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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제국의 발흥과 융성 /몰락

구름위 2013. 2. 16. 10:13

제 1제국기 (1) - 돌궐제국의 발흥과 융성


540년 당시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는 세 개의 유목민족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위용을 자랑했던 세력은 탁발선비의 북위(北魏)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몽골계 유목민인 유연(柔然)이었다.

 유목민 최초로 카간(可汗, Qag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이 민족은 만주의 경계로부터 발하쉬호 동단의 투르판까지, 만리장성부터 오르콘 상류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동부와 중부의 스텝을 지배했다

. 몽골계 유목민의 또다른 지파였던 에프탈은 카라샤르에서 메르브, 발하쉬호 - 아랄 초원에서 아프간, 펀잡 중부까지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지역들은 현재의 세미레치에, 투르키스탄, 소그디아나, 동부이란, 카불등지였다. 유연과 에프탈은 전통적으로 동맹관계에 있었으나, 몽골리아의 주인이던 유연이 에프탈에 대해서 어느정도의 주도권을 가지는 형태였다.

러시아 초원에는 아틸라 이후 쇠퇴한 투르크 - 몽골계통의 훈의 잔여세력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서부의 쿠트리구르, 동부의 우트르구르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그 세력을 점점 잃고 있는 형편이었다.

돌궐의 기원에 대해서는 19세기 초반까지 그 의견이 매우 분분했으나, 오르콘 비문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면서 그들은 흉노의 후예라는 의견이 정론화 되고 있다.

오르콘 비문에 기록되어있는 돌궐의 기원설화로 유추해 보면, 돌궐은 흉노계 저거씨족이 세웠던 북량(北涼)의 후예로서 북위에게 멸망 후 유연에 항복했던 아쉬나 씨족에 기원을 두고 있다.

유연에 복속되어있던 돌궐은 알타이 산맥 동부지대에서 주로 야금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부터 돌궐은 순수 유목상태로만 지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돌궐은 유연카간의 치하 내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돌궐의 지도자들은 대대로 유연의 카간에게 야브구(Yabghu, 제 2인자)의 칭호를 받았으며 534년경에는 서위(西魏)와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수립 할 정도로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이 패권을 잡을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뛰어난 지도자였던 부민(土門Bumin ?~553)의 등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546년 알타이 남부에 거주하던 고차(高車)가 유연의 패권에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돌궐의 저지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당시 돌궐의 지도자였던 부민이었다. 부민은 이런 공적의 대가로 당시 유연의 카간이었던 아나괴(阿那壞)의 공주와 결혼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고 만다.

이 일로 아나괴와 감정의 골이 깊어진 부민은 551년 유연과 대립하던 서위와 혼인동맹을 맺고, 내분으로 시끄러운 유연에 대한 공세를 시작한다. 552년 유연을 격파하고 아나괴카간을 자살로 몰아간 부민은 몽골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하게 되고, 카간을 칭하여 돌궐제국을 건국한다. 유연의 잔여세력은 몽골리아에서 도망쳐 동위(東魏)를 계승한 북제(北齊)에 의탁하였다.


돌궐은 최초로 자체 기록을 남긴 유목민족이다. <사진> 터키史 - 이희수저

돌궐제국의 창업자였던 부민카간은 그의 위대한 승리 직후 사망하였고, 그의 영토는 돌궐의 전통에 따라 동생과 자식들에게 분배되었다.

몽골초원 일대는 부민의 아들인 콜로(Kolo)에게 계승되었으나 그가 바로 요절하였으므로 그의 동생인 무한(木汗Muqan 553~572)에게 돌아갔으며 카간의 칭호 또한 계승하였다. 준가리아와 율두즈강 유역, 일리강, 추강, 탈라스강 유역의 서부지역은 부민의 동생이었던 이스테미(室點密Istemi 552~575)에게 야브구의 칭호와 함께 돌아갔다

. 이스테미는 조카인 무한의 카간권을 인정했고, 자신은 서돌궐의 제 2인자 칭호에 만족했다. 이로서 돌궐제국은 동돌궐의 칸국과 이에 종속하는 서돌궐의 칸국으로 지배권이 분리되는 형태를 보이게 된다.

557년 무한카간은 북제 변방과 바이칼호 주변에 머무르던 유연의 잔존세력을 일소한다. 이어 560년에는 요서지방에 거주하던 몽골계 유목민인 거란을 격파하여 요하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대치하게 된다.

 이후 동돌궐은 탁발북위의 두 계승자인 북주와 북제의 조정자 역할을 하며 북중국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564년에는 북주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북제의 태원(太原)을 약탈하기도 한다.

