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 태종① 정몽주 제거

구름위 2013. 6. 18. 15:18

하늘이 시킨 일 汚名을 마다하리

 

모든 군왕(君王)은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고 싶어한다. 누가 폭군(暴君)·용군(庸君·어리석은 임금)으로 기억되고 싶겠는가? 그러나 원한다고 모두가 성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군주 개인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때로 시대는 악역과 가시밭길을 요구한다. 이때 악역과 가시밭길을 거부하다 용군이 된 지도자는 많다. 반면 묵묵히 악역과 가시밭길을 걸음으로써 후대에 평가받았던 군주는 소수이다. 스물일곱 조선 군주 중 악역을 자청했던 두 임금이 3대 태종과 7대 세조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뭇 다르다.

태종도 다른 군주처럼 성군이 되기를 바랐다. 또한 성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성군이 되기를 바랐는지는 태종우(太宗雨) 고사가 잘 말해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음력 5월 10일에 내리는 비가 태종우이다. 조선의 민간 풍습을 기록한 홍석모(洪錫謨·1781~1850)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5월조는 “태종이 임종할 때 세종에게 ‘가뭄이 극심한데 내가 죽어서도 비록 알게 된다면 이날에는 반드시 비가 오게 하리라’고 말했는데, 훗날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초·중기 문신 정경세(鄭經世·1563~1633)는 『우복집(愚伏集)』에서 “동산(洞山)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니 크게 가물었는데, 때마침 반가운 비가 왔다. 금년은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고 더 심했는데, 5월 10일 감로수 같은 비가 새벽부터 밤까지 내렸다. 이 나라의 민간에서 소위 말하는 태종우이다”며 “느낀 바가 있어서 그 기쁜 뜻을 적는다”고 기록했다. 신라의 문무왕이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죽어서도 신라를 지키겠다고 한 비장한 애국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비를 내리고 싶었던 태종은 살아서는 성군의 길을 걷지 못했다. 시대가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종은 재위 16년(1416) 5월 19일 극심한 가뭄 속에서 기우제를 준비하는 예조와 대간(臺諫:사헌부·사간원)에 전지를 보내 “가뭄이 든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니 다른 까닭이 아니라 무인년(戊寅年)·경진년(庚辰年)·임오년(壬午年) 사건이 부자와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이다”고 자책했다.

무인년(1398·태조 7년)은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해이고 경진년(1400·경종 2년)은 제2차 왕자의 난, 임오년(1402·태종 2년)은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발생한 해였다. 이 난들이 부자와 형제의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다는 자책이었다. 태종으로서 이는 피를 토하는 자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종은 곧이어 “이 또한 하늘이 시켜서[天使] 한 일이지 내가 즐거워서 한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태종이 악역을 수행한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그러나 그 명을 따른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에 따른 벌책은 태종이 감수해야 할 운명이자 업보였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의 최초 악역은 정몽주 살해였다. 이성계는 우왕(禑王) 9년(1383) 함주까지 찾아온 정도전(鄭道傳)을 만나면서 새 왕조 개창을 꿈꾸었지만 그에 따른 역신(逆臣)이란 비난까지 감수할 생각은 부족했다. 변방 무장 출신이란 이성계의 콤플렉스는 세평(世評)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게 만들었다. 때론 이런 성격이 개국에 대한 의지도 무뎌지게 해 개국을 물거품으로 만들 뻔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혁명 무력과 혁명 사상의 결합이었다. 역성혁명파가 고려 말의 문란한 토지 문제 해결을 개국 명분으로 삼은 것은 정도전의 혁명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1388)으로 나라가 어수선할 때 정도전은 조준(趙浚)에게 토지 개혁에 관한 상소문을 올리게 해 혼란스러운 회군 정국을 일거에 토지 개혁 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부전(賦典)에서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아울러 병합해 부자는 밭두둑이 서로 잇닿을 만큼 땅이 많아진 반면 빈자(貧者)는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한 사람이 경작하는 토지의 주인이 7~8명인 경우도 있어서 빈자들은 남의 땅을 빌려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해도 밥을 먹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토지 개혁을 통해 새 왕조를 개창하기로 결정한 역성혁명파는 공양왕 2년(1390) 공사(公私) 전적(田籍·토지문서)을 개경 시가(市街)에 모아 불을 질렀는데, 『고려사』 ‘식화지(食貨志)’는 “이 불이 사나흘 동안 탔다”고 전한다. 이때 공양왕은 “선왕들이 만든 토지제도가 내 대에 와서 크게 바뀌니 아까운 일이다”며 눈물을 흘려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이처럼 과거의 문란했던 토지제도를 무효화하고 공포한 새 토지제도가 공양왕 3년(1391) 5월에 반포한 과전법(科田法)이다. 정도전이 이에 대해 “전조(前朝·고려) 때와 비교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처럼 빈농(貧農)들은 과전법을 쌍수 들어 환영했고, 농민의 지지는 새 왕조 개창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사건이 발생했다. 공양왕 4년(1392) 3월 명나라에 다녀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하다가 낙상한 것이다. 『고려사』는 경연(經筵) 중에 이 소식을 들은 공양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정몽주는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전한다.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를 역성혁명파를 제거하기 위해 하늘이 준 마지막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곧바로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을 시켜 역성혁명파를 탄핵했는데, 『고려사절요』는 보고를 들은 공양왕이 주저 없이 정도전·조준·남은·남재·윤소종·조박 등 역성혁명파 핵심을 귀양 보냈다고 전한다. 게다가 “정도전은 귀양 간 곳에서 처단하여 뒷사람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탄핵이 뒤따라 곧 사형에 처해질 분위기였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이성계가 벽란도(碧瀾渡)에 누워 자려 하자 이방원이 급히 말을 달려 찾아왔다.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된다”는 방원의 거듭된 재촉을 받고서야 이성계는 견여(肩輿)에 올라 개경의 사저로 돌아왔다. 『고려사절요』는 “형세가 위급합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묻는 방원에게 이성계는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있으니 다만 순하게 받을 뿐이다”고 답했다고 적고 있다. 거의 체념 상태였던 것이었다. 이때 다시 변수가 발생했다.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온 것이다.

