통해서 찾아보면... "먼저 철포대와 궁병들이 원거리에서 활과 총을 쏘고 물러난다. 그 이후에 기병대나 창병들이 서로 접근 해서 공격을 가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철포나 활은 전투가 시작 될 때 상대에게 치명적이진 못하지만 일정 량의 타격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때 연사 속도가 느린 철포대는 당연히 한 두 발 발사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죠. 다만 활은 연사속도가 빠르므로 철포대가 물러나고 상대의 기마대가 들이닥칠 때도 계속 발사를 했었죠.
이런 전투방식이 상식인 시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철포대는 굳이 많은 수를 운용하지 않았을 거란 결론이 나옵니다. 전쟁을 하는 곳이 항상 평야지대도 아닐것이고 갖가지 장애물이 많은 지역에서는 곡선운동으로 적을 노리는 활이 직선운동밖에 할 수 없는 철포에 비해 쓸모가 많았죠. 전국의 다이묘들 입장에서 보면 철포를 대량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이 상식이겠죠. 실제로 3만의 기병, 보병을 운용하는 부대에 배속된 철포대는 약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300명 이상이어 봐야 그 인원을 늘여 세울 만한 넓은 장소도 없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겠죠.
그러니 그 당시에는 '철포의 재장전'이라는 것은 몇만 단위의 부대가 싸울 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직선공격밖에 할 수 없는 철포를 포기하고 활을 선택한 것은 철포대를 300명 운용할 생각을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습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을 노부나가는 깬 것입니다. 그가 깬 근본적인 고정관념이란 "철포대를 1렬로 운용한다."가 아니라 "사실상 전장에서는 300명 이상의 철포대는 운용할 수가 없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아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철포대를 운용할 생각을 못한 것을 노부나가는 3단으로 배열된 철포대를 이용해서 깨뜨린 것이죠.
노부나가는 3만의 다케다 가문 기마병을 상대할 때 (물론 3만은 기병+보병의 숫자였겠죠)
노부나가의 3단 철포대는 단순히 철포 발사간의 틈을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3줄로 세우면 평소 보다 많은 철포대를 운용할 수 있다는 획기적인 (당시로서는) 발상이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철이 풍부한 오와리 지역이 노부나가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말이죠....
실제 전쟁에선 1만 vs 1만 정도의 비교적 큰전투어서도 한쪽이 1000명정도 전사하는 정도에서 일단 끝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유라면 사기가 유지가 안되거든요 자신앞에 시체가 계속 싸여가는데 이떤사람인들 계속싸우고 싶겠습니까 공포감에 사로잡혀 진형이 무너지게되고 지리멸렬하게 퇴각하는거죠
나가시노 전투 3단철포예기도 나오는데 실제로 3단으로 사격을 했는지 목책뒤에 철포를 그냥 3구룹으로 나눴는지는 불명입니다.
다케다 기마병은 기마위에서 마상돌격을 하는 식의 군대가 아닙니다. 기마로 빠른 이동을 하고 전투는 말에서 내려서 하는 형식입니다.
(고대 카네이후로 중세는 물론 지금까지도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죠 - 2차대전때을 독일전술도 전자전면에 배치하고 정면돌격하는 식이 아니라 보병과 전차를 유기적으로 활용해
반포위 하는 전술이었습니다. 독소전 독일이 거둔 4대 포위전 또한 이런형식이었죠)
- 이것도 일렬로 쭉늘어트려 배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호를 이용해서 사선방향으로 기관총을 교차배치하는 전술하에서 가능한 방식이죠)
물론 목책을 쌓고 철포를 배치하는건 참신하고 또한 효과적이었지만 그렇다곤해도 나가시노전투 주는 백병전이었고 승리에 가장큰 요인은 다케다군 2배가 넘는 물량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다보니 빼먹었는데 다케다군 기마병이 마상돌격식의 군대가 될수 없었던 이유는 일본말 자체가 체구가 작어서 돌격 형식으로 사용하는게 불가능 했습니다.
마상돌격기병을 기마위에서 중장비를 갖추고 평지 전장에서 적을 전면을 공격할 능력을 보유한 집단으라고 정의 하면 이렇구요 기병 형태는 괭장히 다양합니다.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도 어떤 씨스템이냐에 따라 천차 만별이구요
임진왜란의 경우도 예기하다보면
조선의 꽤발달한 수준의 중세국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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