 무한카간의 재위시기 동돌궐 제국은 유라시아 동부초원의 모든 유목민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으로서의 기반을 다지고, 중국에 대해서도 강력한 우위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이스테미가 지배하던 서돌궐 제국은 에프탈을 협공하기위해 사산조의 위대한 군주인 호스로우 아누시르반1세(Khosraw Anuchirvan I)와 동맹을 체결한다. 페르시아와 서돌궐에게 동서로 협공을 당한 에프탈은 붕괴하였고(565), 그 잔존세력은 헝가리로 흘러들어 몽골계 칸국을 건설하는데 이들이 서양 역사에 나타나는 ‘아바르Avar’의 정체이다.

에프탈을 멸망이후 사산조는 옛 고토인 박트리아를 회복하였고, 서돌궐은 소그디아나와 트란스옥시아나, 비단길의 중추였던 호탄과 카슈가르를 차지하여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서돌궐과의 연합으로 에프탈을 멸하고 고토를 회복한 사산조 페르시아는 서돌궐이 장악한 실크로드의 지배권에 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호스로우 아누시르반1세는 고의적으로 실크로드를 차단하고 트란스옥시아나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서돌궐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출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서돌궐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연합을 초래하고야 말았다. 사산조를 통한 중계무역으로 많은 손해를 입고 있던 비잔틴 제국은 서돌궐 제국을 잠재적인 동맹세력으로 간주했고, 이를 알아차린 이스테미는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아누스 2세에게 소그드인 마니악(Maniakh)을 파견하였다.

 568년 이렇게 비잔틴과 서돌궐은 대 페르시아 동맹을 체결하고 이스테미는 곧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572년 비잔틴 제국 역시 앞으로 20년간 지속되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하므로서 사산조 페르시아는 동서로 막강한 적들에게 포위당하게 되고, 이후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돌궐제국의 판도

투르크 제족의 영웅이었던 부민카간을 필두로 무한카간과 이스테미 야브구가 건설한 돌궐제국은 동으로는 요하, 서로는 사마르칸드에 이르렀고, 남으로는 힌두쿠시와 만리장성을 압박하고 북으로는 바이칼에 이르는 유라시아 초원의 대부분을 장악한 대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제국은 선조에 미치지 못하는 후손들이 계승함으로서 그 기상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주변 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돌궐 제국을 서서히 침몰하게 만들어 버린다.


제국의 몰락


582년 서돌궐 제국의 야브구를 계승한 타르두(達頭Tardu, 575~602)는 선친이 지켜오던 미덕을 과감히 부수고 스스로 카간을 칭하여 동돌궐 제국의 종주권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이로서 벌어진 돌궐 제국의 대 분열 사건의 배후에는 중국을 통일한 수(隋)문제 양견(文帝 楊堅, 581~604)의 움직임이 있었다. 타르두의 독립을 반란으로 간주한 이쉬바라(沙I鉢略 Ishbara, 581~587) 카간은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타르두에게 의탁한 아파 카간(Apa Qagan) 다르빈(大邏便Tarbien)역시 동조자로 판단, 그의 세력기반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다르빈이 가지고 있던 동돌궐 제국내의 세력기반은 초토화되었지만, 친 다르빈계 귀족들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에 다르빈의 요청에 화답한 타르두가 군사적인 압박을 가해오자 내우외환에 빠진 이쉬바라 카간은 584년 양견에게 화해와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 시점부터 돌궐 제국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중국 왕조들에 대한 힘의 우위를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돌궐(突厥) 석인(石人)

당시 상황은 양견에게 상당히 위험했다. 서쪽에서 강력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타르두가 동돌궐 제국까지 석권해 버릴 경우, 신생국인 수(隋)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강력한 유목제국을 맞상대해야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양견은 타르두에 대한 우호정책을 버리고, 동돌궐의 카간인 이쉬바라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는 동돌궐 제국에 우경칙(宇敬勅), 장손성(長孫晟)을 사자로 보내 카간의 신속과 한족문화의 수용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답신은 수서(隋書)에 나와있는 본문을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당신의 신하로 조공을 바치고 명마를 드리겠나이다. 그러나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의관을 차리고, 중국관습을 취하기는 어렵습니다. 돌궐의 관습은 우리의 심장이기에 우리백성이 매우 민감하기 때문임을 헤아리소서.”


587년 이쉬바라가 사망하고 그의 계승자인 동생 출로(莫何Chulo, 587)는 다르빈을 생포하여 처형시키지만 곧 암살당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툴란(都藍Tulan, 588~600)이 즉위하는데 그 역시 양견의 은밀한 지원을 받는 정적인 돌리(突利계민Kemin, 600~609)와 치열한 내전을 펼쳐 겨우 그를 오르도스 지방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시기에도 타르두는 지속적으로 군사적인 압박을 가해왔고, 절망적인 내분에 빠진 동돌궐의 카간들은 수(隋)의 지원을 받으며 점점 수(隋)에 정치적으로 예속되고 있었다.