위독하다는 소문과 달리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자 사실 여부를 알아보러 온 것이다. 정몽주는 세평에 신경 쓰는 이성계가 자신을 해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고려사절요』는 정몽주의 문병을 받은 이성계가 “전과 같이 대하였다”고 적고 있다. 방원이 이지란에게 정몽주 제거를 요청하자 “공(公·이성계)이 모르는 일을 내가 어찌 하겠는가”라며 거절한 것처럼 정몽주 제거는 모두가 꺼리는 일이었다. 정몽주의 예상은 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방원을 간과한 예상이었다.

방원은 결단을 내려 가신(家臣)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공양왕 4년(1392) 4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제거했다. 이성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동각잡기』는 방원이 사실을 고하자 이성계가 “너희들이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남들이 내가 모르는 일이라 하겠는가”라면서 “내가 약이라도 먹고 죽어 버리고 싶다”고 꾸짖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했기 때문에 이성계는 석 달 후 개국시조가 될 수 있었다. 방원까지 악역을 거부했다면 조선 개창은 무망(無望)한 일이었을 것이다. 개국의 밑거름이 되었지만 오명 또한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 이 또한 그가 선택한 인생이었다.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개국은 했으나 불안한 신생 왕조였다. ‘조선이 과연 얼마나 갈까?’라는 의구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개국 초 감찰(監察) 김부(金扶)가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비록 큰 집을 지었지만 어찌 오래 살게 되겠는가?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이성계는 “이는 조선 사직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라며 김부를 사형시켰지만 신생 왕조에 대한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자 책봉이었다. 이성계 사후를 노리는 고려 부흥 세력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강력한 인물을 세자로 책봉해 미래를 다져야 했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인 향처(鄕妻) 한씨(1337~1391)에게서 여섯 아들을, 개경에서 얻은 경처(京妻) 강씨(?~1396)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강씨는 개경 명가 출신이었지만 한씨가 사망하는 공양왕 3년까지는 후처일 수밖에 없었고, 두 아들 역시 서자(庶子)에 불과했다. 조선 개국 당시 열한 살에 불과했던 강씨의 둘째 방석은 아무 공을 세우지 못했고, 두어 살 위의 형 방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와 『태조실록』은 개국 초 태조가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공신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세자 문제를 논의하자 ‘시국이 평안할 때는 적자(嫡子)를 세우고, 시국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고 전한다. 개국 초의 혼란기였으므로 당연히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했는데, 이 경우 정몽주를 격살해 개국의 기틀을 연 방원이 유리했다. 시국이 평안하다면 적장자(嫡長子)인 진안대군 방우(芳雨·태조 2년 사망)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방우는 조선 개창에 부정적이었으므로 제외한다면 둘째 방과(芳果·정종)나 방원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논의를 들은 신덕왕후 강씨의 통곡 소리가 전세를 뒤집었다. 『동각잡기』는 “뒷날 또 배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니 다시는 적자를 세워야 하느니, 공 있는 이를 세워야 하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태조 1년(1392) 열한 살의 방석(芳碩)이 세자가 된 것은 오로지 모친의 눈물 덕분이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의 ‘세자를 정함’이란 글에서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先王)이 장자(長子)를 세자로 세운 것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賢者)를 세운 것은 덕(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 동궁(방석)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라며 장자도 현자도 아닌 방석의 세자 책봉이 가져올 문제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는 눈을 감는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방원은 우왕 9년(1383) 이성계 집안에서는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 변방 무가(武家)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이성계는 이때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할 정도로 기뻐했다. 신덕왕후도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왜 내게서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했다고 『동각잡기』는 전하지만, 스물여섯의 장년인 그는 열한 살 이복동생에게 밀려났다.

방원은 반발했다. 단순히 이복형제 사이의 자리다툼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 같은 개국공신들을 제거한 것처럼 피의 숙청을 통해 왕실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안을 나라로 만든 화가위국(化家爲國)의 부친과 맞서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방번 형제와 배후의 정도전을 죽인 것은 사실상 부친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제1차 왕자의 난은 당(唐) 고조 9년(626) 태종 이세민이 장안(長安·현 서안) 북쪽 현무문(玄武門)에서 태자인 친형 이건성(李建成)과 넷째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현무문의 변(變)’과 흡사했다.

현무문의 변으로 고조 이연(李淵)이 강제로 양위(讓位)당한 것처럼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도 사실상 강제로 양위당했다. 이성계는 충격을 받았고 격분했고 좌절했다. 이성계 퇴위 이틀 후인 『태조실록』 7년 9월 7일조는 “상왕이 이방석 등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드니 도평의사사에서 육선(肉膳)을 올리기를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심지어 태조는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도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종 2년(1400)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정종실록』은 방간이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 거병 계획을 보고하자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꾸짖었다고 전하지만 이성계가 일방적으로 방원 편만 들었을 까닭은 없다.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세제(世弟)로 실권을 잡은 방원이 인사하러 오자 이성계는 덕담 대신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조롱했다. 그러나 방원은 부친의 경멸에 좌절하는 대신 강력한 개혁 노선을 걸었다. 사병(私兵) 혁파가 그것이었다.

정종 2년(1400) 4월 대사헌 권근(權近) 등이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해야지 흩어서 주장할 수 없습니다”고 사병 혁파에 대해 상소하자마자 당일로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전광석화처럼 사병을 혁파했다. 『정종실록』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원망함)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고 전할 정도로 반발도 작지 않았다. 그중에는 방원의 측근이자 정사·좌명 1등공신인 조영무(趙英茂)도 끼어 있었다. 대간에서 조영무의 처벌을 요구하자 방원은 두 번 반대하는 형식을 취한 후 황주(黃州)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조야가 놀랐다. 조영무까지 내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정종은 재위 2년(1400) 11월 11일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전에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5월 태종이 헌수(獻壽)하자 토산(兎山)으로 유배 간 방간을 불러 올릴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이것이 신이 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이라며 명령대로 하겠다고 답했으나 대간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태종의 본심이었다. 태종은 방간을 불러옴으로써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동기이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발해 함흥으로 돌아가 버렸다. 심지어 이성계는 태종 2년(1402·임오년)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가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며 군사를 일으키자 여기 가담했다. 태상왕부인 승녕부(承寧府)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태상왕을 호종해 동북면으로 가서 조사의의 역모에 참여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조사의의 난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이성계의 가담은 무수한 뒷말을 낳았고 태종의 정통성에 큰 상처가 되었다. 태종도 “내가 무인년(1차 왕자의 난) 가을 사직의 대계(大計) 때문에 부득이 거사한 후 부왕께서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으셨다(『태종실록』8년 6월 21일)”고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태종은 부친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이 신생 조선을 살리는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직도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전곶교). 1420년(세종 3년) 세종이 태종을 위하여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당대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길이 78m로 당시 가장 긴 다리였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명제: 태종우(太宗雨), 규격: 95x64cm, 그림: 우승우(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