600년 툴란 카간이 사망하자 서돌궐의 카간인 타르두는 동쪽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돌궐 제국의 재통합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중국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수(隋)의 수도인 장안을 위협했다. 이어 602년 오르도스의 쿠쿠 노르를 공격하나 수(隋)의 장손성의 계략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 이에 대응하는 양견의 정책은 매우 은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이루어 졌다.

 603년 중국의 비밀지원을 받은 서돌궐 제국 하의 복속민들은 제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해에 타르두는 토욕혼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 쿠쿠 노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후 서돌궐의 카간을 계승한 타르두의 손자 사궤(射櫃, 603~618)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위해 중국의 힘을 빌렸고, 이로 인해 그의 통치기간중에는 중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하지 못했다.

마지막 불꽃


609년 동돌궐의 카간은 돌리의 아들이었던 시피(Shipi始畢, 609~619)가 계승하였다. 이 시기 중국의 통치자는 수(隋)양제 양광(楊廣, 煬帝, 604~618)이었다.

양제는 돌궐에 대한 견제를 지속하는 동시에 608년 감숙지방에 있는 토욕혼을 격파하고, 그들을 티벳으로 쫒아버렸다. 또한 타림분지의 하미를 비롯한 몇 개의 오아시스를 점령하고, 투르판을 복속시켜 실크로드에 대한 영향력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바야흐로 동아시아의 질서는 중국의 통일왕조인 신생국가 수(隋)를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하였고,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도 동서양의 대 제국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돌궐제국조차 중국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구조는 양제의 고구려 원정(612~614)으로 인해 모두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백만대군을 일으키고도 고구려에게 당한 뼈아픈 패배는 중국 황제의 위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이는 중국의 힘 앞에 복속해 있던 수많은 민족들의 반란을 초래하였다.

동돌궐의 카간이었던 시피는 이 기회를 돌궐의 부흥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겼음이 분명하다. 시피 카간은 먼저 제국 내에 만연하게 펴져있던 한족의 문화를 일절 금지시켜 버리고 돌궐의 전통문화를 부활시켰다.

 이어 중국의 간섭이 미약해진 틈을 타 티벳과 아무르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615). 양제는 다시금 동돌궐 내의 분란조장을 시도하나 실패로 끝나고, 이에 격분한 시피 카간은 산서(山西)의 안문(安門)에서 양제를 포위하여 그의 친위군을 전멸 직전까지 몰고가기도 하였다.

시피 카간은 수(隋)의 내분을 조장하기 위하여 반군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는데, 이 때 돌궐의 지원을 받은 이들이 바로 당 제국을 건국하는 이연(李淵), 이세민(李世民) 부자였다.


돌궐 제 1제국의 멸망


수(隋)가 무너지고 당(唐)이 건국되는 동안 벌어진 중국의 혼란 속에서 돌궐은 과거의 호전적인 기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619년 시피 카간이 사망할 때 까지 동 돌궐 제국은 실지를 대부분 회복한 상태였고,

 중국의 신생왕조인 당(唐)에 대해서도 군사적인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시피의 뒤를 이은 힐리(Ilig頡利, 620~630)는 수시로 당의 수도인 장안으로 군대를 몰고 들어가 위협을 하고 조공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같은 돌궐의 우위는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626년 즉위한 당 태종(太宗) 이세민은 당해 쳐들어온 힐리의 군대를 회군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태종은 돌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철륵(위구르)와 설연타(薛延陀)를 지원하여 반란을 부추겼고 설연타의 족장 이난(Inan)은 628년 힐리에게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동시에 거란마저 당에 복속되면서, 완전히 포위된 동돌궐 제국은 이정(李靖)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군의 공격에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시피 카간에 의해 동돌궐 제국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을 618년 서돌궐 제국은 사궤의 뒤를 이어 통 야브구(Ton Yabghu統葉護, 618~630)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확장에 대단한 열정은 쏟은 인물로서 오르콘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스텝지역을 재확보하고, 무너지고 있는 사산조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간다라 지방까지 정복한다.

 630년 초 통 야브구를 예방한 구법승 현장의 눈에 보인 서돌궐 제국은 그 세력이 최고 정점에 올라있는 상태였고, 신당서(新唐書)의 기록에서도 통 야브구는 당시 가장 강력한 유목군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현장이 예방한지 몇 달 뒤에 일어난 카를룩의 반란으로 통 야브구가 살해되고, 서돌궐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를 수습한 호루(Holu, 653~659)카간은 투르퀴즈와 카를룩의 지원을 받아 동돌궐 제국을 복속시킨 당 제국과 전쟁을 벌이나 통 야브구 사망후 일어난 내전으로 상실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였고, 당 제국과의 현저한 국력차이로 인해 658년 완전히 복속되면서 돌궐 제 1제국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